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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신라 선원세계도 [朴氏新羅璿源世系圖] |
면천박씨세계도 |
| 삼척박씨세계도 |
.평산박씨세계도 | 무안박씨세계도 | |
강릉박씨세계도 | 밀성대군휘언침세계도 |
시조1세 | ★시조대왕 거서간 박혁거세★ | ||||||
시조2세 | 남해왕 [嗣南解王]02 | 특(忒) | 민(忞) | ||||
시조3세 | 유리왕 [嗣儒理王] 03 |
| 내노(奈老) |
| 세무(世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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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4세 | 일성왕 [嗣逸聖王]07 |
| 파사왕[嗣婆娑王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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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5세 | 아달라왕[嗣阿達羅王]08 |
| 지마왕[嗣祗摩王]06 | ||||
시조6세 | 남 벽방 [男 碧芳] |
| 남 이비 [男 伊非] | ||||
시조7세 | 무영[武英] |
| 아도[阿道] | ||||
시조8세 | 판득[判得] |
| 물품[物品] | ||||
시조9세 | 광흠[光欽] |
| 제상[提上] 영해박씨 시조 | 지상[池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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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0세 | 미일[美一] |
| 문량[文良] | 충원[忠元] | |||
시조11세 | 내물[乃物] |
| 등흔[登欣] | 등흔[登欣]出爲堂叔 | 실휘(失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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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2세 | 상건[相建] |
| 의각[義珏] | 女金智證王22 | 실휘(失諱 병산.비안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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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3세 | 인엽[仁燁] |
| 담 [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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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4세 | 계보[啓輔 |
| 유 [紐] | 女金眞興王24 | |||
시조15세 | 명신[明信] |
| 용문[龍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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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6세 | 정환[貞環] | 女金眞知王25 | 경한[京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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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7세 | 노겸[露兼] |
| 인범[仁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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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8세 | 남선[楠善] |
| 유 [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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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19세 | 금산[金山] |
| 수봉[秀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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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20세 | 응찬應燦] |
| 계엽[季葉] | 女金興德王42 | |||
시조21세 | 덕흥[德興] | 女金翼成王익성 | 린 [麟] | 女金興平王 | |||
시조22세 | 대영[大寧] |
| 문현[文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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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23세 | 이순[尼淳] | 尼秀 | 尼國 | 신종[愼宗] | 치종(致宗) | 환명(煥明) | 기원(琪遠) |
시조24세 | 융검[隆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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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邕] |
| 득의(得宜) | |
시조25세 | 지곤[之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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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홍[術洪] |
| 술희(述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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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박씨신라선원세계도 [朴氏新羅璿源世系圖] |
시조23세 | 이순[이淳] | 이秀 | 이國 | 신종[愼宗] | 치종(致宗) | 환명(煥明) | 기원(琪遠) | |||
시조24세 | 융검[隆검] |
|
| 옹[邕] |
| 득의(得宜) | ||||
시조25세 | 지곤[之坤] | 술홍[術洪] | 술희(述熙) 면천박씨관조(貫祖) | |||||||
시조26세 | 순성[順成] 東山大君 문천(文天) 大伐利 | 빈濱 | 관灌 | 윤淪 | 희희 | 정원(精元 | ||||
시조27세 | 추신[秋信] 思顯大君 | 선성왕[宣聖王 諱乂謙神靈 大君追尊王 만신(萬信) 원신(遠信) 대신(大信) | 미楣 |
| 무진(武進) | |||||
시조28세 | 희복(僖福) 浪川侯 희천(僖川) 浪川侯 | 신덕왕[嗣神德王53 諱景暉西紀 912年卽位 재위5년 | 광염(光廉) | 광우光祐 | 양유(良柔) | |||||
시조29세 |
적고 (29세) 직윤 (30세) 평산박씨 지윤(31세) 遲胤 (중,시조 1세) | 경명왕[嗣景明王]54 諱鼎英즉위 서기917년 재위7년 | 사경애왕(景哀王)55 | 섬暹 | 도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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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碩) | ||
시조30세 | 밀양(밀성) 박씨 | 남언침封密城大君 | 남입순封鷄林大 君 | 도덕度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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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有仁) | |||
고령박씨 | 남언성封高陽大君 |
| ↑ 강릉박씨 경주박씨 우봉박씨 해주박씨 구진박씨 노성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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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 -삼척박씨 | 남언신封速咸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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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박씨 -음성박씨 | 남언립封竹城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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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박씨 -충주박씨 | 남언창封沙伐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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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박씨 -무안박씨 | 남언화封完山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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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박씨 | 남언지封江南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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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박씨 | 남언의封月城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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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씨 | 남교순封金城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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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朴)씨는 시조(중조)가 분명히 밝혀진 것은 대략 70본 안팎이다.
그리고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하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재미있는 전설이 보인다.
신라이전 원시 부족사회인 기로육촌(欺盧六村)의 촌장들이
하루는 알(연)천(閼川) 언덕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차 양산(陽山) 아래 멀리 나정(蘿井) 수풀사이에
무지개 같은 서기가 뻗히고 용마 한 필이 끓어 절하는 것을 보고,
그 곳에 가보니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한 포(胞)가 있어 기이하게 여겨 헤쳐보니
그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때가 서력 기원전 69년의 일이요.
뒷날 그를 왕으로 삼아 신라를 세우니 그가 곧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이야기다.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이 되고 일성왕(逸聖王)의 대에서 크게 갈리는데
그 각파의 분적종을 보면 밀성대군파(密城大君)파,
고양대군(高陽大君)파,
속함대군(速咸大君)파,
죽성대군(竹城大君)파,
사벌대군(沙伐大君)파,
완산대군(完山大君)파,
강남대군(江南大君)파,
월성대군(月城大君)파,
국상공(國相公)파등 이렇게 아홉으로 나뉜다.
강릉 박씨 박순(朴純) 1187년(명종17) 난을평정
중시조 박순(朴純)은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31세손이요,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4세손이다.
그는 고려 명종조에 문과에 급제, 보문각 시어가 되고 좌승선, 남경유수 등을 거쳐
병부상서가 되었다가 1187년(명종17) 조원정(曺元正), 석린(石麟) 등이 모반하여
난을 일으 키자 대장군이 되어 이를 평정하고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정당문학, 중서시랑 평장사에 오르고 계림군에 봉해졌다.
만년에 강릉으로 낙향해서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고려조에서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순의 현손박지계(朴之桂)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부시랑, 서운관 부정을 거쳐 예문관 저핵과 참지정사를 지냈다.
공민왕이 최만생(崔萬生), 홍륜(洪倫) 등에게 살해당한
후 9년간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정몽주(鄭夢周)의 천거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은거했다.
조선 정조조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충경군에 봉해졌다.
강릉박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했다.
그 중 박중신(朴中信)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강릉부사를 지냈으며
박시형(朴始亨)과 박시문(朴始文)은 중신의 아들로 각각 세조와 성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시형은 1459년(세조5) 발영시에 급제,사헌부 장령,호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박사, 교리, 동부승지, 안동부사등을 지내고 예문관 직제학에 올라
호조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시문은 강릉도호부사를 지냈다.
박공달(朴公達)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고,
그의 종질 박수량(朴遂良)은 단상법이 엄하던 연산군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효자 정문이 세워지고 유일로 천거되어 용궁현감, 사섬시 주부 등을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경주 박씨박도덕(朴度德) 1033년(덕종 2) 문과에 급제
경주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영해(寧海), 면천(沔川), 강릉(江陵)등
박씨와 함께 상고세계에서 분적한 파사왕 계통이다.
따라서 경명왕의 여덟째 왕자인 언의(彦儀)가 월성대군에 봉해져서
월성으로 관적한 월성박씨와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다.
경주박씨는 파사왕의 25대손이요.
영해박씨의 시조 박제상(朴堤上)의 21대손인 박도덕(朴度德)을 중조로 하고 있다.
그는 1033년(덕종 2) 문과에 급제, 합문지후가 되고 1036년(정종2) 한림학사,
정당문학·검교태부 등을 역임했다.
1044년(정종 10) 이부상서, 문하시중, 참지정사가 되고
1054년(문종 8) 금자광록대부에 올랐다.
그는 나라에 이바지한 충성과 공훈도 컸으려니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그가 죽으매 왕이 조제를 내리고 정문을 세우게 했으며 특히 문효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경주박씨는 고려조의 명문으로서 관적지는 경주이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옮겨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내면서 영화와 번영을 누려오다가
중조 도덕의 11대손 앙(1451년, 문종2 문과에 급제)이 단종조에 홍문관 저작으로 있을 때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김시습(金時習) 등과 함께 수양산에 은둔하였다.
만년에 함안군 서부 광평리 백이산에 은거하면서 「동로( 김시습)와 함께
어느 해에 수양산에 있었던고? 꿋꿋한 충성,곧은 절개는 가을 서리보다 늠름했도다.
백이산 무성한 고사리 지금 누가 같이 캘꼬?
고마정 아래 시내에서 나 혼자 슬퍼하노라」라고 시를 지었다.
그는 복지한 후 유덕자와 학자들이 대를 이어 군내의 파벌이 되었으므로
그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명동 풍계산에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조 도덕의 증손 황(璜)과 소부자를 들 수 있다.
자는 한향(漢鄕).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열공 황은 1126년(인종 4) 문과에 등과하여
이부시랑, 간의 대부,중서시랑 등을 역임했다.
1135년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들어 갔는데 금나라 임금이
「너의 임금이 주색에 빠져 인도를 돌보지 않으므로 짐이 폐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하고 묻자
그는 「임금 과 신하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이니 신은 비록 죽을지언정 따를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금나라 임금이 크게 화를 내어 「네가 속국의 신하로서 천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리라」하고 형벌을 가했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금나라도 그의 충성에 감동하여 시신을 고국으로 보냈는데 왕이 분개하고 추모 하면서
「 박황은 살아서는 된서리를 맞아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졌고
죽어서는 해를 꿰뚫는 충신이 되었으니 이는 그 선조 박제상이 남긴 가르침과 절개가
백대에 흘러 내려온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비단 일백 단과 쌀 이천 섬을 부조하였으며, 예관 김부식(金富軾)에게 명하여
왕례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또 정려를 세우게 했으며 개부의 동삼사사 문하시중에 추증하고 문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소는 1341년(인종 19)등과하여 예문관 수찬이 되고
감찰어사에 옮긴 후 한림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를 지낸 후 이부시랑에 승진되었다.
의종 때 대장군 박지순(朴之順), 병마사 김영석(金永錫) 등과 함께 강서의 도적을 토벌하고
돌아와서 정당문학 겸 간관이 되었다.
그 때 지주사 정습명(鄭襲明)이 무고에 의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자
성재대관 14인과 함께 조서를 받들지 않고 북을 울린 후 물러났다.
문하평장사에 추증되고 월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절효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세조 앙의 5대손 제현(齊賢), 제인(齊仁) 형제가 빛난다.
송암 박제현은 재주가 뛰어나서 책을 읽으면 곧 외웠고 문자도 잘 지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20일동안이나 회생을 시켰다.
일찍이 자오시를 지어 어버이 모실날이 부족하다는 뜻을 나타냈고,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비바람 속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성묘함을 거르지 않았다.
