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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4일(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사도2,1-11 성령은 자비와 용서를 일깨운다 성령강림 축일이 되면 우리는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 장면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장면은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성령에 대한 초기 교회의 체험을 말하기 위해 구약성서 표현들을 빌려 각색한 장면입니다. ‘세찬 바람’, ‘소리’, ‘불’ 등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신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입니다. 각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각자가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은 바벨탑(창세 11,1-9)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올려서,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며 살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 진리라 생각하는 것을 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하는 행위였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그들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서,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차이를 존중할 때 의사소통이 가능 성령강림 장면에서,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일은 이 흩으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혀 같은 불길로 주어지자,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말을 하지만, 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합니다. 성령은 인간 상호 간의 차이를 존중하시고, 그 차이는 인간간의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은 상호 간에 차이가 있기에 서로 보고 들을 것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한 사회는 인간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존중하며 살리는 사회이고, 그것은 다채롭게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한 가지 말을 강요하는 통제된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강요와 통제는 생명을 죽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의사소통하며, 풍요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풍요로움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자비와 용서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 20,22-2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화답송에서 함께 읊은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30) 예수님이 체포되자 모두 도망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모여들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교하면서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다시 소생한 것이고 그들의 모습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김인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개인고백 고해성사에서 사제가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행 고해성사가 의무 사항으로 채택된 것은 1215년,(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13세기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형태의 참회 절차가 있었습니다. 현행 개인고백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되면 엄청난 보속, 곧 고행을 하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입니다. 한 번은 긍정적으로 말하고 또 한 번은 반복하되 부정적으로 반복하는 화법입니다. “믿고 세례 받는 이는 구원받겠지만 믿지 않는 이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마르코 복음서(16,16)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위협이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말입니다. 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말입니다. 그것에 반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고 믿고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카 6,36)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성서 안에 있는 부정적 표현들은 하느님 앞에 책임질 수 있게 행동하자는 공동체의 마음가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죄의 용서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 복음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당신의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일을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 숨결로써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 주며, 그들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죄는 자신의 척도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예수님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죄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요한 복음서(8,1-8)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당신네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44) 단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며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 협착증’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시야가 협소한 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획일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하느님은 다양함을 풍요로움으로 보시는 광활한 시야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시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요한 15,26)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하느님의 시야를 우리 앞에 열자는 것입니다. 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숨결로 살자는 것입니다. 바람과 불: 성령 우리는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 성령께서 어떻게 현존하시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봅니다. 성령이 현존하신다는 이미지는 두 가지입니다. 바람과 불입니다. 사도들은 바람을 통하여 성령의 현존을 느꼈습니다. 바람의 속성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강함과 부드러움. 세찬 바람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합니다. 비와 바람을 동반하는 태풍은 가로수를 넘어트리기도 하고 거대한 집도 날려버립니다. 모든 것을 부수어버리고, 파괴하는 속성으로서 바람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의 현존의 이미지는 불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불은 무언가를 데우기도 하고 태우기도 합니다. 불의 이미지로서 성령은 바람처럼 정화의 의미도 있습니다. 바람이 해로운 것을 쓸어 버린다면, 불은 태워 버립니다. 우리가 알듯이 금을 정제할 때, 불순물을 태워야만 순금이 나오듯이, 그렇게 불의 이미지로서의 성령은 우리 안의 부정적인 것들을 태워 정화합니다. -최성영 신부님(요셉) 성령은 어떤 능력을 주실까? 2013년 7월, 10여 년의 페루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비행기 안에서 하느님께 드렸던 세 가지 기도가 생각납니다. 첫 번째로 ‘한국 정치가 제발 이념 논쟁, 파벌 싸움이 아닌 정책의 토론장이 되길’ 기도했고, 두 번째로 ‘작은 본당들도 경제적인 자유가 있길’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부부들과 어린이들이 있는 본당에서 사목하게 되길’ 기도했습니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3>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
-홍기선 신부님(히지노) [아! 어쩌나] 294. 내 안의 괴물(종교 범죄 원인자)
< 성령을 받아라 > 복음: 요한 19,20-23
불꽃 모양의 혀
‘생활성서’사의 ‘이 시대 성자에게 행복을 묻다’라는 책에 2007년 94세의 일기로 선종하신 ‘아베 피에르’ 신부님의 일대기가 소개되었는데 참으로 감동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로 거의 매년 선정되어온 분입니다. 그분은 1917년 리용의 상류층 가톨릭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사업가로서도 성공했지만 또한 걸인들에게 면도와 이발을 해 주고 아침식사와 빨래 등을 도와주는 봉사에 열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면도를 해 주다 실수를 하였고 아이들 앞에서 심한 말을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준 말은 피에르 신부의 기억에 평생 남았습니다.
“얘들아,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필 자격을 갖춘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았지?”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살게 된 데에는 부모님의 이런 사랑이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년시절 피에르는 힘든 사춘기를 겪었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휩싸였고 한동안은 범신론에 빠져 자살충동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태리 아씨시에 성지순례 갔던 날, 즉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그는 성령의 불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는 수첩에 바로 이렇게 썼습니다.
