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붉은 모래언덕
“여보. 그러지 말고 제발 이번 한 번만 오빠하고 동행하세요. 당신이 장인도 싫고 처남도
싫더라도 아내인 내 입장은 좀 생각해 줘야 되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무작정 거절해 버리면
난 새중간에 끼어 어쩌라는 거예요.”
또 그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원병균은 그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아내의 말마따나 그 난처
한 입장을 생각해서 감정을 눌렀다.
“그래. 당신의 난처한 입장 잘 알아. 그렇지만 내 입장이라는 것도 있잖아. 자꾸 말해봤자
결론은 똑같은데. 내가 이번 일에 끼어들어 할 일도 없고, 장인어른도 계속 그런 식으로 회
사를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당신은 좀 괴롭더라도 모르는 척하고 있어.”
“아니. 어찌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하세요? 당신 가게 하라고 자꾸 전화가 걸려오는데 어떻
게 모르는 척해요. 그리고 지금 아버지 회사에 난리가 나고 있는데 모르는 척한다는 게 말이
나 돼요?”
처음에는 사정조였던 박영자의 어조가 냉기를 품으며 새침하게 변했다.
“당신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로 사리 분별을 잘하다가도 어떤 때
는 또 영 말이 안 되게 판단력이 없어진다니까. 이번 문제는 무조건 친정아버지 편만 들려
고 하지 말라니까. 좀 어렵더라도 냉정하게 객관적 입장에서 생각해 봐. 사학과를 나왔다는
사람이 왜 그래?”
원병균의 어조에서도 짜증이 묻어났다.
“아니. 왜 갑자기 사학과까지 들먹이고 그래요? 맞아요. 그나마 사학과를 나왔으니까 자유
언론 민주투사를 따라 지지리 궁색하고 가난한 것 참아가며 여지껏 살아왔다는 것 알기나 해
요?”
박영자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런. 왜 또 말이 그쪽으로 회전을 하나? 가난해도 처자식 밥 굶긴 적 없고. 떨어진 옷 입
힌 적 없으니까 당신이 장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야. 투위회원 중에는 우리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어머. 당신 그거 말이라고 해요? 당신은 그놈의 투위가 먼저예요? 투위하고 마누라하고 뭐
가 더 중하냐구요. 당신은 언제 한번 내 처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여자의 마
음이란 걸 생각해 본 적이 있냐구요. 난 애초에 신문기자 원병균하고 결혼했지 민주투사 원
병균하고 결혼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형편이 변하고 말았어요. 그래도 당신이 옳
다. 사회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받아 들였어요. 그
렇지만 고생이 오래갈수록 그런 마음은 자꾸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난 당신이 마땅찮아하는
부잣집 딸로 컸어요. 그리고 여자에요. 철따라 좋은 옷 해 입으며 멋도 부리고 싶고. 값진
보석을 달고 친구들 만나 으시대고도 싶고. 분위기 있는 음식점에서 자주 외식도 하고 싶고
그래요. 그렇지만 그런 걸 다 참아왔어요. 친정에서 돈을 가져다가 하려고 하면 다 할 수 있
었지만 당신 아내로 살기 위해 참아왔다구요. 그 대신 난 친구들 만나는 걸 포기하고 살았어
요. 당신은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알기나 해요?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또 저질이다. 천박하
다 하면서 경멸하겠지요? 경멸하려면 얼마든지 경멸해도 좋아요. 그렇지만 아무리 이성적이
고 유식한 여자라도 속으로 그런 마음은 다 가지고 있어요. 당신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니
까 깊이 한번 생각해 봐요. 여자가 자기의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친구들
을 피해가며 외롭게 사는 게 얼마나 슬프고 눈물나는 일인지.”
박영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병균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내에게 면목이 없었고. 아내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
러나 마음과는 달리 말은 엇지게 나갔다.
“왜 친정 회사일 얘기하다가 쓸데없는 소리하고 그래. 당신도 4.19때 데모를 했다면 아버지
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비판해야 돼. 월남에서도 근로자들이 항의 데모를 하게 만들더니 사우
디에서 또 폭동을 일으키게 하면 어떡해. 그렇게 회사를 운영해 돈을 벌어 뭘 하자는 거야.
도대체.”
