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0】
1930년대 전 세계적인 대중소비사회의 흐름은 최승희의 상품적 가지가 갖고 있는 대중적 파급력을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타이완, 유럽,남미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1936년 2월 타이완 최대의 문예단체인 ‘타이완문예연맹’ 도쿄지부가 ‘무희 최승희 양 도쿄지부 환영회’를 주최했다.
이 단체는 타이완의 문화인들을 모아 놓고 최승희의 무용이 민족의 전통을 말살하는 제국 일본의 동화정책에 대응하여 조선 예술을 주체적으로 체현한 모범 사례라고 소개했다.
“조선은 마치 최승희에 의해 그 존재를 알리는 듯했다.
최승희를 낳은 건강한 예술적 환경이 타이완에서도 자라나기를 바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국제관계의 악화가 지속되고 점차 중일전쟁으로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일본은 1936년 9월 그동안 문관 출신 총독을 임명했던 관행을 바꿔 해군대장 출신의 고바야기 세이조를 타이완 총독에 임명했다.
중일전쟁 발발이 임박해 있었던 이 시기 일본에서 국민정신 발양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타이완 총독 고바야시도 황민화, 공업화, 남진기지화의 3대 시정방침을 내세웠다.
전쟁 수행을 위한 황민화 정책은 타이완의 정신문화를 파괴하고 개조하기 위해 희극 공연과 음악, 미술 등의 전통예술을 금지하고 일본어 상용운동과 성명변경운동을 전개하는 등 점차 전시체제에 돌입할 태세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무희 최승희가 전통 의상을 입고 세계무대에 조선무용을 선보이고 있었던 것은 타이완 예술인들에게 식민지 민족으로의 동류의식을 갖게 해주었다.
1938년 2월 19일 최승희의 미국 공연을 앞두고 뉴욕 브로드웨이의 길드 극장 앞에서 조선 교포들이 최승희를 ‘일본 문화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면서 ‘최승희를 배격하자’라는 전단지를 뿌리는 등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일으켰다.
주최 측인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은 이 사건으로 인해 회사의 이미지가 손상될 것을 우려해 최승희와의 공연 계약을 파기했다.
그런데 얼마 뒤 일본에서는 최승희가 미국에서 ‘반일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인즉슨, 최승희가 미국에서 반일 조선인들과 어울려 반일 전단을 배포하고 반일 뱃지를 판매하는 등 일본 무용가가 아닌 조선 무용가로서 자신을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무용을 서양에 알리고 또 재래의 조선무용을 현대화하는 데 앞장서고자 했던 최승희의 욕망이 미국에서는 ‘친일 매국노’로 그리고 일본에서는 ‘반일 선동자’로 매도되었다.
최승희는 ‘반일’이라는 오해를 신속하게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1937년 12월부터 만 3년간의 구미 순회공연을 마친 뒤, 1940년 12월 5일 일본에 귀국한 최승희는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궁성요배를 하고 메이지신궁과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면서 더욱더 무용을 통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맹세함과 동시에 ‘대정익찬회’에 가입했다.
남편 안막이 자신의 성인 ‘安’을 ‘야스이 安丼’으로 바꾼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