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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역사에 흘린 고귀한 땀방울
하정 김혜식
우리 고장 문단사를 새삼 되짚어보며 소크라테스의 ‘인간은 인간에게 배운다.’라는 언술을 문득 떠올려본다. 이 말에서 배움이란 지식, 지혜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사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자아 형성도 이룬다. 인간의 자아실현 그 한 몫으로 문학이 손꼽히기도 한다.
사회의 넓은 의미는 국가이지만 좁게는 우리가 속한 문단도 사회라고 지칭할 수 있다. 우린 그 속에서 선배님들이 남긴 아름다운 문향과 면면히 이어온 문학사를 우러르며 오늘도 손에 쥔 붓 끝에 힘을 가하고 있다. 예전엔 새색씨가 남의 가문에 시집을 오면 친정에서 몸에 익힌 가정교육을 기반으로 시댁의 풍습과 법도를 다시금 따라야 했다. 이즈막은 어떤가. 고초당초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말이 됐고 오히려 시부모들이 며느리 눈치 보고 사는 참으로 야릇한(?)세상이 되었다. 집안에 어른이 실종 된 것이다.
어찌 사라진 게 집안의 어른뿐이랴.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조차 몰라 정(情)과 의(義)가 가슴 속에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이런 기본이 무너진 혼탁한 세상에 사노라니 소위 혼이 깃든 글을 쓴다고 자부하는 작가들의 심사가 고요할 리 없다. 작가들의 기상이 깃든 작품들은 음습한 곳은 보송보송하게 건조 시킨다. 냉랭한 곳엔 따뜻한 온기마저 보낸다. 불의 앞엔 분연히 두 주먹을 쥐게 하기도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가로서의 궁극적인 사명감을 자각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고뇌에 의하여 삶의 구원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의 원형인 예술이 한껏 꽃핀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작가들의 사명감은 거저 생겨난 게 아니리라. 충북문단사만 짚어 보더라도 앞서 걸은 문단 선배들의 발자취가 확고한 계기가 된 게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토록 원고지 여백에 마음자리를 옮길 수 있음은 지난날 척박한 토양에 짙은 문향이 배이도록 애쓴 선배들의 지대한 노고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든 단체든 역사는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지키는 자만이 자신의 뿌리를 튼실하게 보존할 수 있다. 하여 충북 문단의 작가로서 영원불멸의 그 기백과 자존감을 재확인키 위해 우리의 자랑스런 충북 문단사를 다시금 되돌아보기로 했다. 이 글은 그동안 '충북문학'에 특집으로 수록된 내용을 참고로 했음을 밝힌다.
우리 충북문단은 걸출한 선배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홍명희, 김팔봉, 조벽암, 정지용, 이무영 등 한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선배 문인들이 그들이다. 그 영향에 힘입어 요즘도 진천에 송재섭 시인, 김홍은 수필가, 충주의 양채용 시인, 박재륜 시인, 음성에 반숙자 수필가, 임찬순 희곡작가, 안수길 소설가, 김효동 시인, 조철호 시인 , 강준형 시인, 한병호 시인, 오세탁 시인, 제천의 홍석하 시인, 박희팔 희곡작가 등이 계시다. 이들의 훌륭한 역량은 우리들의 문학적 사표로 자리하고도 남음이 있다. 15여 년 전 내가 문단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땐 우리 고장의 향토 문학을 빛낸 이런 훌륭한 문단 선배들을 미처 몰라 뵈었었다.
오로지 ‘나만 글쓰기에 전념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물론 문단의 햇병아리로서의 자만심도 크게 작용 하였겠지만 무엇보다 충북문단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중앙 문예지로 추천되는 행운(?)을 누린 탓이기도 하다. 가장 큰 원인은 충북 문단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나의 무지가 불러온 소치이기도 하다.
한편 작가라는 명칭이 무슨 대단한 벼슬인양 여긴 나의 교만이 아니었었나 하는 반성도 이 기회에 가져본다. 그런 오만하고 분수를 모르는 나의 태도가 진정한 작가로서의 태도에 크게 어긋났었음을 깨닫기까진 여러 해가 걸리었다. 나의 충북 문단에 대한 무지와 선배들에 대한 공경심 결여를 보다못한 어느 분의 충언 한마디가 훗날 나를 진정한 작가로서의 정립에 대해 고뇌케 하였다. “ 문단 원로 선배님들 앞에선 아직 문단에 입문 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문학한다고 말하지 마라. 그냥 “글 씁니다.” 라고 겸손히 자신을 낮춰라.” 이 말 한마디는 그동안 문학이란 거대한 산 앞에서 한껏 우쭐 댄 나의 교만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 되었음을 이제야 솔직히 시인한다.