“아! 나의 소원은 사랑이라는 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땅 전체가 고백하는 어느 종 울리는 아침에 죽는 것.”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불’의 모양으로 내려옵니다. 불은 어떤 때 사용되는 것일까요? 당연히 태우는 용도로 쓰입니다. 불을 받아 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 850명을 대항해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일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준비해 놓은 소를 제단에서 불살라버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세례 때 성령의 불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 제대 위에서 당신을 불사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제물을 통해 죄가 용서받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 아버지와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불로 살라져 세상을 위한 또 다른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은 순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피 흘리고 부서져 봉헌되고 먹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도 이제는 자신이 아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게 됩니다. 아니 죽게 됩니다.
1931년 열아홉 살이 된 청년 피에르(본래 이름은 ‘앙리’)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중 가장 엄격하다는 카푸친회에 들어가 맨발로 다니며 옷을 입은 채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고 매일 자정에 일어나 새벽 2시까지 기도하는 생활을 8년에 걸쳐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런 고생스런 수련 생활로도 만족할 수 없어 ‘타인에 대한 봉사’에 대한 열망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로마의 허락을 받고 1942년에 그르노블의 작은 성당의 보좌신부가 됩니다. 당시 2차 세계 대전 중이었고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역시 유태인 체포령이 발동 중이었습니다.
피에르 신부는 유다인들의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와 스페인 등지로 그들을 피신시키는 비밀 안내원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게슈타포가 그 주동자를 찾게 되자 앙리 신부는 이제 피에르 신부라고 불리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아베 피에르(베드로 신부님)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스페인에서 경찰에 붙잡혀 독일군에게 넘겨지기 직전에 간신히 프랑스 정부에 의해 구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가 해방되었습니다. 용감한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유명해진 피에르 신부를 정치 쪽에서 손짓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나는 신부이지 정치인이 아닙니다.”라고 거부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더 돕기 위한 마음으로 관할구역 대주교에게 허락을 받고 국회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과 비슷하다고 여겨 그들을 위한 유스호스텔을 손수 만들 계획을 세우고 손수 작업에 들어갑니다.
지금 엠마우스는 행려자들을 돌보는 공동체로 프랑스에만 100개가 넘고, 35개국 400여 개의 큰 공동체가 되었고 큰 곳에는 수천 명씩 살고 있습니다.
처음 가난한 이들을 데려와 살 때 돈을 마련하기 위해 피에르 신부는 쓰레기통을 뒤져 박스 등을 주워 파는 넝마장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54년 영하 20도의 매우 추운 겨울 퇴거명령서 한 장을 손에 꼭 쥔 할머니가 얼어 죽었고 폐차 속에서 생활하던 젊은 노동자 가족의 아기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피에르 신부는 라디오 방송국으로 달려가 신문기자 친구의 도움을 받아 5분 동안 이런 연설을 합니다.
“친구들이여, 도와주십시오. 새벽 3시에 세바스토플 뷔레바드의 인도에서 한 여인이 얼어 죽었습니다. 손에는 전 날 발급되어 그녀를 노숙인으로 만든 퇴거 명령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매일 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헐벗은 채 굶주리며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이 끔직한 일에 맞서기엔 숙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프랑스의 도시에, 파리의 곳곳 어두운 골목 등불 아래마다 우애 지원 센터의 이름으로 플랭카드를 걸어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침대와 담요 그리고 스프가 있습니다. 누구든 필요하면 먹고 쓰세요’하고요. 오늘 밤에 아스팔트 위나 처마 밑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찰리 채플린이 내 놓은 2백만 프랑을 비롯하여 5백만 프랑의 성금이 모아졌고 엠마우스 본부에는 격려 전화와 편지가 쇄도하였으며 몇 주에 걸쳐 프랑스 전역에서 자원봉사자 신청이 줄을 잇게 된 사건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그 이후에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거리를 뒤지고 다녔고, 밤에는 노숙자들이 술과 칼부림 등이 일어나지 않게 지켜야 했으며, 주일에는 미사를 8대나 할 정도로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나 인종차별, 모든 형태의 억압과 모순을 발견할 때이면 그 대상이 교회일지라도 통렬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불 때문입니다. 불이 붙으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이 붙이면 편할 수 없고, 불이 붙으면 부자일 수 없고, 불이 붙이면 배부르고 따뜻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을 통한 자신을 불사름을 통해 이웃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며 이웃들을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만들어줍니다.
