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댁노비(클리앙)
2023-08-29 23:59:01
"제가 환자를 놔버려야겠다,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환자 분들도 그걸 알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니까 OO씨도 포기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네요."
저는 오늘 이 말을 듣고 펑펑 울었습니다.
제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서 울어본 것은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었어요.
그만큼 저도 울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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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의학과와의 인연은 11살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003년인가요, 2004년인가요..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도저히 못가르치겠다며, 감당이 안된다며..
부모님께 전화해서 정신과 진료를 보게 하라는 항의성(?) 전화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ADHD가 흔하지 않았고, 뚜렷한 정의가 잘 되어있지 않았던 시절로 기억해요.
그래서 각종 종합심리검사, 심지어 중금속 검사까지 진행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진단은 ADHD와 뚜렛장애였고, 이미 또래사회로부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리되어 왕따생활을 하던 저는
매일 자해를 했고, 학교에서 투신을 하려 했고 (이때는 진짜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죠.. 그저 나 이렇게 힘들다고.. 외치려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SSRI 계열의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 31살이니까, 20년째 SSRI를 먹고 있네요.)
매년 또래들과 같이 성장하지 못한 탓에, 어딜가나 늘상 혼자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보니 우울증은 더 심해졌고, 집중하지 못하고, 충동적이고. 이것을 잡으려고 ADHD약을 먹으면 뚜렛장애가 심해지고.
이런 상황에 놓이다보니 불면증도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고3의 나이에 수면제 (정확히는 벤조디아제핀 계열 안정제)를 먹어야 잠들기 시작했어요.
복합적인 상황에 놓이다보니 늘상 대학병원 진료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매달 나가는 병원비가 장난아니었어요.
그리고 대학병원의 큰 단점이 있죠. 급한 일정이 생기는 등 정해진 외래 날짜에 가지 못하면 다시 진료가 잡히는데 한세월이었습니다.
그나마 정 급하면 응급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병원비가.. ㅠㅠ
수소문해서 좋다는 로컬 정신건강의학과 의원들을 찾아가봤지만, 대부분이 어마어마한 비급여 상담료를 제시하거나,
제가 먹어야하는 수준의 약들의 처방이 불가능했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조합의 처방은 대학병원 급에서만 가능하다고..)
그래서 계속 대학병원을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진료를 길게 보려고 해도 10분 남짓, 그나마도 증상에 따른 약제 조절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맞는 교수님을 찾기가 어려웠죠.
그나마 서울이라 병원 선택지가 많아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우울증이 중등도까지 올라온건지.. 결국 진짜 죽겠다는 마음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중환자실에서 간신히 눈을 떴던 경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 뒤,
시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꿈을 쫓아 저도 병원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테니, 그런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좁디 좁은 취업문으로 인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서 타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꿈을 쫓으면서 우울증상은 많이 좋아졌었고, 이때 당시까지만 해도 저를 괴롭히는 증상은...
약간 남아있는 성인 ADHD 증상 (충동적인 감정, 이게 타인을 향하는게 아닌 제 자신을 향한 비난... 같은 충동적 감정)
그리고 지독한 불면증이었습니다.
그래도 몇년동안 잘 봐주시던 교수님이셨기에, 지방에서 한달에 한번씩 KTX 타고 올라와 약을 타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느껴지더라구요. 잠을 더 못자기 시작해서 이것 저것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약제 조합이 복잡해진다고 느껴진 순간
저에게 졸피뎀을 처방하셨습니다.
이때 저는 느꼈어요. '아.. 이제 나를 놓으셨구나..'
졸피뎀, 정말 좋은 약이지만. 저는 이 약의 치명적 부작용을 매번 봐왔기에.. (중독성, 의존성.. 그리고 자살사고.. )정말 먹기 싫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병원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처음 찾아본 것은 제가 다니는 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였습니다.
의사를 신뢰하는걸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1년간 열심히 다녔습니다.
하지만 뭔가 더 나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짧은 진료시간과.. 지방이라 환자 몰림이 심각해 예약을 잡기 어려운 문제가 겹쳤죠.
그리고 여기서도 결국 졸피뎀 처방이 났습니다.........
그러던 중, 성인 ADHD 커뮤니티에서 새로 개원한 의원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다시 병원을 옮겨야하나.. 서울로 가야하나.. 고민하다가 홈페이지를 들어가봤습니다.
수면장애가 저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에,, 성인 진료파트 안내를 보다보니.. 수면장애도 같이 보시더라구요.
무엇보다, 더이상 졸피뎀에 의존한 처방은 지양한다는 내용의 글귀를 보고 여기다!! 싶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닌지가 벌써 3~4개월 정도 됐네요.
제가 이때까지 경험한 로컬 의원과는 정 반대로, 상담시간도 매우 길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일하는 병원에서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새로운 약들도 가지고 계셨고, 상담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가주셨습니다.
잘 적응하면 참 좋았겠지만, 갑작스런 타지생활 때문인지 다시 우울증이 심해졌습니다.
요 근래에는
정말 이대로 사는게 맞나, 죽으면 다 끝나는게 아닌가..
지금 사는 집이 23층인데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마주하는 자살시도 환자들을 보며, 때로는 성공한 환자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네요.
이게 심해지고 심해져서, 점점 집도 안치우게 되고.
쉬는 날에는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게 되고. 오히려 휴일이 오는게 두려워졌습니다.
아무도 저를 찾지 않고, 친구도 없고, 혼자 있어야하니까요.
