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은 한말인 순종 2년(1908) 9월, 창덕궁에 궁중의 중요 유물들을 황실박물관[일명 제실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것이 시초인데, 서민들의 일상생활 모습과 그 생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2014.01.29. 국립민속박물관 편 참조).
하지만, 고궁박물관이라고 해도 대부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인 고종과 대한제국 황실의 유물들로서 경복궁을 비롯하여 오랫동안 정궁 역할을 해온 덕수궁, 창덕궁 등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1909년 11월 일반에게 처음 공개되었던 황실박물관은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후인 1938년 3월에 이왕가박물관으로 명칭이 격하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3월 소장품을 덕수궁으로 옮긴 후에는 '덕수궁미술관'이라고 개칭되었다. 그 후 1969년 5월 덕수궁미술관은 국립박물관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가 1992년 궁중유물전시관으로 다시 개편되었는데, 5대 궁과 12개 능·원에 분산 소장되던 중요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그 해 12월 덕수궁 석조전 동관에 궁중유물전시관을 신설하여 재개관하고, 2005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칭하면서 옛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에서 현재의 건물로 이전했다.
이렇게 서민들의 일상을 알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과 왕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고궁박물관 등 두 개의 박물관을 경복궁 동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세워서 두 박물관을 한번에 관람한다면, 조선왕조를 비교 평가하는데 유익한 기회가 될 것이다.
고궁박물관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지하통로로 연결되어서 접근이 아주 편리한데,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에 10개 실로 나뉘어 약4만여 점의 전시물을 소장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조선의 최고 권위와 규범으로서 각종 국가 통치제도와 백성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성리학의 '예(禮)'를 구현하는 국가의례와 오례관련 유물과 대한제국기의 역사, 그리고 왕조 정통성의 표상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국보 제228호)를 만나볼 수 있다.
전시실은 왼편에서부터 제1실 조선의 국왕실→제2실 조선의 궁궐실→제3실 왕실의 생활실 등이 있는데, 국왕이 행정과 각종 의례를 위해 사용한 어보(御寶), 왕이 앉는 자리 뒤편에 장식된 해와 달 그리고 5개의 산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 등 국왕을 상징한 대표적 물건을 전시하고 있다. 어보는 국가의례에서 왕을 비롯하여 왕세자, 왕세자빈, 왕후, 빈 등 개인에게 수여되는 도장으로서 국가의례 중 가례에 속하는 책봉, 존호, 존숭 의례와 흉례에 해당하는 국장, 부묘 의례 때 해당 주인공에게 받쳐졌으며, 주인공 사후에는 종묘 신실에 모셔져 왕실과 국가를 지키는 상징이기도 했다. 또, 국왕을 정점으로 한 왕조사회에서 국왕의 공식일정과 행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은 국가의 행위여서 조선왕조실록, 국조보감, 승정원일기 등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왼쪽부터 왕과 왕비복, 용상. |
제2전시실 조선의 궁궐실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경복궁을 짓고,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으며, 궁궐은 중심에 국가적 행사를 거행하고 국정을 논하는 건물인 정전과 편전을 두고, 조정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을 배치하였는데, 그 전각들의 편액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3실 왕실의 생활실에는 임금과 왕비의 대례의상 등 궁중에서 사용하던 격조 높은 왕실의 생활상과 문화를 보여주는데, 임금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의복과 음식, 각종 기물 등은 당대 최고의 장인에 의해서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들었으며, 화려함보다는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왕실 가구들도 일반가구들에 비해서 크기가 크고 표면을 붉은 색으로 칠한 것이 많은데, 붉은 칠은 민가에서 사용을 금지하는 왕실용 가구의 특징이다.
지하 1층으로 계단을 내려가면 제4전시실 왕실의 의례실→제5전시실 대한제국과 황실실→제6전시실 천문과 과학실이 있는데, 중앙 홀에는 순종이 타던 어차와 순종비가 타던 어차 2대가 전시되어 있다.
1918경에 제작된 리무진형 캐딜락인 어차는 현재 전 세계에 약20대 정도 남아있다고 하지만, 공장에서 갓 출고된 최신형 칼라로 도색된 것이 너무 아쉽다. 퇴색한 색깔 그대로 전시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의례실에서는 왕실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 등 오례를 보여주는데, 세종실록의 오례에서 시작하여 성종 때 국조오례의가 완성됨으로써 조선의 기본 의례서가 되었다.
제5전시실 대한제국과 황실실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인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개항후 합방될 때까지의 문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光武)’,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나,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다.
제6전시실은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의 변화 등을 통해 시각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중요하여 국가는 천문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통치에 활용하는 데 치중했는데, 특히 세종 때 천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뤄서 천체에 대한 관측과 천문도 제작, 천문 관련 서적의 발간이 활발하여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대간의(大簡儀)·소간의(小簡儀), 천체의 위치와 적도 좌표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주야 겸용의 천체 관측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천문도가 완성되었고, 조선의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이 간행되었다.
지하 2층에는 제7전시실 왕실의 회화실→제8전시실 궁중의 음악실→제9전시실 왕실의 행차실→제10실 천문과 과학2실이 있다.
왼쪽부터 5개의 산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와 순종황제 어차. |
경복궁은 조선왕조 500년의 법궁이지만, 경복궁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기간은 사실 2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는 1395년 궁궐이 완성되자 4대문과 부속건물들이 채 완공되지도 않았는데도 한양 천도를 단행했는데, 태조는 그만큼 고려의 잔재가 듬뿍 배어있는 개경을 떠나고 싶어 했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의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은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낙타산과 인왕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은 정도전의 작품이지만,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정도전 등이 죽자 태조는 둘째아들 정종에 왕위를 넘겨주고 함흥으로 낙향해버린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은 1399년 왕권다툼으로 피를 많이 흘린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천도했는데, 이듬해인 1400년 정월 다시 2차 왕자의 난을 겪자 그 해 11월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말았다. 태종 방원은 즉위하자마자 한양 재천도를 원했지만, 경복궁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해서 1405년 별궁인 창덕궁을 새로 지은 뒤에야 한양으로 왔다.
경복궁은 세종이 즉위한 1418년 이후부터 비로소 조선왕조의 중심이 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경궁 등이 모두 불타버리자 평안도 의주까지 몽진했던 선조가 돌아와서 머물 곳이 없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을 행궁으로 삼았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고 불렀는데, 경운궁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약250여 년 동안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한 것이다. 순종은 경운궁을 지금의 이름인 덕수궁(德壽宮)이라고 고쳤다.
이렇게 경복궁은 1395년 태조가 천도한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때까지 채 200년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나마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쫓겨났으며, 단종복위를 모의하던 사육신이 고문 끝에 처형되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가 사정전 앞에서 임금의 친국을 당한 뒤 처형된 불운의 장소였다. 또, 대원군에 의해서 중건되었어도 1895년 을미사변으로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니 경복궁은 단청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빈집이 되었다.
그 후 조선을 강탈한 일제는 경복궁을 헐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어 조선왕조의 상징을 훼손하였으니, 경복궁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성리학자들이 확신했던 명당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2013. 10.30. 경복궁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