원병균은 신문을 획 밀치고는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참 잘났군요. 당신이나 많이 냉정해 봐요. 난 그렇게 못하니까. 오빠하고 동행 안 하면 이
혼인 줄이나 알고 나가요.”
박영자도 남편의 뒤에다 대고 억지소리를 퍼부었다.
남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자 박영자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때 문득 강숙자가 떠
올랐다. 아버지에 대해서 냉정하라고 한 남편의 말은 4.19때 자신이 강숙자에게 한 말이었
다. 그때 강숙자는 끝내 데모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강숙자가 되어 있었
다. 그때는 남의 일이라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 지금은 타락을 해서 아버지 편을 들고 있는
지 잘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남편 모르게 계속 친정 도움을 받고 있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업들에 대해서도 독재정권에 못지
않은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기업들이 근로자들을 착취해 치부를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인한테까지 조금도 여유를 보이지
않는 것은 야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 안타까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어쩌자고 옛날식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지 모를 일이었다. 언제까지 축적이란 말이냐. 이젠 분배를 해야 한다. 하며 노동자들은 노
조를 만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사회는 그들의 주장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된지 오래였
다. 하긴 총리라는 사람이 국민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듯. 지금은 축적의 시기이지 분배의 시
기가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라. 한 것이 10년 세월인데도 정부는 전혀 분배할 기미를 보이
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거북살스러운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했길래 근로자들이 외국에
서까지 폭동을 일으키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보나마나. 그대로 다 굶어죽을 것
들을 일거리 줘서 먹여 살려 놨더니 이제 회사 망쳐 먹으려 든다고 화를 낼 것이 뻔했다. 아
버지에게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줄기차게 여색을 밝히는 것이었고.
직원이나 근로자들을 종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아버지는 상극 중에 상극이었다. 박영자는 한숨을 토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다. 셋째오빠. 네 남편 어떻게 됐냐?”
전화속의 박준서 목소리는 급한 기색으로 퉁명스러웠다.
“오빠. 내 힘으로 안 되겠어요. 나하고 한바탕 하고 방금 회사로 나갔어요.”
“이런. 답답하기는. 한바탕 해버리면 어떡허냐? 부드럽게 살살 어떻게 했어야지.”
“오빠나 답답한 소리 하지 말아요. 첨부터 한바탕 하자고 대들었겠어요? 하다하다 안 되니
까 그리 된 걸 알기나 해요? 나도 속상하고 신경질 나 미치겠다구요.”
박영자는 자신도 모르게 울먹였다.
“알았다. 알았다. 수고했어. 내가 회사로 바로 찾아가 만날 테니까 넌 더 신경 쓰지 마라.
전화 끊는다.”
“거긴 언제 가는데요?”
“응. 오늘밤에 출발해야 한다. 네 남편 비행기표까지 다 끊어놨어.”
전화를 끊으며 박영자는 또 한숨을 쉬었다. 오빠가 직접 만난다고 될지 모를 일이었다. 남편
은 아버지 못지않게 셋째오빠를 싫어했다. 아버지 회사에서 고속 승진을 할 때부터 차츰차
츰 금이 가기 시작해 셋째오빠가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자 둘 사이의 우정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셋째오빠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어색하고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셋
째오빠가 4.19의 부상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아버지의 욕심과 허영의 산물
이었고, 셋째오빠는 거기에 얹혀 어설픈 정치욕을 드러낸 셈이었다. 아버지는 돈으로 만족하
지 못하고 우리 가문을 더 빛내야 한다는 욕심을 가졌고, 경쟁상대인 다른 재벌들에게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허영에 차 있었다. 값비싼 보석을 주렁주렁 단 부
잣집 여자가 또 하나의 색다른 보석을 탐하는 격이었다.
원병균은 시내버스 안에서 줄곧 아내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자의 마음....... 멋 부리고 싶
고. 보석을 갖고 싶고. 품위 있게 살고 싶고....... 그런 게 어찌 여자 마음일 뿐이겠는
가....... 남자에게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 있다. 그 대상이 좀 다를 뿐이지. 초라하고 궁색
한 모습을 안 보이려고 친구들을 피해가며 사는 것....... 그게 어디 슬프고 눈물만 나는 일
이겠는가. 그것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아내는 손꼽히는 재벌
집 딸이 아닌가. 아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고. 그런
일로 눈물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아내의 눈물이 왜 그리 가슴 아프고, 사람을 서럽게 하
는지....... 아내는 그동안 잘 참고 견디어온 것이다. 아내가 남달리 이성적이고 슬기롭지
않았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아내가 가엾고 안쓰러웠다. 내 아내로 살기위
해....... 그럼 나는 아내의 남편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자유 언론 투쟁.......?
