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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끈질긴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그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묵상을 위한 풍족한 자원이다. 이 비유는 매우 많은 다른 층위들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 8절에서 기독교의 가르침(교설, 학설, 교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키워드이자 주제를 발견한다: 기도와 신뢰, 정의와 구원, 심판과 믿음, 끈기와 저항, 예수의 초림과 재림, 신자의 삶 (prayer and trust, justice and deliverance, judgment and faith, persistence and resistance, the first and second coming of Christ, and the life of believers) 이에 덧붙여, 어떤 주석적·신학적 관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 비유에 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해질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지, 혹은 믿는 자와 그들에게 요구되는 신실한 삶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한 개인의 사적인 기도 생활에 있어 독실한 경건함의 필요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해석을 택할 것인가? 혹은 그 비유를 가지고 불의에 대항하는 연대적 저항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해석자들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인가?
개혁신학, 특히 존 칼빈은 우리가 누구고 무엇을 하려고 부름을 받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항상 강조해왔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관한 하나님의 통치는 사적이며 공적인 신앙생활의 단절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러한 개혁적인 지도 원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의 비유를 누가가 요약한 부분이 두 개의 초점을 갖는다는 것을, 즉 믿는 자에 관한 것과 하나님에 관한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위에 언급된 모든 신학적 키워드들을 그 두 가지 관점과 연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이 많은 용어 중에서도 나는 “끈기와 저항”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다소 시각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두 용어가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해석에서 모두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먼저 끈기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끈기에 대해서. 구약과 신약 전체에 흐르는 성서적 메시지의 핵심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끈질기고도 흔들리지 않으며 영원한 사랑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하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사랑 안에 거하시며 매우 끈질기게 참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주권적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하나님 안에서 정의가 찾아올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밤낮 울부짖음을 들으실 거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도움을 오래 지연시키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는 조바심이 생겨 희망을 잃기도 한다. 예수의 초림 이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해오던 방향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는가? Fred Craddock이 언급한 대로 “기도의 삶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계속 믿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끈기는 이 맥락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사랑을 알고 경험해 왔기 때문에, 매일 끈질기게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중간기에는 –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 사이, 기독교인의 경우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 – 항상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절망의 세상에서 희망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기도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희망찬 신뢰를 의미한다.
믿는 사람들의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형식적인 기도나 혹은 기도의 결여에 관한 핑계는 많이 있을 수 있으나 그 핵심은 신뢰의 상실이다. 과부는 재판관을 계속해서 찾아온다. 모든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고집스럽고도 결단적이며 수그러들지 않은 채 과부는 계속해서 요청한다. 신자들도 모든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고집스럽게 기도한다. 이것은 그들이 “좋은 크리스천”이거나 위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은 상처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끝없이 기도할 수 있도록 성령이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 비유는 항상 기도할 필요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기도하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성령의 끊임없는 사역, 즉 성령의 끈기에 대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믿는 자들이 성령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이러한 희망찬 용기는 기도가 명상적이며 내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천적이며 외적이고, 모든 불의에 대해 저항적으로 만든다. Luise Schottroff는 이 점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불의에 대항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부짖는 것- 그들의 노력과 저항-이 믿는 자들의 삶의 전부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의 비유에서 묘사된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왜”와 “어떻게”에 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두 번씩이나 하나님은 정의를 제공해 주는 분으로서 여기서 묘사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끈질길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개인의 죄에 대해 끈질기게 저항할 뿐 아니라,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불의한 권세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저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성령의 특별한 선물을 통해 그 저항에 참여하도록 준비가 갖추어졌다. 고집스럽고 끈질기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과부는 우리의 본보기다.
주석적 관점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대부분의 비유에서와 같이, 언어는 고도로 압축되어있고, 의미는 열려있다. 이 비유의 두 인물은 재판관과 과부이다. 과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적대자에게서 그녀의 권리를 찾으려는 것이고(3),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판관은 불의한 재판관(6)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성격규정은 그 재판관이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4a) 것과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2b,4b)사람이기 때문이다.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 공통적인데, 이들은 가족제도 바깥에서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 경제제도에서 보호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과부의 끈질김이 또한 포인트인데 3,5절에서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5b)라는 말은 과부가 혼자서 버티고 있음을 보여준다.
