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맹균 (孟畇) 문혜공 (文惠公)의 며느리 되시며 휘 보기 (保基) 부정공(副正公) 의 배위 되시는 숙부인 (淑夫人) 교하노씨 (交河盧氏)는 사정 (司正)
노정산 (盧定山. 혹은
노정지, 盧定之) 의 따님이요, 전의인
(全義人) 이사흠 (李士欽) 의 외손녀요,
중추원사 (中樞院使; 정2품) 이정간 (李貞幹) 의 외증손녀요, 공주목사 (公州牧使; 정3품) 이구직 (李丘直) 의 외현손녀이다.
[참고:
휘 보기 부정공은 생부되는 휘 맹진 (孟畛) 판중추공 (判中樞公 ) 의 3남으로 자식이 없는 중부 (仲父) 되신 문혜공에게 출계하여 문혜공의 가계를 이었음.]
숙부인의 부친되는 노정산에
대해선 이렇다할 문서기록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고 있어서 부인의 친정에 대해선 자세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교하노씨를 전체적으로 놓고 볼때 조선조에서 현달한 인물들로는 세종때 한성부윤을
거쳐 우의정에 오른 노한 (盧閈), 당대에 이름난 명신으로 세조때 영의정에 오른 노사신 (盧思愼)
과 노사신의 아들로 6조판서를 두루 거친 노공필 (盧公弼), 선조때의 명신으로 황해감사-병조판서-경기 감사를 거친 노직 (盧稷)
등을 꼽을 수 있다.
교하노씨는 조선조에선 문과 급제자
12명, 무과 급제자 36명을 배출하여 문신보다는 무신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으며, 그다지 크게 현달한 가문은 아니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계파로는 서원군파 (瑞原君派), 창성군파 (昌城君派), 경원군파 (慶原君派), 신양공파 (新陽君派)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노태우 (盧泰愚)
씨가 교하노씨 후손이라고 한다.
2000년 통계청
자료 기준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53,203명의 후손들이 현재 살고 있다.
숙부인의 외가가 되는 전의이씨가문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볼 것인데, 우리는 이미 휘 맹균 문혜공 배위 정경부인 (貞敬夫人) 전의이씨 (全義李氏) 편에서 전의이씨를 잠시 만난적이 있다; 정경부인 이씨의 친정아버지가 바로 숙부인의 외현조부가 되는
공주목사 이구직이다. 즉,
정경부인은 숙부인의 외조부가 되는 이사흠의 고모님이
되셨으니, 숙부인에게 있어 정경부인
이씨는 시어머님뿐만이 아니라 혈육으로 보면 외증조모님뻘이 되셨던 것이다. 우린 이 사실을 접하며 조심스레 추측을 한 가지 할 수가 있는데, 다른 것이 아니라 정경부인
이씨가 양자로 들어온 휘 보기 부정공의 혼사가 닥쳤을때 아마 앞에 직접 나서서
혼인을 주선한 장본인이 아니였을까 하는 것이다. 장차 시어머님 되실 분으로 정경부인은 아마도 본인의 일가친척중에서
참한 규수를 한 명 점찍어 골라두었다가 나중에 며느리로 삼지나 않았나 쉽다.
숙부인의 외현조부가 되는
이구직 (?~1394)은 고려조에서 여러 벼슬을 거쳤다고 정경부인 이씨편에서 익히 접하여 알고 있다; 숭복도감녹사 (崇福都監錄事), 삼사좌윤 (三司左尹), 판선공시사 (判繕工寺事) 를
거쳐 봉익대부 형조판서 (奉翊大夫
刑曹判書; 종 2품 재상직) 에 이르렀다. 1392년( 태조 1) 에
조선이 건국되자 새왕조에 출사하여 개국원종공신 (開國原從功臣) 으로
책록되고, 그뒤 호조전서를 거쳐 공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곧 있어 1394년에 세상을 하직한다.
이구직의 후손들은 나중에 현달하여 명문 전의이씨중에서도 번창한 한 파인 예조참판공파 (禮曹參判公派) 등을 이루었고 출세한 후손들 덕분에
이구직은 사후 (死後) 에
높은 증직 (贈職) 을
조정으로부터 계속 받았었다.
