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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는 큰 절문(節文)으로 선행(善行)을 높이고 평생의 선악을 드러내어서 후세에 권장과 징계를 보이니, 명교(名敎)에 보탬이 되는 것이 많다.” 하였다. 따라서 1438년(세종 20)에 시법서를 편찬하고 증시를 법규로 제정한 것은 실덕(實德)을 밝혀 권계(勸戒)하고 명분과 교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종친과 문무관 실직 정2품 이상에게 시호를 준다고 규정되었다. 친공신(親功臣)은 비록 직위가 낮더라도 역시 시호를 주는 특전이 있었다.
시호(諡號)도 미시(美諡)와 악시(惡諡)가 있다. 시호(諡號)는 한 번 정해지기만 하면 그에 따른 영욕(榮辱)의 이름이 영구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증시를 받는 입장에서는 미시(美諡)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文)’ 자와 ‘충(忠)’ 자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았다. 같은 ‘문(文)’ 자라도 원하는 해의(解義)가 따로 있어 이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대단하였다. 「시법해」를 보면, 신(神)·황(皇)·제(帝)·왕(王)·문(文)·덕(德)·무(武) 등 각 시자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그 뜻을 풀어놓은 해의(解義)를 부여하고 있었다. 공(恭) 자는 9가지의 해의를 지녀 가장 많고, 문(文)·영(靈)·장(莊)이 6가지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증시를 받는 자는 좋고 아름다운 시호를 받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민간에서도 결정된 시호에 불만이 있을 경우에 정파·학파의 차원에서 시호나 시주(諡註)를 고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시호 관련 시비는 19세기 중반 이황과 그의 문인 김부필의 후손 간에 야기된 이른바 문순시비(文純是非)다.
2. 시장(諡狀)
시장(諡狀)은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생존 시 행적을 적은 글이다.
『경국대전』에는 종친(宗親) 및 문무관 실직 정2품 이상과 직위는 낮더라도 친공신(親功臣)에게 시호를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 밖에 대제학을 지낸 자는 종2품이라도 시호를 주었고, 유현(儒賢)이나 사절(死節)한 자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정2품이 아니라도 특별히 시호를 주었다.
응당 시호를 받아야 할 사람이 죽으면 본집에서는 휘(諱)·자(字)·성(姓)·본관(本貫)·현조상(顯祖上)·출생·학력·관력(官歷)·이력·행적·자손·성품 등과 글을 작성한 사람의 성명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갖추어 예조에 바쳤다.
예조에서는 내용을 조회한 뒤 제사(題辭)를 써서 봉상시(奉常寺)에 보낸다. 그러면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봉상시의 타 관원과 함께 시법(諡法)에 따라 시초(諡草)의 글자를 모아 시장을 작성한다.
그 뒤 홍문관의 응교와 합석해 돌려가면서 열람하고 가부를 논한 다음에 세 가지로 시망(諡望)을 의정해 예조에 다시 이첩하였다.
예조에서 행적을 참고해 첫 머리글자에 문신의 경우 문(文), 무신의 경우 충(忠)자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충절이 높은 문신에게도 충자 시호를 내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의정부와 양사(兩司)의 서경(署經)을 거쳐 이조로부터 계청(啓請)해 낙점(落點)을 받아 회람한 뒤, 시장을 다시 봉상시로 돌려보내 간직하도록 하였다. 만약, 임금의 특별한 교지(敎旨)로 시호를 주게 되는 경우에는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홍문관에서 날짜를 정해 봉상시에서 합석해서 정하였다.
유현으로서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린 경우는 이황(李滉)에게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준 것이 최초의 예였다.
3.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시장(諡狀)
가.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시장(諡狀)
시장(諡狀)은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생존 시 행적(行跡)을 적은 글이다. 전식(全湜)의 시장(諡狀)은 권유(權愈)가 작성하였다.