아내한테 더 이상 이성적이기를 바란다는 것은 염치없고. 그것이 바로 비이성적이었다. 인간
은 어떤 존재인가....... 이성적이면서 본능적이고. 본능적이면서 감성적이고. 감성적이면
서 영성적이고. 영성적이면서 이성적이지 않던가. 그 요소들이 혼재해 있는 인간에게 이성적
이기 만을 강요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었다. 더구나 형제도 아니고 부모를 대
상으로.
그러나 장인은 용납할 수 없는 대목들이 너무나 많았다. 성명서 건으로 우연히 알게 된 그
일도 너무나 충격이었다. 장인이라서 남아있던 한 가닥 정마저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아
까 아내 앞에서 그 이야기가 곧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었다. 장인한테 오만정이
다 떨어져 그 어떤 일도 돕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아내한테 확실하게 이해시키려면 그 이야기
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딸로서 아내가 무릅써야 하는 창피스러움과 모욕감을 생각해 차마
그 이야기를 뱉어낼 수는 없었다.
지난번 성명서 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을 때 트집이란 트집은 다 잡던 경
찰은 마침내 출판사 발행인이 위장이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이상재가 끌려오고. 허미
경까지 끌려왔다. 이상재는 오빠 친구로 동업하는 사이라고 허미경이 당당하게 대응해서 걱
정했던 그 문제는 쉽게 풀렸다. 그런데 1주일 동안 구류를 살고 나와서 그 이야기를 다시 하
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은 저의 첫사랑이었는데. 박 사장 비서 때 몸을 망쳐 그렇게 혼자 살아가게 되었죠. 아
들을 뺏기고 상처가 크니까요. 제가 군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땐 그냥 변심한
줄 알았었지요.”
“아니. 그럼 허미경씨는 내가 그 집 사위인 걸 알아?”
“글쎄요....... 아마 모를걸요. 제가 그런 얘기한 적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형은 내가 박 사장 사윈인 걸 다 알면서도 허미경씨 이름을 빌린 거 아냐.”
“ 글쎄요. 선배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이것 참 묘하군요. 이 말 듣고 생각해 보니 비
로소 그것 좀 곤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 그때는 이상하게도 그 일이 전혀 그렇게 연결
이 되지 않았어요. 뭐랄까....... 저는 선배님만 생각했고.......그러니까 선배님에 대한 믿
음이랄까. 존경이랄까....... 그런 게 전부였지 다른 건 생각지도 않았어요. 다시 생각해보
니 제가 이상하긴 이상하군요.”
자신을 그렇게 믿어준 이상재가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반면에 장인이 저지른 잘못이 너무 죄
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원병균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아내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사무실에 다다를 때까지 눈
물 흘리는 아내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선배님. 변호사한테서 전화 왔었습니다. 그거 하나 작성하는데 굼벵이가 서울부산을 왕복
하고도 남도록 질질 끌어대니 원.”
원병균은 세차게 혀를 찼다.
“상고 기일이 급하니까 연락 달라고 하면서도 그 말투가 좀 뜨악하다고 할까....... 맥 풀
리게 들렸어요.”
“그럴 만도 하지. 상고해 봤자 또 패소할 거니까. 패소할 사건 맡고 있는 변호사 심정은 우
리하고 또 다를 거요. 우린 패소 그 자체를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는 거지만.”
원병균이 쓸쓸한 듯한 웃음을 흘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는 그럼 인쇄소에 가겠습니다. 교정지 바꿔와야지요.”
이상재는 바쁘게 사무실을 나섰다.
원병균은 소파에서 신문을 뒤적뒤적하다 말고 책상으로 옮겨 앉아 교정지를 끌어당겼다. 정
신을 교정지에 모으려고 했지만 장인의 일과 상고건이 뒤섞이면서 머리는 혼란하기만 했다.
