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오는 26일 미국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한다. 또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해리스 부통령과도 만날 예정이다.
미-우크라 정상(급) 회담 테이블에는 우크라이나의 향후 대(對)러시아 전략과 미국의 대우크라 지원 방안 등이 의제로 오를 것이 확실시된다. 해리스 부통령은 민주당 대선후보로서 대우크라 외교 정책의 방향과 세부 내용을 조율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되는 것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워싱턴 방문에서 내놓을 '우크라이나의 승리 플랜'이다. '승리 구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이는데, 정치적 승리인지, 전략적 승리인지, 군사적 승리인지 감을 잡기 힘든다.
다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들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쟁의 조기 종식'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11월 이전에 제2차 평화정상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 비춰보면, 그의 승리 구상이 정치적 혹은 전략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 백악관 방문 모습/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20일 키예프(키이우)를 방문한 우르줄라 폰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전쟁은 이르면 11월에 끝날 수 있다"며 "나의 '승리 구상'을 서방 동맹국들이 늦지 않게, 10월과 12월 사이에 수락하기만 하면,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또 "그 대부분이 미국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플랜 B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우크라이나는 이미 플랜 B에 따라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플랜B의 또 플랜B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평화에 관심이 있고, 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두 번째 평화 정상회담을 올해 성사시키려면 우크라이나를 최대한 (군사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젤렌스키의 승리 구상의 실체는?
폰데어라이언 EU집행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스트라나.ua는 이날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11월까지 전쟁은 끝날 것인가?(Окончат ли войну до ноября?)'라는 코너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승리 구상은 발언이 나올 수록 점점 더 혼란스럽다"고 평가했다. 시차를 둔 그의 발언들은 앞뒤 맥락이 맞지 않고,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젤렌스키는 20일 회견에서 "(승리 구상을 담은) 문서에는 전쟁을 종식시킬 (제2차) 평화정상회담을 11월에 개최하기 위해 먼저 서방 측이 향후 3개월 이내에 취해야 할 특정한 조치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조치를 미국 애이태큼스(ATACMS) 등 장거리 미사일의 러시아 본토 공격 허용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기는커녕 러시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하다. 푸틴 대통령의 권위와 체면을 깎아내리는 우크라이나의 본토 공격에 러시아가 보복 대응을 확대했으면 했지, 전쟁 종식(협상)에 응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측의 계산은 좀 다른 것 같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15일 미CNN과의 회담에서 "승리 플랜에 담긴 5개 핵심 사항 중 하나는 전쟁 후에 필요한 것"이라면서 "안보와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 매우 강력한 군사 지원, 특정 자원 사용에 관한 자유, 경제적 지원에도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쟁 후에 필요한 것'으로는 누가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 종식 뒤 안전보장 조치와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예를 들면 나토 가입)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나머지 조치들은 즉각 필요한 것들이다.
그는 "러시아 사회가 위험에 빠지고, 국민들이 전쟁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면 크렘린에 (평화협상) 압력을 가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는데, 결국 나머지 조치들을 통해 푸틴 대통령을 협상 테이블(제2차 평화정상회의?)로 끌어들이겠다는 계산이다. 러시아 본토 쿠르스크주를 급습한 것도 그 작전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격으로 피난한 러시아 주민들/사진출처:현지 언론 영상 캡처
미하일 포돌랴크 고문은 이후 쿠르스크 공격이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에 큰 영향을 주고, 크렘린에 압력을 가해 전쟁의 종식으로 이끌 것이라고 보충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러시아 본토를 향해 에이태큼스나 스톰 섀도와 같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 모스크바 등 주요 도시들도 전쟁의 무서움을 알게될 터이니, 푸틴 대통령이 '반전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계산이다. 우크라이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서방의 더 많은 장거리 미사일이고, 러시아 본토 공격에 대한 서방 측의 허가다.
세르게이 레쉔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도 '장거리 미사일의 활용'이 '젤렌스키 승리 구상'의 핵심 요소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독일 일간지 빌트(Bild)는 장거리 미사일 외에 우크라이나가 특정 부문에서의 군사 작전 동결(휴전)에 동의한다는 제안도 '젤렌스키 구상'에 담겨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측은 이를 부인했다.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하일 포돌랴크 고문은 18일 '빌트지' 보도를 부인하면서 "젤렌스키 구상'의 핵심은 '군사적 패키지와 경제 회복, 러시아에 대한 심정적 압박 및 외교적 압력(патетическое принуждение России и дипломатическое давление на нее)"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러시아에 대한 심정적 압박 하에서만 우크라이나가 전쟁이 끝난 뒤 동맹(나토)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말한 '전쟁 후에 필요로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전쟁후 나토(NATO) 가입 요구가 '젤렌스키 구상'에 들어있다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보도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 승리구상은 '나토 가입'으로 끝난다?