그의 그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문단 선배들의 문학적 궤적과 그들의 훌륭한 필력에 감응하는 길만이 올곧은 작가로서의 거듭나는 길임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하여 나는 그들이 남긴 문학사를 통하여 훌륭한 필력을 따르려 애썼고 남다른 심적 나상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지난 2009년도엔 과분하게 위상 높은 제 11회 청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 청주문학상은 우리 문단 선배들께서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더욱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길 바람 하는 진실한 후배 사랑과 충북문단의 품격을 높이고 좀 더 확고히 지키려는 선배들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상이기도 하여 내심 나는 어깨가 무겁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 충북 문단사를 빛낸 고인이 된 많은 원로 선배들을 비롯 현존해 있는 선배들께 이 자릴 빌어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문단 생활 15년이면 중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되돌아보면 엊그제 문단에 섣부르게 첫발을 내디딘 듯한데 벌써 15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 이쯤 되니 중견이란 자리를 얻기까지 그 발판이 되어준 우리 충북 문단의 문단사에 대한 관심이 가슴에서 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 충북문단은 최초로 그 이름을 만천하에 내걸게 된 게 언제일까? 궁금하여 자료를 눈여겨봤다.
자료에 의한 것을 굳이 거명하자면 지난 1957년 출발한 충북문단은 이미 작고한 신동문, 최병준(작고) 오세탁 전 충북대 교수, 박재용, 송주헌, 이상훈 등의 선배들이 그 주체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난 6,25 전쟁 이후 우리 고장 문인들이 1955년 전후로 서로 수소문하여 인사를 나누다가 1956년경부터 향토 신문을 매개로 하여 청주 우체국 2층 오페라 다방에서 자주 모였었다는 오세탁 전 충북문인협회 회장님의 회고담이 눈길을 끈다.
특히 오세탁 전(前) 충북대 교수이자 충북문인협회 회장은 충북문학 제1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1957년에 충북문화인 협회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충북문단이 출발했다하니 반세기가 훨씬 넘은 셈이다. 이렇게 출발한 충북문단은 4,19 전 후의 혼란으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이때 향토문단 1세대로 신동문, 오세탁, 이설우, 박재용, 송주헌,최병준, 민병산, 유흑열, 최창희, 유종호 등의 원로 선배들이 계시다. 1962년 1월 20일 드디어 지금의 상공 장려관에서 충북문인협회 겸 한국문인협회 충북지부가 정식으로 창립 됐다.
이때 오세탁 전(前) 충북대 교수가 회장, 부회장에 백재봉이 선출 됐으며 상임 위원장에 송주헌, 상임 위원에 박재용, 최병준, 이상훈, 우영, 황규호 등의 선배들이 선임 됐다고 한다. 이때 향토 신문 신춘 문예를 통하여 안수길 소설가와 그 당시 영동에서 학생 신분으로 박희성 시인이 향토 문단에 그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고 한다. 이에 일찍 문학에 혼을 불사른 그들이 매우 존경스럽다. 1960년대 이르러 시 ‘풍선기’로 문단에 한 획을 그은 신동문 시인(작고), 최병준(작고), 오세탁 전 충북대 교수, 현재 청주 문협 고문으로 계신 송주헌, 우영, 이상훈, 오세탁 전 충북대 교수 등의 선배들이 충북문단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멸의 문학의 불을 활활 지피었다.