시장(諡狀)
공(公)의 휘(諱)는 식(湜)이고 자는 정원(淨遠)이며 호는 사서(沙西)이고 옥천(沃川) 전(全)씨이다. 고려시대 영동정(領同正) 휘 학준(學浚)으로부터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고, 이후로 이름난 관리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는데, 태자중윤(太子中允)을 지낸 효격(孝格)과 병부전서를 지낸 유(侑)와 판도판서를 지낸 숙(淑)이 드러난 분이다. 휘 응경(應卿)에 이르러 이조참판에 추증되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는 휘가 팽조(彭祖)인데 국자감의 상상(上庠)이며 조부(祖父)는 휘가 혼(焜)이고 부(父)는 여림(汝霖)이다. 무릇 3대가 밝은 관료였으며 공(公)이 귀하게 되어 부(父)는 이조판서에, 조부(祖父)는 이조참판에, 증조(曾祖)는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母)는 정부인(貞夫人) 월성이씨(月城李氏)인데 신라시대 알평(謁平)의 후손이며 참봉 신(信)의 여식으로, 가정(嘉靖) 계해년(1563년 명종 18년) 정월 21일에 공을 낳았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빼어나며 지조와 행실이 있었다. 기관(羈貫)에 몸이 여려서 집안일을 할 수 없었지만, 부모 봉양에 애를 써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품 안에 넣어 가지고 부모에게 드렸다. 부모가 매우 가난하여 의식(衣食)이 넉넉함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부모가 자신이 굶주림을 근심할까 걱정하여 비록 굶주림이 따른다 해도 굶주림을 말하지 않으니, 향당(鄕黨)에서 ‘전씨 효자 아이(全孝兒)’라 불렀다. 조금 자라서는 글을 읽어 의리(義理)를 통하고 학문에 힘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김홍민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기어 칭탄(稱歎)을 마지않았다.
기축년(1589년 선조 2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남구(南寇, 일본을 가리킴)의 난이 일어났는데, 공(公)은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개연히 국난(國難)을 도모하는 뜻이 있어, 진사 강주(姜霔)와 함께 창의하여 선비들을 모아 험한 지역에서 수십 명의 적을 격살하고, 혹 적이 기회를 틈타 진퇴(進退)할까 염려하여 공(公)이 대의(大義)로서 이끌며 더욱 힘을 쏟으니, 선비들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응남이 이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연원찰방에 천배(遷拜)되었다. 연원은 적(賊)이 경유할 길이었다. 역참의 이졸(吏卒)이 왜적의 침입을 심하게 받아 남김없이 죽어서 흩어지니 공이 무마(撫摩)하고 불러서 회유하며 우역(郵驛)의 일을 함께 받들어 통사(通使)를 보내고 맞이하게 하였으며, 명(命)하기를 모두 부절(符節)과 같이 하니, 관찰사가 그 재능을 아름답게 여겨 공에 가흥창(可興倉)을 감수(監收)하게 하였다. 이때 마침 왜적이 다시 이른다는 허위사실이 나돌아 상하가 서로 놀라 어지러웠는데, 공(公)은 편히 뜻을 곧게 하고 한층 더 일을 처리함에 조금도 굽히지 않으며 이졸(吏卒, 하급관리)을 감독하고 삼가 창고를 지키니, 며칠 안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 관찰사가 한층 더 그 재능을 알고 다시 공(公)에게 호서(湖西)의 군량(軍糧)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때 마침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급박하여지자, 체부가 흔들리고 두려워하며 적에게 점령당할까 불안을 느껴서 적취를 불태우라고 명하였는데, 공(公)은 이를 고집하고 듣지 않은 채 감독하고 지키기를 한층 더 엄하게 하였다. 당시 양식이 만여 섬이나 되는 것을 보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 다행히 우리 군사들에게 넉넉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공(公)이 위태로울 때 전일(專一)하게 지키며 뜻을 빼앗기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신축년(1601년 선조 34년)에 예빈시 직장(禮賓寺 直長)에 전임(轉任)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계묘년(1603년 선조 36년)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당로자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성균관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에 천거로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다. 당시 권력을 잡은 신하가 존호(尊號)에 대한 논의를 앞장서 주장하여 조정 신하들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오직 영남(嶺南) 사람만이 박의를 가져서 당로자가 공(公)이 가르쳐 시킨 것으로 의심하여 시끄럽게 헐뜯어대므로, 공(公)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갔다.