지난번에 고등법원은 해직기자들이 낸 해고처분 무효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전원 패소 판결
을 내렸다. 판사마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위협당하는 것이 예사가 된 세상에서 그건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상고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신문사와 정부를 향
한 자유언론 투쟁인 동시에 역사의 기록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똑. 똑. 똑. 손기척이 울렸다.
“예. 들어오세요.”
누가 노크를 다 하나. 생각하며 원병균은 고개를 돌렸다. 이 사무실은 사랑방과 같아서 그
런 예의 갖추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박준서였다.
“이거 어쩐 일이야. 아침 일찍부터.”
원병균은 어색스런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쩐 일이긴. 영자한테 전화하고 오는 길이야. 좀 나가지. 다방으로.”
박준서는 원병균과 달리 활달한 태도로 밝게 웃었다.
“다방은 무슨. 여기서 얘기해도 괜찮아. 내 동업자는 인쇄소에 가서 두 시간 안에는 안 오
니까.”
원병균은 낡고 먼지 낀 소파에 주저앉았다.
“딴 사람들이 올 수도 있잖아. 여긴 퇴직기자님들 집합소라며. 오랜만에 다방에서 커피 한
잔해서 나쁠 것도 없고. 어서 일어나.”
박준서의 몸에는 흔히 사교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풍기게 마련인 좀 능글맞고 비위 좋은 세련
됨이 배어 있었다.
“이거. 변호사 사무실에도 가야 하는데.......”
원병균은 시간 길게 끌 생각 말라는 듯 이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박준서는 다방으로 들어서면서 바로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꺼냈
다.
“야. 병균아. 우리 여러 말하지 말고 떠나자. 너하고 난 친구만이 아니라. 가족이야. 집에
불이 났으면 일단 끄고 보는 것이 가족들이 해야 할 일 아니냐? 불길 놓고 누가 불냈느냐.
어쩌다가 불냈느냐 하고 따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냔 말야. 병균아. 우선 불부터 좀
끄자.”
원병균은 머리가 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박준서가 ‘병균아’ 한 호칭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공격이었다. 그 호칭은 처남 매제 사이가 되면서 없어진 지 오래였고. 말투도 친구 때
사용했던 ‘해라’를 버리고 ‘반말’로 올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준서는 말투를 그 옛
날의 ‘해라’를 쓰며 백기를 들게 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 불부터 끄는 게 가족의 도리라고 하자.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며 곰곰이 생각해 봤
어. 그렇지만 내가 거기 가서 할 일이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안 그러냐?”
원병균은 커피잔을 들었다.
“알아. 너보고 무슨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 나 혼자 가는 것 보다는 동행하는 것. 그게 네
가 할 일이야. 그것도 못하겠단 말이냐?”
“혼자? 회사 간부들은 아무도 안 간다는 거야?”
“그야. 서너 사람이 가지.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월급쟁이일 뿐이야. 난 마음
편하게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넌 그저 특이한 나라 여행가는 셈 치면 돼. 오늘 저녁 출
발이다. 아까 네 마누라 한테는 말했어.”
박준서는 그의 아버지 박부길 사장의 스타일 그대로 한달음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너 지금 제 정신이냐? 난 여권도 없는 몸이야. 그리고 참. 요주의 인물이라 여권도 안 내
줄 거다.”
원병균은 뒤늦게 떠오른 신통한 생각에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넌 예나 지금이나 순진무구해서 참 좋구나. 여권 벌써 다 냈고. 비행기표까지 사놨다. 너
이거 무슨 말인지 감이 전혀 안 잡히지? 네 사진은 그저께 영자가 조달했고. 여권은 이틀 만
에 나왔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는 꼭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 내의며 거기 가서 입
을 옷까지 여행 준비는 완료해 놨으니까 오후 5시까지 바쁜 일 끝내놓고 있어. 내가 모시러
올 테니까.”
