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지난 旅程에서 상처받은 이야기(1)
一 松 韓 吉 洙
여름 한 철에 제 세상인 냥 입만 가지고 날뛰는 모기도 안면(낯짝)이 있다는데 필자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맥문학]지의 한정되어 있는 지면을 욕심을 부려 다달이 차지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체면이라는 게 있기에 필자의 분통터지는 이야기를 격월로 3. 5. 7월 3개월에 걸쳐 하소연 하고자 하오니 江湖의 諸賢께서는 너무 독촉(?)하지 마시라는 양혜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나서 이 글을 쓰려고 한다.
인생여정에서 산수傘壽를 지나 해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노라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이어서 그러는지 자주 지난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다 보게 된다. 거기에는 구불구불한 구절양장의 길과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걸어온 인생의 굴절된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가에서는 즐거운 음악소리가 들리며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었던 길은 별로 생각나지 않고 비바람 치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을 걸어온 생각만이 차고 넘친다. 이 생생한 여정을 글로 쓰려던 차에 충주시 엄정면 가춘리 미락골에 사시는 수필가 김애자 선생으로부터 지금은 미니스커트처럼 수필이 짧아야 독자들이 선호한다는 강의를 들었기에 필자의 이야기를 토막을 쳐서 몇 부로 나누어서 기술하려고 한다.
필자가 80평생 살아오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고 또 이를 극복하면서 성장해 왔기에 만리장서처럼 할 이야기가 엄청나게 쌓여있지만 이중에서 특히 다음 3가지 화제만 선정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현장으로 안내하려고 한다.
0. 초등학교 담임선생문제로 몽둥이찜질 당한 이야기
0. 성동구 주택과장 재직 시 초가지붕 개량승인으로 징계처분 당한 어굴한 이야기
0. 서울시 지하철운영사업소 직원 경력평정 잘못했다고 징계처분 받은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는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으로 막 넘어가던 학기 초에 있었던 철이 없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우리들은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에 해방이 되었기에 우리말로 된 교과서도 없이 우물쭈물 처삼촌 묘 벌초하듯이 대충 지나오다가 4-5학년 때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도 밑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떠밀려서 얼렁뚱땅 마지막 학년인 6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6학년에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하여야 중학교에 진학을 할 터인데 4, 5학년 담임이었던 김 선생이 6학년 우리 담임을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김진옥이라는 교장선생님의 따님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지금까지 공부해온 과정과 내용을 교장 선생님이 잘 알고 있었는지 6학년 우리 반 담임으로 안병선 선생님을 배정하였다. 이는 불감청이나 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고 필자가 바라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안 선생은 내 아우 동수의 담임이어서 그 선생님의 가르치는 방법과 실력이 주로 음악만 가르치려고 하는 김 선생보다도 월등히 앞서 있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그런데 이때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바람몰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4-5학년 담임이었던 김 선생이었다. 하루는 학년 초인지라 모든 것이 궁금하여 목을 빼며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들에게 김 선생이 들어오더니 하시는 말씀 “너희들 담임이 바뀌었는데 그냥 멍청히 앉아만 있을 거냐?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지금 백방으로 뛰고 있는데. . . 너희 놈들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하루아침에 날벼락이라더니 김 선생은 잔잔한 어린가슴에 돌을 던져 평지풍파를 일으키고는 휙 나가버렸다. 그러자 우리 반의 리더들이 교실에서는 말을 못하고 밖으로 나와 갑론을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론은 안 선생님은 잘 가르치는데 학생들을 쥐 잡듯이 다루고 마구 때린다더라. 6학년까지 올라와서 매 맞을 일 있냐. 그러니 반대를 하자. 필자는 이 급우들의 생각을 돌려놓으려고 벼라 별 소리를 다 했으나 이란격석以卵擊石 격으로 이미 이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가 되었다. 그래서 필자가 한 가지 묘책을 내 놓았다.
“그래 너희들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다. 어느 선생 찬성이라는 이야기는 빼고 안 선생 반대라고만 하자. 내가 한문으로 [안 선생 반대]라고 쓸 터이니 누가 교장선생님께 이걸 전 하겠느냐?”고 물으니 키가 제1작지만 똘똘한 박준섭이 적임자라고 해서 나는 공책을 찢어서 [安 先生 贊成]이라고 써서 박 군을 통하여 교장선생님에게 전하도록 했다.
