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호]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옥성호칼럼(20)
분열을 걱정하는 지체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옥성호라는 평범한 사람이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쓰고 또 ‘방언’에 대한 책을 써야 할 정도로 우리가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얼마 전 제가 모 신문사 기자와 주고받은 이멜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질문) ‘부족한 기독교’시리즈는 그동안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던 여러 가지 잘못된 신앙에 대한 지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조엘 오스틴, 빌 하이벨스, 릭 웨렌 등 미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을 실명 비판한 사실과 좀 더 명쾌한 신학적 시도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을 평한다면 어떻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또 책을 패 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면? 답변) 좀 더 깊은 신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저보다 공부 많이 한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생각할 때 많은 분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구도자 예배」나 릭웨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 속에 있는 신학보다는 제 책 속의 신학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조엘 오스틴의 책들 속에 무슨 ‘신학’이 있습니까? 그 친구 스스로가 자기는 신학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분들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무신학’ 또는 ‘얄팍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전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 책에 대해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썼다는 점 때문에 말씀하신 그런 ‘비판 내지 아쉬움’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명한 분들이 내는 책들을 향해 ‘더 큰 기대’를 가지고 더 많이 요구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유명한 분들의 책들을 향해 좀 더 엄중한 잣대를 가지고 제대로 검증해 왔더라면 아마도 「부족한 기독교」와 같은 책이 애초에 이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이 못 잡은 강도를 시민이 잡았더니 경찰이 나타나서 시민에게 ‘강도 잡는 법’에 대해서 훈계를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제 책을 스스로 평가할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더 폭넓은 자료들을 공부하고 썼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간증집’으로 넘치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나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와 관련해 바라는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옥성호씨, 저는 당신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한 ‘온전한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이런 근거로 볼 때 그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을 놓고 성경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펴보는 논쟁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런 토론을 통해 많은 분들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방언을 반대하는 옥성호는 성령을 방해하는 자다.’라는 말보다 “왜 사랑이 없어요? 왜 당신은 기독교 안에 분열을 조장하시나요?”라는 말이 더 듣기 힘듭니다. 아니, 이런 말을 들으면 더 화가 납니다.(물론 이 경우도 ‘더 안타깝습니다.’라고 쓰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요.) 교회 안에 만연한 이런 식의 태도가 한국 교회를 오늘날 이 상황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통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강조했듯이 크고 성공하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천국 체험으로 가득채운 황당무계한 책을 번역한 조용기 목사님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한국 교회를 성경 외에 천국에 대한 다른 계시를 들이밀며 분열을 조장하느냐고 공개적으로 질문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성공했으니까요, 성공은 진리이고 선이니까요. 분별이 정죄가 아니듯 사랑도 무조건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썼듯이 나에게 진짜 중요한 사항에 대해 우리는 결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내세우며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무관심입니다. 아니, 사람마다 다른 기질상 느끼는 ‘불편함’일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고 분열이 무엇입니까? 돌팔이 의사가 우연히 몇 사람의 병을 고친 후 소문이 나서 병원에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듭니다. 그 돌팔이 의사의 정체를 아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병원에 앉아 있는 환자들에게 외칩니다. “이 사람 엉터리 의사예요.” 그러자 누가 벌떡 일어납니다. “환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해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혼동을 줍니까? 환자들에게는 특히 ‘심리적 절대 안정’이 필요한 걸 모릅니까?” 마르틴 루터가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무엇일까요? 사랑이 없는 ‘분열주의자’라는 딱지입니다. 가톨릭(원래 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 일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으로 하나 되어 잘 나가던 교회를 아예 완전히 산산조각 분열시키지 않았습니까? 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님의 종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협력하지 않고 영국 교회 내에 분열과 갈등을 유발시켰습니까? 아니, 어떻게 사람이 완전합니까? 빌리 그레이엄이라고 약점이 없겠습니까? 몇 가지 맘에 안 드는 점들은 눈 좀 감고 넘어가면 어디가 탈이 납니까? 교계를 초월해 모두가 하나 되어 빌리 그레이엄을 선두로 ‘복음’이라는 깃발 아래 뭉치는 영국 교회에 왜 혼자 잘났다고 반대를 해서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주었습니까? 왜 존 맥아더 목사는 그토록 ‘극단적’인 책들을 계속 쓰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까? 왜 교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라는 이름만 들어도 ‘빼도 박도 못할 근본주의자’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합니까? 