상을 마친 후 아우 제인과 함께 조식(曺植)에게서 글을 배우면서
동문들과 더불어 강론 연마하여 견해가 정밀해지고 조예가 독실해지자 스승이 감탄하여
「함안의 고사는 난형난제다」라고 하였다.
안자(顔子)의 사물잠(四物箴)과 주자(朱者)의 십훈(十訓)을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면서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고, 효경론(孝經論)을 지어 자여질을 가르쳤다.
49세 때 추천을 받아 선공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덕을 감추고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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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암 박제인 역시 조식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학문과 덕을 닦는데 힘을 쓰자
정탁(鄭琢)이 「박제인은 남에게 알려 지지 않은 덕행을 지닌 군자다」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태릉참봉, 왕자사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 송라도 찰방이 되고 1601년 사임했다.
이듬해 시직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해 왕자사부로 부름을 받아
왕이 「왕자를 가르치는 데는 무슨 책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라고 묻자
「먼저 대학을 가르쳐야 하는데 소주까지 겸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왕은 왕자를 돌아보고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힘써 배우라」고 하였다.
1605년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이어 군위현감으로 나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제용감 판관에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1세조 앙의 아우 근무 역시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형과 함께 남하하여
진도로 들어가 그 후손이 진도에서 대성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대동보를 수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고령 박씨박섬(朴暹) 박환(朴還) 박련(朴連)
중시조 박언성(朴彦成)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9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둘째 아들로 고양대군에 봉해졌다.
고양(高陽)은 본래 대가야국으로 562년(진흥왕23) 신라에 합병된 후
경덕왕 때 고양 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다시 고령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고령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사인공파 파조 박섬(朴暹),
부창정공파 파조 박환(朴還),
주부공파 파조 박련(朴連) 등 3파로 나뉘어 세계를 잇고 있다.
고령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56명,
상신 1명, 청백리 4명, 호당 1명, 공신 1명을 배출하여 벼슬 열력으로는
밀양박씨, 반남박씨, 죽산박씨에 버금간다.
3파 중에서도 사인공파와 부창정공파가 인물을 많이 냈는데,
부창정공파는 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성세를 보인 반면
사인공파는 조선 후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사인공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은(朴誾), 박장원(朴長遠), 박양한(朴亮漢),
박문수(朴文秀) 등을 들 수 있다.
읍취헌(相翠軒) 박은(자는 중설(仲說), 호는 읍취헌(相翠軒))은 박담손(朴聃孫)의 아들로
한시로 조선 5백년에 걸쳐 으뜸가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5세에 이미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연산군 1년(14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 18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98년 사가독서를 했다.
승문원에 발탁되어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고,
호당을 거쳐 경연관으로 5년간 있으면서
바른말을 잘하여 연산군이나 대신들로부터 경원되었다.
당시의 권신인 류자광(柳子光), 이극균(李克均) 등을 규탄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파직당했다.
이 때부터 산수를 주유하면서 문주로써 소일, 독서에 열중하여 많은 책을 일었고,
1504년 지제교에 임명되었으나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동래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당했다.
1506년 신원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읍취헌유고(相翠軒遺稿)>가 있다.
문효공(文孝公) 박장원은 현종 때 서인의 중진으로서 이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인 매옹(梅翁)박양한은 숙종~영조대의 학자로 고산현감을 지냈다.
그의 저서 <매옹한록(梅翁閑錄)>은 인조대부터 숙종대까지의 시사를 엮은 것으로
귀중한 사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충헌공(忠憲公) 박문수(자는 성보(成甫), 시호는 충헌(忠憲))는
문효공 박장원의 증손이며, 박긍한의 아들이다.
그는 1723년(경종 3년)때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1724년(영조 1)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직되었다. 뒤에 소론이 집권하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를 뿌리뽑아 명성을 떨쳤다.
그 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착되고,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에 이어호서어사로서 기민을 구제,
1734년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1737년 병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 경상도 곡식 1만 석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다음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 지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손사부 등을 역임,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약방제조의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됐으나
다음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으며, 암행어사 시절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고령박씨가 낸 유일한 상신인 문익공(文翼公) 박영원(朴永元)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
철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도 사인공파에 속한다.
부창정공파의 박광순(朴光純)은 고려 말엽에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박광우(朴光佑)는 문하시중을 지냈다.
박우생(朴雨生) 역시 문하시중을 지냈고,
박임종(朴林宗)은 우왕조에 여러 차례 왜구를 방어하고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서는 박임종의 아들 무숙공(武肅公) 박만(朴蔓)이 건국초 야인의 침입이 잦자
도원수로 출정, 이를 격퇴시켰으며 정종조 제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예조판서로 이에 동조하지 않은 탓으로 유배되었다.
박처륜(朴處綸)은 성종 때 등과,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대사간·부제학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박영준(朴永俊) 역시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충숙공(忠肅公) 박난영(朴蘭英)은 선조 때 면천군수와 중군 등을 거쳐
1619년(광해군11) 강홍립을 따라 후금국 정벌에 나가 포로가 되었다가 8년만인
1627년(인조5)에 풀려나 귀국하여, 조선을 괴롭히는 후금에 회답관, 선유사, 선위사,
추신사, 춘신사 등으로 수차 왕래하면서 회유에 힘썼다.
그 후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장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등과 청영에서
청군이 화친 조건으로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자
왕족인 능봉군을 왕자로, 형조판서 심집을 대신으로 가장시킨 것이 탄로되어
청나라 장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학암(鶴巖) 박정번은 선조대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대의 유현들과 깊이 사귀었다.
삼오당(三吾堂) 박만중(朴萬重)은 인조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숙종조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폐위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성리학을 연구하여 제식을 작정했다.
근대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있다.
한국의 5대 대통령으로 박숙동의 후손이며, 박성빈의 아들로
1961년 육군소장으로 5·16군사 혁명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1962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다.
해 10월 5대 대통령 당선을 시작으로 그 후 6, 7, 8, 9대까지 역임했다.
재임중 2, 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과 조국 근대화에 몰두 하였으며,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여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중화학공업 육성, 자주국방등을 주창하는 등 우리나라 조국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장기집권 및 군사독재자라는 말도 듣고 있다.
1974년 8월15일 광복절에 육영수여사를 문세광의 총탄에 잃고,
그도 79년 10월 26일 그렇게 믿었던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지도자도(指導者道)> <민족 중흥의 길> 등이 있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중조 박서(朴犀)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0세손으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제 4자인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조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구주(龜州)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구주에 모여 성을 사수,
한 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몽고군은 구주를 버리고 개경을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구주를 공격하자 이를 다시 대파하여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뒤에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고 철성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죽산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그 후 6백여 년을 고성에 관적해 오다가
1839년(현종5)예조의 승인을 얻어 죽산(竹山)으로 복관,
현재는 죽산박씨의 한 분파를 이루고 있다.
경렬공(敬烈公) 박보로는 1375년 고려 우왕 1년에 밀직부사로
서해도 부원수겸 도체찰사가 되어 여러 번 왜구를 무찔러 공을 세우고,
서북면 원수 겸 도순문사로 승진했다.
뒤에 상원수가 되어 풍주(豊州)에 침입한 왜구와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그 후 서해도 조전원수가 되고, 1378년(우왕 4) 문하평리로서 안주 상운수겸
서북변 도체찰사가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세조 때 박식(朴埴)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 2등으로 철성군에 봉해졌다.
박애상(朴愛祥)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각 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고성의 귤도(橘島) 앞바다에서 순절했다.
박내경(朴來慶)은 현종조에 문과에 급제, 현감을 지냈고,
박사혁(朴師赫)은 영조조에, 박정검(朴廷儉)은 정조조에 각각 문과에 급제했다.
중조 박명훈(朴明勳)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고 전할 뿐
상계가 실전되어 분파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조에 전서를 지냈다고 한다.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게 된 유래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상들이 광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광주를 본관으로 삼은 듯 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후손이 경기도 옹진군 흥미면 식여리에
47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광주에서 언제 옹진(甕津)으로 옮겼는지도 알 수 없다.
중조 박천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9세손인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 언침(彦沈) 의 15세손이다.
그는 우왕조에 형 박위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워 구산군에 봉해지고
의흥현(義興縣)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구산(龜山)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의 흥면 수북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산 아래 중조가 살던터에
무검단을 모으고 무검재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단과 재실의 명칭을 무검이라 하게 된 연유는 원래 그곳의 지명이 무검동 이었으나
중조가 생전에 검소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았고,
또 그곳 사람들이 중조의 위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무검의 두 글자를 인용해서
무검동으로 고쳐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조참의를 지낸 겸산재(兼山齋) 박간(朴艮),
공조판서를 지낸 박진(朴震)등이 있다.
또 선조 때 한성부 판관을 지낸 회보(晦甫) 박경장(朴景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화왕산성 수비에 공을 세웠다.
중조 박헌(朴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2세손인 하신(河信)의 아들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속함대군 언신(彦信)의 15세손이다.
그는 고려 우왕조에 문과에 급제, 도사를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공조전서에 올랐다.
본관은 원래 함양(咸陽)이었으나 그의 원종공신 녹권에 본관이 군위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후손들이 함양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군위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699년(숙종2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낸 박희안과
1719년(숙종45) 별시문과에 병과롤 급제하여 정랑을 지낸 희안의 아들 태휘(泰彙),
그리고 희안의 손자로 1783년(정조7) 식년 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을 지낸 현보(顯輔) 등이 있다.
중조 박병묵(朴炳默)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상계가 실전되어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나주(羅州)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 이 본관을 나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범박씨세보(汎朴氏世譜)>에 의하면 조선조에 나주목사를 지내고
좌정승에 추증된 박취생(朴就生)을 중조로 하는 다른 계통의
나주박씨가 있다고 하였으나 그 역시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이 집안의 중요 인물로는 중조 병묵의 아들로 고려말에 호군을 지낸
박덕영(朴德瑛)과 덕영의 아들로 조선조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박도가 있다.
또 호조정랑을 지낸 박선문(朴瑄文)과 사복정(司僕正)을 지낸
선문의 아들 제창(齊唱)도 이 집안을 빛낸 인물이다.
중조 박연(朴延)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실전되어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 개국 초에 사헌부감찰을 지냈다고 한다.
노성(魯城)은 지금의 논산군의 일부로
이를 본관으로 하게된 연유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중조 이후 노성에서 세거했기 때문에 이를 본관으로 삼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충남(朴忠男)과 경남(慶南)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선조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평안남도 성천군 능중면 덕연리와 삼덕면 삼덕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조 박득의(朴得宜)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4세손으로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21세손이다.
그는 고려 태조 때 대승을 지내고 혜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혜성이 뒤에 면천(沔川)으로 개칭되고,
또 그 의 아들 박술희(朴述熙)가 면천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면천으로 하였다.
그러나 술희의 아들 정원(精元)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신기도령을 지낸 주를 1세조로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엄의공(嚴毅公) 박술희는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었다가
후에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전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광에 올랐다.
936년(태조19) 후백제를 칠 때 보기1만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며,
왕의 임종시에 군국대사를 부탁받고,훈요 10조를 전수받았다.
