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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전쟁 기념관 기록화- 로케트 탄은 저렇게 한 발만 쏜 것이
아니라 수 십발을 일시에 발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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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한국 전쟁이 끝나고 전쟁 전 10만 내외의 작은 군대에서
전후 70만 대군으로 성장한 한국군은 전후 다시 한번
월남전을 거치면서 성숙해졌다.
한민족이 겪은 전쟁은 한국전뿐만이 아니다.
북한은 전후 끊임없이 남한에 대해서 통일 전쟁이라는
미명아래 도발을 일삼아왔다.
예를 들면 휴전후인 1953년 도발이 계속되던 1980년까지 북한이
대남 첩보원들을 남한에 침투시키다가 발각된 횟수만 5,000회가
넘고 그들이 한국 군경에게 사살당하거나 검거된 숫자만
2,900명에 달한다.
북이 남에게 격심한 도발을 해온 것은 월남전이 한참이었고 한국이
오랜 가난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치던 1965년부터
첫 남북대화가 있었던 1972년도 사이이다.
한국은 이 기간, 또 다른 전쟁을 치루었던 것이다.
지금은 쌀 달라고 고개 숙인 신세가 되었지만 북한은
이 기간동안 남한 잡아먹겠다고 살기 띤 도발을
밥 먹듯이 계속했었다.
도발기간 한국은 한편에서는 잘 살아 보자는 노래와 한편에서는
휴전선과 한반도의 바다와 내륙 사방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동족의 발버둥에 김일성이가 재를 뿌리는 요란한 도발의 총소리들을
같이 들어야 했다.
이 제2의 한국전쟁에서 육군 해군 해병대와 경찰 나아가서
예비군까지 치열한 생사를 건 전투를 벌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 공군이 이 전쟁동안 헬리콥터나 지원해주고
그저 쉬어 자세로 관망만 한 줄 아는 알지만 공군도 이 전쟁에서
여러 번의 전투 출격을 해서 적 간첩선을 격침시킨 전과를 올렸으며
쌍발 수송기 한 기를 중무장한 간첩선에 의해서 격추당하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 한국 공군이 치룬 전투에서 주역을 담당한 전폭기는 당시
한국 공군이 도입한 최초의 고성능기였던
‘F5A 자유의 투사기-freedom fighter-’였다.
F-5A기 미국 노스롭사 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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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북한의 재침에 불안해하던 시절,북한이 먼저 도입했던
최신예기인 미그 21기에 대응해서 1965년 도입되어 한국민들의
큰 환영을 받던 기종이었다.
이데오르기 대결의 냉전시대 미국이 동맹국에게 원조하기 위해서
단순하지만 효율성 높은 전폭기로 특별히 개발한
이 전투기는 냉전의 현장인 한반도에서 톡톡히 제 역할을 해냈다.
그 자유의 투사기들이 활약한 기록들을 보자
F5A- 노스롭 사 제조: 40년간의 한국 국방 봉사를 끝내고
은퇴 생활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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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69년 흑산도 간첩선 격침
1969년 6월 11일 전남 신안군 대 흑산도 남쪽 해안에 접근해오던
75톤급의 대형 무장 간첩선이 발각되었다.
이미 세 명이 자선을 타고 상륙하여 거물 간첩 김용규를 북한으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접선 하던 중 미리 첩보를 받고 대기하고 있던
한국 공군의 F5A기가 수송기가 투하하는 야간 조명탄 아래 공격했다.
전폭기가 발사한 로케트 탄들은 도주를 꾀하던 간첩선에
정통으로 명중하였다.
간첩선은 항해를 멈추고 바다에 표류했다.
해군은 이를 감시하다가
날이 밝자 선체 수색을 해서 7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불타는 배를 버리고 도주했던 간첩들은 흑산도 군도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군경 합동의 수색 작전에 의해서 6월 16일 흑산도 예리의
한 바닷가 동굴에서 발견되어 6명 전부 사살되었다.
