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 조치
2021년 12월 26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4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도적이란 세상 모든 사람이 +를 추구하고 있기에 그 +를 –(마이너스)로 바꾸는 도적에 대해서 인간들은 존중하지 않습니다. 초대하지 않습니다. 도적이 우리 집에 오라고 먼저 연락 취하지 않습니다. 도적같이 주님이 오신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시공간을 주님 자신을 위한 시공간을 돌려놓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모든 자들은 ‘자기를 위해’삽니다. 이것은 천국의 삶에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나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한 이웃 형성’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이웃의 자리에다 예수님마저 꽂아놓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켜보는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도적같다’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낌새가 있어, 자기 아내를 미행했는데 아내가 어떤 남자와 더불어 복도가 긴 호텔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얼른가서 열쇠구멍으로 그 구멍으로 둘이 뭣하고 있는지를 살핍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그 긴 호텔 복도 저편에서 어떤 사람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도적같은 시선’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상하거나 기대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열쇠구멍 들여다 보는 것처럼 자신의 집중력을 가한 자기 관찰에 존중을 합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이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할 수가 없습니다.
열쇠구멍으로 보는 이 자리는 내가 마련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낯선 시선은 이미 나만의 자리에 도달했습니다. 나만의 은밀한 영역에 침범한 겁니다. 이로서 인간에게는 그 어떤 출구는 없습니다. 천국이란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로 빠져나가는 출구는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시는 바로 그 구멍이 곧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먼저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먼저 시선의 공격을 받은 자가 됩니다. 즉 평생 자신의 일, 혹은 자기 구원에 도모한 일이 얼마나 헛된 짓이며 아무짝도 소용없는 짓을 해왔음을 아는 겁니다.
내가 그동안 내가 선택한 주님에게 지사충성을 하고 헌신을 다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냥 ‘아는 사이’가 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종결된 겁니다. 이미 들켜버린 겁니다. 그동안 자기를 위해 충성한 그 지난 날의 헛수고가 아까워서 울음이 울꺽 올라오지요. 하지만 그 울음은 곧장 웃음과 기쁨으로 바뀝니다.
벌써 주님과 ‘아는 사이’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사이’란 함께 하는 사이입니다. 마태복음 1: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가 어떻게 마련되는 걸까요? 요한복음 11:39에서는 그동안 예수님을 잘 섬겼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가족에서 오빠 나사로가 먼저 죽게 됩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서러움에 북받쳤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만에 자신의 돌무덤에서 되살아났습니다.
누가 굳혀 닫힌 돌무덤을 열어젖혔을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하심’이란, 인간들이 예수님을 초청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그들이 죽어 마땅함을 아는 코스가 필요합니다. 움직이시는 분은 예수님이지 결코 인간들이 아닙니다. ‘도적’이란 움직임을 갖고 있습니다.
즉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기 있다고 한다면, 저기 계신 주님께서 내가 있던 이 자리에 찾아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에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앞으로도 그 십자가 사건이 현재화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에게는 ‘시간의 밀실’ 같은 것이 있어 그 안에 십자가 사건 중으로 모든 사건이 현재가 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나흘이나 돌무덤같에 갇혀 있는 것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거동락한 것이나 오늘날 우리들이 구십이나, 백세 평생을 산 것이나 모두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절차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 자체에 저주의 전류가 둘둘 감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오라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는 인간쪽에서 예수님에 대해 절교를 선언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그다음은 움직임을 무얼까요? 요한복음 14:3에 보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입니다.
이곳으로 데려가야 되는 자들은, 예수님의 자신의 몸으로 새로 생겨버린 구멍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간 세계에서 ‘예외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갈 자들도 예수님처럼 ‘예외적 존재’들로서 새로 생겨납니다. 출애굽기 9:4에 보면, 애굽 나라에 10가지 재앙이 떨어져 가축들이 죽을 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이 사는 땅에만 예외적으로 가축들이 죽는 재앙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의 ‘예외적 존재’의 특수성을 그대로 이스라엘의 본질로 집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출 10:23)
오늘 본문에서, “평안하다, 안전하다”라는 말들로서 이 세상에 채워져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던 성도가 존재하는 것은, ‘도적같이 오신다’이 말씀 자체가 마리 성도가 될 자들에게 미리 도적같이 일찍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오로지 ‘예외 조치’에 해당됩니다.
이들 성도는 예수님처럼,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요일4:12) 이 형편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내세우지 말고 그저 주님과 아는 사이가 됨에 감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21-12-26 19:21
18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예외조치)21122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성경 말씀은 우리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 불편한 말씀 가운데서 더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주님께서 그 때에 도적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도적같이 이른다는 말은,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을 일방적으로 접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라고 여겼던 우리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도적같이 임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환경이다.’ 그렇게 들이닥친다는 거예요.