혜종을 태자로 봉하는 데 공이 컸고, 뒤에 혜종이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왕규(王規)가 역모를 품자 신변 보호를 위해 백여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새로 즉위한 정종으로부터 다른 뜻을 품었다는 의심을 받아 강화도로 유배된 후
왕명을 사칭한 왕규에 의해 살해 당한다.
태사삼중대광에 추증되었으며, 묘정에 배향되었다.
해은(海隱) 박심(朴諶)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고려 말 공조전서 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배를 타고 해주의 입암촌으로 들어가 불사 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황해도 일대에 분포하여 살게 되었다.
박삼길(朴三吉)은 박효순의 아들로 학문에 열중, 제자백가에 통달했고,
1474년(성종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정언 등을 거쳐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다.
연산군 때 병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으나 연산군조에 난정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력, 기로개 선생이라 일컫어졌다.
문온공(文溫公) 박여룡(朴汝龍)은 부호군 김수의(金守義)의 아들로서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율곡의 유집을 간행했다.
1573년(선조6) 중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81년(선조14) 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사옹원 직장에서 평양현감, 호조좌랑, 평시서령을 거쳐 공조정랑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1830년(순조30) 이조참판 겸 좨주찬선에,
1835년(헌종 즉위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해주의 방현서원에 제향되었다.
중조 박진승(朴進昇)은 시조왕 혁거세의 38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언화(彦華)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벼슬이 국자좨주에 이르고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주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무안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어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에 경기묘를 세워
중조 이하 15위의 제향을 드리고 있다.
무안박씨는 고려 초 무안 지방의 토호로서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21명, 공신 1명을 배출했는데,
문과 급제자 21명은 박씨 중에서 본관별로 일곱 번째 가는 숫자이다.
고려조에서는 중조의 아들 박섬(朴暹)이 현종 때 상서우복야를 지내고
문종 때 명신으로 각상에 도형 되었다.
또 그의 증손 박승중(朴昇中)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상안부 녹사를 거쳐 중서주서가 되었다.
예종 때 한림시독학사를 지내고,
이재(李載), 박경작(朴景綽) 등과 함께 예식을 정하고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찬진했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사에 오르고 참지정사를 거쳐
수태위, 증서시랑 평장사에 올랐으나 이자겸(李資謙)이 죽자 그 일파로 몰려 곧 유배당했다.
조선조에서는 풍정(楓亭) 박의룡(朴義龍)이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을 도와
개국원훈으로 호조, 병조, 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의암(義庵) 박익경은 성삼문(成三問)의 사위로 장인인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등과 도의로 사귀다가 1456년 그들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자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 묻어 주고 무안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세조가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병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효행이 출증하고 경학에 뛰어나 단종조에 효행으로 정릉 참봉을 제수받았다.
그의 아들 박호(朴壕)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호조판서를 지냈다.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은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경주 탈환전에서
화차와 비격진천뢰를 사용, 적을 대파한 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승진되었다.
그의 동생 박홍장(朴弘長)은 임진왜란 때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순천부사에 올랐다.
박대근(朴大根)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정을 정찰한 공으로
서부 참봉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특진되었고, 능을 범한적을 색출했으며,
사신을 따라 여러 차례 대마도를 왕래했으며,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박상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으로 무령군에 봉해지고
6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조선중기의 시인 여락당(余樂堂) 박창하(朴昌夏)는 고율시 5,6백 편을 남겼고,
그의 아들 박징(朴澄)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구한말 의병장 박윤식(朴潤植)은 궁내부 팔궁관으로 재직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을 총대장에 추대하고,
그는 총지휘 겸 운영대장이 되어 활약중 홍천 전투에서 적에게 피체,
경성 평리원에 수감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암살단과 결사대를 조직,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맹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는 박두성(朴斗星)은 서울맹아학교의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취임한 이래 한평생 맹아 교육에 헌신하였다.
1920년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6년 만에 완성,
점자로 번역한 도서가 성경을 비롯하여 76종에 이른다.
중조 박의중(朴宜中)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6세손이요,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16 세손인
인기(仁杞)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사예를 지내고 우왕 때 대사성, 밀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1388년(우왕14) 사신 으로 명나라에 가서 철령위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창왕 때 공신에 오르고 문의군에 봉해졌다.
또 공양왕 때 서운관에서 한양 천도를 상소하자 음양설의 허황함을 역설하여 이를 반대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
뒤에 검교참찬 의정부사가 되었다.
그의 맏아들 박연(朴衍)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제학을 지내고
정사공신으로문의군에 봉해졌으며,
둘째 아들 박행(朴行) 역시 문의백에 봉해져서 문의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박씨에서 분적, 박의중(朴宜中)을 중조로 하고 본관을 문의로 하였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녕(朴寧)을 들 수 있다.
그는 고려 말에 공조전서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72현의 한 사람이 되어 충절을 지켰다.
조선조에서는 박윤성(朴允成)이 조선 초에 평리전서를 지냈고,
박문덕(朴文德)이 홍문관 대 제학을, 박귀덕(朴貴德)이 부제학을 지냈다.
박윤경(朴潤卿)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조광조(趙光祖)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1513년(중종8) 식년문과에 을 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고,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을 지낸 뒤 낙향하여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박성순(朴性淳)은 174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이외에 임진왜란 때 해서(海西)에서 창의하여 절묘한 지략으로
왜적 6백여명을 수양산지성산성으로 유인,
지성 폭포에 모두 추락케 하여 수장시킨 박현민(朴顯民),
선조조에 훈련원 판관 겸 주부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박린(朴璘),
임진왜란 때 낙안 군수로 조령(鳥嶺)에서 전사한 박인정(朴仁定),
그리고 많은 적함을 불질러 침몰시키고 녹도 앞바다에서 순절한 박란(朴蘭) 등이 유명하다.
근세 인물로는 1907년 정미7조약(丁米七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해주 신천 등지에서 여러차례 왜병을 격파하는 등 많은 활약 을 하다가
문화의 구월산에서 전사한 박기로(朴基魯),
3 1운동 때 해주에서 독립 만세를 주도하고,
독립군에게 많은 군자금을 제공한 박기주(朴基周) 등이 있다.
중조 박한보(朴閑甫)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전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전후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일설에는 인제대군의 후예라 하고,
또 그의 아들 박광(朴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度祖)의 장인으로
안변부원군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문주는 문천 (文川)의 별호인데 어째서 본관을 문주로 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도 상고할 수 없다.
중시조 박언침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로 경명왕이 여덟 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밀성대군 (密城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성(密城) 이 뒤에 밀양(密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 밀성박씨라고도 한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져 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 하고 있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중시조 박언침의 8세에서 6파로,
그 아래에서 다시 6파로 나뉘어 크게 12파로 분파되어 파마다 중조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각기 또 여러 소파로 분파되어 내려오고 있다.
12파로는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언부(彦孚)파,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 언상(彦祥)파,
좌복야공(左僕射公) 언인(彦仁)파,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양언(良彦)파,
판도판각공(版圖板刻公) 천익(天翊)파, 삼사좌윤공 (三司左尹公) 을재(乙材)파,
규정공(糾正公) 현(鉉)파,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원(元)파, 밀성군(密城君) 척(陟)파,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中美)파, 영동정공(令同正公) 원광(元光)파,
정국공 (靖國公) 위파 등으로 나뉜다.
그 중 규정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 밀양박씨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 또한 규정공파, 밀성군파, 좌복야공파, 사문진사공파 등에서 많이 배출했다.
밀양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61명, 상신 1명, 문형 1명, 청백리 2명, 공신 6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특히 문과 급제자 261명은 우리나라 전체 씨족중에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청주한씨, 광산김씨에 다음가는 숫자인데 비해 상신과 문형이 적었다는 것은
밀양박씨가 조선조의 정치 권력 구조에 깊이 찹여하지 못했음을 뜻하며,
그 원인은 밀양박씨와 왕실 권려고가의 상관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규정공파의 중추적인 인물로는 나산경수 박강생(朴剛生)과 그의 아들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을 들 수 있다.
박강생은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현손으로 고려 말에 집현전 제학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태종∼세종대에 수원부사, 안변부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충정공(忠貞公) 박심문은 박강생의 아들로 절신으로 유명하다.
1436년(세종18) 친시문과에 급제, 기주관, 평안도 판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1453년(단종1)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가 살해되자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중
1456년(세조2) 질정광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성삼문 등이 참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끝에 음독 자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은 심문의 중형 절문의 아들로 계유정난에 가담,
정난공신 2등으로 밀산군에 봉해지고 세조 때 공조,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또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니 공간공(恭簡公) 박건(朴楗)은 중손의 아들로
단종 때 문과에 급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내고 중종 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3 등 으로 밀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은 박조의 아들로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 교리, 영월군수 등을 지내고,
1546년(명종 1) 성천부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 후 사가독서를 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성, 우부승지를 역임한 후 명종 때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선조조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 후 동부승지, 대사성, 양관대제학,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문장공(文莊公) 박계현(朴啓賢)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냈다.
충정공(忠靖公) 박숭원(朴崇元)은 충원의 종제로 도승지,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죽은 뒤 호성공신에 추록되고 밀천군에 봉해졌다.
밀양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 숙민공(肅愍公) 박승종(朴承宗)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무렵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를 시해하려고 흉모를 꾸미자
그는 이를 적극 말리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등 폭정에는 휘말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는 아들 자흥(自興)의 딸이
광해군의 며느리로 세자빈이 되어
그 일족이 권세를 누렸음을 자책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다.
이 외에도 중종대의 무신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제자를 길러낸 문목공(文穆公)
박영(朴英),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돈령록(敦寧錄)>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문헌공(文憲公) 박성원(朴聖源) 등이 유명하다.
사문진사공파에서는 정재(貞齋) 박의중(朴宜中)이 고려 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 검교 참찬이 되었다.
그는 성리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다.
의중의 손자 평간공(平簡公) 박거겸(朴居謙)은 무신으로 당대의 손꼽히는 명궁이었다.
그는 도총관,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성종 때 좌리공신으로 밀산군에 봉해졌다.
이정공(夷靖公) 박열(朴說)은 중종 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박종남(朴宗南)은 무신으로 선조 때 호적(胡賊)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야인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李舜臣)의 주사 조방장이 되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 충장공(忠壯公) 박영신(朴榮臣)은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막다가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던 중
포로가 되어 참살을 당한 절신이다.
좌복야공파의 인물로는 문헌공(文獻公) 박연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박천석의 아들로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 집현전 교리, 지평, 문학 등을 역임하고,
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당시 조율이 불완전한 악기 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주장,편경 12매를 제작하는 등
궁전 음악의 미비점을 대폭 변경,수정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 중추원 부사 등을 역임,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명음악가로서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으로 불리운다.
영동의 초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악기를 개량하는 등 민족 음악 발전에 큰 업적을남겼다.
그의 사촌 박흥생(朴興生)은 세종 때 13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7세에 생원이 되었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밀성군파에서는 파조 박척(朴陟)이 충선왕 때 흥위위의 무장으로 공이 있어
밀성군에 봉해 졌다.