르 몽드는 지난 18일 "나토의 우크라이나 가입 초대가 젤렌스키의 '승리 구상'의 핵심 중 하나"라며 "2025년 1월 이전, 즉 바이든 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우크라이나에 나토 가입 초청을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우크라이나가 유럽 각국과 체결한 '안보에 관한 협정'을 거의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나토만이 진정한 안보 보장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을 포함해 서방 측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러시아 측의 반발로 이어져 제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것"으로 르몽드는 우려했다.
'젤렌스키 승리 구상'에 대한 스트라나.ua의 평가가 의미심장하다. 단편적인 정보를 두루 취합한 결과, 우크라이나의 자체 행동 계획이 아니라 미국 등 서방 측에 대한 요구 목록과 같다고 했다. 서방 측에게는 '새롭거나 놀랍만한' 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야당 측이 '젤렌스키 구상은 서방에 대한 최후 통첩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는 이유다. 서방 측이 '젤렌스키 구상'을 거부할 경우, 러시아와 휴전 협상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라나.ua는 "추측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깔았지만, "미국이 젤렌스키 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크라이나는 대외적으로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합리적인 추론이다.
'장거리 미사일 (제공및 사용) 요구'와 '협상'을 연결하는 또 다른 버전은 (한때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입 역할을 한) 알렉세이 아레스토비치 전 대통령실 고문에 의해 나왔다. 미국이 모스크바를 설득하는 카드라는 주장이다. 러시아가 평화협상에 나서지 않을 경우, 장거리 미사일의 본토 공격을 허용하겠다는 협박용이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협상에 나서야 한다. 아레스토비치 전 고문은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구상을 들어본 뒤, 현실적으로 러시아와의 협상이 가능한 조건에서만 장거리 미사일의 사용을 허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거리 미사일의 사용 여부는 당초,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워싱턴 방문에서 결판이 날 것으로 관측됐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과 스타머 총리는 회담 후에도 이에 대해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영국 관리들도 놀랐다는 후문이다.
존슨 전 영국 총리와 전직 영국 국방장관 4명은 이후 스타머 총리를 향해 "영국이 (미국의 승인을 기다리지 말고) 우크라이나에 자국의 '스톰 섀도' 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용으로만 사용되는 미국의 특수 위성 항법 시스템을 스톰 섀도 미사일의 유도에 활용하지 않는 한, 스톰 섀도는 러시아 목표물 근처에도 못간다는 것이다.
스톰 섀도 장거리 미사일의 타격 거리/사진출처:스트라나.ua
◇현실적인 전쟁 종식 방안은?
현실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휴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러-우크라가 내세우는 조건은 너무나 다르다. 키예프는 1991년 국경으로 러시아 군대의 철수를, 모스크바는 점령한 4개 지역(도네츠크, 루간스크, 자포로제, 헤르손주)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철수를 내세우고 있다.
이같이 엇갈린 입장에서 양측이 휴전에 동의하도록 하는 방법은 또 단 하나다. 서방 측과 글로벌 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있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가 각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일정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핵심 국가는 중국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대놓고 중국의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내친 상태여서 러-우크라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력은 아직 힙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젤렌스키 승리 구상은 사실, 미국 측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추가 지원안이 하원에서 통과된 지난 4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 전략을 의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그동안 미뤄오다 최근 의회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에는 초안 형태로나마 미국 측에 건네진 '젤렌스키 구상'이 담겼을 가능성이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달 27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끝낼 종전 청사진을 미국 측에 전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종전안을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워싱턴 방문에서 바이든 대통령-해리스 부통령에게 자신의 '승리 구상'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일 대국민 영상 메시지를 통해 "키예프가 러-우크라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계획 중 모든 쟁점과 핵심 주요 지역들, 그리고 필요한 계획의 세부 사항들이 확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것이 푸틴 대통령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100% 보장할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고 푸틴 대통령이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 생각하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 승리 구상에 우크라 야당측 의혹 제기
그러나 우크라이나 야당 측은 '젤렌스키 구상'을 러시아와 '평화협상 시작을 위한' 꼼수라고 비판한다. 야당인사인 유리 루첸코 전 검찰총장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서방 측이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요구 사항을 내민 뒤, 이를 거부한 서방 측을 비난하고 '이제 다른 선택지는 없다'며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실이 서방으로부터 장거리 미사일의 사용 허가를 받지 못해 문제가 있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주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다. 러시아의 주요 군사장비들은 이미 에이태큼스 미사일의 타격 범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장거리 미사일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러시아의 에어폭탄(활공폭탄) 카브와 미사일 공격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 구상의 향후 시나리오를 이렇게 정리했다.
△미국에 새로운 요구조건(승리 구상)을 제시한다.
△미국의 거부로 우크라이나는 서방 측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다시 평화협상으로 복귀하는 것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선언한다.
△협상과정에서 푸틴 대통령은 (2022년 3월 말 합의된) 이스탄불 평화협정과 유사한 제안을 받는다.
△이 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며 이를 위해 휴전할 수 밖에 없다고 공표한다.
△휴전안에 서명한다.
△전시(휴전)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 일정한 제약하에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한다는 시나리오다.
우크라이나 야당 측이 그리는 향후 군사적, 정치적 시나리오도 이처럼 흥미롭다. 과연 우크라이나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