필자는 초등학교 1학년에서 3학년까지 낮에는 학교공부를 하고 밤에는 건너 마을 새 터라는 외가가 있는 곳의 서당에서 사자소학 명심보감을 떼고 통감 2권까지 공부를 했기에 한문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아니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박군이 메모를 전한지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말까 한데 김 선생이 푸르뎅뎅한 얼굴로 우리교실에 들어오더니 “너희들 소원대로 되었다. 잘 해 보아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과는 다시는 상종을 않겠다.” 하고서 칼바람소리를 내면서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러자 밖에서 논의했던 친구들이 필자에게 몰려와서 김 선생이 왜 그러느냐고 따졌다. 그래서 필자가 말했다. “그래 내가 알아듣도록 말을 했는데도 너희들이 듣지를 안 해서 내가 찬성이라고 썼다. 너희들은 상급학교에도 안 가고 여기에서 여름날 매미처럼 노래만 부를 거냐?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를 않는다.”고 했더니 필자의 말에 수긍이 되었는지 그 뒤로는 풍파가 가라앉아 조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 일어났다. 소위 스승이라는 사람이 회초리가 아닌 복수의 칼을 들고 제자를 헤치려고 나타났다. 이 분은 우리학생들 2인이 같이 앉는 장의자의 등받이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들고서 우리 교실에 나타나더니 필자를 앞으로 나오라고 불렀다. 그래서 필자가 쭈뼛거리며 교단 쪽으로 나갔더니 그 두껍고도 긴 몽둥이 같은 나무로 필자의 등허리를 한 번 후려치자 딱하고 허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래서 아이쿠 하고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그러면서 나 죽는다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데도 김 선생은 필자가 엄살을 한다고 계속해서 등과 허리를 가격했다. 김 선생은 실컷 분풀이용 폭행을 하더니
“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이다. 그래도 나는 너를 공부도 잘 하고 착해서 급장도 시키고 했는데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놈아 ” 하더니 들고 온 나무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스승이라고 하면 우리의 사표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분을 어떻게 존경을 하고 따르겠는가? 선생이 이렇게 막나가니 사제 간의 정이 1.000리로 달아날 수 박게 없었다. 학창시절에 스승의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의 일생의 운명이 결정되고 나아갈 좌표가 형성된다는데 이런 선생한테서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 참으로 한심한 현장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허리를 다쳐서 일어나지를 못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반 친구들이 달려 나와서 필자의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간신히 내 자리에 앉혔다.
우리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골격에 유연성이 있어서 그랬는지 필자는 각목으로 허리를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병원에 가지 아니하고 집에서 닭에다 옻나무를 넣어서 다려서 먹고 몸을 추스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연치가 쌓이게 되자 뒤늦게 그 여운이 나타났는지 허리가 아파서 걸음을 못 걸어서 병원 10여 곳을 전전했는데 이 아픔을 소재로 쓴 글을 2020년 1월호 [한맥문학]지에 [나의 투병기]라는 수필로 발표한바 있음을 알려드린다.
이제는 이런 난리도 아닌 깽판을 친 뒷이야기인 후일담을 써야겠다.
이와 같이 자기 담임 교실인 3학년 2반이 아닌 남의 교실을 휘젓고 다니도록 빌미를 준 것은 새로 담임을 맡은 안병선 선생님이 하필이면 그때 전주에서 교원연수 중이기었에 무주공산인 이 빈틈을 이용하여 김 선생은 우리교실을 휘졌고 다니며 제자를 폭행도 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우리교실을 종횡무진 휘저으며 우리들을 선동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난데없이 김 선생이 우리교실에 불쑥 나타나더니 무슨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하시는 말씀 “ 학년 초에 선생들 인사발령시기도 지났는데 뜬금없이 나는 정읍군 산내면 목욕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지도를 놓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목욕국민학교는 찾을 수가 없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여 끝까지 보살펴 줄려고 하는 마음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 벌을 왜 내가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막된 처사가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다.”
하면서 채신머리없이 우리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반 아이들도 따라서 울음을 터뜨려 때 아닌 곡성이 전교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를 이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요, 본인이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하건대 <기둥을 치면 보가 울린다.>고 이는 한 반에 있는 김진옥 학생이 교실에서 정당한 주장을 한 제자를 각목으로 폭행한 장면을 집에 가서 아버지인 교장선생에게 알려주어 일어난 사단으로 알고 김 선생은 김진옥 앞에서 보아란 듯이 교장선생님에게 간접적으로 실컷 퍼부은 항의 같았다.