그의 7세손 박척(朴瘠)은 정종의 부마가 되어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청숙공(淸肅公) 박신규(朴信圭)는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충간공(忠簡公) 박이서는 척의 11세손으로
선조 말에 이이첨(李爾瞻)을 논핵하다 파직되고
광해군 때 폐모론이 나오자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삭직당한 후 복직되어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해상에서 풍랑으로 행방불명 되었다.
그의 7세손인 효정공(孝靖公) 박장복(朴長復)은 순조 때 판서를 지냈고,
문정공(文貞公) 박승휘(朴承輝)는 척의 11세손으로 순조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삼조보감(三朝寶鑑)> 편찬에 참여했다.
위에서 열거한 각 파의 주요 인물도 인물이지만 밀양박씨는
영조∼정조대에 실학의 대가 박제가(朴齊家)를 배출하여 더욱 유명하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으며,
이덕무(李德懋), 류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시문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2)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이조원(李調元)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했고,
다음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1794년 춘당대 무과에 장원하고 오위장을 거쳐 그 후 영평현감을 지냈다.
반남박씨의 세계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潘南縣) 호장을 지낸
박응주 (朴應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이지만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계보와 분적의 연원을 밝히지 못한 다.
그래서 반남박씨는 그를 시조라 하지 않고 선조로, 박혁거세를 도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선조의 발상지와 세거지가 반남이므로 이를 본관으로 하였다.
선조 박응주의 묘소는 나주군 반남면 흥덕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반남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15명, 왕비 2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호당 5명, 청백리 1명, 공신 6명, 장신 3명에 문묘에 배향된 분도 1명이 있어
모든 박씨 중에서 벼슬 열력이 가장 화려하다.
반남박씨가 이토록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이
고려 말에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고,
그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박은이 조선조에 들어와서
반남박씨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문정공 박상충(자는 성부(誠夫), 시호는 문정(文正))은 공문왕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되었다.
당시 예의사에서 관장하는 향사의 의식이 일정하지 못하므로 그가 고서를 참고,
사전(祀典)을 작성했다.
우왕 초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했는데 김의의 종자가 돌아오자
이인임(李仁任), 안사기(安師琦) 등친원파가 대우를 극진히 하므로
그가 「김의가 명사를 죽인 죄는마땅히 다스려야 할 것인데 재상이 그 종자를 후대한 것은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한 것이 분명하오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에 화가 미칠 것이다」
고 상소하여 안사기를 처형케 했다.
이인임등이 백관과 연서하여 북원의 중서성에 글을 보내려 하자 그는 선왕이
이미 명을 섬기기로 하였는데 다시 북원을 섬길 수 없다하여 서명을 거절했다.
판전교시사로 있을 때 북원의 사신이 오자 또 상소, 원을 섬김이 불가하다하여
사신을 돌려보내게 했다.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친원파의 죄를 다스리라고 상소하다
도리어 연루, 장류도중 죽었다.
경사와 역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예도에 밝았다.
그의 아들인 평도공 박은은 고려 말에 개성부 소윤을 지내고 조선 개국후
두차례의 왕자 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오르고 태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박규(朴葵), 박강(朴薑), 박훤(朴萱)은 박은의 아들 로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박규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규는 세종 때 예조와 형조의 참판,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다가 훈구파에 의해 파직되었다.
소의 아들 응천(應川), 응순(應順), 응남(應男), 응복(應福), 응인(應寅) 5형제도
모두 현달했으니.
박응천은 중종조에 한성부서윤을 지냈고,
정의공 박응순은 딸이 선조비가 되어 반성부원군에 오르고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문정공(文貞公) 박응남은 명종조에 참의를 지냈으며 박응인은 도정을 지냈다.
이들 5형제 중에서도 맏이 응천, 넷째 응복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은 응천의 아들로 선조조에 보덕을 지냈고,
동생 정헌공(貞憲公) 박동선(朴東善) 은 인조조에 좌참찬을 지냈다.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은 동선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에 오르고 금주군에 봉해졌다.
박세견(朴世堅)은 정의 아들이고,의 중진으로 숙종조에 좌참찬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박태상(朴泰尙)은 세견의 아들 이다.
철종조에 좌의정에 오른 숙헌공(肅憲公) 박회수(朴晦壽)는 태상 의 5대손이다.
또 문정공(文貞公) 박세당(朴世堂)은 세견의 동생으로 숙종 때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다가 파직 되었다.
그는 부제학 박정의 아들로 1660년(현종 1) 증광문관에 장원하고 부수찬,
황해도 암행어사를 거쳐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낸 뒤 숙조 때
공조와 이조 및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소론에 속한 실학파 학자로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저술하고 농촌 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의 학풍을 이룩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이증환, 안정복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 알려졌다.
저서로는 <사변록(思辨錄)> <산림경제(山林經濟)> 등이 있다.
박태보(朴泰輔)는 세당의 아들로 백부 세후에게 입양 됐다.
그는 숙종 때 호당을 거쳐 암행어사 등을 지내고 기사환국(己巳 換局)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 도중 죽었다.
문정공(文 貞公) 박종훈(朴宗薰)은 태보의 5대손으로 헌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나 순조의 행장을 지었다. 한말에 개화파 인사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핵심이었던 문익공(文翼公) 박정양(朴定陽)도 응천의 후손이다.
그는 한말 총리대신으로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
판관 박제근의 아들로 1866년(고종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참파 등 을 걸쳐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도일,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이용사 당상 경리사가 되었다.
그후 협판교섭통상사무, 도승지, 협판내무부사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887년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도미, 미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 했다.
1889년 귀국한 후 호조판서, 교정청 당상, 한성부 판윤등을 거쳐 갑오경장 후
제1차 김홍집 내가그이 학부대신이 되고, 이어 내각 총리 대신이 되었다.
1896년(건양1)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이 살해되고,
내각이 의정부로 개혁되면서 참정대신이 되었다.
한편 박응복의 가계에서는 그의 아들 박동열(朴東說)이 1608년(광해군1) 충주목사,
대사성에 이어 예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부당하다고 상소하자
이에 격분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을 깎아 버렸다.
그러자 이에 대로한 광해군이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 실패,
조정에 있기를 꺼려 나주목사로 나갔다.
충익공(忠翼公) 박동량(朴東亮)은 그는 대사헌 박응복의 아들이자 동열의 아우로
1590년(선조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검염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에 호종하고,승지에 승진하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이어 동지증추부사·도승지를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금계군에 봉해지고 형조판서를 지낸 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문정공(文貞公) 박미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와 결혼하여 금양군에 봉해졌고,
미의 동생 박의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사위로 인조조에 호당에 뽑히고 홍문관의 수찬,
교리, 장령 등을 지냈다.
당대의 유종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는 박의의 아들로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으며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어 좌의정에 올랐다.
충희공(忠僖公) 박명원(朴明源)은 박미의 5대손으로 영조의 딸 화평옹주와 결혼,
금성위가 되었다.
글씨를 곱게 써서 나라의 애경사 때 여러번 금옥보책명정서관에 임명되었고,
죽은 뒤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신도비를 세웠다.
실학파 학자로 유명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실학자이며,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지돈령부사 박필균의 손자이며 박사유의 아들이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고,
1780년(정조4)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인들의 이용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뜻을 두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을 거쳐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내고, 양양부사에 승진했다가
1801년 (순조1)사직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당시 홍대용.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그 가쓴 열하 일기(熱河日記)>는 정치,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실학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고루한 양반을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정경대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연암집(燕巖集)> <허생전(許生傳)> <과농소초(課農小抄)>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그의 아들 문익공(文翼公) 박규수(朴珪壽)는 박지원의 손자이며, 박종채의 아들로서
1848년(현종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병조좌랑 등을 거쳐
1864년(고종 1) 병조참판, 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873년 우의정에 올라 사임, 다음해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이에 호응,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으며,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헌공(忠憲公) 박종악(朴宗岳)은 박미 의 6대손으로 정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한말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 이자 철종의 부마인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영효(朴泳孝)도
미의 후손 이다.
그는 한말 궁내부대신을 지냈으며,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1882년 수신사로 도일,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했다.
일본의 조야를 시찰하고 돌아와 정치적 개혁을 기도했으나
수구파들의 정권장악으로 실패, 이어 한성부 판윤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3일만에 실패하여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일본으로 망명,
1894년 갑오경장으로 귀국하여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그 후 반역음모 사건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대신에 임명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후작이 되었으며,
뒤에 중추원 고문을 거쳐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세양공(世襄公) 박강(朴薑)은 세조조에 좌익공신 3등으로 금천군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박용(朴墉)은 딸이 세자빈 (인종의 비인 인현왕후)에
책봉됨으로 해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의 아들 공순공(恭順公) 박숭질(朴崇質)은 연산군 때 좌의정에 올랐으나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100여 일 동안 등청하지 않아 면직되었다.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으로 인해 후일 중종반정 때 일문이 무사하게 되 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조 박우(朴瑀)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9세손인 박제상 (朴堤上)의 동생
지상(地上)의 25세손이며,
고려조에 상서를 지낸 영주 (英柱)의 증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벽상공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병산군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병산사에 제향되었다. 본관은 병산이 비안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비안으로 하였다.
비안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7명을 배출했다.
중조 박우의 9대 손 박서생(朴瑞生)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판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수차의 사용을 건의하여
관개에 혁신을 가져와 농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서생의 손자 박효원(朴孝 元)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사간을 지냈다.
박대인(朴大仁)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박준(朴峻)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선조조에 참봉, 현감 등을 지냈고, 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징빈(朴徵賓)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령을 지냈고,
그의 아들 박수유(朴垂裕)는 영조 때 문과에 급제, 현감을 지냈다.
또 박징좌(朴徵佐)도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을 지냈다.
중조 박자문(朴自文)은 신라 제2대 남해왕의 둘째아들로
사수군주에 봉해진 환(桓)의 46세손이며,
고려 충렬왕조에 공부상서, 첨의평리 등 을 지내고 사주군에 봉해진 인겸(仁謙)의 손자이다.
그도 역시 고려 공민왕조에 공부상서를 지내고 사주군에 봉해졌다.
본관은 사주(泗州) 가 뒤에 사천(泗川)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사천으로 관적하였다.
사천 박씨는 관적지를 떠나 주로 함경남도 일대에서 살아왔는데
그 까닭은 중조 박자문이 고려 말에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함경남도 안변에 은거 했다가 뒤에 영흥으로 들어가 살았고
또 그의 10세손 용계(龍桂)가 함흥으로 가서 세거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인 박창조(朴昌朝)는
1783년(정조7) 식년 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 직강, 사예 등을 거쳐
연서도 찰방을 지냈다.
중조 박원경(朴元鏡)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9세손인
박제상(朴堤上)의 동생 지상(池上)의 3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상서좌복야에 오르고 삼척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삼척(三陟)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신단비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삼척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박여량 (朴汝樑)은 1600년(선조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 사간 등을 지냈고 박홍규(朴鴻逵)는 1733년(영조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중조 박언창(朴彦昌)은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자
신라 제54 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917년(경명왕1) 사벌대군에 봉함을 받아 사벌방어장으로 외적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려와 후백제 의 침략을 받아 영토가 낙동강 동쪽으로 축소됨에 따라
사벌주가 고립 되자 그는 사벌주를 사벌국이라 하고 왕으로 자립, 통치하다가
11년 만에 후백제에게 패해 망했다.