원병균은 박준서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금력과 권력이 합해졌으니 여권 아니라 더한
것도 못 해낼 일이 없다는 것을 그는 허전한 마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어쨌거나 더 어떻게
빠져나갈 틈이 없어 그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커피잔을 드는데 또 눈물 흐르던 아내
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게 말이야. 일종의 전염병이야. 무슨 말인고 하면. 얼마 전에 항만 공사를 하던 회사의
근로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어. 수천 명이 중장비들을 무기삼아 관리직들을 공격해대
고. 공사장 여러 곳을 파괴하고. 사무실까지 떠넘겨버렸어. 그 폭동은 3일 동안 계속되다가
진압됐는데. 그 다음이 문제야. 그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회사 근로자들도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한거야. 지금 우리 회사도 그 피해를 입고 있는 거지.”
비행기가 고도를 잡자 박준서가 안전띠를 풀며 말했다. 원병균은 담배를 피워 물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 그거 제일 중요한 게 빠지지 않았어?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흔들릴 것 아냐.”
원병균은 그 말을 참을까 하다가 박준서의 말투가 너무 장인을 닮은 것이 역겨워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야 이유 없는 무덤 없는 법이지. 간단하게 말해서 임금 차별을 한다는 건데. 그건 근로
자들이 자기네 푼수를 모르고 설쳐대는 거야. 근로자들은 1년 계약인 임시직일 뿐이고. 관리
직이야 엄연한 정식 사원에다가 모두 대졸들이니까 월급이 차이 나는 건 당연하잖아. 어느
회사 어느 업종이나 다 그런 차이가 나는 게 정상인데 폭동을 일으키다니. 그따위 짓들은 도
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전행위고 파괴행위야.”
얼굴에 감정이 돋은 박준서는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를 시켰다.
“그런 불만은 벌써 국내에서도 일어나고 있잖아. 일은 생산직 근로자들이 뼛골 빠지게 다
하는데 관리직들은 편히 책상에 앉아 펜대나 굴리면서 월급은 왜 더 많이 받느냐고. 그거 단
순한 불만이 아니니까 경영자들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될 문제 아니겠어?”
“그거 하나도 심각할 거 없어.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는 모든 면에서 엄연히 달라. 학벌에
서부터 하는 일까지. 비교가 안 돼. 블루칼라들은 화이트칼라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하지
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새대가리들의 생각이야. 한마디로 말해 블루칼라들은 손
발일 뿐이고 화이트칼라는 두뇌야. 사람이 두뇌가 없는데 손발이 움직일 수 있어? 고작 단순
노동이나 하는 블루칼라들이 뭐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시건방을 떨기 시작하
는 거야. 그건 일고의 가치도 없어.”
원병균은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피곤을 느꼈다. 박준서는 철벽같은 경영자 입장이었다. 그
와 말을 더 해보았자. 부질없는 언쟁만 될 거였다. 그와 자신은 세상을 너무나 다른 방향에
서 바라보고 있었다. 4.19때 함께 데모를 한 입장인데 어디서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한 일도 없이 왜 이리 피곤하지. 나도 술이나 한잔 마시고 한숨 잘까.”
원병균은 스튜어디스를 향해 손짓했다.
공항에는 승용차 두 대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공항 건물을 나와 승용차까지 얼마 안 되는 거
리를 걸어가는 동안 원병균은 화끈화끈 끼쳐오는 더위를 느끼며 자동차 범퍼위에서 계란프라
이가 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더위를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어떻게 돼 있소?”
마중 나온 소장과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박준서가 차 앞에 이르러 대뜸 내던진 말이
었다. 침묵의 힘으로 한껏 고조된 그의 거만한 위세는 마침내 대포가 되어 소장을 향해 날아
간 것이다.
“예. 예. 주. 중정 요원들이 출동하자 오늘부터 기가 꺾였습니다.”
처음부터 잔뜩 주눅이 들어 허리를 펴지 못하고 걷던 소장은 더욱 허리를 굽히며 말을 더듬
었다.
뭐라고? 중정!
원병균은 깜짝 놀라며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중정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소?”
박준서는 차에 몸을 부리며 말했다.
“예에. 주. 주동자들을 색출해 내고 있습니다.”
원병균은 전신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끼며 소리없는 한숨으로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데까지 중정이....... 그들이 우리 보다 앞서 온 것인가......?
더 단호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따라온 것을 원병균은 후회하고 있었다. 또 눈물이 흐르는 아
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장은 뭘 하고 있었소. 그런 불순분자들을 미리미리 색출해 내지 못하고.”
박준서가 두 번째 쏘아댄 대포였다.
