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자 효 - 1947년 부산 출생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졸업 -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입선 - 1972년 『시조문학』에 「혼례」를 발표하며 등단 - 시집으로 『성 수요일의 저녁』, 『떠남』, 『내 영혼은』, 『지금은 슬퍼할 때』, 『금지된 장난』, 『아쉬움에 대하여』, 『성자가 된 개』, 『여행의 끝』, 『전철을 타고 히말라야를 넘다』 등이 있음 - KBS 기자, SBS 정치부장, SBS 이사,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한국시인협회 평위원
수레국화
열여덟 살의 소년 왕 투탕카몬이 죽었을 때 왕가의 계곡에서는 긴 장례가 치러졌다 마침내 그의 미라가 황금 가면을 쓰고 관 속에 안치되기 전 어린 왕비가 슬피 울며 수레국화 한 아름을 소년 왕의 곁에 놓았다 관은 닫히고 3천 년의 세월이 흘러 투탕카몬의 무덤이 발굴됐을 때 이상하여라 아직도 어린 왕비의 비탄이 살아 있는 듯 메마르게 건조된 수레국화 한 아름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카이로 국립 박물관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관 속의 관, 관 속의 관, 관 속의 관의 장려함에 감탄하면서 손가락, 발가락에까지 끼워져 있던 황금의 골무에 탄식하지만 그 곁에 걸려 있는 메마른 수레국화 한 아름의 내력을 알지 못한다 미라의 나라 이집트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꽃들도 미라가 되어 3천 년의 비탄을 전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포옹
황제펭권이 영하 수십 도의 폭풍설을 견디는 것은 포옹의 힘이다 그들은 겹겹이 에워싼다 수백 수천의 무리가 하나의 덩어리로 끌어안고 뭉친다 천천히 끊임없이 회전하며 골고루 포옹의 중심에 들어가도록 한다 그 중심은 열기로 더울 정도라고 한다 남극 황제펭귄의 포옹은 영하 수십 도를 영상 수십 도로 끌어올린다
속도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가족사진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옷을 잘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내고는 마치 아무 근심 걱정 없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아들은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말을 잃고 어머니는 깊은 잠에 못 든 지 오래됐지만 사진 속의 세 가족은 언제나 똑같이 웃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명절
조심할 것 흉보기 쉽고 소리 나기 쉽고 싸우기 쉽고 갈라서기 쉽고
숨어 있던 마성魔性도 들뜨는 날이니
대부도
바다는 밤을 새워 울고 있었다 하루가 가야 바뀌는 조수 긴 기다림 그만큼 긴 설움을 싣고 바다는 오늘도 밀려가고 있었다 서러워 마라 바람이여 새여 달려가고 달려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너희들은 끝내 이 섬을 떠나가리라 조수를 배워 바다를 배워 너희들은 무수히 이별을 학습했건만 떠날 때마다 슬프고 다시 올 것 같지 않는 재회의 시간 대부도는 안다 이별만으로 끝나는 이별은 없는 것이며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는 것이며 아프지 않은 삶은 없는 것이며 아프지 않은 죽음 또한 없다는 것을 별들이 자는 꿈의 섬이여 그리움이여
시
인기 소설가 박범신이 시 전문지의 시 청탁을 받고 시를 쓰려 하니 오래 안 하던 짓이라 그런지 갑자기 똥이 마렵더라면서 시인들은 참 용한 사람들이라고 썼는데 이른바 전업 시인이 된 나는 원고 청탁에 쫓겨 시를 쓰는데 똥은 마렵지 않고 마른 힘만 들어 하루를 다 비워 두고 몸부림쳐도 끝내 시가 안 써지더라는 걸 시라고 쓰고 있으니 히말라야 가파른 고갯길을 가쁜 숨 몰아쉬며 똥 싸며 넘는 당나귀만도 못하구나 나는
시단詩壇
강호의 고수들이 겨루는 무림 서느런 칼을 겨누어 말의 명줄을 노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불꽃 튀는 단 일합 一合에 생애를 다 건 오랜 적공積功 피 뿜으며 스러지는 검객처럼 표연히 사라지는 무사처럼 진검 승부 무도武道의 길
주머니 속의 여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주머니 속의 여자가 외친다
좋은 조건의 대출 상품이 있다고 동창 모임이 있다고 심지어는 벗은 여자 사진이 있다고 시도 때도 없이 외쳐 댄다
버튼을 눌러 말문을 막아 버리자 마침내는 온몸을 부르르 떤다 참 성질 대단한 여자 주머니 속의 여자
점심 식사
냄비에 물을 끓이고 낙지 몇 마리 집어넣는다 뜨거운 물속에서 꾸물거리는 낙지 위로 마늘이며 파며 콩나물이며 야채들이 얹힌다 낙지와 채소가 익어 가면 가위로 낙지를 썬다 뜨거운 냄비 속에서 오로지 웅크렸을 뿐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힘 잃은 발들이 썰리고 뭉툭한 머리도 썰린다 그 머리 속에서 삐져 흐르는 먹물 비록 아껴 뒀으나 너무나 큰 힘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가여운 먹물이 눈물처럼 핏물처럼 접시에 고이고 있다
배려
"정지" 밤을 줍다 흠칫했다 저만치서 다람쥐의 새까만 눈동자가 내 손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네 겨울 식량이었지"
우면산
우면산에 올 때는 그냥 오게나 요란한 등산복 차림도 필요 없으니 입은 옷에 몸만 오게나 그래도 숨도 차고 땀도 나는 등산길일세 산이 주는 미덕은 다 갖추고 있네 삶이 밋밋해지거든 우면산에 오게나 행여 내가 없더라도 우면산에 올라 커피 대신 솔바람이나 마시고 가게
거리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
아침송(頌)/ 유자효
자작나무 잎은 푸른 숨을 내뿜으며 달리는 마차를 휘감는다
보라 젊음은 넘쳐나는 생명으로 용솟음치고 오솔길은 긴 미래를 향하여 굽어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길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없다
두려워 말라 젊은이여 그 길은 너의 것이다
비 온 뒤의 풋풋한 숲속에서 새들은 미지의 울음을 울고 은빛 순수함으로 달리는 이 아침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