이 사실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이언적 (李彦迪)이 사벌국사를 저술,
비장했던 것을 후손 박세준(朴世俊)이 발췌, 유전함으로써 밝혀졌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덕천창 부사를 지낸 견을 1세조로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사벌국이 고려 초에 상산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상산이라 하였다.
상산박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2명, 호당 1명, 공신 2명을 배출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臣)이 있다.
그는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408년(태종8) 사간원 좌정언이 되고,
1424년(세종6) 회례사가 되어 불경을 가지고 일본에 다년온 뒤,우사간에 이어
병조, 예조, 형조, 공조, 이조참판, 대사헌,황해도를 비롯해
각 도의 관찰사,형조판서, 우참찬, 공조판서 등을 지냈고 치사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조 이조판서에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했다.
그의아들 박이창(朴以昌)은 문종조에 참판, 관찰사 등을 지내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갈 때 원로에 대비, 양미를 많이 가지고 간 것이 죄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자 국법을 어기어 면목 이 없다 하고 자결했다.
문강공(文剛公) 박세희(朴世熹)는 중종 때 문과에 장원, 호당에 뽑히고
기묘사화 때 좌승지로 있다가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강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아우 박세후(朴世煦) 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박충간(朴忠侃)은 세후의 아들로 음보로 여러 청환직을 거쳐 1589년(선조22) 재령군수로
재직중 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알려 평난공신 1등으로 상산군에 봉해졌다.
뒤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선곡(選曲) 박건중(朴建中) 은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경전의 주소와 제가의 예설을 증보하여 <상례비요보(喪禮備要補)>를 편찬하였다.
중조 박선민(朴善敏)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21세손 이다.
그는 목사를 지내고 관적을 선산으로 받았기 때문에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하였다.
선산박씨는 주로 함경남, 북도에 본거를 두고 있는 성씨인데,
그 까닭은 중조 선민의 증손 박숭이 조선 초에 부원군의 신분으로
함경 북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당했고, 그의 아들 박임창(朴林昌)이 수군 절도사를 지내고
함경북도 길주로 들어가 세거했으며 임창의 아들 박장(朴章), 박원후(朴元厚),
박근손(朴根孫) 형제 중 원후의 아들 박술량(朴述良)이 그의 숙부인 우후 박근손과 함께
함경남도 단천(端 川)으로 이사하여 세거하였기 때문이다.
순창박씨는 전주박씨에서 분적한 씨족이라 하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혈연 계통을 상고할 수 없다.
중조는 훈련원첨정을 지낸 박두간(朴斗 幹)으로 그의 선대 중 박제세(朴濟世)가
고려조에서 순창군에 봉해 졌기 때문에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세 와 두간 사이의 세계가 실전되어 세계를 헤아리지 못하고
계대가 가능 한 박두간을 중조로 하게 된 것이다.
중조의 묘소는 개성(開城)의 용흥동(龍興洞) 부소산(扶蘇山)에 있다고 한다.
주요 인물로는 거제 부사를 지낸 박창식(朴昌植)과 군수를 지낸 박우현(朴宇鉉)이 있다.
유일한 문과 급제자 박문규(朴文逵)는 1887년(철종24)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순천박씨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 의 일곱째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아들
영규(英規)를 중조로 하고 있다.
그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 훤장군이 되었 는데
935년 견훤이 왕위 승계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하자
그도 이듬 해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귀부(歸附)할 뜻을 비치고
태조가 신검을 칠때 내응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공으로 좌승(左丞)에 임명 되고 승주군에 봉해졌으며 전답과 말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혜왕 때 보문각 대제학, 관동존무사를 지낸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로 하였다.
중조와 1세조 사이에 고려조에서 평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죽어서
순천 인제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박난봉 (朴蘭鳳)을 득관조로 하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난봉이 영규의 증손이요, 숙정의 6대조다>하였으나
<순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본관은 중조 영규의 아버지인 언지가 봉군된 강남(江南)이
순천의 형승(形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중조의 발상지인 순천이 신라 때 승평(昇平), 고려조에 승주(昇州) 등 으로 불려지다가
충선왕 때 순천을 개칭되었기 때문에 순천으로 하였다.
순천박씨는 고려 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명문의 기반을 굳혔고,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35명, 상신 1명, 호당 2명, 청백리 1명, 공신 8명을 배출했다.
1세조 숙정의 손자 박천상(朴天祥)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평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박가흥(朴可興)은 고려말에 좌정승을 지내고 가흥의 동생 박가실(朴可實)은
판계림부윤, 박가권(朴 可權)은 판개성부윤를 지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석명(朴錫命), 박중림(朴仲林), 박팽년(朴彭年),
박중선(朴仲善), 박원종(朴元宗) 등을 꼽을 수 있다
.
문숙공 (文肅公) 박석명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공양왕 때 우부대언,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392년 개국되자 한때 은거했다가
1399년(정종1) 좌산기상시에 등용된 뒤 안주목사,
도승지를 거쳐 1401년 태종을 옹립한 공으로 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에 봉해지고 뒤에 지신사를 거쳐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은 이조판서 박중림의 아들이며,
시호는 충정(忠正), 사육신중 한사람이다.
1434년(세종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를 거쳐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세종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고, 1456년(세조2) 형조참판으로 성삼문,
하위지, 이기, 류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사형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과천의 민절서원, 흥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박중선(朴仲善)은 조선 판돈영부사. 자는 자숙(子淑). 시호는 양소(襄昭). 지돈령
박거소의 아들이다.
음보로 선전관 등을 거쳐 1460년(세조6) 무과에 장원하고, 훈련원 부사가 되었다.
이어 지훈련관사, 판군기감사, 지병조사, 병조참판 등을 지내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평로장군으로서 난을 진압, 적개공신 1등으로
평양군에 봉해진뒤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이 되고,
숭정대부에 승진했으며 1471년(성종2) 좌리공신 3등이 되었다.
그 후 경기도 곤찰사를 거쳐 판돈령 부사에 이르렀다.
박원종(朴元宗)은 시호가 무열(武烈)이며, 박중선의 아들이다.
음보로 기용된 뒤 선전관으로서 무과 급제한 후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
공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연산군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정국공신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고,
그 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에 올랐으며, 평성부원군에 개봉되었다.
중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박성명의 손자인 양소공(襄昭公) 박중선은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
적개공신에 오르고 예종조에 남이(南怡) 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성종조에 좌리공신이 되고 판돈령 부사를 지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은 목사 안생의 아들이며 팽년의 아버지이다.
그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뽑히고 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아들 팽년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러댜 사형 당했다.
문하에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배출되었다.
충정공(忠正公) 박팽년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고
호당에 뽑혔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여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 등 일문이 참화를 입었다.
이 때 같이 화를 당한 사육신은 모두 멸문 의 화를 입어 정통 후손이 없게 되었으나
그의 둘째며느리(순(珣)의 부인)가 아들을 낳아 같은 무렵에 낳은 여종의 딸과
서로 바꾸어 키워서 생명을 보전, 오직 그만이 정통 후손을 이어왔다.
무열공(武烈 公) 박원종은 성종조에 무과에 급제, 중종반정에 주동적 역할을하여
정국공신 1 등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을 거쳐 이과(李顆)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 등에 오르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기는 신경진과 함께 역사상 단 두 사람뿐이다.
같은 무렵에 박이검(朴而儉), 박이온(朴而溫) 역시 정국공신에 녹훈되고,
각기 순성군과 승평군에 봉해졌다.
이 외에 의민공(毅愍公) 박이현(朴而絢)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성주(星州)의 가천(伽川)에서 순절했고.
민양공(愍襄公) 박춘무(朴春茂)는 창의사가 되어 호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 춘무의 아들 충경공(忠景公) 박동명(朴東命)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고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던 중 무계(茂溪)에서 적을 만나 분전하다 전사했다.
숙종 때의 학자 문숙공(文肅公) 박광일(朴光一)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왕자사부, 시강원 자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 했다.
박기정(朴基正)은 팽년의 후손으로 정조조에 승지·참판 등을 지내고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했다.
시조 박명달(朴命達)은 방적도위를 지낸 인물이라고 전해오지만 문헌 이 없어
그 세계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安東) 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안동박씨에서는 우리나라 국문학사상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노계(盧 溪) 박인로(朴仁老)를 낳았다.
그는 승의부위를 지낸 석(碩)의 아들로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난 인물로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시명을 떨친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의 막하로 종군, 공을 세우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하자 군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태평사>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수문장 선전관을 지낸 후 조라포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비를 확충 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고,
1630년(인조 8) 노인직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도학과 조국애, 그리고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
전쟁중에도 서정과 조국애가 넘치 는 작품을 썼으며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가사문학을 발전시켰고, 시조 60여 수가 전한다.
영천의 도계향사에 제향되었다.
중조 박지석(朴之碩)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0세손이요,
밀양박씨 시조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20세손으로
고려조에 중훈대부 사재감 부정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환(奐)이 고려조에서 중랑장을 지낸 후
여주(驪州)에서 함흥(咸興)으로 이주하였고,
또 환의 종손 서창(徐昌)이 함길도 관찰사를 지낸 뒤 함경북도에 정착 했으며
지석의 아들 성장(聖章)은 조선 초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이원(利原)에 유배되어 3년만에 풀려나 경성(鏡城)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경북도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게 되었으며
본관은 조상의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여주로 하였다.
이 밖에 같은 계통이면서 상계를 가리지 못해 사헌부 지평 공조정랑 등을 지내고
1451년(문종 1) 호조참의에 오른 박윤검(朴潤儉)을 1세조로 하는 파도 있다.
중조 박항(朴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9세손이요,
신라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10세손이다.
그는 고려 인종 때 좌정승을 지내고 영암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박통(博通) 역시 고려 명종조에 공이 있어 영암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암(靈巖)으로 하게 되었다.
영암박씨는 고려조에서 대대로 영화를 누렸으나
고려 말에 박성좌(朴成佐)가 절의를 지키고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체 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조에서는 통의 아들 박광(朴光)이 시중을 지냈고,
광의 손자 박기 (朴璣)가 충숙왕 때 이부상서를 지냈다.
기의 증손 박성좌는 이색(李穡)의 생질로 외숙에게서 수업하고 고려 말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와 죽마고우로 고려조에서 같이 국사를 논의하던 처지 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종적을 감추고 태조가 승상의 자리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끝내 거절했다.
박세보(朴世甫)는 성좌의 증손 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제조에 이르렀으나
연산군 때 정치 가 문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경원(朴慶元)은 1624년(인조 2)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중조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파사왕의 현손 물품의 맏아들이다.
본관은 그의 26세손 박명천(朴命天)이 고려조에 전법판서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지고 예원이 영해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영해(寧 海)로 하였다.
박제상은 내물왕 때 삽량주의 태수로 있었다.
내물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실성왕은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일본 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수교를 하였다.
그 후 내물왕의 제일 왕자 눌지(訥祗)가 실성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볼모로
이국에 가 있는 왕제들을 그리워하며 근심하자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을 쩜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 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자 그는 바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 으니
그 노래가 유명한 <우식곡(憂息曲)>이다.