퇴근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게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퇴근시간이 지났고, 교대까지 끝냈음에도 병원에서 사람들 만나고 이야기하려고 퇴근을 안하기도 했었습니다.
대학병원을 다닐 때보다 더 자주 진료를 받고 (1~2주에 한번씩), 더 긴 시간을 진료를 보는데..
오늘은 도저히 우울감이 사라지지 않아서 잠을 한숨도 못자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아 참고로 병원 일이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직이라고 느낍니다. 정말 재밌어요 병원 일 하는 것 만큼은..
그래서 더 이 타지생활을 포기하기 싫습니다. 좋은 직장이거든요.)
예약도 못하고 간건데, 거진 1시간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이야기도 해주시고요.
그리고 저는 중학교 이후로 진료실에서 울어본 적이 없는데... 울어버렸습니다.
자꾸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채찍질과, 남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려고 발악하고..
그러다보니 저를 사랑하지 못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게 되고..
이러한 종합적인 이야기를 하다보니, 원장님도 저와 같이 죽음에 대해서 매일 생각하셨던 분이셨고,
제가 했던 고민들을 똑같이 해오셨던 분이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똑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병원이라는 환경을 깊이 이해하시는 분이다보니, 제가 직면한 고민들도 참 많이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극심한 우울에 찾아간 저를 이해해주시고, 같이 약제에 대한 고민도 해주시고.
무엇보다 저를 울게 해주시니까... 이게 뭔가 해결된건 없는데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느낌입니다.
그리고 진료를 마무리하시려던 찰나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제가 환자를 놔버려야겠다,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환자 분들도 그걸 알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니까 OO씨도 포기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네요."
이 말을 듣고 저는 졸피뎀을 계속 처방해주시려던 교수님들이 생각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들이 졸피뎀을 언급하는 순간, 아.. 나를 놨구나.. 생각했는데.. 여기 원장님은 제가 아무리 수면제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어해도
불편해하지 않고 오히려 다 이야기하라고 하시면서 끝까지 조정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진료를 끝나는 순간 너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웃으면서 나왔네요.
여전히 삶의 무게는 힘듭니다. 달라진건 없어요.
그치만 뭔가 저를 바라보는 태도는 조금씩 달라진 것 같아요. 앞으로 달라질거라고 자신을 믿어봅니다.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시는 분들, 정신건강의학과가 여러분 근처에 있습니다.
환자를 대하는 직군인 저도 (의사는 아닙니다.) 이렇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 지친 분들도 주변을 잘 찾아보면 이렇게 좋은 로컬 의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이때까지 20년 넘게 다니며 만난 의사 선생님 중에 가장 라포 형성이 단기간에 깊게 잘 된 분이라.. 제일 믿음이 갑니다.
두서 없는 사용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오늘은 아직 마음이 묵직한데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끄적이고 싶었습니다.
댓글 중---
HOXY
힘내세요! 대감댁노비님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에요!! 저도 우울증 공황장애를 겪었지만 이제는 많이 좋아졌거든요. 대감댁노비님도 분명히 좋아지실 거예요😄
뚜비뚜비9
저도 님의 의견동의합니다. 저는 중증 우울증은 아니지만, 꾸준히 관련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있다보니 서울에 있는 큰병원을 가지 못하고, 권역별 종합병원에 다녔는데 매우 불만족 스러웠습니다. 개인병원도 편차가 심했구요. 그러다가 지금 다니는 병원에 안착했습니다.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도 적어도 10분이상은 상담하고, 매번 증상에 따라 약복용을 조절하면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병원거리가 자차로 2시간 거리라서 옮겨야하나 생각도 들지만, 이만한 병원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피곤해도 한달에 2번정도 가는 걸로 하고, 잘 다니고 있습니다. 대감댁노비님도 분명히 좋아질꺼에요. 왜냐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요! 그리고 좋은의사 선생님도 만났잖아요~~!!
좋은 선생님과 연이 닿았네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앞으로 전진하지 않아도... 끝까지 화이팅입니다~~~!!!
맴이
저도 직장 우울증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꽤 경력이 많은데 한 7년 정도 다니는 지금 병원으로 옮기고 삶을 찾았습니다.
무엇보다 우울증은 자신을 이해해 주는 상담과 적절히 조절된 약물이 함께 필요합니다. 환자는 대부분 의사 앞에서 자신의 현 상태를 숨기거나 아니면 너무 오버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라도 현재 상태를 정확히 유도해서 판단하고 맞는 약물을 조절해 주신다고 제 담당의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불면증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 고통을 격하게 호소했구요.
하지만 약성분에 수면제나 수면 유도제 같은건 7년간 한번도 처방해 주신적이 없습니다. 대학병원 약 먹다 너무 깔아져서 출근조차 못한적도 있었지만 동네 병원으로 바꾼이후에는 충분한 상담과 위로, 적당히 조절된 약을 먹으면서 우울증을 떨쳐버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굳이 대학병원 고집하지 마시고 여러 선생님들 만나시면서 자신에 맞는 선생님 찾아보세요. 요즘은 파란창 사이트에 리뷰 같은것도 보니 잘 걸러내고 찾아가 보시면 잘 맞는 분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1. 선생님 앞에선 현재의 고민과 불편의 정도가 어떤지 정말 솔직히 말한다.
2. 항상 처방해 주시는 약물이 어떤 기능을 가진 약물인지, 용량은 어떤지 확인하고 다음 처방에서 바뀐 상황을 기록해 둔다.
이정도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