이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너희는 평생 소용없이 살았다.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너희를 위한 환경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천국이 뭐냐 하면, 천국은 나를 위하지 않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하기도 싫지요. 본성상 우리는 우리를 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도적같이 임한다는 것이 우리의 처지를 비참하게 만드는데, 성경 말씀은 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데 특히 도적같이 온다는 말은 연락을 주님께서 먼저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거든요. 이게 바로 나의 이웃이에요.
우리는 이웃과 친구와 이런 사람들에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럴 때 동원되는 것은 뭐냐? 나의 선택입니다. 주님이 내 영역에 침투하려면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 되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려면 내가 먼저 주님을 초대하고 초청할 경우에만 주님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내 영역에 들어와야 우리가 주님과의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나의 허락도 없이 그냥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처럼 평안하다, 안전하다, 자체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어떤 하자가 없고 이 정도 하면 만족한 인생이다, 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도둑이 오는 것처럼 쳐들어와 버리면 한마디로 해서 이것은 깽판 놓겠다는 거지요. 우리가 살아온 모든 인생을 완전히 무산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방적행위에요.
이것은 아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주님이 예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전에 협의도 없고 상의도 없고 이렇게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주님은 주님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주님은 주님이 아닌 거예요.
도적같이 오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피할 곳이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대체할 여지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왜 그렇게 주님께서 오시느냐 하면, 우리에게 출구를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오시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 못 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천국 못 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만 위해서 평생 살았던 사람이 자기를 위하지 않는 나라에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언어도단이지요. 말도 안 되지요. 결국 우리는 출구 없는 곳, 탈출할 수 없는 곳, 구원할 수 없는 곳에 묶이고 매여서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받는다, 뭐 천국 간다, 그 출구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그것은 도둑으로 오시면서 생긴 그 문 있잖아요. 도둑으로 침투하면서 생긴 그 작은 구멍 구멍이 유일한 출구에요. 다른 출구는 없습니다. 먼저 외부에서 뚫고 들어온 출구만이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는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가 되는 겁니다.
먼저 도적같이 오는 거예요. 도적같이 와버리면 내 쪽에서 천국가기 위해서 준비한 모든 것은 다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말았어요. 왜? 도둑이니까. 도둑은 우리가 존중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있는데 자기 아내가 낌새가 좀 이상해서 뒤따라 가보니까 자기 아내가 어떤 남자와 더불어 긴 복도를 갖고 있는 호텔 어떤 방에 딱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지금 예를 드는 겁니다. 심각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립니다. 예를 드는 거예요. 그렇게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어떤 남자하고 아내가 들어간 그 호텔 방의 열쇠 구멍, 지금은 그런 구멍이 없지만 옛날에는 있었어요, 그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 본다 그 말이지요.
무슨 짓 하고 있는가, 열쇠 구멍을 통해서 딱 보고 있는데 그 복도에, 아내가 어떤 남자와 들어간 호텔 방을 열쇠 구멍을 통해서 열심히 보고 있는 그 나를 보고 있는 어떤 남자가 복도에 있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나의 행동은 뭐로 취급받겠습니까? 도둑으로, 수상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겁니다. 나는 내 시선과 내 선택에 대해서 지금껏 스스로 존중해 온 거예요. 나는 관찰하는 겁니다. 내 눈으로 확인이 되는 그것만 나는 믿고 싶어해요.
열심히 보는데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열심히 보고 있는 그 보는 것을 지켜보는 또 다른 몸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내가 발견하지 못한 곳에서 나를 주시하는 다른 시선, 그것은 우리에게, 나에게는 도적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내 모든 행동에 대해서 중요시 여기고 평생 그런 식으로 내 인생을 가꾸어 왔잖아요. 나를 존중하면서.
나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결정을 할 때 이 공간과 시간은 나를 위한 공간이고 시간이다 그 말이지요. 내가 그걸 주시한다는 것은 나에게 더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해서, 더 플러스(+) 되게 하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도둑은 플러스(+)가 아니고 마이너스(-)에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무용지물로 만드는 그것이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여기 ‘형제’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형제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도적같이 와야 돼요.