한편 미사흔을 떠나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왕제는 몸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오>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나는 계림의 신하다> 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이
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이 사실을 혈서로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 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후 세 사람들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충렬묘와 치산서원, 양산에 효충사, 춘추원,
공주에 동계사, 영덕에 운계서원 등을 세워 제향 하였다.
또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 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 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 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기(阿奇) 아경(阿慶)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 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 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가 보게 하였던 바 치술암 기슭 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러한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 은 <신라 천년에 으뜸하는 충신이다>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하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 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중조 박중화(朴仲華)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상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조에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운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 을 운봉(雲峰)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김포군 하성면 가금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조의 증손 박신(朴信)과 그의 아들 박종우(朴從 愚)를 들 수 있다.
혜숙공(惠肅公) 박신은 박지의의 아들이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85년(우왕 11년)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규정을 거쳐 예조 형조의 좌랑을 역임 했다.
조선 초에 봉상시 소경을 거쳐 대사성이 되고, 정종조에 형조 전서가 되었다.
태종 때 개성유후 한성부윤 등을 지내고 대사헌이 되어 언사로써
왕의 비위에 거슬려 귀양갔었으나 동북면 도순문찰리사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후 지의금부사 찬성사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세종조에 선공감 제조로 있을 때
부하 직원이 저지른 부정 사건에 관련되어 통진현에 유배되었다가 13년 만에 풀려났다.
성렬공 (成烈公) 박종우는 태종의 사위로 운성군에 봉해지고,
명나라에 사신 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후 경상좌도 도병마절제사, 삼군장수 등 을 거쳐 호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세종조에 함길도 도 체찰사 등을 지내고 단종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을 도와 정난공신 1등으로 운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중조 박윤웅(朴允雄)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6세손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와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숙종 때 동여진의 침범을 막았고,
다시 예종 때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과 함께
동여진을 격퇴하고 돌아와서 대장군이 되고 흥려백(興麗伯)에 봉해졌다.
본관은 흥려가 울산 (蔚山)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울산으로 하였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박추(朴諏), 박유(朴愈), 조선 조의 박홍(朴泓),
박율, 박응한(朴應漢) 등을 들 수 있으며, 조선조에서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11명이다.
여은(汝隱) 박추는 고려 말에 지한주사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유은(柳隱) 박유 역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한림원에서 벼슬하고
남평감무로 나갔다가 고려가 망하자 대흥(大興)으로 은퇴하여 절의를 지켰다.
박홍은 1556년(명종11) 무과에 급제,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적의 선봉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평양으로 피난가는 선조를 호종했우며,
성천(成川)에서 우위대장이 되었으나 다음해 전사했다.
오리(梧里) 박율은 효종 때 문과에 급제, 현종 조에 은산현감을 지내고
숙종 때 장령에 이르렀다.
저서에 <주학본원 (籌學本原)>이 전한다.
그의 아들 박두세(朴斗世)는 1682년(숙종8)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목사,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당시 국가사회의 정책, 제도를 문답식으로 풍자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가 전하며, 《삼운통고보유》를 편찬했다.
김재현(金在顯),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박응한(朴應漢)은
음보 로 경릉령이 되었으며, 학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중조 박언의(朴彦儀)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 54대 경명왕의 여덟째 아들이다.
그는 경명왕이 여덟 왕자에게 각기 분봉할 때 월성대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월성으로 하였으며,
월성이 경주로 개칭된 연유로 경주박씨라고 한다.
월성 박씨는 고려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크게 성장하였다.
중조 언의의 13세손 박구(朴龜)는
고려말에 중군사정 부령 등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인천의 장아산에 은거,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 위에 망경대를 세워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다.
그의 아들 박간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세종조에 청양현감,
단종조에 성균관 대사성 경주부윤, 성종조에 이조참판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간의 아들 박휘지(朴徽之)는 장례원 판결사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신겸(信謙) 호겸(好謙) 종겸(宗謙) 아들 3형제 를 두었는데,
둘째 호겸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관포(灌圃) 박홍미(朴泓美)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인조조에 창원 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의복을 하사받았으며 지방관 중에서 치적 이 제일이라 하여 경주부윤에 올랐다.
그의 아들 박대익(朴大益)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전적을 지냈다.
흥미의 종제 박홍중(朴弘中)은 음보로 세마를 거쳐 장령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을 공박하고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자 몰래 야식을 바치다가 탄로되어 원도(遠島)로 유배당했다.
문장으로 당시의 명인 석학들과 교유했다.
황암 박제인(朴齊仁)은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선조조에 태릉 참봉 왕자사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최영경(崔永慶) 하항(河沆) 김면(金沔) 등과 서로 격려하며 면학했다.
뒤에 왕자사부 형조좌랑 군위현감 제용감 판관 등을 지냈다.
중조 박치온(朴致溫)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이라고 전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혈연 계보와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 개국 초에 군수를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사적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본관을 은풍(殷豊)으로 하게 된 연유도 알 수 없다.
중조 박서(朴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아들 죽성대군(竹城大 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그는 죽산박씨의 지손으로 고려 고종조 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구주(龜州)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朔州 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 장군 김경손 등과 함께
구주에 모여 성을 사수, 누차 대포차 운제 등 온갖 무기로 공격해 오는 몽고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이를 격퇴했다.
구주를 버리고 개성을 먼저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군세를 정비하여 돌아가는 길에
다시 구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또다시 대파,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때 그에게 지병마사(智兵馬使) 최임수(崔林壽), 감찰 어사 민희(閔曦)가 와서
왕명이라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어기지 못해 항복했다.
뒤에 문하 평장사에 오르고 음성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죽산 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음성(陰城) 으로 하였다.
음성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순(朴淳) 박광옥(朴光玉) 등을 들 수 있다.
충민공(忠愍公) 박순은 박문길(朴文吉)의 아들로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의 휘하 장수로 요동정벌에 참가,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해 우왕 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이 되었다.
그 후 여러 왕자를 죽이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상왕과 친분이 두터운 그가 사신되기를 자원하여
1402년(태종 2) 함흥에 내려가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귀로에 올랐다.
한편 그를 쫓아가 죽이자는 측근의 간청에 못 이긴 태조는
그가 용흥강을 건널 무렵을 어림하여 신하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며
쫓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도중에 급병으로 지체하다가 간신히 배를 탔는데
결국 뒤쫓아 온 사람들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태종은 그의 공을 녹하고 관직과 토지를 내리는 한편 자손을 등용할 것을 명했고,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에게 모지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 열녀의 두 정문을 세우게 했다.
송시열(宋時烈), 민정중(閔鼎重), 홍석주(洪奭周), 김재찬(金載瓚) 등이 지은
묘표 시작 상량문 제문 등 그를 추모한 많은 글이 전한다.
판승추부사에 추증, 용강서원에 제향되었다.
경원공(景瑗公) 박광옥(朴光玉)은 사예 박곤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 문과에 급제, 봉상시정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학행으로 피천, 내시교관 종부시 주부를 지냈다.
157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춘추관 기사관, 전라 충청도의 도사, 지평,
예조정랑 등을 지내고 봉상시정 때 신병으로 사직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는 한편, 군량을 수집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권율(權慄)을 도왔다.
1593년 나주목사에 임명받아 병을 무릅쓰고 민심을 수습하며
흩어진 병사를 규합하던 중 죽었다.
광주의 의열사, 운봉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의흥박씨의 선계는 고려 왕족인 왕씨였는데,
고려말에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때 왕씨 일족에 대한 탄압을 모면하기 위해
박씨로 변성하였다고 한다.
시조 박을규(朴乙規)는 형 갑규(甲規)와 함께 고려 말에 병부상서와 이부상서를 각각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씨 일족에 대한 학살정책을 자행하므로 이들은 화를 피해 형은 중국으로 도피하였고,
아우인 을규는 지금의 충북 단양의 영춘에 숨어 살면서
성을 박씨로 고쳐 목숨을 보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의흥박씨세보>에도 나타나 있고
또 시조의 제단 비문에 <을규공은 신변과 후손 보전을 위해 영춘의 차의동으로 낙향,
성을 의흥박씨로 개성하였다>고 적혀있다
이래서 의흥박씨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본관을 의흥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다.
<세보>의 서문에 의하면 시조 박을규가 처음에 지금의 단양 차의동에 은거하였고,
4세 박근(朴瑾)의 대 이후부터 지금의 제원군 금성 청풍 학송 등지로 옮겨
많은 후손들이 살면서 세천지로 지켜왔고,
11세 이후 일부 자손들이 강원도 영월 등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경북의 의흥과는 하등의 연고가 없는데
어째서 의흥으로 관적하였는지 알수 없고
또 후손들이 의흥으로 옮긴 사실도 <세보>에 나타나 있지 않는데
1930년도 국세조사에 충북 제원군 금성면에 40호,
경북 군위군 부계면 의흥면 등지에 170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것으로 보아
시조가 왕씨 성을 감추기 위해 외가의 성인 박씨를 따랐다는 족보 서문에 미루어
외가의 성이 의흥 박씨였고
따라서 군위에서 산 의흥박씨는 을규 외가의 후손으로 을규의 계통과는 다른 박씨로 짐작된다.
시조와 2, 3세까지의 묘소가 실전되어
1973년에 제천시 장락동 4세 박근(朴瑾)의 묘역 왼쪽에 제단비를 세워
매년 향사하고 있다.
이러한 곡절을 지닌 의흥박씨가 관로를 트기 시작한 것은 3세 박득서(朴得瑞)부터이다.
그의 아들 박근은 관계에서 크게 활약하여 의흥박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흥박씨의 시조가 박득서로 되어 있고
또 <의흥박씨세보>에 박근을 <기복종덕지조(基福種德之祖)>라 하여 받들고 있다.
박득서는 운산유학교도를 지냈고,
아들 근은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 세조의 등극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충주목의 판관을 거쳐 성종 때 교하현감 나주목사
영암군수 소격서령 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했다.
박수검(朴守儉)은 의흥박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현종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진주목사 경상병사 예빈시정 등을 지내면서
김수항(金壽恒) 김만중(金萬重) 등과 보사공신 1 등에 책록되었다.
박양한(朴良漢)은 수검의 아들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장으로 안무사를 제수받아 공을 세우고
정려가 명해졌다.
한창 번성해 오던 의흥박씨가 영조조를 고비로 인물을 내지 못해
오늘날 희성의 반열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조 박률(朴律)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 君) 언침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인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양박씨에서 분적, 본관을 인제(麟蹄)로 하였다.
그의 손자 박통(朴通)은 고려조에서 영암군에 봉함을 받고
후에 함경남도 문천으로 들어갔으며, 통의 아들 박광(朴光)은 천호 벼슬 을 지냈다.
그리고 광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조부 춘(椿)에게 출가 한 후
조선이 개국되자 춘은 도조로 추존되고 부인 박씨는 경순왕비로 추존되었다.
그리고 광은 문하시중에 추증, 안변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조 박언화(朴彦華)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이다.
경명왕이 8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그는 완산대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은 완산(完山)이 전주(全州)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전주로 하였다.