정미년(1607년 선조 40년)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무신년(1607년 선조 41년)에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나라의 관례에 도사는 변방 사람들을 쇄환하는 일을 관장하는 것이었으나 쇄환할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 점차 많아져서 욕보이며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공(公)이 조목별로 그 진상을 말하여 그 쇄환령(刷還令)이 의(義)에 맞지 않은 것을 혁신하였다. 순부(巡部)에 오래된 송사(訟事)가 정사(政事)를 거치면서도 판결을 내리지 못한 것이 있어, 순찰사(巡察使)가 공에게 맡겨 공평한 판결을 내리게 하였는데, 공(公)이 곧바로 그 사정(事情)을 이해하고 모든 의혹들을 억누르고 막으니, 호서지방 백성들이 공(公)의 명철함에 탄복하였다.
기유년(1609년 광해군 원년) 예조 좌랑(佐郎)을 배수(拜受)하고 얼마 뒤 정랑(正郎)에 승진하였다. 공(公)은 이미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재능이 있고, 문학이 우수하고 학업을 계승하여 사망(事望)이 이루어졌다. 이조가 공(公)의 억울함을 애석하게 여겨 공(公)을 천거하여 이조정랑(正郎)으로 선발하려고 하였으나. 척리의 자식이 먼저 이조정랑이 되는 일이 있었다. 공(公)이 정도(正道)를 지키며 거부할 것이 두려워하여 이조의 장관(長官)이 가인(家人)을 시켜 진심을 다해 공(公)의 뜻을 물었다. 또한 공(公)이 척리의 자식을 한 번 만나보면 공(公)에게 보답할 자라고 권면하며 그 마음을 부드럽게 보였으나 공(公)이 웃으며 거절하여 이 때문에 이조에 들지 못하였다.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에 울산부 판관(蔚山府 判官)에 제수되었는데 풍정(風政 : 治績)을 닦고 사람들을 이롭게 해 줌이 많았으며, 갑인년(1612년 광해군 4년)에 금교찰방(金郊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또 외직으로 나아가 전라도 도사가 되었는데, 당시 광해군(光海君)이 무도(無道)하여 이륜(彛倫)이 무너져 내리므로, 공(公)은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상산(商山, 상주)에 돌아가 세상에 뜻을 접고서 우복 정공(愚伏 鄭公), 창석 이공(蒼石 李公)과 함께 서로 뜻을 같이하고 서로 벗하면서 다녀보지 못한 곳을 유람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니, 세상 사람들이 ‘상사삼로(商社三老)’라고 불렀다.