숙부인의 외증조부되는 이정간 (李貞幹, 1360~1439) 중추공 (中樞公) 은 하늘이 내신 효자라는
칭송을 자자하게 받았던 인물이다. 평상시에 부친인 이구직이 일찌기 세상을 떠난것을 항상 슬퍼하여 돌아가신 분을 섬기기를 살아계신 어버이 받들듯이 하였으며,
초상때나 제사때에는 한결같이 주문공의 가례에 따랐고, 고려초에서 불교를 숭상하던
영향을 깨끗이 씻어 버리었다고 한다. 나머지 힘이 있는대로 글 공부에 힘을 기울이어 문필이 또한 전아
(典雅) 하고 넉넉하면서도 민첩하여 능란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구차스럽게 과거보기 위한 공부는 힘쓰지 않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조선개국공신이였던 부친
이구직의 음덕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집의
(司憲府執義) 를 거쳐 1405년 (태종 5) 강화부사 (江華府使) 가 되었다.
이
때 목장에 뛰어든 호랑이를 인마의 살상없이 포획하여 비단을 하사받았다.
공은
그뒤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고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 (江原道觀察使) 에 이르러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노모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100세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노모를 봉양하는 데 전심전력하였는데, 특히
자신도 80세의 노령이면서 100세의 어머니 앞에서는 색동옷을 입고 출천지효 (出天之孝) 로
이름을 날렸다
한다. 당시 사람들이, 나이 70이
되어서도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주고자 때때옷을
입고 어리광을 피었다는
중국의 옛 효자
노래자 (老萊子) 의 모습을
공에게서 다시 볼
수 있다 하고
칭찬하였다 한다.
세종 (世宗) 도 이 사실을 알고 그의 품계를 정2품 중추원사 (中樞院使)
로, 공의 모친을 정대부인 (貞大夫人) 으로 봉하고 특별히 기리는 교서를 내리시고,
궤장 (几杖)
과 주악 (酒樂) 을 하사하여 그 효행을 표창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여 가내가 공순하기로 소문났다. 명문들이 그 일을 노래하며 책으로 엮어『경수집(慶壽集)』을 내었다. 공의 시호는 효정 (孝靖) 이다.
(가전충효 세수인경. 이 여덟 글자는 세종대왕이 손수 어필하여 효정공 이정간에게 하사한 시임. 세종대왕의 남아있는 필적으론 유일한 것.)
이정간의 아랫동생들로서 숙부인의 외종증조부 (外從曾祖父)들이 되는 홍문관 부제학 (弘文館 副提學) 이진간 (李珍幹) , 또
그 아래 동생 내섬소윤 (內贍少尹) 이양간
(李良幹) 및 막내 군기시
부정 (軍器寺 副正) 이문간 (李文幹) 이 있었다.
숙부인의 외조부가 되는 이사흠 (李士欽, ?~1399) 은 이정간의 5남3녀중 장남으로, 좌통례 (左通禮) 에 증직되었던 분이고, 숙부인의 외조모는 공조전서 (工曹典書) 를 지낸 순흥인 (順興人) 안경검 (安景儉) 의 따님이셨다. 두분은 3남3녀를 두었는데 숙부인의 생모가 이중 차녀가 되는 분이신 것이다.
첫댓글 재미있게 엮어 낸 우리 할머님네 이야기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희귀한 세종대왕 어필도 함께 감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초심이 변치 않도록 계속 노력하며 미천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형님 덕분에 저도 잘 배우고 있습니다 저도 문양공 선조님의 후손부터 차례로 게시하고 있는데 아직도 휘 맹유 선조님을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은 할아버지 15분의 손주중 1번째 끝나면 2번 휘 맹균으로 갈 예정입니다 서로 도움 받으며서 친가와 처가의 이야기 고인이 될때까지 후손에 물려주고 갑시다 많이 도와 주십시요ㅎㅎ
방대한 자료를 계속 올려주시니 우리가 아우님께 큰 빚을 지고 있네. 다 나중에 긴히 쓰일 일들이 있을것이니 고마울 뿐이네 그려. 참 자료불충분으로 문양공쪽은 이제 잠시 접고 다음편엔 인재공쪽을 살펴볼 셈이네..
보자기자 할머니 에 대한 가계를 잘보았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미약하나마 힘닷는데로 친가던 외가던 훌륭하신 선조님들 알리는데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