우리 나라 박씨는 모두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주로 경명왕의 아들 8대군 아랫대에 분적되었는데,
이 전주박씨에서도 무안(無顔) 우주(紆州) 순창(淳昌) 평택(平澤) 안남(安南) 등의
박씨가 분적되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주로 함경남북도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입북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조 언화 의 아들 박웅(朴雄)이 고려 개국공신에 올랐고,
증손 박보진(朴輔辰)은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7세손 박혁(朴奕)은 평장사를 지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시조가 박지화(朴枝華)라고 되어 있으나
<세보>를 상고하지 못해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박지화 (1513~1592)의 호는 수암(守菴)이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현감을 지냈다.
시문이 고절하고 예서에 박통하여 <수암유고(守菴遺稿)>가 전하며
청안의 구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죽산박씨의 시조 박기오(朴奇悟)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으로 계림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죽주백에 개봉되고,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게 되었다.
죽산박씨의 세계는 박기오의 후손에서 철성백<서>파
찬성공<훤>파 태복경<의지>파 문광공<전지>파의 4파로 크게 갈린다.
철성백파의 파조 박서는 고려 고종 때 서북면 병마절도사로
몽고군이 대거 침입할 때 구주성(龜州城)을 사수하고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의 후손에게 음성(陰城)과 고성(固城)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에서 음성박씨와 고성박씨가 분적하게 되었다.
문광공파의 파조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는 문과에 급제, 사국 한림원의 벼슬을 역임.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고려의 양반 자제들을 뽑아 입시시킬 때 선발되어
정동성 도사 가 되었다.
귀국 후 안동부사를 거쳐 전중윤 지제교를 지내고,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삼사 좌사 한림 학사승지 밀직부사 개성부윤 등 을 역임하고
연흥군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 정승에 이르렀다.
충숙왕 때 수첨의찬성사 정당문학을 지내고
경원에 봉해진 문강공(文康公) 박원(朴遠)은 그의 아들이고,
죽산군 문보 문충공 덕룡 판서 수룡 제학 문화 충현공 문수는 모두 박원의 아들이다.
조선조에서는 55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상신, 그리고 호당 1명, 공신 3명을 배출했는데,
문과 급제자의 수는 박씨의 여러 본관 가운데 서 밀양(密陽) 반남(潘南) 함양(咸陽)
고령(高靈) 박씨의 다음가는 숫자이며, 상신 2명은 반남박씨의 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문헌공(文憲公) 만절당(晩節堂) 박원형(朴元亨)은 연흥군 박고의 아들로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직장 의금부 도사 등을 역임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좌승지 겸 지형조사를 거쳐 다음해 사가독서를 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좌익공신 3등이 되고,
여러 판서직을 거쳐 좌의정 에 오르고,
145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으로, 호조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내고, 1466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익대공신 2등으로 연성부원군에 진봉되고,
이어 영의정에도 올랐다.
그는 세종∼예종조에 걸친 충신으로 정승에까지 올랐으며 극히 청렴하고 검소했다.
어느 해 그의 생일날에 아들 정안공(靖 安公) 안성(安城)이 술상을 차려 올리자
그는 기쁘게 마시고 나서 <오늘밤 등불 앞에 몇 순배 술을 드니 너의 나이 서른 둘이라.
우리 집 가보로는 오직 청백뿐이니 부디 잘 전해다오>라는 시를 읊어
후손 을 경계했다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호(梨湖) 박홍구(朴弘耉)는 원형의 5대손으로 광해군 말년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 반정으로 삭직되고 이괄(李 适)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음모했다는 조카
박윤장(朴允章)의 사건 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했으나 숙종 때 신원 복관되었다.
박명현(朴名賢)은 영의정 박원형의 후손으로 선조조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
목사 홍가신(洪可臣)의 휘하에서 반란군을 청양(靑陽)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고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 방어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 면서 전공을 세워
1604년 청난공신 2등이 되고 연창군에 봉해졌다.
충민공(忠愍 公) 박명룡(朴命龍)은 인조조 이괄의 난 때 형 성룡(成龍)과 함께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난이 평정된뒤
고부 군수 병마우후 등을 지내고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의 방위전에서 전사했다.
이 밖의 인물로는 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죽성군에 봉해졌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갖고 방간(芳幹)측에 가담, 방원(芳遠)과 충돌했다가
참살당한 박포(朴苞), 임진왜란 때 청도 조전장으로 참전하고 뒤에 경상도와 공홍도의
관찰사를 지낸 한천(寒 泉) 박경신(朴慶新),
영조 때의 학자로 경전과 백가에 통달하고 시 서 화에도 능한 만봉(晩峰) 박종유(朴宗儒) 등을
들 수 있다.
중조 박진문(朴進文)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인
신라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으로
고려조 에 대장군을 지냈다.
본관은 중조 이하 대대로 진원에서 세거하였고,
또 가문을 중흥시킨 박희중이 진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진원(珍原) 으로 하였다.
진원박씨는 고려조에서 특별한 인물을 내지 못하다가
고려가 망할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토반으로 등장했고,
특히 조선 중기의 석학 박광전(朴光前)을 낳아 전남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진원박씨가 고려조에서 세력을 펴지 못했던 원인은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울 때
진원의 관할지인 대전면에서 기병하였고,
또 견훤의 아들 신검(神 劒)의 전설이 아직도 남면(南面)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 지방 토호들이 왕건에 대항한 세력의 중추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고려가 건국된 후 왕건의 미움을 산 이 지방 사람들이
중앙에 진출을 못하게 된것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중조 진문의 현손 박첨(朴瞻)을 들 수 있다.
그는 고려조에 공을 세워 순충론도 동덕좌명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
우문관 대제학 등을 지내고 익양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박홍서(朴洪瑞)는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홍서의 아들 박온(朴溫)은 구례감무를 지냈다.
진원박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이다.
그의 초명은 희종이었으나 태종이 그의 기국을 중히 여겨 희중으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전라도 경차관이 되어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축조에 크게 기여하여
주민들이 제방 위에 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다.
또 통사가 되어 일본에 가서 국위를 선양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벼슬은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집권자의 권리 남용을 시정,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집권자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강공(文康公) 박광전(朴光前)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왕자사부, 감찰, 현감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에 추대되어 왜적과 맞서 싸웠다.
그의 아들 박근효(朴根孝)는 동생 박근제와 함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합세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인 아버지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근세 인물로는 항일 운동가요, <향교의 제주>사건으로 유명한
양정 (陽亭) 박남현(朴南鉉)을 들 수 있다.
그는 한말 규장각제조를 지냈으며,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후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유림을 탄압할 계략으로
향교의 제주를 밀주라고 취체 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 초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유림계를 탄압하기 위하여 1차로 유림의 집결체인
향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향교제향에 절대 필요한 제주를 밀주라 하여 취체한 일본인
사와다를 그가 선동하여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형형식을 취하세 하고 항일하였다.
이에 분격한 일제는 그를 처형코자 하였으나 그 방대한 유림세력의 위세에 눌려
일보후퇴정책으로 이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방안 으로 일체는 전국 각 향교의 제주를 직접 제조케 허가하였다.
이는 항일운동사상 쾌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애국애족의 정신 이 투철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이며 의병의 자금 조달에
헌신 노력 하였고, 일생 동안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중조 박령(朴齡)은 시조왕 혁거세의 46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 언침의 17세손이다.
그가 고려 공민왕때 창원도호부사를 지내고 창원군에 봉해진 까닭으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남 마산시 남산에 있다.
창원박씨는 관적지인 창원보다 전라남도 고흥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다.
그 까닭은 증조의 손자인 진사 박동지(朴東智)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세 아들과 함께 지금의 고흥의 속면인 흥양으로 낙향하여 세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흥 일대의 창원박씨 후손들은 그를 입향 중조로 삼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지의 맏아들 박유원(朴由元)을 둘 수 있다.
그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헌납, 예조참의 등을 지내고, 세종 때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당시의 집권자들과 뜻이 맛지 않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를 방유정이라하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박경은 1470년(성종 2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 집의, 군수 등을 지냈다.
박사문은 1702(영조 38) 식년 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지냈다.
중조 박항(朴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0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한림원에 보직되고, 충주 목사, 우정언 등을 거쳐
충렬왕 때 승선이 되어 전주를 주관했다.
동지밀직 사사로 왕을 수행, 원나라에 다녀와서 좌명공신으로 춘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참문학사, 찬성사 등을 역임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군기, 군량, 군비를 징발할 때 원나라 원수 흔도와 우승 홍다구 등이 이를 감독하면서
행패를 부리자 왕에게 건의, 원나라 세조에게 글을 올려 왕을 좌승상행중서성사에,
김방경(金方慶)을 정동 도원수에 임명케 하여 흔도와 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게 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일처리가 공명정대했다.
본관은 중조가 봉군된 춘성이 뒤 에 춘천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춘천으로 하였다.
중종의 묘소는 강원도 춘성군 발산리에 있다.
춘천박씨는 고려조에서 성세를 누렸으나 조선조에서는 특출한 인물을 내지 못했고,
문과 급제자도 겨우 3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중조 항의 맏아들 박원굉(朴元宏)이 평장사, 둘째아들 박원비(朴元庇)는판사를 지냈고,
원굉의 아들 박안구(朴安具)는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박광선(朴光先)의 아들 박려(朴旅)가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직강을 지냈고,
박성근(朴聖根)이 1883년 (고종20) 식년문과에 을과로,
박상범(朴尙範)이 1890년(고종27) 경과에 병과로 각각 급제하였다.
중조 박영(朴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1세손이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대군(沙伐大君) 언창(彦昌)의 12세손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 벼슬은 부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충주가 고구려 때는 국원성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이를 취하여 진흥왕 때 소경을 두어
그 지방의 지배세력이었던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선대부터 토착한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충주박씨는 조선조에서 20명의 문과급제자와 1명의 상신 및 대제학,
그리고 청백리 1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상(朴祥)과 박순 (朴淳)을 들 수 있다.
문간공(文簡公) 박상은 조선 목사를 지냇으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다.
1501년(연산군7) 진사로 문과에 급제, 전라도사 재임시
연산군의 폐희 (嬖姬)의 아버지 우부리를 장살, 대죄했으나 중종반정으로 무사했다.
사간원 헌납 재임시 종친의월자승당을 반대하여 한산군수로 좌천 되었다가
그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호당에 뽑혔다.
응교를 거쳐 담양 부사 재임시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중종반정 후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반정훈신의 추죄를 상소,
권신의 격렬한 반발로 남평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여러 고을의 목사를 지내고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 나주목사로 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평생을 직절강명으로 일관, 귄귀의 배척을 받았으나
기묘사화 때에는 복상중이라서 참화를 면하고 피화자들을 구휼했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성현 (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한문4가>로 일컬어진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충공(文忠公) 박순은 상의 조카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을 거쳐 이조참의, 대제학,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고,
선조 초에 영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직했다. 시, 문, 서에 두루 뛰어났고,
특히 시는 당시의 풍을 따랐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
상의 아우 인 박우는 한성부좌윤을 지냈으며,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이다.
1510년(중종5) 진사로 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역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전횡을 일삼자 자청하여 남원부사로 나갔고,
뒤에 도승지로 있다가 허항(許沆) 등의 모함으로 공주목사로 좌천, 이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병조, 이조참의, 개성유수, 한성좌우윤을 지냈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을 감수, 만년에 전주부윤을 역임했다.
