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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 사랑의 재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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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재현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여러모로 의미를 새기고,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얘기입니다.
먼저 지나가되 지나치지 않는 점입니다.
이는 지나가면서 많이 지나치는 저와 다르지요.
저의 지나침에는 더 예쁘고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다가 보니
눈에 끌리지 않는 것들은 못 보는 비의도적 지나침도 있지만
보기 싫은 것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지나침도 있지요.
가끔 아픈 사람을 보면 같이 마음이 아픈 것이 싫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하는데 도와주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지나칩니다.
이런 저와 달리 오늘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지나치지 않고 유심히 봅니다.
그렇습니다.
유심히 보는 점, 이것이 제가 두 번째로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 ‘유심히’라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한자어의 유심(有心)에서 비롯된 말이지요.
어디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말로 ‘무심하게’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마음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에게는 또 어떤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하고 그래서 갖고 싶은 것에는 관심이 있지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지요.
사람도 좋아하고 소유하고픈 사람에게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유적인 관심도 있지만 사랑의 관심도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런데 챨리 채플린은 정반대의 얘기를 합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역시 사랑으로 보지 않고 소유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가까운 것일수록 좋은 것이고 선이기를 바라지요.
똥도 멀리 있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가시도 멀리 있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똥이 가까이 있으면 냄새가 고약하고,
가시가 가까이 있으면 서로 찌르게 되겠지요.
그래서 사랑이 없을 땐 좋은 것이 가까이 있고
좋은 것들만 가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땐 어떻겠습니까?
사랑하는 엄마는 아기 똥도 싫지 않고 아기 똥을 보고 건강을 살핍니다.
사랑하는 의사는 병자의 병을 살피고 멀리 있는 병자까지 찾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가까이 있는 것을 지나치지 않음은 물론
멀리까지 관심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불구자나 병자를 보고 저는 제가 고쳐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사랑을 포기합니다.
고쳐줄 수 없어도 손을 얹어줄 순 있고 기도해줄 순 있는데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주님 사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돈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진 것은 주님이고 주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을 오늘 재현합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 사랑 없다고 버틸 것인가?
그래서 나는 사랑할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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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 부활 판공 때는 다른 때와 달리 평일이 아닌 주일에 판공성사를 했습니다. 9시와 11시 미사 전 1시간, 총 2시간을 교구청 신부와 학교 신부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두 시간 동안 고해성사 보신 분이 자그마치 600명이 넘었습니다. 평일에 했던 판공성사보다 2배 이상 많은 사람이 고해성사를 본 것입니다.
얼마 뒤, 우리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던 신부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 요즘에 부활에는 거의 성사를 보지 않던데, 그렇게 많이 성사보실 줄 몰랐어.”
맞는 말입니다. 신자들에게 너무 감사했고, 이런 본당의 본당신부라는 사실에 특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한 모습에 더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만약 성탄 판공성사 본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성사 보는 사람이 적었다면, ‘우리 신자들은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마음이 부족하다’라며 저 역시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영향을 받는 우리입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누군가가 그 모습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타본당 신자가 미사 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냉담하다가 이곳 성당에 우연히 오게 되었는데, 성당이 깨끗해서 기도하고 싶어졌어요. 이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우리 성당 교우들은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알아서 치웁니다. ‘누가 치우겠지’라면서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해서 치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성당이 늘 깨끗합니다.