도적같이 와서 내가 어떤 나에게 플러스(+)가 되는 행동, 나한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 내 행동에 주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도둑 되는 주님 앞에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 버리면 그것이 바로 도둑한테 들켰기 때문에, 이미 들킨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 사람한테 더이상 도둑이 아닙니다. “내가 도둑질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자인하고 자백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굉장히 당황스럽지요. 나는 아내를 주시하면서 어떤 증거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보게 된다면 나는 굉장히 당황스럽고 몸둘 바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내 행동은 나를 주시하는 사람에 의해서 아무것도 아닌 그냥 관찰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생 내가 나를 위해서 나에게 봉사한다고 살아온 그것이 주님한테는 도둑한테 들킬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때 우리는 너무 살아온 것이 서글프고 너무 허사스러워서 막 울게 돼요. 나 자신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울게 되는데 일단 우세요. 실컷 울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예상 못한 기쁨과 웃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인생 내가 키우고 관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했던 그것이 나를 지켜본 주님한테는 도둑 같은 행동처럼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데서 오는 서글픔, 내 노력이 다 허사가 되는 아쉬움,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걸 주께서 미리 알고 계셨다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가 아는 사이가 되는 거예요.
연말이 되면 교회에서 성만찬도 하고, 떡도 떼고, 포도주 나누고, 코로나 때문에 미뤘던 유아세례까지 다 하는데 저도 그걸 다 했어요. 몇십 년 그걸 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껏 성경을 보니까 딱 중요한 것은 주님하고 아는 사이가 되면 그게 끝이에요. 그런 세례식, 성만찬 의식, 아무것도 의미가 없고 다 헛짓입니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교인 수가 몇 명이고, 예배당이 몇 평이고, 1년에 교회를 몇 번 다니고, 몇 년 동안 나는 교회 섬기고, 세례는 몇 살 때 받았고, 전도 선교 몇 명하고, 헌금 얼마 하고, 정말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딴 게, 주님한테 들키면 되지 그 딴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안다.” 네가 정말 이 예수를 안다면 이 예수에 대해서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 도둑놈이지요?’ 그걸 미리 아는 거예요, 미리. 그걸 진즉 알아버리는 거예요. ‘내가 평생 동안 플러스(+) 하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주님께서는 내가 모아놓은 그 플러스(+)를 마이너스(-)로 만들기 위해서 마이너스계정, 마이너스 통장, 마이너스(-)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지요. 그지요?’
이게 얼마나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까? 목사, 장로, 집사 되었다고, 뭐 권사 되었다고 하던 철 없던 그때, 권사 되고, 목사 되고, 장로, 집사 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신학교 나와서 라이센스 얻는 게 뭐 대단한 것처럼, 주의 종이 되고 사자가 된 것처럼 좋아했는데 그게 도둑으로 오신 주님 앞에 무슨 소용 있습니까? 삼위일체를 알고, 신학을 공부하고, 거기에 무슨 뜻이 있어요? 아무 짝도 소용없는데요.
서로 아는 사이 되면 안 됩니까? 그걸로 족하면 되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가 지켜보던, 내가 선택한 주님은 주님이 아니었어요. 그냥 나하고 좋은 관계 하기 위해서, 내가 내 이웃을 내 이웃에게 좋은 관계 맺은 것처럼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나중에 죽고 난 뒤에 봐야 될 분이기 때문에 미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내가 만들어낸 나의 우상이었고 판타지에요. 가짜에요. 가짜, 거짓 예수였습니다.
주님은 도둑같이 오는 거예요. 도둑으로. 왜 도둑같이 오셔야 되는가? 우리 몸에 어떤 저주가 전류처럼 둘둘 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내 하는 모든 행동이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지요. 그리스 신화에 보면 그 비슷한 이야기 좋은 교훈 되는 이야기가 나와요. 악티온과 아르테미스라는 관계가 있어요.
악티온이라는 신화의 등장인물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이지요. 아르테미스는 여신인데 다이애나와 같은 뜻, 같은 인물입니다. 그 다이애나 아르테미스가 목욕을 하고 있는데 악티온이 사냥하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누가 목욕을 하는구나, 하고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더 자세히 보려고 가지를 치웠어요.
그러다 나뭇가지 치우는 그 소리가 아르테미스에게 들렸거든요. 그때 아르테미스가 이게 어디서 허락도 없기 초청받지도 못한 것이 남의 벗은 몸을 보느냐, 해서 물을 그 악티온에게 확 물을 뿌려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순간 자기에게서 뿔 같은 것이 나타나면서 갑자기 사냥꾼이 사슴으로 변했습니다. 사슴으로 변하니까 데리고 다니는 사냥개들이 자기 주인을 사슴으로 보고 물어뜯어서 죽였다는 이야기예요.
