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그린 나이트>
1. 모험을 찾아 떠나는 영웅의 이야기가 허무의 색깔로 채색됐다. 보통 영웅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운명의 늪을 헤쳐 결국 주어진 임무를 완성하고 금의환향한다. 그에게는 온갖 명성과 명예가 주어지고 그의 모든 것이 찬사의 대상이 된다. 대표적인 서구의 영웅이 ‘아더왕’이었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아더 왕 시대를 배경으로 영웅의 이미지를 전복시킨다. ‘영웅’의 신화 속에 숨겨진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 비겁함 그리고 무모함이 가져오는 비극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은 진한 허무이다.
2. 아더 왕 궁전의 크리스마스 축하연 때 미지의 ‘초록색 기사’가 등장한다. 그는 특별한 게임을 제안하며 아더 왕 기사들의 용기를 시험한다. ‘용기가 있다면 자신의 목을 치고, 1년 후 자신을 찾아와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는가’라고 도발한 것이다. 기사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 아더의 조카인 가웨인이 나선다. 아직 기사가 아닌 가웨인은 이것을 자신의 용기를 과시할 기회라고 믿은 것이다. 가웨인은 초록기사의 목을 치고, 초록 기사는 자신의 목을 들고 사라진다. 1년 후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가웨인은 특별한 존재로 1년 동안 국가의 중심이 된다.
3. 1년이 지난 후 닥쳐오는 두려움은 가웨인의 결정을 흔들리게 한다. 하지만 아더왕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격려한다. 그들은 이것을 영웅 등극의 하나의 시나리오로 여기는 분위기이다. 오직 그의 연인만이 말한다. “위대해질 필요가 있나요? 그저 괜찮은 사람으로는 부족한가요?”라며 무모한 결정을 비난할 뿐이다.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명성을 얻겠다는 야심으로, 가웨인은 모험을 떠난다. 돌아올 기약없는 도전이지만 모든 영웅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고난을 이겨내고 귀환할 것이라 믿고 있다.
4. 가웨인이 시작한 모험의 여정은 결코 영웅적 장면과 만날 수 없다. 다만 전쟁의 참혹상 속에서 죽어 너브러진 시체들을 만나고 우연히 만난 귀족 여인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럼에도 가웨인은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초록 기사가 있는 예배당에 도착한다. 초록기사가 약속대로 그의 목을 치려하자 그는 묻는다. “다른 무엇이 없나요?” 가웨인은 전혀 다른 희망적 상황을 꿈꿨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용기를 칭찬한 보상?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찬사? 하지만 초록 기사 말처럼 ‘다른 무엇이 있으리 있나.’였다.
5. 가웨인은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도망간다. 도망가던 순간 그에게는 도망 이후의 일이 빠르게 나타난다. 어째든 귀환 이후 그는 칭송을 받고 아더 왕이 죽은 후 왕을 계승한다. 하지만 야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연인을 배신하고 전쟁을 일삼으며 결국 야심에 사로잡힌 폭군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백성들의 존경을 잃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가웨인은 결국 목이 잘린 채 죽고 만다. 탈출 직전에 경험한 기이한 환상은 결국 가웨인을 다시 초록기사 앞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그는 자신의 목을 초록기사 앞에 내 놓는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6. 가웨인을 다시 돌아가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허무’ 이외에는 다른 어떤 긍정적 힘을 찾을 수 없다. 인간들이 얻어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지위, 명성, 명예라는 것들이 결국 무의미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목표로 하는 순간 인간의 고결함이나 존엄함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 가웨인은 깨달은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가웨인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는 영웅적 모험담의 실체가 지닌 진한 허무함을 증언하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벌이는 생존의 몸부림이 아주 짧은 순간 그에게 만족을 선사할지라도 결국은 파멸에 이르는 위험한 결정이었음을 말해준다.
7.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위대함과 명성에 몰두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쓸쓸한 물음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초록기사가 제안하고 실행하는 ‘게임’은 지극히 불합리하다. 목숨을 담보한 용기의 실험이 가웨인에게 어떤 현실적 의미를 부여하였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감행한 용기가 무의미하게 무너져가는 모습은 그것이 담고 있는 삶의 불합리함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라도 지극히 독단적일 뿐 아니라 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벗어나 있다. 결국 가웨인의 죽음은 전혀 의미없고 공정하지도 않은 게임을 선택한 그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 결말이 가져오는 쓸쓸하고 불편한 감정은 오랜 시간 나를 사로잡았다.
첫댓글 영웅이 사라진 시대에도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