총 인원 15 명중 7명이 바다에서, 나머지 6 명이 육지에서 사살되고
나머지 두 명은 폭풍에 바다로 날려가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간첩선은 75톤급으로 시속 35노트의 쾌속을 자랑하는 고성능의
대형 간첩선이었다.
무장은 82mm 무반동포[북한 명칭으로 비반동포]1문,
40mm 기관포 4문, 14.5mm 쌍신 기관총 2정으로서
어지간한 정규 해군 전투함 수준의 무장이었다.
82mm 무반동총은 69년 6월9일 심야, 묵호 침투 간첩선 사건때
해안에 침투하던 간첩선에서 해안 초소와 교전하면서 발사했던
한 발이 삼척 산업 사택 이 대운씨 집에 명중하여
이 씨 내외와 세 명의 자녀 5명 일가족 전원을 몰살시킨
위력이 있었다.
82mm 무반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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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간첩선 사건 때 공군기의 출동은 해안선에 접근하던
간첩선을 공격한 것으로서 바다에서 고속으로 도주하던 간첩선을
공격하던 다른 공중 작전과 차이가 있다.
2.격렬비열도 근해 간첩선 격침
1967년 4월 17일 새벽 4시 30분 서산 앞의 격렬비열도 근해인
영해에서 초계중이던 해군 52함은 30노트의 고속으로 북상하는
북한 무장 간첩선을 발견하고 추격했으나 속도 부족으로
추적 불능 상태가 되자 인근에서 작전 중인 63함에 연락했다
긴급 교신을 받은 63함은 호위 구축함과 함께 진로를 차단하고
원거리에서 위협 발포로 간첩선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정지명령을 내렸지만 간첩선은 계속 사격을 해대며 그대로 도주했다.
그러나 그 무렵의 한국 해군은 간첩선을 따라 잡는 30노트 이상의
속도를 내는 함정은 소수의 구축함을 빼놓고는 보유를 하지 못했었다.
해군은 한참을 추적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공군기의 지원을 요청했다.
수원 기지에서 긴급 출동한 F-5A편대는 아침 햇빛 아래 흰 항적을
가르며 전속력으로 북쪽으로 달리는 간첩선을 발견했다.
조종사 안상전[31]대위가 조종하는 F-5A가 선도 공격을 했다.
그는 간첩선의 대공 사격을 제압하기 위해서 급강하하면서
20mm 기관포를 사격함과 동시에 2.75인치 로케트를 19발을
그대로 쏟아 붓고 급상승했다.
로케트 포탄 모두가 정확히 간첩선의 중앙에 모두 명중하는
타격을 가하자 간첩선은 대파 상태로 정지해버렸다.
간첩선은 그래도 악착같이 대공포로 응전하여 그중 한 발을
공격기의 동체에 명중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속기에 의해서 한 번의 로케트 공격이 더 가해지자
간첩선에서 불길이 솟아 오르며 간첩들은 바다로 뛰어내렸다.
뒤 쫓아 온 해군 함정들은 아직 침몰하지 않고 표류중인 간첩선과
해상에서 6명의 간첩들을 모두 구조했다.
그러나 한 명은 귀환 중 해군 함상에서 죽었고 나머지 5명도
모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15명의 간첩 중 9명은 로케트 탄들이 배에 명중 했을 때
사망했거나 해상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2.75inch 로케트 탄 19발 발사 공군기 pod장비.아래는 20mm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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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선은 4월 16일 새벽 5시 해주 항을 떠나 공해상에서 대기 하다가
16일 야간에 서해안으로 접근하어 임무를 수행하고 고속으로
귀대하다가 17일 새벽 한국 해군에게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 전투는 그 때 공군이 보유했던 최신의 전투기 F-5A편대
최초의 전투 출격이었다.
3.흑산도 근해 간첩선 사건
1969년 10월23일 21시 30분, 소흑산도 동북방에서
20여명의 간첩을 태우고 33노트의 고속으로 침투 중이던
간첩선이 초계중이던 해군 구축함 충무함에 발견되었다.