그 사냥꾼은 자신의 결정적 본질과 취약점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사냥개가 자기 말을 듣는 사냥개인 줄 알았지요. 사냥개에 의해서 자기가 물려 죽을지는 몰랐지요. 이걸 악티온의 콤플렉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인간이 자신의 열심, 주특기로 여기고 장기로 여기고 기술로 여긴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악티온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바로 잘 안 보이니까 나뭇가지를 자꾸 제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식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모르는 게 있으면 그냥 물러서지 않고 더욱더, 더, 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더, 더 알고자 내 쪽에서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인간은 정지한 존재, 사물같이 정지해있어요. 움직이는 쪽은, 도둑처럼 움직이는 쪽은 운동하는 존재는 주님이지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뛰기 밖에 안되고 정지 되어 있는 거예요. 정지되어 있는데 자기는 어떤 연속적인 존재로 생각해 가지고 나는 이대로 그냥 천국 가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연속적인 것은 주님께서 연속적으로 일을 따로 벌였습니다. 인간은 연속적이 되면 안 돼요. 이게 도륙당해야 되고 쪼가리 나야 돼요. 어디에 동반해서? 주님이 움직이는 그 운동력에 의해서 인간도 같이 쪼가리 나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이사야 1장 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이 태어날 때 이것이 예언되었다고,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마태를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이 이 말씀의 성취다, 라고 하는 겁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23절 계속 보면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려면 자리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없어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움직이는 쪽이, 주님 쪽이 정지되어 있는 우리 쪽을 도륙하고, 박탈하고, 마이너스(-) 빼앗아가게 되면 그 뺏긴 자리가 임마누엘이에요. 주님이 손댄 자리고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된 자리가 임마누엘 자리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 오늘 본문 5장 4절에 형제들아, 할 때 형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형제는 없어요. 형제는 없는데 주님 쪽에서 움직임을 보이니까 없던 형제가 발생 된 겁니다. 이것은 몇 주 전에 말씀드린 거예요. 이 땅에 천국 백성은 없어요. 성도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성도라 할 수 없어요.
아까 기도하실 때 집사님 기도하신 내용도 전부 다 내 가족, 내 집과 나 중심, 전주 이씨라 했습니까, 그 집안 아무리 교회 다니고 직분을 받아도 그것은 나를 위함이에요. 나의 시간과 나의 공간에 내 것으로 채워 넣은 겁니다. 스스로 거기서 벗어나 지는가? 벗어나 봤자 노력하는 그것이 내가 새롭게 마련한 내 자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마찬가지예요. 제자리 뛰기라니까요.
아무리 종교적인 노력과 신앙적인 애를 써도 그것은 나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에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정지한 것으로 보고 주님께서 움직일 때 도적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도적같이 움직이게 되면 예수님은 저쪽에 있고 나는 이 자리에 있는데 주님께서 저 자리에 계시지 않고 내가 있던 이 자리를 일방적으로 폭력적으로 차지해 버려요. 마이너스(-), 빼앗아간다니까요. 내 자리라고 여겼던 이 자리를 주님께서 몽땅 빼앗아 가버려요.
빼앗아 갈 때 좋게좋게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고 도적으로 오셔서 강제로 빼앗아 가버린다고요. 이것을 미리 경험한 자에게서 발생 된 자리가 임마누엘 자리고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형제가 발생 된 자리, 성도가 생겨난 자리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시는 그 업무 그 움직임의 목적은 요한복음 14장 3절에 나와 있습니다. 간단하게 나와 있어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끝.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끝. 그러면 그 전에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자기가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움직이니까 베드로 본인도 움직이는 존재라고 오해한 거예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만 있어.” 너는 네 움직임을 봐야 그 움직임은 아무 의미 없는 거거든요. “가만 있어. 내가 가서 내가 움직여서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 처소에,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그 방식 말고 다른 구원의 방식은 없습니다. 내 쪽에서 뭔가 전도하고 십일조하고 헌금하고 찬송하고 뭘 해도 그것은요, 망상입니다, 망상.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늘 본문에서 오신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인간 쪽에서, 주님 쪽에서 주님과의 절교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오기 때문에 ‘나 주님하고 안 놀아. 나 주님하고 안 살아.’ 이럴 수 있는 형편에 놓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나중에 무덤에 가도 다시 불러낼 거예요. “누구 맘대로 네가 절교를 해? 내가 도적같이 온다는 말은 너희들 중에 나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런 뜻이에요.