기미년(1619년 광해군 11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경신년(1620년 광해군 12년)에 판서공(判書公) 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다스림에 있어 상례(喪禮)를 다하였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며 슬픔에 겨워 몸이 여위어 거의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상복(喪服)을 벗은 뒤 경상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계해년(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대왕이 반정(反正)하고 버려진 당시 영재들을 폭넓게 추천하니, 공(公)도 예조정랑에 임명되어 기주관(記注官)을 겸하고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 이해 가을에 홍문관에 선록(選錄)되어 수찬(修撰)에 임명되고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는데, 언제나 임금 앞(前席)에서 진강(進講)할 적마다 경의(經義)가 매우 밝고 조목조목 해석함이 자세하고 마땅하여, 주상께서 항상 가벼운 눈인사를 하였으며, 임학사 숙영(任學士 叔英)은 일찍이 “고금(古今)에 통달한 사람은 정경세이고(通古今鄭經世),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전식이다(通事理全湜).”라고 하였다. 이해 겨울 전적을 거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죄상(罪狀)을 들어 탄핵함에 회피하는 바가 없었고, 간혹 배척을 받아 파직되면 대신들이 주상에게 “전 아무개는 전원에서 학문에 힘쓰는 선비이니, 언지(言地)에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아뢰어 직강(直講)애 임명되곤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옮겼는데,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모반을 도모하여, 성상(聖上)이 공산(公山, 공주)으로 피란하고 공(公)은 길을 따르면서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이때 연평군 이귀(李貴)가 임진(臨津)에서 군사를 버리고, 도원수 장만(張晩)은 머뭇거리며 급히 적을 추격하지 않아, 적이 이 때문에 세력이 더욱 커져 마침내 경성(京城)을 범하게 되어, 성상은 낭패를 당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공이 두 사람의 죄를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계론(啓論)하자, 장만의 막하에 있는 무사들이 시끄럽게 헐뜯으며 “원수(元帥)께서는 큰 공이 있으신데, 도리어 법을 행하려 하는가? 공공연히 질서를 어지럽히는 말로 대각(臺閣)을 움직일까 걱정된다.”라고 하였다. 공(公)이 이들을 불러 앞에 오게 하고는 성난 목소리로 “주상을 몽진하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이냐? 너희들도 신하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느냐?”고 꾸짖으니, 모두가 섭복(攝伏)하고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주상께서 도성(都城)으로 돌아온 뒤 호종에 공로가 있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승진하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는데, 주상께서 김공량(金公諒)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자급(資級)을 더하였으나, 공(公)이 곧바로 봉환(封還)하고 뜻을 받들지 않으니, 여론(輿論)이 공(公)이 처리를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을축년(1625년 인조 3년) 좌승지(左承旨)로 옮겼으나 사체(辭遞)하고, 다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상사(上使)로써 명(明)나라의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러 가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 사람이 요동(遼東)에 주둔하며 우리 사신(使臣) 길을 막고 있어, 시절마다 보내는 사신(時節朝京)이 요동 길로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바닷길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파도가 사나워 혹 침몰하여 돌아오지 못할까 봐 각종 사명(使命)을 받든 자들이 모두 꺼리며 가지 않으려고 푸념만 늘어놓았으나, 공(公)이 사명을 받음에 이르러서는 마치 평탄한 길을 나아가듯 조금도 두려워하고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황성도에 이르자, 큰바람이 일고 파도가 요동쳐 배가 거의 전복될 위기에 처하였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안색이 가지가지 변하였으나, 공(公)은 우뚝이 앉아 시(詩)를 지으며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큰 미꾸라지(大鰌)가 배를 끼고 나아가 언덕에 배를 붙여 주고 떠나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이 모두 감탄하며 “신(神)의 도움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황도(皇都)에 들어가자, 황도 사람들이 모두 ‘후덕한 재상이다.’하였고, 등주군문(登州軍門) 무지망(武之望)은 더욱 경례(敬禮)를 융숭(隆崇)히 하였으며, 황조(皇朝) 태사(太史)가 “조선 사신 전식이 조회하러 왔다(朝鮮使臣全湜來朝)”라고 특서(特書)하였으니, 이는 우리 조정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이지만 공(公)도 사실 그 영광을 함께한 것이다. 