- 비유자체로는 과부의 끈질김이 초점이라면, 예수의 적용은(6-8a)은 재판관에게 맞추어진다. 예수의 평가 논리는 유대인, 기독교인,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작가들이 사용한 문장기술에서 왔는데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라고 알려진 것이다. 비록 예수는 물음을 물었지만(문법적으로 긍정적 답변이 요구되는 7a)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만약에 불의한 재판관이 계속적인 요청에 응답하여 권리를 찾아 주었다면,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권리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더 하겠는가! 하나님이 권리를 들어주기 전에 지쳐버린 다는 주장을 피하기 위해 누가는 예수가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8a)라고 명확하게 말하게 했다.
- 누가의 비유의 편집 서론은(1) 그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비유를 이해하고 있음을 표시해 주는데, 하지만 비유를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일부로 만들어 적용하게 했다. 어떻게 누가는 과부의 끈질김과 불의한 재판관이 권리를 찾아줌을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것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두 가지 설명이 이 질문의 대답에 도움을 준다: 첫째는 누가의 이야기 속의 비유의 즉각적인 맥락이요 둘째는 누가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 8절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이 질문은 초점을 재판관/하나님에서 과부와 그의 끈질김으로 전환함으로써 비유에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누가가 기도에 있어서의 끈질김과 낙심하지 않음을 믿음의 요소로 만든 것이다. 누가의 설화의 관점에서 끈질김과 용기는 추상적 자질이 아니라 종말론적 필수요소이다.
- 이점을 보기위해 교회력C에서 포함되지 않은 17:20-37의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부분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수는 마24:23과 막13:21과는 다른 언어로 대답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0-21). 이어진 22-37절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주장이 아마도 사람들이 해석하듯이 누가가 종말론적 이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는 여기에 오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있는 마가의 자료(13장)와 마태의 자료(24장)을 많이 배치시켜 그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간다. 눅18:1-8의 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해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너희가 인자의 날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보고싶어 할 때가 오겠으나, 보지 못할 것이다”(17:22). 그의 주의를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제자들에게 돌리고 인자가 오실 날을 고대하라고 말함으로써 누가의 예수는 인내해야 하고, 언제나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아야 할 제자들에게 관심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장 18:8은 툭 던지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의 맥락에서 18:1-8을 끌어낸다. 만약에 제자들이 인자가 오실 때 충성된 자로 살려면, 끊임없이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 누가는 11:5-8의 비유로 비슷한 관점을 보여주었다. 이 비유에서도 18:1-8과 같이 두 인물이 있다. 여기에서 빵을 밤중에 꾸어주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권리를 찾으려는 과부와 같고, 또 다른 인물 일어나기를 거부하고 권리를 주지 않는 사람은 재판관과 같다. 여기에서의 비유의 교훈도 “끈질김”(11:8)이다. 18장에서 하듯 누가는 비유를 주기도문(11:2-4)과 “구하라 주실 것이라”(행11:9-10) 사이에 둠으로써 기도에 관한 교훈을 적용시킨다.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으로의 기술과 요청하는 자에 대한 인간 또는 하나님의 반응과 함께 이 부분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반복해서 기도를 끈질기게 하도록 배우고 또 배웠다. 과부는 기도하며 충성하는 자의 표식이 아니겠는가?
목회적 관점
예수를 단지 선생, 치유자,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는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예수가 코미디언이기도 했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예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무릎을 치면서 이 기묘한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어떤 여인이 그녀의 곤경에 관심이 없는 부패한 재판관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 마침내 그 재판관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알았어요. 그만 좀 두드려요! 지금 당장 그만두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께요.”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여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부당한 취급을 당했는데,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남편도, 유산도, 사회적인 지위도. 그들은 이 판사도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 힘없는 여인이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이 뺀질거리는 작자를 마침내 그가 좋은 일을 할 때까지 괴롭혔다는 생각에 박장대소했다.
