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8:28]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다시 라이스의 지형적 여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라이스에 대한 단의 뜻 아니한 침략이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 '베드 르홉'이란 지명의 뜻은 '르홉의 집'이다. 민 13:21과 삼하 10:6에 따르면 이 지명은 소바 왕 하닷에셀의 아비 르홉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아셀 지파의 지경인 훌레 평지 윗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골짜기를 통하여 흐르는 물은 요단 강에 이르게 된다.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 여기서 '상종하다'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친밀히 교제하다'는 뜻 외에도 '사업상 교류하다'는 뜻이 있다. 이로 보아 라이스 거민들은 지형상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국가간의 외교적 친선 도모나 경제적 교류 따위를 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삿 18:29]"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더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 이곳 라이스는 가나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7절주석 참조. 그래서 이곳을 단이라고 칭한 이후 부터는 이스라엘의 전영토의 경계를 말할 때에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란 말을 쓰게 되었다. 여기서 '브엘세바'는 팔레스틴 최남단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기업이다.
한편 이때부터 실제로 단 지파는 단 지역의 사람과 소라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로 분리되게 된 듯하다. 11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후로 성경에선 이들 지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든데 역대기에도 단 지파에 속한 인물에 대해서는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분되었던 단 지파는 영적인 이스라엘의 족보에서조차 사라진 셈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단지파의 거족적인 우상 숭배 탓으로 이해하고들 있다.
[삿 18:30]"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본절에서는 단이 라이스에 정착한 이후 독자적으로 행한 우상 숭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 - 여기서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으나 후에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 소년'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없다. 그런데 그 외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므낫세'로 읽도록 모세라는 히브리어 문자 사이에 작은 문자 '눈'을 삽입하여 므나쉐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본절을 '므낫세의 손자'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나 70인역(LXX), 수리아역 등을 볼때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아들'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히브리어 성경 필경사들이 이와 같이 '모세'를 '므낫세'로 읽도록 '눈'을 첨가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1) 모세의 이름을 신성시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란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명기함으로써 불경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2) 단 지파를 우상 숭배죄로 몰고 간 요나단을 모세와 같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 본절의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간에는 상당한 이견(異見)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유수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한 앗수르 포로 유수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 학자 데이빗 킴치나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엘리 시대 때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 갈 때로 생각한다.
그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일리가 있다. (1) 31절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라는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로의 회막은 여호수아 때에 세워진 것으로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 사울 때에는 놉에, 그리고 다윗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
(2) 미가의 새긴 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계속 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분열 왕국 시대에 여로보암이 그곳에 다시 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미가의 전통을 따라 행한 것이다.(
3) 이스라엘의 기강이 바로 잡힌 사무엘, 다윗, 솔로몬 시대에까지 한 지파 전체가 그러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도록 용납되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사로잡힌 날'이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법궤가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내외적으로 연약해졌을 때를 가리킴에 분명하다.
[삿 18:31]"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 이러한 본절의 기록은 본서가 사무엘 시대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회막이 엘리 시대까지는 실로에 있었으나 블레셋에 의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이후부터 실로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사무엘에 의해 실로의 회막이 라마로 옮겨졌을 것이라 보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는 성막이 보관되어 있던 실로였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정한 절기 때에나 기타 개인적으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 실로에 모였다. 이러한 관습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서,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실로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단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