자기 모습이 바로 전교 활동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전교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자기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주님을 가장 잘 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교 활동을 잘하고 있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요. 이미 몇 차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하지 않고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가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전하기보다는 과거로만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믿음을 통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믿음을 통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삶으로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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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미래에 있어 사랑은 없다. 사랑은 오직 현재에 필요한 것이다. 현재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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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고 절망하고 슬픔에 빠져,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는 말한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계 안에 매달리는 대신 그 너머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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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에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허망함은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무덤의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려면 영의 눈이 열려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고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 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엠마오(따뜻한 샘물)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는데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였듯이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오시든지 가시든지 그냥 놓아두지 말고 못 가시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시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길을 걸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으며,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하면서 마음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곧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들이 육안으로 부활한 영의 몸을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실망을 환희로 바꾸는 당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남아계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즉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가르침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오늘도 말씀을 대할 때에는 지식이 아니고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저는 아프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고통을 받지만 낙담하지 않습니다. 혼란되지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시련을 받지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내쫓기지만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시련은 잠시뿐이지만 다가올 삶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성녀 엘리사벳시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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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헬렌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날. 나는 나에게 친절과 따뜻함, 그리고 우정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둘째 날, 새벽 여명과 함께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며 지구가 깨어나는 그 경이로움을 지켜보고 싶다. 마지막 셋째 날. 다시 나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아침을 지켜보며 이날의 새로운 계시를 체험하고 싶다. 이날 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밤중이 깊어가 나의 마지막 밤이 문을 닫을 때 나는 이 사흘간 보았던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감사할 것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마찬가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단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자 평생 걷지 못했던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날 걷지 못했던 사람은 결코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뉴욕에서 왔을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댈러스에는 볼 것이 별로 없답니다. 운동도 골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댈러스에 와서 1달이 지났는데 댈러스에는 볼 것도 많고, 운동할 것도 많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성당까지 차로가면 5분이지만 걸어가면 50분이 걸립니다. 매일 성당 갈 때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새벽의 바람과, 오전의 바람 그리고 오후의 바람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대형을 유지하며 날아가는 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모양의 구름, 양 모양의 구름도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로질러가는 뱀도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제법 온 날에는 둑 가까이 불어난 불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껑충껑충 뛰어가는 토끼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 숲속을 걸으면 산책 나온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고, 길을 청소하는 차량도 볼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걸으면서 강의를 듣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1달이 조금 넘었는데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댈러스는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제게 보여 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함께 할 공동체가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물리적인 시간)은 어쩌면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의미의 시간)은 언제나 감격과 감탄의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서는 사제관에서 성당 가는 길이 곧 엠마오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은 말 그대로 충격, 경악, 감탄,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 되었을 지라도 곧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박해와 고문과 죽음을 계속 이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어어 올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박해와 고문을 받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당하게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피와 땀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2000년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라뿌니’라고 소리쳤던 마리아와 같은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긴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빵을 나누었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진한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헬렌켈러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방긋 웃는 아의 모습에서도,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의 땀방울에서도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리들 또한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성가 461번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을 이 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 마저 하시며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뜻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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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말하고 또 말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이런 경우 자기 생각이 그 중심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우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여러 번 자신이 겪어야 하는 수난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또한 부활에 관해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음을 이야기하며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자기 스승님께서 이제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고 동시에 주님을 따랐던 자신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기 모습에 슬퍼합니다.
이런 그들이 눈을 다시 뜰 수 있도록, 귀를 다시 열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줍니다. 특히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못 알아보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해 다시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부활의 의미를 들려주십니다. 오늘도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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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지
이곳에는 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소나무도 있고 감나무도 있습니다.
상수리도 있고 꽃나무도 있습니다.
지금은 잎들이 제법 푸르르지만
얼마 전만 해도 앙상앙상 했습니다.
곧은 가지도 있고
굽고 굽은 가지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가지의 모양들이 가지가지입니다.
그중 저는 굽은 가지에 더 마음이 갑니다.
굽은 가지는 그 나름의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굽어져서 그늘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굽어져서 눈도 가득 쌓이고
굽이 있어서 새들도 신나게 놀아다닙니다.
곧은 가지도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우리처럼 굽은 가지도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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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여정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평생 날마다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삽시다!”
“하느님,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뻐하오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내는 축제로,
영원한 파스카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본기도)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파스카의 기쁨의 계절 4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실현된 축제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파스카의 기쁨과 더불어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변모됩니다. 예수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강림대축일까지는 “레지나 챌리(Regina caeli;하늘의 모후님)” 삼종기도를 바치며 끝기도 역시 이 레지나 챌리를 노래합니다.