좋은 이야기로군! 그들은 웃었고, 그리고 한숨을 쉬고, 예수가 그들에게 기도란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예수는 우리 교회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문 앞에서 열심히 두드리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일까? 어린 아이들의 어머니가 암에 걸려 쓰러져서 우리는 아주 열심히 기도했다. 하지만 결국 죽음은 찾아온다. 우리는 또 다른 자연 재해에서 안전하고 구원받기를 기도하다가 지친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지만, 라디오는 더 많은 전쟁의 희생자에 대해 보도한다. 이것이 정말로 존재하기로 되어 있는 그런 방식일까?
예수는 어떤 희망을 제공하고 있는가? 예수는 하나님이 이 불의한 재판관과 닮은 게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예수가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약속을 받는 것보다 더 빠르게 우리의 지속적인 기도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만약 기도 응답이 예수가 이 땅에 신속하게 돌아옴으로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면(8b), 21세기의 교회에서 진실의 간격은 더 벌어졌을 것이다. 이 설교의 목회적 쟁점은 우리의 교회가 근심과, 이미 그것을 포기한 기도자와, 기대하지 않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바로잡아주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붕 위에서 기다리지 않을 때, 눈과 귀로만 듣는 이 비유가 어떻게 의미 있게 될 수 있을까?
예수는 그가 다시 올 때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 할 때, 우리의 곤경을 예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효과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언제 내가 다시 돌아올지 예상하기를 멈추고, 지금 신실하게 기도하기 시작하라.”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궁금해 하는 것은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이 질문 때문에 예수가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1절)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앙생활은 하나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의 목록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기쁨과 염려, 모든 두려움과 의심, 모든 애통과 탄원을 듣고 응답하시는 분에게 계속해서 올려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답은 우리가 대답을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할 때 오지 않는다. “천년도 주님 앞에서는 밤의 한 순간과 같다”고 우리는 시인을 따라 노래한다. 이사야의 하나님은 우리를 일깨운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55:8).” 그렇지만 우리가 하늘의 문을 계속 두드려서 우리의 손이 상하게 하면서 진정으로 기도할 때, 이런 장기적인 전망을 취하기는 어렵다.
예수는 말한다. “하나님은 늦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정의를 승인하신다.” 만약 사람의 아들이 세상에서 믿음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수많은 응답을 받지 못한 기도의 일부가 아니라는 이해해야만 한다: 그보다 그것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참여이다. 계속해서 기도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산다. 희망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다가올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만찬에 모일 때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한다: “하늘과 땅의 주님 교회와 합하여 오! 하나님, 주께서 우리 가운데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주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실 것을 기도하나이다. 주께서 마지막 승리 가운데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사역에 신실하도록 우리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님의 영원하신 통치의 기쁨을 누리면서 주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겠나이다.” 또, “그가 영광 중에 오실 때에 경계하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진리와 사랑 안에서 강건한 모습으로, 그리고 떡을 떼는 일에 신실한 모습으로 그에게 발견되게 하옵소서. 마침매 모든 백성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며, 분열된 모든 것이 치유될 것이며, 모든 주님의 피조물과 함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찬양을 노래할 것이니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예수가 가르치신 것에 또한 충실하다.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마 6:10) 다시 한 번, 예수는 신앙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간절히 희망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위한, 세상을 위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목회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런 기능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희망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비극이 우리 앞에서 일어날 때 이미 하나님의 틀림이 없으신 섭리 안에서 강력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이 도전이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느낌을 전하기는 훨씬 어렵다. 그렇지만 적극적인 믿음이 작용하고 있을 때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향해 우리가 분투하게 하고, 그래서 희망은 여전히 살아서 중얼거리는 음성으로라도 찬양할 수 있게 한다. “우리 하나님, 지나간 날 동안 우리의 도움이시고, 다가오는 날에 우리의 희망이며, 폭풍우로부터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집이시다.”