당시 배 안에서 지은 시는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병인년(1626, 인조 4)에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 5) 봄에 오랑캐가 우리를 침범하여 서해(西海) 지방에 이르러 주상께서 강도(江都: 강화도)에 피난하였는데, 오랑캐 사신인 유해(劉海)가 오랑캐 서찰(書札)을 가지고 와서 주상과 더불어 맹약(盟約)을 맺자고 하여 조정의 논의가 이를 허락하려고 했다. 그래서 공(公)이 분개하며 곧바로 상소(上訴)하여 “천승(千乘)의 존엄한 신분(身分)을 낮추어서 아래로 오랑캐와 맹약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교활한 오랑캐가 속임수를 씀을 예측할 수 없는데, 맹세한 뒤에 다시 등(等)의 말을 올리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 분발하여 명쾌하게 판단하시어, 오랑캐 사신을 다시 돌려보내시고, 급히 제장(諸將)에게 격문을 보내어 임진강을 지키게 해서 적이 감히 강을 건너 남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시고, 관서 지방 장사(將士)에게 명하시어 패강(浿江, 대동강)을 끊게 해서 서쪽 오랑캐가 진퇴(進退)의 근거를 잃게 하여 모두 섬멸하시길 욕망(欲望)합니다.”라고 아뢰었으나, 당시 의신(議臣)들이 굳게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공(公)의 말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얼마 안 있어 예조참의로 옮기고 조금 지나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서, 차자(箚子)를 올려 여섯 가지 일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내용은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라(納諫諍)는 것과, 치우친 사심(私心)을 버리라(去偏私)는 것과, 군정(軍政)을 닦으라(修軍政)는 것과, 군관(軍官)의 수효를 줄이라(減軍官)는 것과,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믿지 말라(勿恃和議)는 것과, 남의 동정을 기찰(譏察)하지 말라(勿爲譏察)는 것이었다. 이때 여러 훈신(勳臣)과 귀척(貴戚)들이 막하(幕下)의 선비를 모아 부양하며 이목(耳目)을 키워서 자신과 다른 이들의 일상을 살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하면 언제나 두루 받아들이셨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공(公)은 일의 내용을 지적하며 직언(直言)을 꺼리는 것이 없었고, 다른 말에 이르러서도 모두 당시 급히 여겨야 할 것을 의론하니 선비들이 위대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여러 번 이조와 병조의 참의에 임명되고 대사간에 임명된 것이 네 번이었는데,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고 혹은 은혜로운 명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여 돌아오곤 했지만, 대체로 수개월 동안 조정에 있은 적이 없었다. 공(公)은 스스로 늙고 병든 이유로 외지(外地)로 보임(補任)시켜 줄 것을 단호하게 요청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신라의 도읍은 문제가 많아 다스리기 어려워 심히 이남(二南, 영남·호남)을 위하였으나, 덕명(德明)을 먼저 들은 백성들의 행동은 사람됨이 미더워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절로 교화되었다. 3년을 지나 돌아오게 되자, 아전과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爲政以德) 視民如傷 三年惠澤 汶水流長.” 즉 정치를 덕으로써 하셨고,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 하였네, 삼 년 동안의 혜택은 문수(汶水)와 같이 길이 흐르리라고 칭송하였다.
갑술년(1634년 인조 12년)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때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혼례가 너무나 사치스럽게 커서 공이 상소하여 “선왕(先王)께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드셨는데, 비록 대군왕자(大君王子)라 하더라도 모두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사방(四方)에 가르침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군의 혼례 때에 의복(衣服)과 기용(器用)이 제도를 넘는 것이 많으니, 아마도 선왕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라고 하니, 주상께서 가납(嘉納)하였다. 또 “기강(紀綱)이 날로 해이해지고, 궁궐이 엄하지 않습니다.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하는데 간혹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밖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들을 필요가 없는데 간혹 위에서 듣게 되니, 이는 나라의 근심입니다.” 하였고, 또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며 “성스러운 지혜는 하늘에서 내시어 홀로 한 시대의 뜻있는 사람을 다스리시는데, 줄곧 신(臣)들은 용납 받지 못하여 충언(忠言)이 가슴속에 답답하게 맺혀 있습니다. 