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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불멸의 성녀, 체칠리아>
로마 시와 로마 근교는 거의 모든 곳이 유적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상뿐 아니라 지하 여기저기서도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기에 지하를 개발하기가 어렵습니다.
로마에 가서 서울지하철처럼 쾌적한 지하철을 기대하면 큰 실망입니다.
아주 소란스럽고 노선도 짧고 노후화된 지하철에 깜짝 놀랍니다.
로마 근처 지하에서 현재까지 약 60여개의 카타콤바가 발견되었는데, 카타콤바란 초세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공동묘지를 지칭합니다.
그중 순례객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카타콤바가 산갈리스토 카타콤바입니다.
순교자이자 교황이었던 성 갈리스토(217~222)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카타콤바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큽니다.
현재 지하 5층까지만 개발되어 있는데, 잠깐 한 눈 팔다가는 길 잃어버릴 정도로 길고 복잡한 미로로 가득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의 관리를 저희 살레시오회에 위탁하셔서 현재 살레시오 회원들이 거주하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가시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한 곳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체칠리아 성녀의 조각상이 있는 장소입니다.
한때 산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안장되어 있던 체칠리아 성녀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난 다음 이 조각상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그녀의 무덤은 지금까지 딱 두 번 공개가 되었는데 500년이 지난 810년, 그리고 1599년.
이장을 위해 그녀의 무덤이 공개되었을 때 성녀의 시신은 순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고, 이에 감동 받은 스폰드라도 추기경은 스물 셋의 젊은 작가 스테파노 마데르노에게 이 모습 그대로를 조각할 것을 요청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조각상이 남게 된 것입니다.
성녀는 얼굴을 땅에 묻고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옆으로 누워 있는데 마치 잠을 자듯이 편안한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녀의 목에 칼자국이 보입니다.
참수 당할 당시 목에 칼을 세 번 맞고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두 손을 보면 왼손은 세 손가락을 펴고 있고, 오른손은 검지 하나만 펴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임종 마지막 순간까지 증거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무척이나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성녀가 체칠리아 성녀지만 솔직히 그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합니다.
오직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들을 통해 그녀의 삶과 신앙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체칠리아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딸이었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해 동정으로 살고자 마음먹었지만 부모는 발레리아누스란 전도양양한 청년과 혼사를 밀어붙입니다.
하느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했던 체칠리아였기에 자신의 계획을 남편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설득에 성공한 체칠리아는 비록 결혼한 몸이었지만 자신이 꿈꾸어오던 봉헌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 체칠리아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교도였던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킵니다.
시댁 식구들도 차례로 개종시킵니다.
남편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나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을 철저히 시켰으면 남편은 체칠리아에 앞서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체칠리아 역시 체포당하여 법정에 소환됩니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노라고 외칩니다.
구전에 따르면 체칠리아는 언제나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루 중 기도를 드리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개인적인 종신서원도 발했답니다.
부모가 강제로 밀어붙인 결혼식 날 체칠리아는 아름다운 금실로 장식된 예복을 입었지만 속에는 거친 삼베옷을 입었답니다.
체칠리아의 깊은 신앙에 감화를 받은 남편 발레리아노는 자신은 물론 동생까지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남편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순교자들에게는 무덤을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하여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그 가녀린 목에 세 번씩이나 칼을 맞고도 3일 동안 목숨이 붙어있었던 체칠리아는 임종 직전 우르바노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느님께 3일을 기도했습니다.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기도하는 집: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부모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L.A. 올림픽 때 다이빙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는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본래 다이빙 선수가 아니었고 100m 육상선수였습니다.
이 선수는 시합 때마다 자주 넘어졌고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풀이 죽은 딸에게 언제나 이렇게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야. 엄마는 네가 달리는 것만 보아도 너무 좋아.
넘어졌을 때 계속 넘어져 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만 보아도 엄마는 너무 기쁘단다.”
나중에 다이빙할 때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네가 다이빙대 위에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너무 기뻐.”
이 선수는 다이빙대에 설 때 항상 엄마의 이 말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긴장이 풀리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말이 이 다이빙 선수에게 등불이자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말을 해 준다고 그 말이 한 사람의 삶에 그런 힘을 줄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은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더라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강도가 살 때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전에 장사꾼을 채찍으로 쓸어내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의 말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말이 영향을 미치게 하려면 그 듣는 사람이 나를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자아와 삼구를 없애야 합니다.
그 자아와 삼구는 나의 피로서만 죽습니다.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기 위해 사용하신 채찍은 곧 그리스도의 피, 성령을 의미합니다.
먼저 사랑으로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예수님은 분명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분을 벙어리 취급하는 꼴이 됩니다.
마치 ‘소리 없는 사랑’이란 태국 광고와 같습니다.
한 여학생은 자신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를 싫어합니다.
듣지 못하여 말도 못 하는 장애인이고 돈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 학생의 등에 “아버지가 바보 같은 장애인”이라는 글을 써서 붙이며 놀립니다.
자기가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 여깁니다.
자기가 왜 힘들어하는지 들어주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이제 싫습니다.