“예. 예. 죄. 죄송합니다. 막사마다 탐지원들을 두 명씩이나 배치했습니다만.......”
앞자리에 앉은 소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뒤로 돌린 채 한층 더 굽실 거렸다.
“시끄럽소. 두 명이 아니라 열 명을 배치하면 무슨 소용이 있소. 또 노무과는 멋으로 두고
있는 거요? 다 능력 부족이라 그따위 사태가 벌어지는 거요.”
박준서의 낮으면서 차가운 말은 소장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화살이었다. ‘능력 부
족’이라는 단어는 ‘파면’을 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최. 최선을 다 한다고 했습니다만....... 그게....... 저
어.......”
다급해진 소장은 더욱 말을 더듬으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원병균은 박준서의 옆자리에 앉아 그런 소장을 보기가 딱해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영
락없이 제왕 앞의 죄지은 신하였다. 그렇게 군림하는 박준서도. 그렇게 굴종하는 소장도 다
마땅찮아 원병균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는 망망한 사우디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캠프는 리야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창이 다 깨진 정문초소부터 폭
동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캠프 안으로 들어가자 폭동의 그림자는 더 짙게 드리워져 있
었다. 관리자들에 대한 근로자들의 불만을 그대로 나타내듯 사무실은 거의 다 파괴되어 있었
고. 여러 종류의 건축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가 하면. 승용차가 박살나고 중장비들이
넘어져 있기도 했다.
“이걸 언제까지 이대로 둘 거요?”
상을 잔뜩 찌푸린 박준서가 내쏘았다.
“예에. 중정에서 주모자 색출이 완료될 때까지는 그대로 두라고 했습니다. 처벌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요. 사진도 찍어야 하고요.”
앞으로 모아 잡은 소장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근로자들은 다 어디 있소?”
“예. 조사하는 동안 행동 통제령이 내려서 모두 각자의 숙소에 있습니다. 조사는 차례로 진
행되고 있고요.”
“조사는 언제까지 한다는 거요?”
“예. 오늘 중으로 끝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빨리?”
“예. 근로자들이 정치범이 아니라 단순하니까 빨리 끝내는 요령이 있다고 합니다.”
“빨리 끝내는 건 좋지만. 이번 기회에 불순분자는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야 해.”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중정 책임자는 어딨소? 여기 파견된 요원들은 다 온 거요?”
“예. 모두 왔습니다. 곧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어.......” 소장은 연신 굽실거리
며 마른침을 삼키고는. “점심때가 다 됐는데. 근로자들 점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
며 눈을 껌벅거렸다.
“점심? 조사가 빨리 끝나게 할 겸 한 끼 굶겨. 폭동 일으킨 쓴맛이 뭔지 알게.”
박준서는 원병균을 쳐다보았다.
원병균은 박준서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됐소. 시간 맞춰 식사 시키시오. 식당은 피해가 없소?”
“예. 식당은 말짱합니다.”
“허!”
박준서는 원병균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어서 책임자를 만나도록 하시지요.”
소장이 또 허리를 굽혔다.
“난 안 만났으면 좋겠어. 그쪽에서도 거북해 할지 모르고.”
원병균은 박준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럼 저 주차장 그늘에서 쉬고 있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처벌할 주모자들을 최소화하는 게 좋아.”
박준서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원병균은 이 말을 잇대었다.
“최소화?”
박준서는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
“주모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제거해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
지? 허나 그렇지 않아. 이 사람들은 다시는 그러지 못해. 왜냐하면 중정이란 힘 때문이야.
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폭동을 일으키면 중정이 이런 식으로 신속하게 진압에 나설 줄 알았겠
어? 아니야. 몰랐어. 그럴 줄 몰랐으니까 용감하게 나섰던 거야. 이 사람들도 중정의 무시무
시한 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더는 아무 짓도 못해.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
어. 회사가 사우디에서 돈을 버는 것은 일정한 시한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회사를 대를 물려
가며 경영해나가야 해. 그런데 회사에 원한 사는 사람을 하나라도 많이 만들어선 안 돼. 잘
알지? 어떤 사업이든 소비자한테 불신당하고. 세상인심 잃어선 해먹을 수 없다는 것. 화도
나겠지만 폭동은 이미 진압됐어. 이젠 냉정해질 단계야.”