가끔씩 나오는 래리 킹 쇼 같은 곳에서 좀 세련된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떻습니까? 꼭 그렇게 고집스럽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의 냉소와 조소를 받아야 합니까? 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예수님까지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지켜 온 각종 율법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함으로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하였습니까?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제자들은 일을 하면서 ‘거룩한 안식일’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교계에 일대 분열을 일으켰습니까?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고 분열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요즘 우리의 분위기는 어떤지 아십니까?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 목사님이요? 물론 저분 하는 소리는 다 틀리지요. 성경의 ‘성’자도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참 저분 말씀하시는 거 보면 정말 사랑이 넘쳐요. 저 표정 한 번 보세요. 눈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잖아요? 저런 표정이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저분 얼굴만 봐도 은혜를 받아요. 설교 필요 없어요. 그냥 얼굴만 봐도 돼요. 내 평생 저분 설교에서 딴 사람에 대해 비판하는 걸 못 들었어요. 참 대단해요.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용납해요. 얼마 전에는 이단까지 사랑으로 다 받아들였대요. 정말 은혜로워요.” “저분 말이 일리는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분 목소리가 왜 저래요? 꼭 저렇게 딱딱하게 해야 돼요? 좀 웃으면 안 되나요? 말은 일리가 있는데 은혜가 안 돼요. 사랑이 많이 부족해 보여요. 안타깝네요.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사랑의 종교’ 아니에요?” 이게 사랑입니까? 이게 일치입니까? 그런데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정하겠습니까?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한 가지 덧붙이지요. 다수 또는 주류는 여유를 가지고 상대를 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수는 그럴 여유가 없답니다. “진보 야당 주장이 일리는 있는데 너무 과격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듣는 말입니까? 소수는 웃으며 상대를 배려하고 포용하며 ‘긍정적으로 폼을 잡을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이 외침은 소수입니다. 아니, 극히 소수입니다. 소수는 외치고 또 외쳐도 들릴까 말까입니다. 저는 분열을 걱정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분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지는 부부가 밖에서는 다정한 채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곪아 터진 관계를 터뜨리려니 우리가 잉꼬부부인 줄 알았던 이웃들이 충격받을까 봐 계속 친한 체하고 사는 것이 사랑이고 연합입니까? 이게 정상적인 부부입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부부사이의 관계입니까? 이웃에 대한 체면입니까? 물론 이 세상에 100% 맞는 이론은 없을 것입니다. 옳다는 주장 속에도 반드시 나름의 문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대해서는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에 만연한 ‘사랑과 연합 구호’ 때문에 나날이 실종되어가는 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누군가는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갈등과 분열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재건과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일치, 아니 ‘무관심’이야 말로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저 역시 이런 글을 쓰고 논쟁하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불들이 오해하지만 저도 ‘싸우는 거’ 안 좋아합니다. 괴롭습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일개 집사가 나서서 이런 소리를 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한국에서 책을 많이 읽고 가장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갓피플에서도 「하늘의 언어」의 내용에 대해 수백 명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상황입니다. 불이 나서 집이 타들어가는 이 상황이 안 보이십니까? 5백 년 전 종교개혁의 시기 가톨릭보다 현재의 우리 개신교가 더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때보다 말씀이 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이비드 웰스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이 아닌 ‘개혁’입니다. 그리고 개혁이 ‘혁명’이 아닌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갈등과 고통과 눈물이 따릅니다. ‘사랑과 일치’라는 이름으로 그 고통을 거부하자는 주장에 저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진짜 사랑은 진리로 하나 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옥성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에 소재한 The 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MBA를 취득했다. 2000년부터 특허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한국의 벤처기업 ‘위즈 도메인’에서 미국 지사를 맡아 현재까지 마케팅과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다.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워싱턴에 있는 아이비엠(IBM)에 이르기까지 북미에 위치한 세계적 기업들을 상대로 국제적 세일즈 경험을 쌓았다. 20세기가 배출한 최고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를 통해 기독교 진리를 깊이 깨달은 후 세상에 물든 교회에 떨어진 폭탄으로 일컬어지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부흥과개혁사)를 탈고 했다. 그 후 책 읽기 노하우를 정리한 『드디어 스승을 만났다』『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부족한 기독교 옥성호의 세상과 교회 읽기 시리즈1,2』(부흥과개혁사)을 출간했다. 급변하는 21세기 속에서 복음의 본질과 정체성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책을 쓰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는 옥성호는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사랑의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목사의 장남이기도 하다.
크리스천인사이드 제20호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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