이걸 성경 전체로 연결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지난날을 오늘의 현재로 계속 만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당구대의 붉은 당구공이 당구대에서 구를 때에 아무리 굴러도 그 붉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 있을 때도 빨간 공이고, 굴러갈 때도 빨간 공이고, 저기 도착할 때도 빨간 공이에요. 빨간색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주님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디를 굴러가도, 어디 가도 십자가 사건의 현재성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여러분 알다시피 뭐냐 하면, “너희는 너희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나를 몰랐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왔어도 하나님을 죽여버린 사건, 그 이유가 뭐냐? 너희는 네 생각만, 네 미래만, 네 시공간만 생각하기 때문에 몰랐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그 십자가 사건을 계속 현재화시키는 겁니다. 과거의 십자가를 현재로 만들고, 다가올 미래도 현재의 십자가 사건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도둑이 안고 있는, 도적이 안고 있는 새로운 시공간 문제에요
저는 이것을 ‘시간의 밀실’이라고 하는데 부잣집의 큰 집에 가면 밀실이 있답니다. 책꽃이 하나 슥 만지니까 벽이 막 밀려서 새로운 복도가 생기고, 다른 비밀공간이 들어서고, 그렇게 하는데 그 자리 그 비밀의 자리는, 모든 비밀의 자리 거기는 미래도 없었고 과거도 없었고 오직 현재만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현재만이 십자가 사건 거기에 다 모여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시공간이 갑자기 쳐들어오니까 인간들에게는 도적같이 오는 것으로 보이는 거예요. 누가복음 21장 34, 35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생활의 염려, 어떻게 생존하는가의 문제 때문에 마음이 너 자신에게 다 빼앗길 때에 그 날은 덫과 같이 갑자기, 주님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도적같이 임한다는 이 말은요, 인간들이 아무리 스스로 자기를 꾸미고 스스로 자기를 잘해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주님은 도적같이 그들에게 임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를 하려면요, 먼저 주께서 도적같이 먼저 임해야 돼요. 주께서 먼저 도적같이 임하고 도적같이 먼저 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는 형제라는 새로운 자리를, 임마누엘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있는 그 자리를 할당받게 되는 겁니다. 출발점은 뭐냐? 우리가 주님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을 실감하는 그 순서가 먼저 순서에요. 그 순서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시범을 보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주님을 잘 섬겼는데 갑자기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후딱 살려줄 것을 예상했지만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늦췄습니다. 늦춰서 죽고 난 뒤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시공간에서는 살아 있을 때 뭘 작동을 해야지 죽고 난 뒤에는 아무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믿으라고 한 거예요. 믿음이 뭐냐 하면, 내가 평생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고, 평생 유아세례부터 해서 그동안 주님을 위해서 했던 찬송과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죽여없애는 그 자리부터 새로 시작되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주님 앞에 충성 봉사하고, 아프가니스탄 선교하고, 뭐 신학교 가고 목사 되고,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무덤 속에 꾸깃꾸깃 다 집어 넣어버리는 거예요. 다 소용없는 짓으로. 사람이 살아 있으면 자기가 살아 있어서 나름대로 뭐 열심히 한 것이 자꾸 기억나거든요.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념이지요. 뭘 자꾸 자랑하려고 해요.
오늘 데살로니가 본문 5장 3절에서도 평안하다, 안전하다, 이 뜻은 뭐냐 하면, 내가 얼추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연금 이 정도 받고, 이 정도 아파트 가지고 살면 내가 보기에는 죽을 때까지는 안전하다. 거기다 죽는 것까지 보람상조에 계약도 해놓고 장지까지 마련해 놓았으니까 이 정도 하면 안전하잖아요. 이 정도 하면 평안하잖아요.
그 과정을 하시라, 그 말입니다. 제가 부탁할 사항이 아니고 지금 잘들 하고 계셔요. 항상 따지면서 이 정도 하면 죽을 때까지는 어지간한 일 아니면 굶는 일은 없다. 그게 순서에요. 그것부터 시작을 하세요, 그것부터. 요양병원을 하든지 뭘 하든지 그것부터, 그렇게 뭘 하라고요. 계약을 하든지.
이게 마르다 마리아가 그렇게 해 온 거예요. 예수님하고 좋은 관계, 좋은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예수님께서 우리가 급할 때 우리가 위태로울 때 죽기 직전에 오셔서 낫게 하실 것이다,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그게 믿음이냐? 너는 그것을 믿음으로 생각했다면 네가 알고 있는 나는 가짜 나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나가 아니에요. 네가 일방적으로 네가 선택한 나였고 네가 오해해서 나온 예수였습니다.
진짜 주님은 주님을 봉사한 것을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들어 버렸어요. 오빠를 죽게 해버렸습니다. 집안 난리 났습니다! 진짜 멱살 쥐었는지 아닌지는 제가 현장에 없어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왜 이렇게 늦게 왔습니까? 죽고 난 뒤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동안 우리가 당신한테 한 게 얼마인데, 얼마나 충성을 했는데, 몸 바쳐서 충성했는데 그 몸 바친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꼭 그래야 속 시원했습니까, 주님이여? 꼭 그래야 속이 시원했습니까!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사람을 우습게 만들고! 그래야 주님이 속이 시원합니까!”
