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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1일 월요일 맑음 거리의 사람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분주하게 움직인다. 호수 쪽에서 해가 뜬다. 아침에 여유를 부리다가 7시 30분에 숙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숙소비를 지불할 겸 카운터에 들렀다. 숙소비를 지불하고 쿠스코 가는 버스시간표를 물어보니 아침에 가는 버스는 8시 40분에 있단다. 아내와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밤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서둘러 가서 아침 버스를 타야했다.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은 생각 보다 넓어보였다. 천정이 유리로 꾸며진 훤한 2층 건물의 터미널이다. 구석에 쿠스코라는 이름이 보인다. 사무실에 들어가 물으니 8시 15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단다. 표를 끊었다. 버스표를 자세히 보니 다른 회사 버스였다. 시간이 있어 그 버스회사 사무실에 가보니 요금이 같았다. 이곳에서 바가지를 썼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다. 버스는 오전 8시 15분과 오후 10시 10분 이렇게 두 대가 운행된다. 버스비는 40솔(16000원)이다. 3좌석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버스를 타는데 터미널 입장권을 사야했다. 우리는 버스를 탔다. 크고 깨끗한 버스다. 푸노의 좁은 언덕의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힘들어 보인다. 멀리 티티카카 호수가 반짝인다. 언덕을 올라와 푸노를 벗어나서 달려간다. 거의 1시간을 달려 큰 마을에 도착했다. 홀리아카(Juliaca)라는 도시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다. 그런데 포장이 되어있지 않아 온통 흑탕물이다. 꼭 네팔의 카트만두가 생각나는 마을이다. 버스가 터미널에 서자 그때부터 평화는 끝이 났다. '리얼 페루'의 시작이었다. 버스 문이 열리자 우당탕탕! 깊은 주름과 햇볕에 그을린 짙은 갈색의 얼굴들이 놀란 눈동자로 손과 어깨에 물건들을 들고서 팔러 올라왔다. 그 모습이 참 소박해 보였다. 아이스크림 장사, 바나나 튀김 장사, 과자 장사, 포장이 조악한 먹거리들을 들고 올라와 버스 안을 가득 채운다. 푸노에서 쿠스코 가는 길은 알려진 대로 참 아름다웠다. 넓은 들판에는 곡식들이 자라고 소들은 유유히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실개천은 조용히 만들어져 강줄기에 합류한다. 삭막한 모래와 거친 바위들만 보다가 초록이 있는 들판과 색깔이 있는 꽃들이 보이니 별천지가 이어지는 것 같다. 경사가 급한 산들이 더해져 그 경치를 더 아름답게 했다. 차는 또 멈췄다. 휴게소란다. 새로 지어진 건물에 가게가 넓다 들어가 보니 식당도 있다. 화장실을 찾아 더 들어가니 빨간색 문이 줄지어 있는 화장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족히 20칸은 넘는 것 같다. 화장실 사용료는 1솔이다. 제법 깨끗하다. 휴게소 앞으로 펼쳐진 도로 건너편에는 아담한 흙집이 몇 채 보인다. 초록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노란 꽃이 많이 보인다. 과자를 하나사서 다시 차에 올랐다. 시간은 흐르고, 차는 앞으로 달려 주위 풍경이 달라지고 있었다. 해발 5,000미터 정도에서 생기는 설산이 가까이 보이는걸 보니 깊은 안데스의 품으로 가고 있었다. 기암괴석과 계곡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힘차 보였다. 고갯마루를 내려오자 좀 부유해 보이는 마을이 보인다. 지금까지 지나온 페루의 건조한 모래로 가득한 사막과 거칠고 열악한 환경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다. 회색을 지나 초록에 왔고 가난을 지나 부유함에 왔으며 겨울을 지나 봄에 이르렀고 지옥을 지나 천국에 도착한 기분이다. 페루는 참 다양한 지형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산 넘고 물을 건넜다. 산중턱에 계단식 밭들도 보였고 옥수수 따는 사람들, 벌목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유적도 보인다. 호수도 지나간다. 농촌은 풍요로웠고 안데스의 품은 아늑했다. 오전 8시 15분에 탔던 버스가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산과 밭은 점점 줄어들고 집과 시멘트 건물들이 많아졌다. 드디어 잉카의 심장, 쿠스코에 도착한 것이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숙소를 찾아가야한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숙소까지 걸어가기에는 멀었다. 