바벨탑에서 경험했던 바로 그 분열. 그 분열이 인간의 교만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벌이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흩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서양의 ‘언어(language)’는 ‘혀(lingua)’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혀는 곧 언어이고 언어는 곧 일치와 소통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께서 내려올 때 그 성령의 불이 ‘혀’의 모양이었다는 말은 성령께서 일치와 소통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불’로 그 사람을 태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성령의 불로써 태워 하느님과 인간의, 또 인간과 인간의 소통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불혀’란 바로 우리 자신을 성령의 불로 태우지 않으면 하느님과도 이웃과도 온전한 소통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지금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이 소진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힘이 아닌 성령의 불 때문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억지로 하는 봉사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태양은 자신이 좋아서 스스로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령강림은 우리 본성이 훨훨 타서 세상의 빛이 되는 삶으로 만들어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게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밝혀주는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전삼용 신부님(요셉)
내가 가진 은사를 서로를 섬기는데 사용합시다
오늘은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독서에서 묵상한 내용이고, 하나는 복음에서 묵상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앞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다.’ 그 말씀이 저에게는 아이들이 저를 대하는 느낌과 비슷한 거 같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를 보고 도망가는 것이나, 노래 연습할 때 목소리를 내지 않는 모습들을 볼 때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마음이 조금 열려 있다면 힘들거나 약간 창피해도 열심히 따라 부르는 모습을 조금 보일 텐데, 그러지 않는 거 같습니다. 연예인을 좋아하고 따라하듯이 저에게 매력이 있다면 뭔가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게 없는 거 같습니다.
인기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한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조재연 신부님도 청소년 사목자는 어느 정도 아이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저는 그런 매력이 별로 없는 거 같습니다. 무뚝뚝하고 매력도 없는데, 화도 잘 냅니다. 오늘로 아이들을 세 번째 울렸네요.
가만 보면 아이들을 사목하는데 타고난 달란트는 없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한계를 많이 느끼고 벽에 부딪힌 거 같은 막막함이 많은데요. 지금 마음은 안 되니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성실하게 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아이들을 대하고 지내다보면 제 바닥을 보는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그만 아이들이 저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형식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제 마음이 들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바로 뜯어고치려는 성급한 마음이 드러나기도 하고, 성가나 기도를 쉽고 재밌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는 걸 발견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저의 그런 부족함을 드러내 보여주는 거 같고, 그것이 필요함을 대신 말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게 아예 그런 일들과 거리를 두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님께서 아이들을 통해 ‘이 일들을 받아라~’ 하시는 듯합니다.
두 번째는 독서의 내용을 보면서 생각난 겁니다.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나라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각자의 언어로 듣고 이해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연수할 때의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30여 개 국에서 사람들이 모였는데요. 그 사람들도 회의하는 내용을 각자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런 모습 자체가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와 같은 것이 아닌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상하시겠지만 여러 통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선교를 와서 40년 간 사셨던 임신부님이 계셨고요.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두 세가지 언어를 하는 사람이 한 가지 언어 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 옆에서 통역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두 세가지 언어를 하는 레바논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아랍어로 통역을 해 주었고, 네 가지 언어를 한다는 어떤 자매님이 브라질 사람에게 회의 내용을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더 많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달란트와 능력을 가지신 분들이 그 달란트를 서로를 위해서 사용하고자 했을 때 초대교회에서 보던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었는데요. 우리 안에도 그런 놀라운 일들이 있을 수 있겠죠.
서로서로가 가진 달란트를 나누고 부족한 지체를 돕는다면 그런 일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 예화를 통해 여러분들이 조금 쉽게 그 일에 접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입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에 설교실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처음 실습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순서가 되어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긴장이 되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떨 결에 입을 연 그는
"여러분,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학생은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하고 내려왔습니다.
노발대발한 교수는 다음 날도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또 할 말을 잃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학생들이 웃으면서 "다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학생은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을 제가 말할 필요는 없지요."라고 말하고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화가 난 교수가 그 다음 날에도 다시 그를 강단에 세웠습니다.
다음날 강단에 올라간 이 학생은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 이때 학생들은 웅성웅성 하면서 안다는 학생도 있었고 모른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 때 이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크게 두 가지 경우에서입니다. 하나는 본당 공동체 안에서 먼저 활동하던 분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이 있을 텐데요. 그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알고 있는 분들이 가르쳐주고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새로 이사 온 분들이나 단체나 구역 기도에 들어간 분들이 훨씬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수녀님이 냉담하다가 돌아온 분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해 주고 있는데요. 아는 수녀님이 모르는 냉담자들에게 시간을 내어 주고 가르쳐주니까 냉담자들이 신앙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좋아지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신앙을 알고 있는 우리 신자들이 신앙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겠죠. 내가 신앙 안에서 체험한 좋은 것들을 전하고 알려줄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 눈에 보이는 그 일을 하는 겁니다. 그 일을 하는데 다음의 글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송길원 교수의 글인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내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향(香) 다 날아갈 것 아냐, 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수의(壽衣)인 세마포와 머리를 싼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네 부인이 안 되니까, 너를「붙여 놓은 것」아니냐! ”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나 자신의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늘상 궁금해 하는 게 있다. 하느님이 주신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상대방에 대한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느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섬기라고」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화장품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그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ㆍㆍ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내가 먼저 변하니 이렇게 아내가 변할 줄이야 미처 몰랐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느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년이 되었을 때 내 가족과 친구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저의 우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내게 보이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은사를 나누는 일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받은 은사를 나누고 활용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이들에게 물었다. “신부님이 좋아요? 싫어요?” 한 아이가 한 템포 쉬고 말했다. “싫어요~” -김기현 신부님(요한) [금주의 성인] 5월 30일: 성 주세페 마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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