마르다가 울었을 거예요. 마리아도 울고, 마르다도 울고, 그래서 주님도 울었어요. 답답해서 울었어요. ‘아이고 인간아, 아이고 인간아!’ 지금 인간은,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자기를 위해서 살았어요. 예수를 위해서 산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살고 뭘 해도 전부 다 자기 좋아라고, 나 잘되기 위해서 살았던 거예요.
이걸 주님께서 극한으로 밀어 붙여버립니다. 그리고 나흘 만에 “그 돌문 치워라!” 나흘 만에 살려놨지요. 나흘만이니까 사흘이 지나가 4일째에 살렸잖아요. 그러면 나사로가 죽은 3일 동안이나 열두제자가 3년 동안이나 예수님 옆에 붙어 있던 그 기간이나 똑같은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70, 80, 백 살 사는 것하고 나사로가 죽은 그 3일하고 똑같은 거예요. 같이 퉁 칩시다. 같은 겁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그 헛된 짓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사로가 갔던 그 길이고, 제자들이 갔던 그 길이고, 오늘날 우리가 그 길을 뒤따라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평안하다, 안전하다, 예수도 믿어놨겠다, 그것도 모자라서 세례도 받아 놨겠다, 또 성령받아라, 해서 뭔지도 모르면서 성령 받았습니다, 하고 그것도 보험 들어놨겠다, 성경 말씀 다 지키고 또 십자가까지 알라고 해서 십자가, 언약, 구속사, 새로운 신상까지 다 알아놨겠다, ‘이제는 걱정하지 마. 든든하다.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이러고 있는 거예요.
나로 인하여 나 자신에 대해 오해했음에 대해서 우리가 울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감히 주님의 뜻이 아니면 웃을 수 없는 웃음으로 이어지는 전(前)과정이에요. 그게 전 절차입니다. 주님이 나타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에 무늬가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무늬가 나타나 보세요. 기절초풍하지요. 내가 있던 그 자리에 주님이 와 버릴 때 바로 주님은 남들에게는 없는 존재입니다. 보지 못했으니 없는 존재에요.
요한1서 4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거 명심해야 됩니다. 자꾸 하나님을 보여달라,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이러지 마세요. 보여주면 믿겠다, 하는 그것은 열쇠 구멍으로 자기 관찰을 자기가 존중하는 거예요. 나는 나에게 존중하는 그것을 뒤쪽에서 개무시하시는 시선으로 보고 계시는 분이 따로 있어야 돼요. 그게 느껴져야 돼요.
타인의 시선, 나를 지켜보는 시선은 나의 시선을 찢어버립니다. 나의 눈을 찢어버려요.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요한1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기정사실화시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보고 믿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이것은 바로 내가 발견하려는 가짜 예수, 내가 발견하려는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는 그 행동을 지금껏 해 왔다는 겁니다. 나는 나한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하나님이든 뭐라도 믿을 용의가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나의 선택지기 때문에, 나의 선택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선택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냥 매일같이 선택이에요.
그래서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이 해결점을 얻는 게 아니고 새로운 선택지를 갖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기도(企圖)와 모든 시도는 어떤 영원한 해결책을 얻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선택지를 새롭게 발견하는, 또 당황스럽고 결핍된 상황을 거기에 또 맞닥뜨리는 것뿐이에요. 선택하게 되면 또 선택할 것이 남아 있어요. 선택하게 되면 선택할 것이 또 남아 있어요.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그다음 움직임을 봐야 돼요. 자,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 보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때에 우리는 어떤 자세여야 하냐 하면, 우리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이만하면 내 살 궁리는 챙기고 예수까지 믿었기 때문에 이제 천국 가는 것은 안전빵이다, 라고 그런 생각부터 먼저 너희들이 하고 있어라, 그 말입니다. 뭔가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냥 우리 잘 하는 것 있잖아요, 잘 하는 것. 남 이용하는 것 그냥 하세요. 그냥그냥 살면 돼요. 오직 나만을 위해서.
그다음에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정지된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 자체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이대로 우리는 인생 끝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아까 나사로도 마찬가지고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나사로가 그냥 죽어 있었는데 바깥에서 문 따고, 문 열고, 무덤의 문을 열어 제키고 강제로 이끄시는 분은 바깥에 계신 분이에요. 내 쪽이 아니고 바깥에서 계시는 분입니다.