택시를 타기로 했다. 흥정을 해서 택시를 탔다. 로터리를 지나는데 커다란 동상이 우리를 환영해 준다. 잉카의 정복 왕 빠차쿠떽의 동상이다. 1438년 잉카의 9대 군주였던 그는 잉카를 에콰도르에서 칠레가지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번성시켰다. 삭사이우아망, 꼬리깐차, 등 쿠스코의 주요 유적들을 건설한 왕이다. 잉카 방식을 흉내 내 1402개의 돌들을 이어 붙인 22.4m의 9층 구조물로, 꼭대기에는 고대 군주의 위엄을 보여주는 높이 11m에 무게 7 톤이나 되는 동상이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잉카를 다스렸던 왕들의 그림과 설명을 볼 수 있다. 시간이 나면 찾아와서 계단을 올라가 봐야겠다. 그런데 이 전망대는 시내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져 있다. 우리 숙소는 Yawarmaki 호스텔이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보다 산 블라스 광장과 가깝다. 택시 기사는 좁은 골목길에 서더니 우리를 내려준다. 쿠스코의 옛 골목길이다. 돌이 다듬어져 집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골목길이다. 우리 숙소는 간판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게 씌어있다. 대문을 두드리니 주인이 나온다.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해준다. 먼저 따듯한 차를 한 잔 준다. 방을 보여준다. 방은 약가 좁아 보이지만 맘에 들었다. 지도를 펼치고 쿠스코 시내 주요 지점을 안내해 준다. 페루 레일을 구할 수 있는 사무실과 마추픽추 입장권을 파는 곳, 그리고 투어 사무실과 오얀따이땀보 가는 버스 타는 곳과 아르마스 광장과 메인 도로를 핑크색 형광펜으로 표시해 주었다. Wi-Fi 번호와 아침 식사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주인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숙소에 짐을 정리한 후 시내로 걸어 나왔다. 지도를 보면서 먼저 내일 가려고 하는 마추픽추 기차표를 구매하러 갔다. 고생하며 발로 찾아가는 더 저렴하고 힘들게 마추픽추에 가는 방법을 미리 메모해 왔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냥 편한 기차를 타고 가려고 맘을 먹었다. 아르마스 광장 부근에 있는 페루 레일 사무실을 찾아갔다. 표를 예매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순서를 기다리는데, 컴퓨터가 잘 작동되지 않아 표를 지금 판매할 수 없단다. 2시간이 지난 다음에 오란다. 표 사기도 쉽지 않구나. 밖으로 나오니 옆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인다. 무슨 줄인지 궁금했다. 마침 한국 사람들도 보여서 물어보았다. 내일 마추픽추 입장권을 사기위해 줄을 선 것이란다. 여기에서 사가지고 가면 시간도 절약되고 바로 입장할 수 있단다. 우리도 서서 표를 사기로 했다. 엄청 줄이 길다. 복잡하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들도 와서 도와주었다. 청년 하나와 70세 정도로 보이는 어르신이다. 따로 따로 오신 분들이다. 표를 위해 기다리면서 마추픽추 어떻게 가는지 물어 보았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쿠스코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1.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쿠스코 근처에서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가 있는 타운, 아구아스 칼리안떼 (Aguas Caliente)로 가는 방법이다. 기차로 한번에 가기에 편하지만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아구아스 칼리안떼까지는 도로가 놓이지 않아 기차 혹은 도보로만 출입이 가능한 타운이다. 2. 다음으로는 Santa Maria 혹은 Santa Teresa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 다음, 기차역이 있는 하이드로 일렉트리카(Hidroelectrica)라는 타운까지 택시를 타고 하이드로일렉트리카에서 기차를 타는 방법. 이곳에서 기차를 타게 되면 편도에 두당 USD 25불이다. 3. 아니면 하이드로일렉트리카에서 기찻길을 따라 아구아스깔리안떼까지 2~3시간 정도 하이킹을 하는 방법이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기찻길을 따라가기 때문에 길을 잃을 걱정도 없고 한쪽엔 강을 끼고 예쁜 풍경과 함께 평평한 평지만 이어지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고 어떤이는 심지어 재미있다고도 한다. 4. 