아드님의 부활에 성모님과 함께 기쁨을 함께하는 우리들입니다. 엊그제 부활축제 월요일 바티칸 광장에서 레지나 챌리 삼종기도후 교황님은 “부활하신 분과의 살아있는 만남으로부터 태어난 엄청난 기쁨이, 파스카의 기쁨이 우리 인생을 변모시킨다” 강조하셨습니다.
봄의 부활축제에 맞춰 동시 다발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온통 주님 부활을 경축하는 기쁨 가득한 요즘 분위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생명과 기쁨으로 찬란히 빛나는 대지를 보며 써놨던 글을 나눕니다.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창간호 봄호(2008년)”에 실린 “봄햇살 붓으로” 라는 시입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
생명의 화판(畫板) 대지위에
부드러운 봄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草綠色)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무수히 피어나는 파스카의 꽃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大地)위에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2007.4.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날 때 참으로 생명과 기쁨으로 살아 나는 사람들이요 온누리 세상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세요. 주님 부활의 사도 베드로가 그 모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모태에서 불구자였던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말그대로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치유, 구원받는 태생 불구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선 “우리를 보시오.” 눈맞춤을 시도하자, 주님은 즉시 베드로를 통해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해마다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신바람나는 말씀이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온 백성은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합니다. 태생 불구자가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온전히 치유되어 살아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살아나는 장면을 감동깊게 전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던 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첫 대화 부분은 미사로 하면 그대로 말씀전례에 속합니다. 주님은 두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며 말씀을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말씀전례중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지만, 후반부 식탁에서 빵을 나누는 성찬전례 부분에 속하는 장면에서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납니다. 이 장면 역시 신선한 감동에 충격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니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전광석화, 그제야 제자들은 말씀전례중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새삼 파스카 미사전례가 얼마나 은혜로운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부활시기뿐 아니라 일년 열두달 매일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전례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파스카의 꽃이 되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여정을 살아가게 합니다. 다시 나누는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시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사랑의 꽃이다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부단히 날마다 폈다 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사랑의 꽃이다
꽃처럼 살자
파스카의 꽃처럼! 아름답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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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다시 예루살렘으로>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그분께서
늘 그렇게
함께하시건만
그분을 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분마저 없는
그분의 제자들이
슬픔과 절망으로
그분처럼 죽지 않으러
엠마오로 갑니다
그분께서
늘 그렇게
함께하시기에
그분을 찾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분과 함께하는
그분의 제자들이
기쁨과 희망으로
그분처럼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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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3.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28-30)
떼어진 빵은 눈을 열어 주는 열쇠
무리가 엘리사를
에워쌌을 때에
한 음성이 목자의 눈을 여는
열쇠가 되어 주더니 (2 열왕 6,7 참조),
두 제자의 눈이
굳게 닫혀 있을 때는
빵이 열쇠가 되어
저들의 눈을 열어 주었네.
슬픔으로 가득찼던 눈이
주님을 알아뵙고
금세 기쁨과 행복으로 기득 차도다.
-시리아인 에프렘 <낙원 찬가>-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두 번째 사랑은 은혜로운 사랑인데, 하느님은 이 사랑으로 창조계를 사랑하고, 우리도 이 사랑으로 창조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합일을 드러내는 새로운 차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합일은 가장 충만한 의식의 잠재력을 지닌 존재들, 곧 인간과 천사들에게서 일어난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를 중심으로 삼던 태도”를 넘어서서, 신적으로 주어진 사랑의 조명을 받는다.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알고 사랑하게 된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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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12. 더 나아가 성경에 충실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우리가 자연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놀라운 책으로 성경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십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습니다”(지혜 13,5).
확실히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수도원 정원의 일부를 언제나 손대지 않은 상태로 놓아두어 거기에 들꽃과 목초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러한 아름다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 이상의 것으로,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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