바깥에서 화들짝, 문을 쫙 열어버리면 우리는 평생 내가 내 안에 갇혀 살았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게 됩니다. 나의 거짓됨을 한꺼번에, 일거에 알아버려요. 나의 거짓됨을. 이게 바로 신바람입니다. 들켜버린 거예요. 들켜버린 겁니다. 오늘 제목을 ‘들켰다’로 할까요? 들켜버린 겁니다.
들킨 상태에서 만약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그 앞에 있는 잔디밭이 나를 위한 잔디밭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질 거예요. 늘상 앉았던 그 벤치에 앉을 때 저 잔디밭은 나를 즐겁게 하고 나의 피곤을 풀리게 하는 잔디밭이었는데 주께서 찾아오고 난 뒤에 잔디밭 앞의 벤치에 앉아버리면, 이 벤치나 그 앞의 잔디밭이나 어디를 가도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 새롭게 확 다가오지요.
왜냐하면 내 몸이 나를 위한 내가 아님을 알았으니까요. 바깥에서 그 문을 열어버렸으니까 외풍이 확 들어오지요. 빛이 확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과 우리 사이는 아는 사이가 되고 주님 보시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주는 그 가벼움, 그 점에 대해서 누가복음 8장 43절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열두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두제자는 들러리고요, 진짜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따로 있어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었어요. 그 여자가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는데 47절에 보면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즉 ‘제가 만지지 말아야 할 분을 제가 건방지게 주제넘게 만졌습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의 연속적인 일은 우리로 하여금 소위 의인이라고 여겼던 자를 죄인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추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 존재가 추락한 사실을 그동안 악마 때문에 우리는 몰랐어요.
그런데 인간은 처음부터 망가졌고 추락했고 죽은 존재였습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피를 흘렸잖아요. 오늘날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예수님 만나자마자 막 따지면서 “남들은 12년 동안 청춘을 잘도 보내는데 나의 아름다운 청춘은 피 흘리면서 다 보냈습니다. 이거 당신이 창조주로서 나한테 이걸 보상할 거예요? 만회해줄 거예요? 왜 저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막 따질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여인은 그걸 따지지를 않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 움직일 때 없는 형제, 없는 성도가 등장하는 절차를 그 여인이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신상에 어떠한 파탄이 일어나도 그걸 마땅한 것으로 본 거예요. 왜? 아무것도 아니니까.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주님보고 “주님, 내 인생 돌려주세요.” 내 인생 보상해달라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이게 주님께서 일하실 때 하나의 모델 되는 인물로서 그 12년 동안 하혈한 여인이 주님과 만남이 된 겁니다. 열두제자와 많은 제자를 보시고 하는 말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 있는 사람 본 적이 없다. 바로 자기가 병든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것, 세상에! 이것은 바로 이 예수가 이 땅에서 만들어내고자 하는 성도의 진짜 모습을 저 여인을 통해서 미리 우리에게 보여준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라서 아무것도 아니게 취급한 게 그게 무슨 주님한테 탈이 되고 주님한테 원망 돌릴 일이 됩니까? 도적같이 오시는 이유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비참해야 돼요. 마땅히 망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오히려 도적같이 오는 것을 가지고 ‘예, 당연합니다’ 여겼던 자들이 누구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형제들이에요. “형제들은 더 이상 나를 도적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왜 하느냐 하면, 도적같이 와서 화들짝 놀라게 하시는 그것은 주님께서의 위치에서 당연하게 맞는 합당한 움직임이십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애초부터 망가져 있으면 더 이상 망가질 게 없잖아요. 그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도적같이 오셔 가지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고 해주시고 그렇게 하시면서 그다음에 제가 말씀드릴 것은, 아까 처음에 했듯이, 그러면 천국 가는 백성, 그리고 천국 가는 출구, 그 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주님 자신이 왔던 그 자체가 출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예외적인 존재로 돌려버립니다.
예외적 존재, 예외적 자리라 하는 것은, 모든 자리는 공평하게 평등하게 다 똑같이 그들을 도적같이 오셔서 멸망하는 게 마땅한데 예외규정을 두십니다. 두시는 이유가, 본인 자신이 예외적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예외적 자리가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 속에 나오는데요. 출애굽기 9장 4절에 보면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열 가지 재앙을 하나님께서 애굽나라에 때리실 때에 출애굽기 9장 4절에서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사람의 가축을 차별해서 이스라엘에 속한 가축들은 하나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게 예외적인 거예요. 제가 예외적인 것을 자꾸 강조하고 싶네요. 예외적이라는 것은, 나의 착함과 성실함과 훌륭함과 나의 주님에 대한 충성 이런 것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내가 얼마나 착하게 바르게 살았습니다, 이런 것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외적인 거예요. 주님의 일방적인 예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예외적인 존재인 것처럼 예수님처럼 예외적인 존재가 발생 되면 그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됩니다.