뒤에 도승지, 참의, 동지춘추관사 등을 거쳐 명종 때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고, 성품이 강직하여 권귀의 근질긴 모함을 받았다.
청백리에 녹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희수(朴希壽)는 명종조의 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로
선조조에 음보로 참봉에 등용되어
형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호남에서 박광옥(朴光玉)·고경명(高敬命) 등과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근세 인물로는 <떠나가는 배>의 작가 박용철(朴龍喆)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 외국 문학 소개에 공헌하였고,
이듬해 <신문학지>를 창간 주재했다.
애수, 회의, 상징이 주조를 이룬 섬세한 감각의 시를 썼다.
경향파에 대항, 순수시를 옹호하는 평론을 썼고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신극운동에도 참여했다.
중조 박원의(朴元義)는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 大君) 언침의 8세손인 삼사좌윤 을재(乙材)의 현손이다.
원의는 고려조에 문과에 장원,
벼슬이 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오르고 태안부 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양박씨에서 분적, 본관을 태안(泰安)으로 하였다.
그 후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 하여 번영을 누려 오다가 8세손 박비가
고흥감무 겸 근농병마 단련판관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송경에서 청산현 동면 대동리로 낙향했다.
그 후 비의 아들 박상덕(朴尙德)이 진주(晉州)로 이거하면서,
둘째아들 자주(自胄)에게 「너는 청산으로 가서 선영을 받들라」하여
자주는 청산에 남게 되었다.
이 때부터 후손이 진주와 청산에 분거 하여진주파·청산파로 갈라졌고,
자주의 둘째아들 일종(一宗)이 정읍 (井邑)으로 이거하여
다시 정읍파를 이루어 3파로 나뉘어졌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안도(朴安道)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으로 맞서 싸우다가 진주에서 전사했다.
호조좌랑에 증직되고, 진주의 충민사에 제향되었다.
박민(朴敏)은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장과 행의가 뛰어난 인물로 정묘호란 때 창의했다.
진주의 정강서원에 제향 되었다.
중조 박언상(朴彦祥)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 城大君) 언침의 8세손으로 밀양박씨 12파 중 도평의사공파의 파조이다.
그의 8세손 박거인(朴居仁)이 고려 말에 인의(仁義:지금의 태인)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자 그의 증손 박언생이 태인으로 본관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밀양박씨와 통합 하여 도평의사공파 안에 문정공파라 일컫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혜공(貞惠公) 박수량(朴遂良)이 있다.
그는 김개(金漑)의 문인으로 1514년(중종9) 별시문과에 급제, 지평, 승문원 정자 등을 거쳐
장령을 지냈다.
함경도 경차관이 되어 지방 관아를 순시할 때 안원보 권관 김주남(金周男)이
야인들에게 임의로 우마를 주어 불법을 행한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고,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주세붕(周世鵬)과 깊이 교유하여 유림간에 학자로 존경을 받았고,
30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집 한 칸을 장만하지 못할 만큼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박영건(朴永健)은 1514년(중종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정을 지냈다.
중조 박지윤(朴智胤)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1세손이요,
시조 박지윤(朴智胤)은 고려 태조의 왕비 박씨의 아버지로 벼슬은 삼중대광 시중에
이르렀으며, 평산에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였다.
신덕왕,희복(28세)---적고 (29세)---직윤 (30세손)---지윤遲胤 (중,시조1세)---
수문.수경 (2세)---승위,승경,승례 (3세)
벼슬은 삼중대광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한다.
본관을 평산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수 없으나
그의 아들 수경(守卿)의 딸이 고려 태조의 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지방 토착한 호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조상의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수경(朴守卿), 박인량(朴寅亮), 박경인(朴景仁)을 들 수 있다.
박수경은 중조지윤의 아들로 고려 초 태조를 도와 원윤이 되고
후백제가 자주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진압,
견훤(甄萱)과 조물군(曹物郡)에서 사워 이긴 공으로
원보가 되었으며 발성 싸움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태조를 구출했다.
정종 초에 내란을 평정할 때도 공을 세웠으나 광종 때 아들 3형제가 무고로 체포되자
걱정이 되어 병사했다. 딸은 태조의 비 몽량원부인이 되었다.
문열공(文烈公)박인량은 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요나라가 압록강 동족을 국경으로 삼으려 하자
진정표를 지어 압록강을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
요나라 황제가 그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그 후 예부시랑이 되어 류홍(柳泓), 김근(金覲) 등과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시문으로 크게 격찬을 받아 뒤에 김근의 글을 곁들인 <소화집(少華集)>이
중국인에 의해 발간되기까지 했다. 귀국 후 참지정사로 재임중 죽었다.
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문서를 전담했으며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했다.
또 신라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의 저서로도 알려져 있다.
장간공(章簡公) 박경인(朴景仁)은 예종 때 병마부사가 되어
윤관(尹瓘)의 여진정벌에 참여하였다가 부상당하여 정주(定州)에서 요향중
윤관이 9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그 방비의 불가능함을 들어 극력 반대했다.
전중감직문하로 있을때 송나라와 의 사신 교환을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국자쇄주를 거쳐 판삼사사에 이르렀다.
평주박씨는 평산박씨와 동원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혈연 관계를 따지지 못해
평산·평주로 갈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까닭 으로 평주박씨의 중조 박수경(朴守卿)이
평산박씨의 중조 박지윤(朴智 胤)의 아들이고,
또 평주는 평산의 고호로서 관적지가 같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주박씨족보>에 의하면 <중조 박수경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윤이 되고,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태조가 그에게 이를 평정하도록 명했다.
조물성(曹物城)과 발성(勃城)의 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밭 2백 결을 하사받고
광종 때 삼중대광이 되었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그 이상의 세계와
그 이하 박광렴(朴光廉)에 이르기까지의 세계를 상고할 수가 없어서
그를 중조로, 박광렴을 1세조로 하였다.>고 한다.
중조 박지영(朴之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으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다섯째아들인 사벌대군(沙伐大君) 언창(彦昌)의 후손 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박지영은 조선 태조 때 평택현사를 지내고 그곳에 정착하여 평택으로 관적했다.
그의 아들 박산(朴山)은 조선 초에 이조정랑을 거쳐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1456년(세조2) 함경북도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경원으로 이배당한 후 풀려나지 못해서 자손들이 그곳에 눌러 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후손들이 함경북도 무산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주요 인물로는 사과를 지낸 박준검(朴俊儉), 온성진관
황척파 권관을 지낸 박인규(朴寅奎) 등이 있다.
박규능(朴圭能)은 유일한 문과 급제자 로 1886년(고종2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함양박씨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 의 셋째아들인 속함대군(速咸大君) 언신(彦信)의 정통 후손이다.
경명왕이 여덟 왕자에게 각기 분봉할 때 셋째 언신이 속함대군에 봉해 졌기 때문에
그를 중조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朴善)을 1세조를 하고,
본관은 속함(速咸) 이 함양(咸陽)의 고호이므로 함양으로 하였다.
1세조의 묘소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사금동에 있다.
함양박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세조 선의 현손 박신유는 고려 고종조에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호남에서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응천군에 봉해졌다.
그에게 여섯 아들이 있어 6파로 갈리는데 첫째 박지문(朴之文)은 검교 군기소감을,
둘째 문원공(文元公) 박지빈(朴之彬)은 위위윤을 지냈다.
셋째 박지량(朴之亮)은 충렬왕조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연합군의 고려군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휘하 중군병마사로 대마도(對馬島) 를 무찌르고
일기도(壹岐島)를 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의 벼슬을 받았고,
뒤에 판삼사사에 이르렀다.
넷째 박지수(朴之秀)는 밀직부사를, 다섯째 박지온(朴之溫)은 감찰어사를,
여섯째 박지영(朴之 穎)은 금오위 중랑장을 지냈다.
이들 6형제의 6개 파에서 둘째 문원공 파의 수가 제일 많고,
넷째 밀직공파와 함께 인물도 많이 났다.
박장(朴莊)은 문원공 지빈의 아들로 군부총랑을 지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 그의 아우 문양공 박리(朴理)는 충렬왕 때 국자좨주에 이르렀다.
문제공(文齊公) 박충좌(朴忠佐)는 박장의 아들로 충목왕 때 찬성사, 판삼사사를 지냈고
공신으로 함양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청백해서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집과 의복은
선비로 있을 때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박초(朴礎)는 박리의 손자로 고려 말에 척불소를 올려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으며
조선조에 들어 와서 태종 때 이조판서,
대제학에 오른 인물로 세종 때 여진의 침범을 피해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기려는 것을 적극 반대, 국토의 위축을 막았다.
박우는 지수의 아들로 공민왕 때 판삼사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박인계(朴仁桂)는 호부상서를 거쳐 양광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우왕 때 왜구를 무찌르다 전사,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인계의 아들 박원렴(朴 元廉)도 호부상서를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문과 급제자 69명, 호당 2명, 청백리1명, 공신 2명,
장신 1명을 배출했는데 급제자 수는 밀양박씨와 반남박씨에 다음가는 숫자이다.
박습(朴習)은 원렴(元廉)의 손자로 태종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김제의 벽골제를 쌓아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세종 즉위년 병조판서로 <강상인(姜尙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고,
그의 아들 박의손(朴義孫)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함양박씨는 한동안 쇠운 을 맞이한 듯하다가 조선조 중기에
<향오린(鄕五鱗), 경팔립(京八立)>이 나와 활기를 되찾는다.
<향오린>이란 함양군(咸陽君) 박전(朴琠)의 6대손 눌(訥)의 다섯 아들인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종린(從鱗)을 말하고,
<경팔립>은 박세영(朴世榮)의 세아들 대립(對立), 사립(私立), 희립(希立)과 박세무(朴世茂)의
세 아들 소립(素立), 응립(應立), 성립(成立),
그리고 박세옹의 두 아들 정립(定立), 명립(名立)의 8종항간을 말한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각각 현직에 있으면서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 중 박대립은 의손(義孫)의 현손으로 선조조에 부제학, 대사헌, 형조, 호조,
이조의 판서를 거쳐 좌찬성을 지냈다.
그리고 대립의 아버지 박세영은 중종 때 돈령부 도정으로 글씨를 잘썼고,
세영의 아우 박세무는 군자감정을 지냈으며
초학자가 읽는 <동몽선습(童夢先習)>을 편찬했다.
박세옹 역시 세영의 아우로 한성 좌윤, 참의 등을 지냈으며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했다.
세무의 아들 박소립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박응립은 수안군수를 지냈으며,
응립의 아들 문목공(文穆公) 박지계(朴智誡)는 벼슬이 동부 승지에 그쳤으나
도덕과 학문이 높았다. 박영문(朴英文), 박영창(朴永昌)은 충좌의 5대손으로
종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오르고 함양부원군과 천령군에 각각 봉해졌다.
영창 의 손자 박민헌(朴民獻)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대사헌 ,
강원도 관찰사등을 역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중종 때 문과 에 급제, 호당을 거쳐 대사헌을 지낸 박홍린(朴洪鱗),
영조 때 무장 으로 총융사, 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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