1970년 대엔 국내 최초의 청소년 문학 단체였던 ‘푸른 문’ 출신인 박영수, 임찬순, 김홍은, 조철호( 현재 청주에 남아있는 분들임) 등의 선배님들이 오늘날의 청주 문협의 단단한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내륙 문학이 탄생 했었는데 내륙문학은 충북대 김영삼 교수를 비롯 충주의 박재륜, 양채영, 김효동, 강준형, 안수길 등의 선배님들이 이 단체에서 활동 하였다고 했다. 1980년대 들어서 조철호 시인이 충북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최초로 충북문학인 대회를 개최한 선배이다. 조철호 시인은 충북 문단의 작가들의 자존감을 드높이기 위해 많은 애를 쓴 분이다. 그 당시 ‘충북문인협회’가 ‘한국문인협회 충북 지부’라는 점에 조철호 시인은 자존심이 크게 상하여 마치 한국문인협회와 종속관계처럼 돼있는 정관이나 체계를 개정, 한국문인협회 충북지부라는 명칭을 충북문인협회로 개칭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의 약력 난에 ‘충북문인협회’라고 떳떳이 그 명칭을 밝히기까지 조철호 선배의 이런 숨은 노력이 있었음을 이 기회에 알게 됐다. 어찌 이뿐이랴. 충북문단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한층 드높일 일을 찾아 고심하다가 조철호 시인은 이에 합당한 행사로 ‘충북문학인 대회’를 계획했던 것이다. 또한 1983년도엔 ‘충북문학 전집’을 발행하기도 했으니 그분이 충북 문단사에 남긴 족적은 매우 대의명분이 뚜렷하여 우리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다. 또한 이 때 조철호 시인이 충북문인협회 회장일 때 현, 청주 문협의 문을 활짝 열고 그 당시 내륙 문학 동인들인 김효동, 강준형, 안수길, 반인섭, 김태하 등의 선배님들을 1차, 2차에 걸쳐 입회 시켰다고 한다. 1980년대만 하여도 현, 충북 문협, 청주 문협을 회장 한 분이 운영했다고 한다. 이땐 충북문협은 청주에 거주하는 작가들만 활동했던 곳이다. 그러다가 임찬순 회장이 충북, 청주 문협을 겸임하다가 충북 문협과 청주 문협으로 명칭을 가르기도 했다. 임찬순 회장은 충북문학상과 청주문학상을 제정 했다.
이때 제 1회 충북문학상 수상자로 공로상에 오세탁 전 충북대 교수, 창작 상엔 홍석하 시인이 수상 했다. 이렇게 권위 있는 상이 제정 되기 까진 선배님들의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임찬순 전 회장은 시군의 문협을 모아 청주 문협이라 명명된 충북 문협을 재정비, 정식으로 충북 문협으로 발족 시켜 충북문인협회의 초대 회장을 엮임 하기도 했다. 이런 사업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충북문학상을 제정하여 그에 소요되는 상금을 모금했었다. 이 때 김홍은 수필가가 백만 원, 임찬순 회장이 백만 원, 조성호 수필가가 백만 원, 송재섭 시인, 반숙자 수필가가 십 만원 그 뒤에 박영수 수필가가 백만 원을 내기도 하였다. 청주문학상도 이때 제정돼 첫 수상자로 조성호, 박길순 작가가 수상 하였다.또한 1995년 문학의 해를 맞아 충북에 거주하는 전체 문인들의 작품 총 406편을 (충북문학 1, 2권) 총 두 권에 걸쳐 게재했다.
충북문인들의 육필 원고 100인 전을 열기도 했으며 충북 작고 문인 영상전을 개최했다. 그해 후반부에 ‘문예 충북’이 창간되기도 했다. 한편 문학인들의 숙원이었던 충북도민대상(도 문화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어 임찬순 회장의 개인 사정으로 중도에 사의를 표명하자 김홍은 전(前) 충북대 교수가 잔여기간 1년 동안 회장을 맡았었다. 김홍은 교수는 충북대 평생 교육원에서 수필을 강의 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 하여 수필문학의 저변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운 분이다. 또한 그는 충북문단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남달라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문학 영상의 밤도 열었고 최병준 선생 추모 1주기 밤도 개최 했었다. 다시 그 이듬해 선임 되어 신동문 선생 10주기 추모의 밤을 갖기도 했었다.
또한 성인 작품 낭송의 밤, 목판(인두화) 솔밭 공원 시화전 및 CJB 청주 방송국과 충북문인협회 주관으로 백일장을 열어 청주, 충북문인협회의 홍보에도 앞장섰었다. 어디 이뿐이랴. 청주 문학 공원도 구상한 바 있다. 현재는 ‘푸른 솔 문학’ 문예지를 창간, 발행인으로서도 활동 하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 충북문단이 자리하기까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역대 회장들, 선배들, 회원들의 문학에 대한 열성과 애정이 그 초석이 되었다. 그럼에도 문학 경륜이나 인생 경륜이 짧은 우리들이 그런 선배들의 문학적 업적엔 전혀 등한시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충북문단이 존립하도록 애쓴 선배들께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물론 작가는 좋은 글 쓰는게 작가로서 할일이다. 하지만 오뉴월 하루 빛이 어디냐는 말이 있다. 요즘 어른 공경심이 옅어지고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 해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짐은 물론 선, 후배의 관계 따윈 안중에 없다.
