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에게 가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내 첫사랑이 만추에 영원히 먼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썸타기와 사귀기의 중간 어디쯤이어서 첫사랑이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아무튼 그때 그녀와의 이별은 한동안 밥맛을 잃게 할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70년 10월의 어느 멋진 토요일 오후 나는 고교 2년생이었다.고3이되는 71년부터는 대입공부에 매진하기로 하고 마지막 가을을 즐긴다는 기분으로 친구들과(나포함 4명) 방과후에 경복궁으로 놀러갔다.
새로지은 정부종합청사와 중앙청(지금은 헐린 옛 조선총독부)주변 누런 잔디밭은 샛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려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경복궁에 들어가기전 혹시 여학생을 만나 꼬시게 되면 누가 먼저 우선권을 갖을 지에 대해 내기를 했다.공책을 한장 찟어서 4등분한뒤 1,2 3 4를 써넣고 접었다. 1자를 뽑은 사람에게
먼저 선택할 우선권을 주기로 했다. 쪽지를 뽑은 결과 내가 운좋게 1자를 뽑았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라도 눈물을 머금고 우선권을 가진사람에게 양보하고 밀어주는 내기였다.
동십자각을 지나 왼쪽으로 경복궁돌담길을 걸어올라가면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앞에 건춘문이 나온다. 여학생들이 많이 놀러왔기를 기원하며 이곳 매표소에 표를 끊어 경복궁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뭐가 되려는지 들어가자마자 벤치에 예쁜 여고생들이 그것도 짝이 맞게 4명이 둘러앚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변 좋고 가다 잘빠진 우리의 선봉장 B군이 용감하게 다가가 넉살을 떨더니
그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잘 됐다는 신호였다. 가다 보니 마음에 딱드는 이상형이 있었다. 왼쪽에서 2번째. 내가 찍었다고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유유상종이라고 모두들 괜찮은 외모여서 뭔가 좀 손해본 기분도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녀옆으로 다가갔다.
그때만해도 순진무구해 여학생 옆에 가니 심장이 쿵쿵거리고 떨려서 겨우 "안녕하세요"라고 한마디 하고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넉살좋은 B군이 호구조사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물어보며 매끄럽게
얘기를 이어나갔다.교복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역시 안국동에 있는 P여고생으로 고1이었다. 이날 생일맞은 친구를 축하할겸해서 놀러나왔다고 했다. 우리는 금방 화통해져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헸다.
경복궁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가을, 음악, 대학진학등 생각나는대로 얘기를 나누며 거리를 좁혔다.내가 찍은 애는 피부가 하얗고 눈망울이 조금 큰 해맑은 친구였다.뭐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훌쩍 2시간이 넘게 흘렀다.저녁에 약속있는 친구들이 있어 아쉽지만 불가피하게 헤어져야 했다. 다음주 일요일에 천마산으로 단풍구경가는 것으로 애프터를 잡았다. 당시 경춘선의 출발지인 제기동에있는 성동역광장(후에 미도파백화점이 들어섬 )에서 오전 8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날씨가 다소 꾸물꾸물했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청바지에 배낭을 들러메고 야전을 든채 제기동행 버스를 탔다.배낭엔 코펠과 버너를 넣었다.버스에서 내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동역광장에 들어서니 노오란 레인코트를 입은 그녀가 저만치서 손짓을 했다.나도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구름위를 걷는 기분이 이러할까...
먼저온 친구가 마석역 한 정거장전에 있는 평내역 가는 표를 끊었다.천마산 등산이 목적이 아니라 단풍놀이가 목적인 만큼 상명여대 별장이 있는 곳으로 코스를 잡았다.평내역에서 내려
40~50분정도 걸어들어가 계곡옆 경치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야전을 꺼내 All For The Love Of A Girl(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이 들어간 빽판을 걸었다.은은하게 흘러나오는 Johnny Horton의
감미로운 음성이 분위기를 돋았다.