설교적 관점
-목회자들은 기도가 항상 응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다. 목회자들은 또 중환자 가족들은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만 또 목사님이 기적적인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라고 바라고 있지만 그런 치유는 잘 일어나지 않음을 알기에 병실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목회자들은 “기도가 정말 효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매우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청에 개입할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을 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 같다. Annie Dillard는 그것을 “매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직장을 얻었을 때, 이익을 얻으려 산 콘도를 팔았을 때, 심지어는 편리한 주차장을 발견했을 때 조차 하나님께서 다 해주셨다는 것이다. 슈퍼보울 우승팀(미식축구)은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다고 감사한다 (기도하고도 패배했다는 선수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해고당하고 마지막 남은 8달러로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도와주세요 주님...이번에는 꼭 당첨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2억 9천 5백만 달러 잭팟에 당첨되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역대상에도 지금까지 언급이 안되었던 야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기도가 나온다: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역대상 4:10).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어주셨고 여기에 근거해서 21세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한한 복을 준비해두셨고 나를 위한 기도를 하기 원하시며 따라서 내 주식이 오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며 또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면 하늘창고를 열어주실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목회자는 마음을 다하여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요청이 이루어지지 않은 착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매일 보면서 오늘날 번영의 복음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잘못되었고 그릇 인도하는지를 알고 있다. Hustom Smith는 이렇게 보고 있다:“믿음의 결과물이 세상에서 좋은 것 예를 들어 건강이라면 이러한 생각은 종교를 자기만족을 위한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교회는 헬스클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역할 곧 자기중심적인 것을 버리고 욕심에 영합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정반대되는 일이다.”
-예수는 지속적인 기도에 관해 한 비유를 말했다. 설교자는 이것이 비유이지 누구나 알고있는 두 사람에 관한 일화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는 우리에게 이 비유의 목적은 제자들이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함” (1절)이라고 말해준다. 처음부터 예수는 응답받는 기도와 그렇지 못한 기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있지않았고 그의 제자들에게 인내를 가르치려는데 있었다. 이 이야기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양심없는 냉혹한 재판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무력하며 자기를 지키지도 못하는 과부인데 억울한 일이 있다. 배경은 재판정같은 곳으로 재판관이 높은 곳에 앉아있고 많은 청원인들이 모여있다. 그 중에는 변호사가 대신하여 온 사람도 있고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 이 여인도 법정이 열릴 때마다 매일 나와 그 무리가운데 있다. 그녀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적대자로부터 권리를 찾기를 원하고 있다. 매일 그녀는 정의를 요구하고 소리친다. 매일 이 재판관은 이 과부를 무시한다. 아마 그녀는 그를 집까지 따라가서 밤낮으로 요구를 반복했던 것 같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 재판관을 성가시게 한다. 마침내 그녀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재판관은 누그러뜨리고 원하는 판결을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7절)라고 예수는 묻는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여기서 주제는 정의이지 하나님을 사람이 원하는 것이나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게는 선하고 사랑스러운 부모님이 있었다. 그 분들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다. 나는 말이나 개를 사 달라고 했고 또 어렸을 때는 탈 나이도 되기 전에 두발 자전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어느 크리스마스에는 백화점 카탈로그에서 본 장난감 드럼세트에 마음이 꽂히기도 했다. 내가 요청한 것들은 부모님이 아셨지만 주지 않은 것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내가 원했던 것을 항상 주신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로 했던 것들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점이 적어도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려 한 내용이다. 초대교회는 받지 못했던 많은 것 예를 들면 안전, 박해로부터의 보호 등을 얻기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한다는 것을 느끼는 일 그리고 존속하는데 필요했던 용기, 회복력 그리고 힘이었다.
-정의의 편에 서기 위해 내려오신 하나님을 확신하라. 힘이 없고 영향력도 없으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라. 돌아갈 아무 데도 없는 사람들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라. 당신의 요구를 언제나 들어주지는 않지만 사랑으로 인내로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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