차가 있다면 쿠스코에서 싼타 테레사(Santa Teresa)까지 운전해 간 다음, 싼타 테레사에 주차를 시키고 하이드로일렉트리카까지 택시를 탄 다음 그 곳에서 기차를 타거나 하이킹을 할 수 있다. 줄을 선 청년은 기차표를 예매해 왔고, 어르신은 내일 여행사의 봉고 버스를 타고 하이드로일렉트리카(Hidroelectrica)까지 이동하고 기차 길을 걸어서 가려고 한다고 알려주었다. 좋은 방법 같아 함께 하기로 했다. 청년이 여행사를 안내해 주었다.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여행사인데 한글로도 간판을 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여행사다. 주인이 한국말도 제법 한다. 아주 친절한 부부가 운영한다. 봉고차로 내일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는 팀에 합류하기로 했다. 요금은 두당 60솔이다. 내일 데려다 주고 이틀 후에 우리를 다시 데리고 푸스코로 오는 것이다. 청년의 도움으로 환전도 했다. 참 친절한 청년이다. 여행사에 다녀와도 줄은 별로 줄지 않았다. 이렇게 줄서기를 거의 4시간 정도 걸려서 겨우 표를 손에 쥐었다.(두당 128솔) 마추픽추 가는 것이 참 어렵구나. 거기에 시간도 많이 들고 비용도 많이 든다. 줄서다가 날이 저물어, 표를 손에 쥐고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배가 고프다. 숙소 골목 초입에 있는 작은 햄버거 가게에 들어서 수제 햄버거를 주문했다. 싸들고 숙소로 와서 라면을 끓여 함께 먹었다. 금방 요리해서 만들어진 커다란 햄버거는 매콤 달콤한 것이 우리 입에 딱 맞았다. 아마도 여기에 있는 동안은 몇 번 이용할 것 같다. 드디어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보던 쿠스코에 도착했구나.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문명의 하나인 잉카 문명의 중심지 쿠스코! 고도 3740m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 있는 쿠스코(Cusco)는 페루 남동부 쿠스코 주에 있는 도시이다. 80 km 북서쪽으로 마추 픽추가 있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중앙부)을 의미하고 타완팅수우유(Tawantinsuyu, 잉카 제국의 정식 명칭)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페루에서 가장 유수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쿠스코의 역사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와 주변지역으로 우아타나이 강이 흐르며 사크사우아만 요새, 태양신전, 주거지 등을 비롯해서 광대한 잉카 이전시대와 잉카 문명의 유적들이 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군대가 1533년에 쿠스코를 점령하여 약탈했다. 그 직후에 지방자치 시 당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1650년에 발생한 일련의 지진들로 인해 도시가 거의 파괴되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황금 도시의 전설을 품은 잉카의 심장 쿠스코는 후에 주로 그림·조각·보석류·장식목공품 등 훌륭한 예술품을 다량 생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식민지시대에 건설된 중요한 건물들로 1654년 잉카 궁터에 완공된 대성당, 산안토니오아바드델쿠스코국립대학교(1692) 외에 교회·수도원·수녀원이 많이 있다. 상공업 중심지인 이 도시에서는 직물·양탄자·맥주가 생산된다. 교통의 요충지로서 비행기·도로·철도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쿠스코에서 제일 먼저 잉카 문명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늘 우리가 잠시 오후에 돌아보던 쿠스코의 중심지 아르마스 광장이다. 이곳에서는 스페인 식민 시대의 관청들과 성당들이 잉카의 주춧돌 위에서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12각의 돌이 박힌 잉카의 돌 벽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종교 예술 박물관이나 잉카 제국의 황금 궁전 터에 세워진 산타도밍고 성당 말고도 많은 근대식 건물들이 잉카 유적의 흔적 위에 서 있다. 특히 산타도밍고 성당이 세워진 곳은 잉카 제국의 전성기 때 코리칸차 궁전의 터였다. 당시 번영하던 잉카 제국의 상징이었던 이 궁전은 온통 금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잉카 제국에 침입해 이 궁전을 본 스페인 사람들이 그걸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이렇게 금이 많다니!” 스페인 사람들은 그 금들을 모두 녹여서 스페인으로 가져갔다. 어찌나 금이 많았는지 유럽 경제가 혼란에 빠질 정도였다. 산타도밍고 성당은 지진으로 그 모습이 사라졌지만 돌로 만든 잉카 제국의 건물 토대는 그대로 남아 있어 잉카 건축의 견고함을 증명해 주고 있다. 