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발에 얽힌 情
달 빛
생각도 얇고 눈이 멀고 우둔하기 그지없던 아내가 나 같은 사람을 만나 조치원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한 때는 1977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부자라는 소릴 들으면서 살았으니 아내는 오늘까지 이어지는 멀고도 험난한 여자의 길을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살림살이를 시작한 곳은 조천교 건너 중봉리의 제방아래에 위치한 네 칸 크기의 한옥이었다. 한옥이라 해도 전통 건축방식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었다. 장사꾼이나 다름없던 개인 건설업자들이 유사형태로 여러 채를 지어 분양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고급스러운 주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듯 한 주변의 집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1970년대 초 흑백 TV나마 시청할 수 곳은 그 동네에서 내 집 뿐 이었으니 연속극이 방영되는 시간이면 마당 가득 이웃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울타리 너머 이웃한 집에도 신혼부부가 살았다. 나이 차가 있어 나를 친 형 처럼, 아내를 친언니처럼 따랐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살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들로 부터 뜻밖의 초청을 받았다. 특별한 음식을 마련하였으니 함께 나누었으면 하였다.처음엔 사양하는 척 하다가 따뜻한 정이 묻어나는 마음에 이끌려 이웃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남의 살림살이 규모를 눈 여겨 확인해 본다는 것도 조심스러워 그저 안내하는 대로 안방으로 들어가 정좌하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시선을 고정시키는 동안 후각을 자극하고 군침을 솟게 만드는 음식냄새와 함께 작지 않은 쟁반이 들려 들어왔다. 그런데 쟁반에 가득 담긴 음식을 보고 아내와 나는 어찌할 바 몰라 고맙다는 인사말도 할 수 없었다. 쟁반 위에는 고추장과 참깨로 푸짐하게 버무린 닭발이 서로 엉켜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닭발요리는 자꾸만 사람의 손가락을 연상케 하는 느낌으로 꿈틀대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진심 어린 정성으로 베푼 것에 대해 말이 필요 없는 웃음과 함께 맛있게 먹는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집에서 몇 개의 닭발을 혀끝으로 맛만 보았던 기억이 또렷하게 살아난다. 어려웠던 그 시절, 이웃이 전해 주었던 따뜻한 정은 아직도 내 가슴에 푸근한 강으로 흐르고 있다. 추석명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오랫동안 기억의 강으로 흐를 사랑과 인정으로 넘치는 명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라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