교회 좀 오래 다닌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절이 뭐냐 하면 ,요한복음 5장 24절이에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우리가 얻을 것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고 예외적인 존재가 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심판의 기준으로 우리를 써먹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마치 출애굽기의 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출애굽기 10장 23절에 보면 거기 사흘동안 흑암이 있게 되는데요 22, 23절에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특별 예외적인 조치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그 땅에는 하나님께서 애굽땅에는 어둠이 있는데 여기는 광명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이거 좋아하지 마세요.
이 말씀은 우리가 ‘야, 나 신난다’ 이 말씀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 뜻대로 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나를 일방적으로 쓰시는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주셔야 돼요.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서도 나를 배척하고 주님께서 나를 일방적으로 뽑아서 예외적인 존재로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 내가 상상도 못했던 그 나를 주님이 생각하는 그 자신으로, 우리를 일방적으로 주님처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이 예외적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 어느 말씀도 우리 좋아라, 하는 말씀은 어느 데도 없어요. “내가 너를 나처럼 사용할 게. 그러니까 군말하지 마.” 이게 예외적 존재에요, 예외적 존재.
“다른 사람은 지옥 보내. 하지만 너는 예외적 존재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도적같이 와서 인간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어서 지옥 보낸다, 라는 이 말이 진짜로 그렇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지옥에서 빼내 준, 천국 갈 수 있게 한 너를 내가 예외적존재로써 죽을 때까지 써먹을 거야.” 이게 주님의 구원의 움직임이십니다. ‘너 구원 못 받았지? 나 구원받았어.’ 헤헤거리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예외적 존재가 장착되었으면 이제는 나의 모든 기대, 나에 대한 모든 희망 다 날아갔습니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한번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사세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는 것은 주님 소관이고요, 우리 할 일이 뭐냐 하면요? ‘평안하다, 안전하다, 아무 걱정 없다.’
몰라요, 그것도 돈이나 좀 몇십억 가져야 되지 그냥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은 안 되지만 일단 한 10억씩은 다 있지요? 십억씩은 있다고 치고 ‘그냥 나는 내가 번 돈 가지고 살 거야. 내가 번 부동산 가지고 살 거야. 내 아파트 가지고 살면 아무 문제 없어. 나는 놀러만 다닐 거야.’ 이렇게 사세요.
사시면 주님께서 예고 없이 오셔서 내가 있던 그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접수할 겁니다. “너라는 인간은 너 자신밖에 모르는 이 더러운 인간, 이 더러운 인간을 내가 예외규정을 통해서 이 더러운 너를 천국으로 보낸다. 이제 너는 죽었어, 이제. 너밖에 모르는 너를 이제부터는 바로 이런 존재도 내가 천국 보냈잖아, 예외규정으로!”
그걸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야, 너 돈 좀 수십억 모았으니 걱정이 없지?” “걱정 없지, 그래. 몸도 건강하고, 난 아픈 데도 없고 그래.” “자식도 잘되고?” “자식도 뭐 전부 다 잘됐어.” “그러면 네가 믿는 성경에 의하면 부자가 천국 못가고 지옥 간다는데?” “그래, 부자는 지옥 가야 돼.”
“그런데 왜 그리 기분이 좋아?” “예외규정, 바로 그 부자 되고 싶어하는 내가 딱 나거든. 그런데 이유가 없어. 이유가 없이 무조건적으로, 예외규정으로 해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가지고 나 있는 자리 거기에 주님이 합세를 해버렸어”요. 합세를 해서 이제는 주님의 패밀리, 주님의 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맘대로 되지를 않는 거예요.
끝으로 마태복음 12장 46-50절까지 보고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배다른 동생들하고 어머니가 뒤에 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저 뒤에 어머니하고 동생들이 와 있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참 섭섭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누가 내 동생이고 누가 내 가족이고 누가 내 모친이냐? 여기 내가 불러모은 이 예외적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더라도요, 예외적 조치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지 우리가 믿음 좋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1년 동안 진짜 나만 위해서 줄기차게 달려왔고 2022년도도 달리 된다는 그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없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추적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가 이것 밖에 안됨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바라보게 한 우리 자신을 죄인이라고 깨닫게 하셔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셔서 그 깨닫는 자체를 바로 천국과 지옥의 기준으로써,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으로써 활용해주시는 주님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