조정 신하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서로 배척하고 분쟁하는 것은 밝은 임금께서 매우 미워하는 것이니, 마땅히 국가를 통치하는 큰 권한(權限)을 말없이 움직여서 그 조짐을 끊어 버리셔야 하고, 제목(題目)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에 현설(顯設)하는 문을 지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천변(天變)이 자주 일어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심해지니, 이와 같이 간다면 어찌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성왕(聖王)께서 예전에 배운 학문을 한층 더 익혀 새로운 공부를 더 하시어, 분치(憤懥)과 애오(愛惡)의 치우침을 충분히 축출하시고, 사치(奢侈)하고 화사(華奢)한 습관을 통렬히 뜯어고쳐서, 서민을 사랑하기를(慈庶民) 동포(同胞)와 같이 하시고, 군신(君臣)을 보기를 내 몸과 같이 하시며, 말을 이롭게 행해지면 소천(疏賤)을 따지지 마시고 해로움이 혹 백성에게 미치게 되면 귀근(貴近)을 봐주지 마시며, 날마다 구경(九經)에 마음을 두시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기본으로 삼으시길 욕망(欲望)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소의 내용이 모두 수백 마디였는데, 모두 시국(時局)을 바로잡는 논(論)이었다. 얼마 뒤 사임하자, 체직(遞職)되어 병조참의와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여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는데,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갔었다.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 정월(正月)에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곡(哭)한 뒤에 곧장 고향에 돌아갔으며, 이어 대사간과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해 겨울에 청나라 군사가 왕경(王京, 서울)에 이르러 주상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였다. 공(公)은 이때 상산(상주)에 있었는데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창의하여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고 곡식 수백 섬을 가지고 달려가 충주(忠州)에 주둔하였다. 이때 마침 영남이절군(嶺南二節軍)이 쌍령(雙嶺)에서 패(敗)하고 달아나며 걸려 넘어지고 짓밟히며 돌아오자, 의병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오랑캐 군사가 많이 이르는 것으로 여겨 두려워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진지를 옮겨 적의 칼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두려워 말라. 내가 이미 준비한 것이 있다. 무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규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거듭 그 진지를 고수하고 동요하지 않았다. 얼마 뒤 그들에게 물으니 과연 싸움에서 패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공(公)이 군사가 약하여 대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니 대도(大盜)가 문경(聞慶)으로 진영을 후퇴하였다. 이때 마침 청나라 사람이 맹약하고 돌아가 주상께서 경성에 돌아오자, 공은 즉시 군대를 철수하고 길에 올랐는데 서울에 이르기 전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공(公)이 주상을 만나 뵙기를 청하자, 주상께서 소견(召見)하고 맞이하여 공(公)에게 “경(卿)이 창의(倡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겼다. 영남의 군대가 병력을 구하여 다시 떨쳐 일어난 것은 영남이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아서 대의(大義)를 밝혔기 때문이니, 호남 사람이 어찌 영남 사람의 죄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공(公)이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고 “ 노신(老臣)은 병이 들어 군대에 관한 일을 맡을 수 없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죽어야 하는 의리(主辱臣死)를 신이 진실로 온전히 저버렸습니다.”하고, 또 “얼마 전에 큰 난리를 겪었으니 마땅히 분발하여 국정(國政)에 힘을 쏟으시고, 다행할 때로 돌아갔으니 선왕(先王)의 사업을 창대히 하십시오. 다만 염연(斂然)히 스스로 저상(沮喪)되어 수개월 동안 대궐에 어거하지 못한 것이 신이 개탄한 바입니다. 게다가 근자에 열 명의 신하가 척화(斥和)에 연좌되어 탄핵을 받고 쫓겨난 것은 전후(前後)를 생각하지 않고 대언(大言)만을 전일(專一)하여 진실로 소원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물어 그들을 물리치신다면, 천하의 의부(義父)가 비웃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주상의 위로가 진실로 두터웠다. 