그래서 비뚜로 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이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다만 딸이 착하게 커달라고 수화로 말해줄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딸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자살 시도를 합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다 줄 테니 딸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딸은 아빠의 피를 받고 살아납니다.
딸은 자신을 위해 피를 내어준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손을 잡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소리 없는 말이 딸의 마음에 들어가 딸을 착하게 만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다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킬까요? 아닙니다.
내 안에 삼구가 살아있으면 여전히 삼구는 하느님을 원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 뱀은 태초부터 하느님께 대한 불만을 심었고 아담과 하와는 삼구를 다스릴 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강도의 소굴이 되게 하였습니다.
말씀 묵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묵상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라면 내 안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은총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말씀이 로고스에서 레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신 마비로 누워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미즈노 겐조의 시를 살펴봅시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성경의 모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굳이 따로 또 말씀해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미즈노 겐조가 이미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미즈노 겐조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감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서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가 되게 했습니다.
내 안에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늘에 뜬 별과
같습니다.
세.육.마.로 땅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로고스이지만 그 별을 따라 결국에 만나게 되어 내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는 그리스도는 레마입니다.
내가 진정한 성전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로 변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피로 내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죽은 결과는 ‘감사’로 나타납니다.
감사가 아니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감사하는 집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레마로 변해 나를 감동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집입니다.
그런 집만이 성전으로 인정받고 구원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사람이 암에 걸리는 이유는 첫째, 유전, 두 번째로는 환경, 세 번째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요. 하고 싶은 말 참고, 하고 싶은 행동을 참으면서 스트레스가 더해져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어떻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 하면서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해하려 하고 또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본인에게 닥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의 인상 깊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라, 자주 웃는 사람이 승자더라.’
이를 위해 자주 감동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는 사람은 감동도 참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재미있는 상황에서도 뚱한 표정을 짓습니다. 어쩌면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참다 보니 자기감정을 참는 것도 습관이 되었고, 이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감동을 잘 받지 못하게 됩니다. 스트레스만 자기 안에 쌓이는 것입니다.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는 엔도르핀은 모르핀의 약 48배 효과가 있고, ‘감동 호르몬’이라 하는 다이돌핀(didorphin)은 모르핀의 약 200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인디애나주 메모리얼 병원 연구팀에 의하면 15초 동안 하하호호 웃기만 해도 엔도르핀이 증가해 수명이 이틀 정도 연장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 효과가 큰 다이돌핀의 효과는 어떠할까요? 따라서 이 효과를 위해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리는 보이지 않고 세상의 자리만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자리가 강도들의 소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자리가 없으니 하느님의 일을 통해 작은 순간에서도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서로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내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기도의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곳에 함정이 있다. 우리는 자신을 가여운 사람으로 만들 수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사실 둘 다 드는 힘은 똑같다(카를로스 카스타레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묵시 10, 10)
저 천사의 손에
황송히 들려져 있는
말씀의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켜야 하리.
말씀은 언제나
꿀같이 달지만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이의
걸음은 팍팍하다네.
그렇지만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는
꿀처럼 달콤하게
다가온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어쩌면 우리 자신은
또 다른 현대판 예루살렘인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거룩한 성전인데,
평화를 버리고 살인과 폭력, 전쟁을 일삼는 예루살렘
정의와 공정을 버리고
불의와 불공정을 관행처럼 일삼는 예루살렘
높은 벽을 쌓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를 분리하는 예루살렘
이런 우리의 모습은
다른 우상을 섬기는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를 보시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또 흘리실지 모릅니다.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있는 그래도 받아 누리지 못하는 모습에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은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빛이십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거듭나야겠습니다.
높은 벽을 쌓고 있는,
외장만 그럴싸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벽을 허물고 세상과 하나 되는,
녹슨 내면을 더 깨끗이 잘 닦은
그런 예루살렘으로 거듭나야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기도의 집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움이 있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뜨거움의
거처에서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기도가
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만남으로 잃어버린
기도의 집을 드디어
찾게 됩니다.
성녀 체칠리아는
최선을 다하여
기도를 끌어안습니다.
서로에게 스며드는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집에는
화해의 신비가
일어납니다.
모든 여정에
함께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집을
향하는 성녀
체칠리아의 삶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충실한 기도의
여정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19,46ㄴ)
'예언자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9,45-48)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聖殿)을 정화하십니다.
이는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 분노입니다.
그런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백성을 구하시려고 애쓰고 계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묵시10,8-11)에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묵시10,9ㄴ) 라는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의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묵시10,11)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꿀처럼 달지만, 받아 삼킨 말씀을 삶으로 살아야 하고, 또 말과 행동으로 너와 세상에 전해야 하기 때문에 쓴맛으로도 다가온다는 말씀입니다.
귀로 듣고 입으로 받아 삼킨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먼저 살아야 하고, 또 세상에 전해야 하는 예언직의 소명이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받은 소명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죽기까지 세상에 전하신, 참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음악인의 수호성인'이신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녀 체칠리아(세실리아)는 어린 나이에 동정을 서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끝까지 동정을 간직한 채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예언자들이 됩시다!
복음말씀
<나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0,8-11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 요한에게 8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11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