그런대도 필자는 그렇게 원하고 갈망했던 안 선생의 수업을 단 1시간도 받지 못하고 특차로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기에 명목상의 졸업생이 되고 말았다. 매 맞아 가며 모신 안 선생의 가르침을 못 받은 것이 너무나 아쉽고 한이 되었다. 그러나 안 선생님은 그 당시에 현장에는 안 계셨지만 안 선생님의 동생 안병헌이 우리 반 급우이었기에 담임선생 문제로 야기된 저간의 사정이야기는 잘 들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23년의 세월이 흘러간 1971년경이다.
필자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 서울시청에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촌로가 난데없이 필자를 찾아 왔다. 헐거운 점퍼를 걸치고 진흙이 묻은 양복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행색이 그런 분들은 수위실에서 시청 사회과에 가서 떼쓰려고 오는 사람으로 취급해서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는데도 이분은 용케도 찾아 왔다. 그분이 필자를 보더니 대뜸 하는 말씀
“네가 한길수지? 나는 너를 가르친 김00이야.” 그러고 보니 옛날에 매나 회초리가 아닌 각목으로 필자를 폭행한 김 선생 바로 그분이었다. 명심보감의 계선편에 보면 수원을 막결하라. 노봉협처엔 난회피니라 讐怨莫結 路逢狹處 難回避하는 글이 있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필자를 길에서 만날까 봐 일부러 피할 사항인데도 염치불고하고 필자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김 선생을 모시고 시청 주변에 있는 부민옥인가 용금옥에 가서 점심을 대접했다.
지난 이야기를 들어 보니 무슨 소설책을 읽는 것 같았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면의원에 입후보했다가 낙선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창피해서 그 고장에서는 살 수가 없어 식구가 몽땅 상경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서울에 올라와서 사기당한 이야기 사업을 한다고 벌였다가 실패한 이야기 등 한이 없는 궁색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본론이 나왔다. 어디에서 알아왔는지 모교 29회 동문들 주소와 전화번호를 필자에게 내밀며 한다는 말씀. “자네를 만나니 반갑네. 자네는 이 다음에 잘 될 걸로 알았네. 자네가 앞장서서 이 동창들에게 연락하여 나를 좀 도와주게.” 처음에 호칭하던 네가 점심 후에는 자네로 바뀌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날을 잡아서 시청근처에 있는 음식점으로 재경 동문들을 모이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는 전화가 귀중한 재산목록중의 하나이어서 전화통화가 가능한 동문은 몇 사람 되지 아니해서 대부분 우편물로 통지했다. 10여명의 동문 중 5-6명이 모였다. 그래서 필자가 점심을 제공하면서 여러 이야기 끝에 김 선생의 딱한 처지를 말 하고 십시일반으로 돕자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모두가 미리 입을 맞추고 온 것처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동문들이 이제 낯선 서울에 와서 아직 안정된 직업인으로 정착되지도 못했고 대부분이 아이들의 교육에 매달리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 큰 기대를 안고 재차 필자를 찾아온 김 선생에게 모임에서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전 했더니 실망했다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 뒤 하루는 필자가 퇴근하는 통근버스를 타고 구의동 우리 마을 앞에 내렸더니 어느 곳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김 선생이 불쑥 나타났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자기는 중곡동에 사는데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들렸다가 필자를 우연히 만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녁을 대접하고 차비를 드린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뒤로는 1주일에 1-2회 꼴로 필자를 기다리고 있기에 어느 때는 집으로 같이 와서 저녁식사 대접도 하고 차비도 드리고 했다.
모기도 안면이 있다고 하는데 자주 깜짝 나타나 필자에게 신세를 지기도 미안했던지 어느 날은 필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말씀을 해 보시라고 했더니 하시는 말씀
“내가 중곡동에 있는 시장 입구에서 야채장사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리어카를 끌고 장사를 하기에 편안하게 돈을 잘 버는데 나는 돈이 없어 지개를 지고 다니며 장사를 하려니 힘만 들고 수입도 시원치 않다네. 그러니 리어카 1대만 사주면 좋겠네.” 참 염치도 좋다.
“그 말씀은 잘 알아들었으나 지금은 돈이 없으니 월급날인 25일 저녁에 만나기로 합시다.” 하고 돌려보냈다. 그런 뒤에 그달 봉급 받는 날 왕년의 김 선생이 어김없이 우리 마을에 왕림하셨기에 월급봉투에서 우선 몇 만원인가를 꺼내서 드렸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받아갔는데 그 뒤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하니 사람이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데 오죽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20여년 전일을 망각한 듯 위장을 하고 로버트 스티븐슨의 작품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처럼 행동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먹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쯤은 내 스승이 아닌 김 선생도 필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생을 편안히 지내시리라 믿고 있다.
|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