이름이 화영이인 그 여학생과 함께 낙엽쌓인 계곡옆 길을 말없이 걸었다.말은 않했지만 우리는 눈빛으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한층 가까워 졌음을 직감했다.손 한번 잡아볼까 하다가 용기가 없어 그만 뒀다.
다음에 다시 만나 좀더 친해지면 반드시 손을 잡고 다정히 걸어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점심을 해먹고 기타를 가져온 친구의 반주에 맞춰 포크송을 부르고 수건돌리기등 게임을 하며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우리는 다시 13일뒤 11월 첫째 토요일 오후3시 단체로 성북동 삼선교인근에 있는 빵집 티파니에서 3차회동을 갖기로 하고 성동역에서 해산했다.
운명의 11월 첫째 토요일 아침 설레면서도 뭔가 찜찜했다.. 오후 2시50분에 빵집티파니에 도착했다. 3시 다되서 그녀들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그녀 친구들의 표정도 않좋았다.한 여학생이 곱게 포장한 파커만년필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만년필을 건네준 친구가 말하기를 10일전 그녀가 나에게 파커만년필을 선물하고 싶다고해 종로에 나와 만년필을 샀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아이가 풍선을 들고가다 놓쳐 차도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잡아끌다가 버스에 들이 받혔다는 것이다.바로 병원으로 옮겼지만 머리에서 피를 많이 흘려 그만 하늘로 갔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망연자실해졌다.눈물이 흐를 것 같아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한 만년필은 오래오래 쓰다 촉이 망가져 책상속에 넣어두었다. 어느날 보니 없어졌다. 이사를 하다 없어진 것같다. 서운하긴 했지만 어쪄랴.
한동안 가을이 오면 그녀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바보같이 가을을 원망해 보기도 했다. 가을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만나지 않았을테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도 있지않았을까해서다.
그래서 한동안 가을은 나에겐 잔인한 계절이 되었다.
All For The Love Of A Girl(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은 미국의 컨트리송 가수인 자니 허튼 (Johnny Horton)이 만들고 부른 곡이다.1959년 6월에 발매된의 앨범 [The Spectacular Johnny Horton]에 들어있다.
이곡은 미국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수 김세환이 1980년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이란 제목의 번안곡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Elizabeth Taylor)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녹원의 천사 (National Velvet)' 주제곡으로 쓰였다.Johnny Horton은 1960년 11월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첫댓글 예전의 어느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 합니다
죽을때까지 잊혀지지않을~~
벌써 50년이 더된 일이라
생각이 나도 빛바랜 사진을 보는 것 같아요.
고운 댓글 감사합니다.
첫사랑과의 느닷없는 이별이라니...하필이면 감성 예민했던 청소년 때이니 그 충격은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었을 지,,, 오래 가슴에 남아있었겠습니다. 잔인한 가을이 되 버렸네요.
사랑까지는 아니고 썸에서 넘어가는 단계..ㅎ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가을도 즐깁니다.
고맙습니다.
@비온뒤 그렇죠. 신께서 시간이라는 명약을 주셨으니요.
참 추억의 팝도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공부하다가 늦은 밤 라디오로 많이 들었던....
@리진 All For The Love Of A Gir은 라디오에 많이 틀어주었어요
그래도 모자라다 싶어 청계천등에 나가 빽판 사다가 듣기도하고...
어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소설 소나기의 느낌으로 다가 옵니다.
그리고 성동역은 기억 하는 분이 드문데
성동역 이야기에 정이 갑니다.
나 중학교가 성동역 건너편에 있었어요
성동역을 아시는 군요...
요즘은 경동시장만 알지 성동역 아는 사람은
많지 않는데...
~ 어쨌든 누군가에게 들려줄(또는 혼자 추억할수있는--)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이-- 그런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해인경님도 가슴에 담아둔 얘기가 있을 것 같네요.
이런 멋진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언제 한번 풀어놓으시죠.귀담아 듣겠습니다.
고운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언제 일지는 모르는 일 이지만
언젠가는 하늘소풍 가시는 그날
그녀와의 만남..
이루시길 바래봅니다.
천상재회라..
멋진 일이네요..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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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행복한 10월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