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하기
1
시를 쓰시는 분이거나
시를 쓰려고 하시는 분,
아니면 이제 막 시를 접하신 분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아마도
"낯설게 하기"일 것입니다.
제가 시를 쓰면서
몸으로 체험한 것들에 한해서만
최대한 성실하게
‘낯설게 하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시의 언어는 어쩌면
‘전자 제품 사용 설명서’와
‘미친 사람의 중얼거림’,
그 중간 어디 즈음의 언어일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에만 국한해서 말씀드리면
‘전자 제품 사용 설명서’는
언어를 낯설게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설명서이기 때문에
최대한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쓰는 것이
이 설명서의 목적입니다.
2
반대로,
미친 사람이 중얼거리는 말은
그 자체가 온통 낯선 말들입니다.
정보의 전달이나 의사소통을 아예 포기한,
말 그대로 혼자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리는 말이지요.
이런 경우가
언어를 ‘지나치게’ 낯설게 한 때입니다.
말하는 사람 혼자밖에 모릅니다.
시의 언어가
이 둘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말한 것은
이 둘에 걸쳐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메시지와 뉘앙스와 의미를 전달하되
약간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기.
이때 필요한 것이 ‘낯설게 하기’입니다.
3
창문 바깥으로 나무들이 서 있다
고독한 나무와 고독한 나는
서로 대화를 나눈다
저 나무는 측백나무,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무를
자기 안에 품고 산다
사람과 나무는 서로 닮아 있어서
같이 저녁을 맞는다
어떻습니까.
이 문장들은 ‘낯설게 하기’를 포기한 문장입니다.
나의 내면과 나무가 보이는 풍경을
'설명서’처럼 풀어서 행갈이만 해 놓은 것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무를 자기 안에 품고 산다”
정도가 소위 ‘시적 언어’에
조금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런 발상과 상상, 그리고 표현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익숙함은 자체로 편안함을 주겠지만
시 언어가 마냥 편안할 수만은 없겠습니다.
4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봅니다.
이번에는
‘미친 사람의 중얼거림’처럼
다섯줄을 써보는 겁니다.
저 초록의 나무는 칸딘스키의 전생
나무에도 미술사가 깃들어 있고
나는 마음에 추상화를 그린다
너는 먼 도시 칸딘스키의 도시로 떠났고
오늘 나의 저녁은 노을빛 추상으로 물든다
어떻습니까.
제법 그럴 듯 해 보이는 이 문장들은
‘낯설게 하기’를 지나치게 한 문장들입니다.
쓴 사람 자신도 아마 모를 것입니다.
(제가 썼지만 저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낯설게 하기’의 목적은
‘낯설게’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위의 문장들은 오로지 ‘낯섦’만 추구하느라
다른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씀드리면 사기에 가깝고
조금 더 심하게 말씀드리면
요즈음의 시들이 대부분 저런 식입니다.
(그래서 시가 어려워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를 낯설게 하는 목적입니다.
그것은 언어 자체를 괴롭히고 못 살게 굴고
‘좀 있어 보이는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반대입니다.
죽은 언어(“세월이 쏜살 같이 지나간다” 따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행위이고
언어 자체를 ‘낯설게’, 다른 길로
인도해주는 행위이고
자신의 능력껏 언어를 다뤄보는 행위입니다.
5
그렇다면 '잘 쓴 낯설게 하기'는 도대체 어떤 문장인가,
우리는 이런 고민을 같이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시인 기형도의 이 문장들을
'낯설게하기의 정답'으로 제출하고 싶습니다.
기형도의 <조치원>이라는 시에 있는 문장들입니다.
시 <조치원>은 시인이 기차를 타고
조치원을 지나면서 쓴 시입니다.
이 시 속의 가령 이런 문장.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기차 안의 청년들을 수식하기 위해
"톱밥"이라는 단어를 시인은 사용했습니다.
이 문장 역시 '낯설게하기'입니다.
톱밥 특유의 까끌까끌한 느낌과
서로 잘 섞이지 않는 속성이
자정 무렵의 기차 안 청년들과 닮았습니다.
기차라는 우연의 공간에서 만난 존재들이니까
어쩌면 필연적인 운명일 것입니다.
"청년들은 쓸쓸해 보인다", 라는 설명서의 문장을
'낯설게', 톱밥의 이미지와 같이 사용해서
'약간은 미친 사람처럼' 낯선 문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했습니다.
어떤가요. 시인이 만났을 청년들은 정말로
톱밥 같지 않았을까요.
서로 기차 안에서 뭉쳐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톱밥 같은 청년들.
이런 문장이 바로 낯설게하기,입니다.
6
그리고 이런 문장.
"좀 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우리는 이 문장을 지날 때 문득,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게 뭐지?,
생각하게 됩니다.
'낯설게 하기'는 이렇게
읽는 사람의 시야를 툭, 걸어서 넘어지게 합니다.
<조치원>이라는 시의 배경은
자정 무렵의 기차 안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서울에서 아마도 부산 방향으로 가는
하행 기차로 보입니다.
기차를 타 본 사람들이면 알겠지만
기차 안에서는 여러 지방 사람들이 섞이기 때문에
역시 말투들, 즉 사투리들도 섞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시인은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이라고 썼습니다.
어떤가요. 실감 나지 않나요.
'낯설게 하기'는 이렇게 실감의 문제와 닿아 있습니다.
자정 무렵의 기차니까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 잠이 편안한 잠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 즉 비유를 선택했습니다.
(시인 기형도의 <조치원>이라는 시 전문은
댓글에 올려 놓도록 하겠습니다.)
7
‘전자 제품 사용 설명서’는 다 읽고 버리고
‘미친 사람의 중얼거림’을 우리는 그냥 흘려듣습니다.
우리는 한 번 읽었다고 해서
그 시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언어라고 해서
시를, 시집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잘 쓴 ‘낯설게 하기’는 우선,
자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와, 내게도 이런 감각이 있었다니!)
그렇게, 잘 쓴 ‘낯설게 하기’의 언어는
어딘가로 전달이 되어서 다시,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어쩌면 여기에
‘낯설게 하기’의 핵심이 있겠습니다.
나 자신이 쓰는 언어의 빤함
(상투성, 어휘의 한계, 상상력의 한계 등등)을
통과해서 ‘낯설어질 때’ 그 언어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가서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언어 자체의 삶, 말입니다.
이렇게 시학의 거의 모든 용어들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윤리’와 만나게 됩니다.
나 자신과 조금 낯설어지되
나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
타인에게 낯설게 도착하되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 것.
이것이 ‘낯설게 하기’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댓글 낯설게 하기에 대해 읽어 본 글 중 가장 공감이 가고 쉽게 이해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진성 참 아까운 시인입니다 성추행 사건에 걸려서 메이저 출판사에서 시집 다 취소 되고 정신이 살짝 흐려진거 같죠 수시로 자살할거라고 언론에 퍼뜨리고 작년에는 자기 아버지 이름으로 시인들께 부고를 돌리기도 했어요 요즘은 아마 시창작 유투브를 하나 봐요 우리 나라 스타 시인들 여러명이 시인 지망생들과 성적인 관계에 얽혀서 퇴장한 사람 많아요 조심해야지 신세 망쳐요
예 조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