충무함이 추격하면서 계속 정선 명령을 내렸으나 간첩선은
응답없이 도주를 계속하였다.
충무함은 간첩선을 잡을 수있는 스피드인 35노트를 낼 수있는
한국 최초의 구축함이었다.
한국 해군이 가난했던 시절 35노트이상 달리는 북한 간첩선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전투함이었기에 해군이 보물처럼 아꼈던
구축함으로서 여러 번 간첩선을 잡았는데 이 간첩선은
한국 해군을 얕보고 함부로 고속으로 달리다가 충무함의
전탐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충무함 -1963년 도입 , 한국 최초 구축함[플레쳐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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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함에 쫓긴 간첩선은 남해안 섬 사이로 숨어 들어가
교묘히 충무함을 피하며 도주하다가
새벽 1시 20분 진도 남방에서 다시 충무함에게 발각되었다.
충무함은 공군기의 조명을 요청해서 이 간첩선을 끝까지 잡고
물고 늘어지며 추자도까지 추적했다.
여기서 간첩선은 40여척의 남한 어선단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날이 밝은 06;20분이라서 출격한
공군기들에게 공격 당하여 속도가 8노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결국 충무함의 사격에 이 간첩선은 추자도 남방에서 격침했다.
간첩선은 75톤이나 되는 대형 철선으로 그때까지 발견된
간첩선중 최대 크기였었다.
속도 역시 40노트로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국 발표에 공군기의 기종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간첩 작전
전담 출격기 F-5A 일 것이다.
4.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
1971년 6월1일 02;25.
해군 함정이 남해 추자도 근해에서 40노트의 고속으로 달리는
간첩선을 발견했으나 심야인데다가 안개가 심한 악조건에서
한 때 이 간첩선의 행방을 놓쳐 수색에 애를 먹었다.
해군은 출동한 공군 C-46수송기의 조명탄 투하로
겨우 접촉을 유지하고 추적을 계속하였다.
간첩선과의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군 수송기는 안개가 끼어
시계가 불량한 바다 상공을 불과 200미터 상공까지 하강하여
조명탄을 투하하였다.
이런 안개 낀 날은 조명탄을 목표물에 바로 근접하여
투하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기 때문에 비무장인 수송기로서
모험을 한 것이다.
14.5mm 대공 기관총- 이것은 14.5 kpv 기관총 4문으로 가장 흔한
형이다 북한 간첩선은 두 문으로서 쌍신 기관총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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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선은 직상공을 비행하는 수송기를 놓치지 않고 수백발의
대공 사격을 했다
대공화기는 간첩선들이 통상 장비하는 14.5mm 쌍신 기관총인 듯하다.
이 기관포탄은 그들의 다시카라 불리는 12.7mm보다 위력이
훨씬 뛰어났다.
월남전 초기 베트콩들은 이 기관포로 월남군의 경전차 M-41을
벌집을 만든 사례가 있다.
수송기는 불시의 기습에 피탄 되어 바다에 추락했다.
승무원 6명[조종사, 부조종사, 정비사, 통신사, 무장병]이 희생되었다.
간첩선에 격추당한 한국 공군 조명 지원기 C-4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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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0시 여명이 희미한 가운데 공군 F-5A기들이 출동하여
소흑산도 서남쪽 약 60마일 해상에서 도주하는 간첩선을
발견하고 로케트 폭격을 가해서 06;15분경 완전 격침시켜서
격추 된 수송기 승무원들의 복수를 하였다.
이 간첩선이 침투시켰던 간첩 성낙오는 2 주 뒤에 당국에 자수해서
간첩선이 5월 17일 남포항을 출발하여 중국 산동 반도 석도만에서
급유를 받았고 6월1일 해남에 상륙했음을 조사에서 알렸다.
간첩선은 성낙오를 침투시키고 북한으로 귀환 중에 40노트의
고속으로 달리다가 한국 해군에 발견되었던 것이다.
5.경북 영덕해안 간첩선 격침
1970년 7월 28일 심야에 길이 18미터 정도 되는 간첩선이
경북 영덕에서 은밀하게 해안 침투를 시도하다가 육군
해안 초소에 발각되었다.