잉카는 안데스 산맥 원주민인 케추아족의 언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잉카 인들은 그들의 창조주인 비라코차의 아들인 인티를 태양신으로 모셨다. 태양신 인티는 지금 사는 세상, 즉 현세를 관장하는 신이다. 안데스 산맥의 대지를 따뜻하게 품어 곡식을 맺게 해 주는 신이기에 잉카 농민들의 조상신이기도 하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잉카 인들은 마야나 아스텍 인들처럼 매일 지는 해를 에너지를 충전시켜 다시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 그런 의식을 통해 태양이 매일 다시 떠오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잉카 인들은 마야 인들이 상형문자를 썼던 것과는 달리 문자 대신 아마우타라를 사용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제사를 쓸 때 사용하는 기원문이나 후세에게 전해야 하는 전통 같은 것을 입에서 입으로 외워서 전해 기억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보조 수단으로 퀴프라는 것을 썼다. 잉카 문명의 산물인 퀴프는 한 가닥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직각으로 매단 것을 말한다. 잉카 인들은 그 퀴프의 색깔과 퀴프에 지어진 매듭의 숫자나 모양, 매듭이 지어진 위치 등으로 가구 수나 세금액 등을 계산했다. 이를테면 ‘순수, 평화, 돈’은 하얀색, ‘황금, 태양, 영원’은 노란색, ‘피, 불꽃, 전쟁’은 빨간색으로 표시하는 식이었다. 또 굵은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달아매어 다양한 숫자를 나타냈다. 퀴프는 그래서 잉카 인들의 필수품이었다. 잉카 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 유럽인들이 퀴프가 무엇인지 해독해 냈을 때, 그들의 인구나 가축, 가구 수를 계산한 것이 아주 정확해서 놀랐다고도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잉카 인들이 현대인들을 궁금증에 빠뜨리게 한 것은 바로 건물을 만들기 위해 돌을 깎고 다듬는 석공 기술일 것이다. 잉카 인들은 금속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지도 않고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을 잘라 정확하게 쌓았다. 하지만 신전과 궁전의 벽을 황금으로 장식할 정도로 화려했던 문명을 꽃피웠던 잉카 문명도 마야나 아스텍 문명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야와 아스텍처럼 황금을 찾아 나선 스페인 군대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는 기독교를 전한다는 주장과 달리 무기를 들고 잉카 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게다가 유럽의 낯선 전염병을 퍼뜨려서 그나마 살아남은 잉카 인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내몰았다. 멸망해 가는 잉카의 마지막 왕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아타후왈라였다. 피사로는 1532년 그를 사로잡아 인질로 삼고는 이렇게 말했다. “왕을 살리고 싶으면 이 나라의 금을 모두 가져오도록 해라!” 얼굴이 하얀 스페인 사람들이 신이라고 생각한 잉카 인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잉카의 금을 산더미 같이 피사로에게 갖다 바쳤다. 하지만 피사로는 자기가 한 말은 무시하고 왕을 처형하기로 했다. “죽기 전에 세례를 받으면 화형 대신 교수형을 해 주겠다!” 아타후왈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이냐?” 그래서 아타후왈라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처형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잉카 제국에는 왕이란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라고 믿어서 미라로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타후왈라는 죽더라도 몸을 보존해 미라가 되면, 태양신이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아타후왈라 왕의 죽음과 함께 잉카 제국은 사라졌지만, 잉카 문명의 정신은 아직도 살아남은 안데스 고원의 인디오들에게 전해져 이어지고 있다.역사가 깊은 만큼 이야기도 많구나. 고풍스럽고 멋진 쿠스코는 틈틈이 돌아보자. 내일은 마추픽추를 다녀오자. 주인에게 짐을 맡기기로 하고 다녀와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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