선배라 하여 후배들 앞에 권위주의를 앞세우자는 말은 아니다. 누군가 어느 분야에 앞서 나와 그 분야에 공(功)을 들이고 기반을 구축하는데 일조해 그 후광을 적으나마 아랫사람들이 향유한다면 그에 대한 공(功)만은 전적 인정하고 본받으려 노력하는게 도리이다. 이번 충북 문단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난 참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한편 우리 충북 문단사를 빛낸 선배들의 높은 공로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그들은 치열하게 작품 창작을 하였었고 어떤 경우라도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올곧은 선비 정신을 잃지 않았었다. 이에 반해 나는 어떤가. 어느 문단 원로분이 중앙 문예지에서 지적했듯 나또한 ‘물질적 욕망과 명예의 야망을 동반한 개인적 욕구 충족에 눈을 뜨고 주어진 나날을 심심찮게 보내려고 취미로 쓰는 글 군(群)’ 의 한 사람은 아니었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그러노라 선배 공경, 후배 사랑엔 ‘나 몰라라’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에 생각이 미치자 초창기 선배들의 훌륭한 문학적 치적 앞에 다시금 옷깃이 여며진다. 단 한편이라도 독자의 심금을 절절히 울릴 글 한 편 쓰고자 안간힘 썼었던가.
이름 석자 활자화 됐다고 하여 그게 무슨 대작가라도 된 양 착각하며 위, 아래도 못 알아 본채 목에 힘을 준적은 없었는지, 패거리에 휩쓸려 이리저리 쓰러지느라 방향과 줏대를 잃고 허둥대진 않았었는지. 문학을 마치 악세사리처럼 가슴에 달고 그것을 빌미로 명예욕에 사로잡힌 바는 없었었는지 이참에 되돌아 볼일이다.
이 글을 쓰며 많은 선배들의 훌륭한 필력과 업적이 충북문단의 밑거름이 됐음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들의 작가로서의 기품과 어떤 상황에서도 변절치 않을 꿋꿋한 기백을 존경하고 흠모 한다. 먼훗날 ‘불멸의 작품 창작의 모태는 바로 충북문단이었다’ 라는 많은 충북 작가들의 자랑스러운 회고담을 듣길 충북 문단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소망해보며 이만 붓을 놓겠다.
--끝--
약력: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제 11회 청주문학상 수상, 아시아 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수상
청주시 예총 예술 공로상 수상
현, 서울 독서 신문, 충청일보 고정 필진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사업’ 강사
저서: 수필집『내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한국문인협회, 충북 수필 회원
주소: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푸르지오 캐슬 아파트 408동 402호
연락처: 010-3117-9886 905-9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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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선생님 덕분에 충북 문단의 역사를 알고갑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은 2010년도 '충북문학'지에 게재하려다가 장르가 불분명한 관계와 원고 매수가 많은 관계로 다음 기회로 넘겨진 원고 입니다. 이렇게 사이버 상으로나마 우리 충북문단의 역사와 그 역사를 정립키 위해 애쓰신 문단 원로 문인분들및 선배님들의 노고를 청주문협 회원으로서 새삼 각성코자 카페에 올렸습니다. 이담 선생님 긴 글을 읽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많은걸 마음에 담아 배움하고 갑니다
고운밤 되십시요~!!
다정 오순옥 선생님 홈에서 자주 뵈었습니다. 우리 충북 문단엔 훌륭한 필력과 문인으로서 선비정신을 지킨 원로 문인분들및 선배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작가정신은 지금도 짙게 작품 속에 살아 많은 감동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생존해 계시는 원로 문인분들론 충주의 양채용 시인, 청주의 강준형,조철호 시인,제천의 홍석하 시인 , 음성의 반숙자 수필가, 진천의 송재섭 시인, 김홍은 수필가, 임찬순 희곡작가, 김효동 시인 등 한국문단에 한획을 그으신 훌륭한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 청주문협이 그 뿌릴 단단히 내리고 있음을 우리 후배들은 잊어선 안될것입니다.외람될지 모르나 그분들의 문학적 치적을 상기하고자 이 글 썼답니다.
글에서 눈을 뗄수가 없네요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명품님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이 글은 올해 중앙 문예지 '한국 작가' 봄호 제 27호에 발표 됐습니다. 제목은 원제 '되짚어 보는 충북문단사'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