간첩선은 초소에서 사격을 받자 기관포로 응사하며 고속으로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난사한 기관포탄에 육지의 한 민간인이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해공군은 긴밀한 협조아래 즉각 출동해서 간첩선을 추적하였다.
공군 F-5A 편대는 긴급 발진으로 심야의 동해로 출격했다.
편대는 28일 03;45 분경 북한이 지척에 있는 거진 앞 바다에서
북한으로 맹속력으로 달아나는 간첩선을 발견했다.
편대장 이수갑 대위는 간첩선으로부터 맹렬한 대공 사격을
받았지만 급강하로 38발의 로케트 탄들을 한꺼번에 쏟아 붓듯이
간첩선에 퍼부었다.
이어서 후속기가 재차 로케트 탄의 세례를 가하자 간첩선은 하늘높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바로 휴전선 남방 7마일 해상에서 침몰했다.
불과 5분만 더 달리면 북한 영해로 도주할 수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6.묵호 앞바다 간첩선 격침
1971년 5월 14일 자정 넘은 00;14분,
해군 경비정이 묵호 동쪽 해상으로부터 해안으로 어선을 가장하고
은밀히 접근하는 50톤 규모의 간첩선을 발견하고 공군기와
합동 작전을 펼쳐서 간첩선을 추적했다.
출동한 F-5A기들은 01;35분에 간첩선을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이 간첩선은 북쪽으로 선수를 돌려 믿을 수없이
빠른 48노트라는 속도로 도주하면서 격심한 대공 사격을 해댔다.
간첩선의 대공 사격과 회피 운동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03;02휴전선
남방 5마일 지점에서 출격한 편대는 드디어 간첩선에 정확한
로케트 폭격을 성공시켰다.
48노트라는 쾌속은 그때까지 출현한 간첩선중 최고의 고성능이었다.
간첩선이 격침된 위치는 휴전선 북방 북한 해군함에서도 볼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으로서 그 스피드라면 3-4분 만에 그대로 휴전선을
넘어 도주 해버릴 만큼의 뻔한 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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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자료가 되는대로 정리를 해보았는데 역시 열악한 장비들로
쾌속으로 달리는 간첩선으로 부터 넓은 한반도 주변 삼면 바다를
지키는 한국 해군으로서 때로는 공군과 합동 작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었고 공군기들의 출동도 많았지만 간단한 대 간첩 작전본부의
발표문만으로서 공군기들의 자세한 활약상을 소개하기가 한계가 있어
위의 사례들만 소개하기로 한다.
한국공군은 지금까지 19번의 대간첩선 작전을 펼쳤고
적 간첩선 11척을 격침 시켰었다.
전쟁 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는 북한 반잠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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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내 집처럼 활개짓하고 횡행하던 간첩선들은 한국 해군이
간첩선 사냥 전문인 PK정을 대폭 증강 배치하고 미사일과
헬리콥터등을 장비하자 급격히 그 숫자를 축소해가다가
반잠수정을 거쳐 잠수함 침투로 방향을 전환했다.
출처-울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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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토론방에 올렸어야 했나요??????
울프독님의 블로그에서 담아오셨나보군요..
무반동 포는 진짜 반동없음?
예전에 댓글로 한번 올린적이 있습니다만, 쉽게 설명해서 사격시 탄이 앞으로 나갈때와 장약에 의한 가스가 뒤로 분출되는 압력을 같게 하여 포의 반동(뒤로 밀리는 현상)을 없애는 원리입니다... 바추카포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겁니다..그렇다고 발사시 충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종류는 직사화기로 강선이 있는 무반동총과 곡사화기로 강선이 없는 무반동포, 이렇게 두가지로 구분되나 보통 둘 다 무반동총이라고 부르더군요..
RPG-7처럼 가스가 뒤로 나가는게 무반동 포죠?
13mm부터 기관포라 하는게 좋을듯한데 기관총이라하면 사람들이 기관총인줄 착각을 할수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