얼마 뒤 이조참의에 임명되고, 이해 여름에 특명으로 참판에 승진하여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게 하였는데, 공(公)이 사양하였으니 주상께서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무인년(1638년 인조 16년)에 대사간과 대사헌,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때 주상께서 호남의 군대가 군율(軍律)을 범하였다는 이유로 남한산성에 가서 석 달 동안 복역(服役)하도록 명하였는데, 공(公)이 계언(啟言)하기를 “호남의 군대는 진실로 죄가 있지만, 농사를 짓는 시기를 빼앗으면 아니 되니 청컨대 삭(朔)을 감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또 순검사(巡檢使)에 명하여 삼도(三道)의 수군(水軍)을 점검하도록 하였는데, 공(公)이 또 “삼도(三道)의 백성들이 힘이 다하여 고달픈데, 또 수군을 감독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은 거듭 백성들을 곤궁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여덟 가지 조목을 논하였는데, 성궁(聖躬)을 조양하라는 것(調養聖躬)과 실덕을 힘써 닦으라는 것(懋修實德), 사치하는 풍조를 통렬하게 혁파하라는 것(痛革侈風)과 언로를 넓게 개방하라는 것(廣開言路)과, 기강을 떨쳐 숙정하라는 것(振肅紀綱)과,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라는 것(崇獎節義)과,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보살펴 주라는 것(勤恤民隱)과,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라는 것(革罷內需)이었으니, 모두 당시 사회의 폐단을 구제할 요체여서 듣는 이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경진년(1640년 인조 18년)에 세 차례나 사간원과 사헌부의 장관(長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대신들이 주상에게 “전식(全湜)의 덕망은 시대에 모앙(慕仰)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몹시 독로(篤老)하니 마땅히 서둘러서 크게 써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는데, 공(公)이 이를 듣고서 스스로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하고 겸양하여 감히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오년(1642년 인조 20년)에 대신들이 또 주상에게 “전식(全湜)은 경연의 중신입니다. 나이가 여든 살이니 마땅히 우로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는데, 주상께서 명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加資)해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하고 동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게 하였다. 얼마 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고, 이해 11월 초7일에 상주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원근(遠近)에서 공의 죽음을 듣고서 알든 모르든 간에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문하(門下)의 선비가 모인 것이 수백 명이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주상은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부의(賻儀)를 보내는 한편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명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春秋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추증하였다.
계미년(1643년, 인조 21년) 2월에 상주 서쪽 백전산(栢田山)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公)이 사후 4년 후인 1646년(인조 24년)에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一等) 녹훈관련(錄勳關聯)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감춘주관사세자부(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에 추증(追贈)되었다.
공(公)은 얼굴이 새하얗고 훤칠하였으며, 재주와 도량이 있었고,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를 대함에 있어 한결같아 하늘에서 얻은 것을 따르며 어려서부터 조금도 변치 않았고, 사소한 말과 행동으로 맞이함이 없었는데 스스로 유익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는 단지 하나의 성(誠)뿐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서애 류상국(柳相國, 류성룡)을 섬기면서 학문하는 중요한 방법을 들을 수 있었고, 우복(愚伏) 정공(鄭公) 창석(蒼石) 이공(李公)과 함께 평생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으니, 그 연원(淵源)이 물들인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시종(始終) 지조를 지킨 것이 오직 도(道)와 의(義)에 방종(放縱)한 마음이 없어서 세상이 공(公)과 함께한 것뿐이니, 비록 방정하였기 때문에 다단(多端)하였지만 꼿꼿하게 공(公)이 정인홍(鄭仁弘)을 아는 것에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았고 정인홍(鄭仁弘)이 광해군 때에 음신(陰臣)이 되어서는 절대 사귀지 않았다. 호서막부(湖西幕府)를 지나다가 길에서 정인홍(鄭仁弘)을 만났는데, 정인홍(鄭仁弘)이 “나라를 위하지 않으니 대신 역시 사론(邪論)을 한 것이다. 대신은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상국(李相國 李元翼)을 가리킨다.”라고 하여, 공(公)이 “상공(相公 : 이원익)의 차자(箚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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