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20세기까지 철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책이다. 우리 '너머' 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 삶의 본질을 향한 믿음과 사색, 계속되는 논쟁 등으로 대표되는 철학의 풍요로움을 담기 위하여 전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철학 전반에 대하여 조망하고 있으며, '서구적인' 관점을 완전히 배제할 수 는 없었다는 필자의 말과 함께 특히 신학과 종교 분야를 다룸에 있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초기 고대세계의 그 많은 신들이 어떻게 하나의 신으로 변모되었을까? 사람들은 언제 처음으로 신들을 달랠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언제 처음으로 숨어있는 힘을 믿게 되었으며, 삶의 진정한 본질 속에 담긴 불가사의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인간에 대한 궁금증들이 철학의 역사를 함께 하는 과정에서 그 해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이다.
철학도 영양학과 같다. 균형이 깨어진 철학은 영양의 균형이 깨어진 몸과 같다. 이 철학사는 ‘주요’ 철학자들을 연대기적으로 좇아가는 동시에, 철학의 여러 주요 문제들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남태평양 등 다양한 문화들의 지평 속에서 비교하며 소개한다. 비서구 철학을 양념처럼 끼워 넣던 기존의 세계철학사(의 탈을 쓴 서양철학사)와 많이 다르게, 비서구 철학에 대한 논의가 상당한 밀도와 비중으로써 다루어진다.
여기서 ‘주요’ 철학자란 기존 철학사의 단골들만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사상이 20세기에 인간의 정신과 본성, 그리고 인간의 조건에 관한 사유의 틀을 세웠다는 점에서, 그를 정신분석학자로 구별하여 철학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철학의 손실이자 수치라고 두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많은 철학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특정 사회의 구조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철학은 과학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왔다. 철학적 문제는 어떤 경험이나 실험으로부터도 독립하여 논리와 언어, 특수한 종류의 직관에 의해 선험적으로 풀릴 수 있으며 오직 선험적으로만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단지 경험적인 것, 혹은 철학이 아닌 심리학으로 간주되어 철학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것이 필연적으로 철학의 빈약함을 초래하였다. 이런 철학 노선에 따라서 어떤 철학자들은, 예를 들어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실제적인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뇌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에 대해 장황하게 논의하고, 또 어떤 철학자들은 물리학자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은 채 과학과 자연의 본성에 관해 토론을 벌이며, 프로이트에 관해 몇 줄 읽지도 않고서 인간의 본성에 관해 장황하게 논의한다고 두 저자는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꼭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에는 생각해보아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 한 사람의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 타인과의 관계, 우리의 정치적 책임과 관심, 미(美) 혹은 예술작품의 매혹적인 복잡성, 그리고 자연의 경이로움 같은 것들은 과학이나 혹은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저자는 절망과 정신성과 사랑에 관한 훌륭한 철학적 이야기를 쓴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까지 철학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철학의 외연을 확대해가면서 이들이 의도하는 바는 단순한 양적 팽창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통합된 인식으로서의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의 진면목을 회복함에 있다. 그동안 철학은 너무 전문적이고 기술적이 되어서 전문 분야 바깥의 사람들은 별 관심 없는 또 하나의 전공 학문이 되어왔다. 철학이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게 되면, 종종 영원한 진리로 여겨지는 잘못 구성된 개념들만이 뎅그러니 남는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바다.
두 저자가 철학과 신화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최초의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해 철학과 신화의 구별을 조장한 이래, 신화는 철학의 저편, 비이성의 대표선수였다. 그러나 때로 우리 삶과 이 세계는 철학의 이편보다는 저편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신화는 이 세계의 속성인 모순과 부조리를 또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것이 신뢰성이나 일관성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세계의 혼돈스러운 실상을 포착하는 매력을 더해준다. 두 저자는 신화에서 철학으로의 이행은 논리적 도약이라기보다는 좀더 산문적인 언어로의 전환으로 본다.
아울러 이 철학사는 (무엇보다 우리의 존재 기반 자체를 흔들고 있는 까닭에) 우리가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문제인 재화의 생산과 소비의 패턴, 욕망과 소유에 대한 개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뿐만 아니라 인간과 환경 사이의 윤리, 그리고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윤리, 지구 행성과 인간과의 관계 등에 관해 새로이 성찰하는 생태철학 및 최근의 이른바 ‘뉴에이지 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철학은 경이롭다. ……철학은 사치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이가 접근할 수 있는 사치이다. 실로 철학은 의심과 분쟁 혹은 혼란의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완고함이 아니라 인간미와 개방성이다. 우리는 뛰어난 논쟁자가 아니라 더 나은 청취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서구가 ‘객관성’으로서 추구해온 것은 가치중립성이나 비인격성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지적인 책임이라는 고상한 의미를 갖는다는 통찰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저 너머에’, 곧 우리 자신의 한계 저 너머에, 또한 세계와 타인들을 편향되게 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관점 저 너머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은 ‘경이감’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그리고 경이감으로서 지속된다고) 주장한 이유이다. 그렇지 못한 그 어떤 것도 철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인간 영혼의 관계를 종교의 중심적인 관심사로 보았다. 영혼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인식은 신을 알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철학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의 하나인 '내면으로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p227 중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우나무노의 철학적 영웅이었다. 우나무노는 객관적인 과학과 이성이 삶의 문제들에 답하는 데 실패한 사실을 슬퍼하며 주관적 진리를 옹호하였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열정과 헌신이지,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다. 이성은 필연적으로 회의론으로 이끌려지며 회의론은 절망으로 이어진다.-p46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