원병균은 박준서의 눈을 주시하며 계속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원병균은 돌아서는 박준서의 기색이 별로 나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사무실 앞쪽으로는 쇠기둥들을 세워 위에 슬레이트를 얹어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그것도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원병균은 천천히 걸어 그 그늘로 들어갔다. 비행
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양복을 벗고 갈아입은 남방에는 어느덧 땀이 내배고 있었다.
이런 땅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돈을 벌다니.......
원병균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흘러들어 온 사우디의 폭염을 실감하며 멀찍하게 줄지어 선 근
로자들의 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층민들일수록 산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고통인지 새
삼스럽게 비감을 느꼈다.
“저어. 더우신데 이것 좀 드시지요. 저는 여기 총무과장입니다.”
한 사람이 얼음을 채운 콜라잔을 쟁반에 받쳐 원병균 앞으로 내밀었다.
“아. 예. 고맙습니다. 저는 원병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 박 의원님과의 관계를 말씀 들었습니다. 원로에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원병균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근데 말입니다. 폭동 원인이 관리직
과 차별을 받는 불만 때문이라고 대충 들었는데. 다른 이유는 또 뭐 없습니까? 총무과장보다
는 근로자한테 물어야 합당한 질문이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요구조건을 가장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총무과장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따가 다 알게 되겠지만. 어디 솔직하게 얘
기 좀 해보세요.”
원병균은 상대방이 대답을 피할 수 없도록 몰았다.
“예에. 그게 그러니까....... 어차피 알게 되실 거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말씀드리자
면. 그게 네댓 가지가 되는데. 첫째는 임금 차별이구요. 둘째는 식당을 분리해 음식 차별을
한다는 거구요. 셋째는 숙소를 분리해 시설 차별을 한다는 거구요. 넷째는 관리직들이 자기
들을 너무 심하게 대한다. 뭐. 그런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다 억지고 트집 입니
다.이 더운 데서 적당히 했다간 게으름피우고 개판 쳐서 아무 일도 못하니까요.”
원병균은 콜라를 마시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박준서와 따질 문제였지 총
무과장은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는 문제였다.
“여기서 지금 하는 일은 뭐요? 도로공사?”
원병균은 말머리를 돌렸다.
“아닙니다. 리야드에서 건설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건설공사? 도로공사는요?”
“예. 몇 년 동안에 중요한 고속도로공사는 거의 다 끝냈기 때문에 이젠 2단계로 대도시들
이 건설 공사로 접어들었습니다.”
“예. 잘 마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원병균은 유리컵을 건넸다.
박준서는 30분쯤 지나 나왔다.
“가지.”
“어디로?”
“리야드로 가서 호텔에서 좀 쉬어야지.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잤으니까 샤워하고 한숨 자면
서 수사가 끝나기를 기다리자고. 근로자들 점검은 그 다음이니까.”
박준서는 먼저 차를 탔다. 원병균도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박준서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던 주모자 처벌 말이야....... 20명 선으로 정했어.”
“뭐. 20명씩이나?”
원병균은 박준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리 놀래? 한 막사에 하나씩인데. 수사관은 이 기회에 뿌리를 뽑으려면 한 막사에서
다섯씩은 잘라내야 한다고 완강했는데 내가 한 명씩으로 줄여야 한다고 밀어붙인 거야.”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박준서는 뒤로 몸을 부리며 눈을 감았다.
자동차 안은 서늘한 느낌이 들도록 시원했다. 원병균은 차창 밖의 낯선 땅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 넓고 넓은 황무지에 가끔 모래언덕들이 나타났다간 사라지고는 했다. 그런데 땅이 침
강되어 이루어진 수직의 낭떠러지들이 있는 지역에 이르자 붉은 모래언덕이 나타났다. 원병
균은 다시 보았지만 부드러운 곡선으로 서너 개의 언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 붉은 모래
였다. 난생처음 보는 그 붉은 모래언덕은 신비스러웠다. 그 언덕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에 부딪쳤다. 이 폭염의 땅에서 수많은 근로자들이 흘리고 있는 피땀을 농축
시키면 저런 색깔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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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 3 부 불신시대 4 (10권)ㅡㅡㅡ 48. 붉은 모래언덕
정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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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1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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