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갈비와 막걸리로 이름난 포천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인 산정호수는 4계절 드라이브족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서울근교의 명소. 약수맛이 좋기로 유명한 자인사가 있는 명성산을 비롯 삼각봉, 비선폭포 등의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가볼만한 곳은 이동면을 사이에 두고 백운산의 백운계곡과 광덕계곡.
찾아가는 방법!!
구파발에서 벽제 - 의정부를 거쳐 포천으로 들어가 43번국도를 타고 21Km를 달리면 문암 삼거리가 나옵니다. 우회전해 129번 지방도를 타고 4Km들어가면 산정호수 입구 매표소가 나옵니다. 자유로를 타고 갈때는 문산4거리에서 37번 국도로 들어가 전곡을 지나 성차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43번 국도와 합류됩니다.
일동온천지구
포천군 일동면은 유황온천지구로 1개의 온천과 3개의 대형욕장이 있다.
각각마다 시설이 약간 다르지만 황토, 맥반석, 옥 등 한국 특유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사우나, 한증막, 탕 실내의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다. 유리 천장 아래서 썬탠을 할 수 있는
대욕장을 갖춘 업소도 있다
교통안내
버 스 : 서울 상봉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일동행 버스 승차, 일동터미널에서 하차.
각 업소별 셔틀버스 운행
자가용 : 구리-포천방향 47번 국도따라 진입후 베어스타운 지나 계속 직진
: 산정호수 · 명성산 억새꽃 축제
행사기간 : 2002년 10월 12일 ~ 13일 (2일간)
행사장소 : 영북면 산정호수 일원(상동주차장, 명성산 등)
행사내용 : 개 · 폐막행사, 공연행사, 참여마당, 전시행사, 기타행사 등
주관 : 사단법인 경기도 관광협회 산정호수 관광지부
주최 : 포천군
후원 : 포천군의회, 포천경찰서, 포천소방서, 농협포천군지부 등
초청인사 : 경기도지사, 국회의원, 도내시장 · 군수, 중국(심양시, 조병산시, 러핑시),
일본국 다까네정장, 경기도의회의원, 유관기관 · 단체장, 포천군의회 의원,
지방지 및 지역지 기자단, 지역인사, 관광객 등
축제의 목적과 배경
포천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산정호수를 중심으로 웅장한 명성산의 경관과
주변의 관광자원을 홍보하여 수도권 관광객으로 하여금 포천을 느끼고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관광의 한마당 잔치를 마련코자 함.
? 포천군의 대표적 관광명소인 산정호수와 인접한 관광자원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 마련
? 산정호수 · 명성산 억새꽃축제를 통한 관광객 유입의 극대화로 지방 관광수입 증대효과 기대
?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모션 및 정보제공으로 대외적 지역 이미지 제고
? 천혜의 관광자원을 축제를 통하여 상품화 하고, 통일을 대비한 경기북부지역의 명소로 부각
금현리(金峴里)지석묘
금현리 지석묘는 가산면 금현 5리 304번지에 있다. 경기도 문화재 자료 47호이다. 현재는 송우리에서 국도를 따라 군내면과 내촌면으로 갈라지는 곳으로 부터 내촌방향으로 약 2.5Km 정도 가면 왼쪽편에 큰 정자나무 숲이 보이는데 지석묘는 이 숲 속에 있으며 도로와는 약 20 내지 30 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입구에는 식당과 민가들이 입구를 가리고 있다. 지석묘는 내촌가는 길을 끼고 양 쪽으로 포진하고 있는 국사봉(해발 546.9m)과 죽엽산(해발 600.6m)의 북편 산자락이 합쳐지는 곳으로 북쪽으로 넓게 연결되는 평야를 바라보는 낮은 구릉의 끝에 입지하고 있다. 북쪽의 전면으로 서쪽의 금현리 마을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개울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민가와 함께 공장들이 있다.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이며 아마도 강화도 부근리의 북방식 지석묘와 함께 남한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하부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북방식지석묘이다. 석재는 모두 화강암으로 치석을 잘하여 두께가 고르게 판석을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하부구조의 방향, 즉 개석의 방향은 거의 남북 방향이며 개석은 남쪽을 향하여 약 15° 정도 들려 있다. 지석들도 서편으로 약 5 °정도 기울어져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당시에 이 거대한 석재들을 움직이는데 따르는 기술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것은 강화의 부근리 지석묘에서도 잘 남아 있다.
개석은 마름모꼴을 한 다면형인데 크기가 5.63m X 4.78m X 0.45m이며 둘레가 16m에 달한다. 면적이 8평을 넘고 무게가 아마도 30 내지 40 톤으로 추정된다. 개석의 상면은 비교적 치석이 덜 이루어져 둥근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하면은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다. 묘실의 크기는 1.65m X 1.39m의 평면 크기에 높이가 1.8m에 달한다. 묘실은 남쪽면의 지석이 작아서 양 쪽으로 커다란 틈이 있어서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아무런 시설이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이미 오래전에 도굴로 인하여 훼손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석은 동쪽의 것이 2.43m X 1.9m X 약 0.5m의 크기이며 서쪽의 것이 2.46m X 1.9m X 약 0.3m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두 장벽이 개석을 지탱하고 있다. 단벽은 이 장벽의 사이에 끼워 넣은 형태인데 북쪽의 단벽은 비교적 잘 짜 맞춘 것으로 그 크기가 1.3m X 1.6m X 0.2m이며 남쪽의 단벽은 0.9m X 1.7m X 0.25m로 묘실의 폭 보다도 훨씬 그 폭이 좁다.
전계대원군묘 및 신도비(全溪大院君 墓및 神道碑)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호
소 재 지 :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산11
규 모 : 직경 7m 높이 2.2m
묘역입구기슭에 신도비각이 있고 일자각의 윗 쪽으로 묘역이 있다. 신도비는 전자로 {유명조선국전계대원군신도비명병서}로 되어있고 {숭정기원후사신해팔월일}인 1851(철종2)년에 건립 되었다. 비각은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고 정면3칸, 측면2칸이며 신도비는 장방형의 대석과 개석을 갖추고 있다. 제각도 팔작지붕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원범이 왕위에 오르니 곧 철종이다. 왕위에 오른뒤에 이미 별세한 전계군을 전계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전계군은 1841(헌종7)년에 58세로 졸하여 양주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포천의 왕방산으로 이장하였다. 묘역은 봉분에 호석을 둘렀고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묘비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비는 숭정기원후사병진삼월일립(崇禎紀元後四丙辰三月日立) 1856(철종7)년에 건립되었다. 유명조선국전계대원군지묘(有明朝鮮國全溪大院君之墓) 완양부대부인전주최씨부우(完陽府大夫人全州崔氏 右)의 명문이 있다.
인평대군 묘및 신도비(麟坪大君 墓 및 神道碑)
지정번호 : 기념물 제136호
지정년월일 : 1992.6.5
시대 : 1658년(효종 9)
소재지 :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산46-1
소유자 : 인평대군파종중종회 이재봉
규모(격) : 묘역 1,800여평
재료 : 토분및 석물
묘역은 곡담이 둘러져 있고 묘비1기 상석1기 문인석4기(소형2, 대형2)향로석1기 망주석2기 장명등1기가 배치되어 있다. 묘역봉분 좌측에는 비신이 없는 귀부가 있어 또다른 비석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묘비에는 유명 조선국 인평대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충경공지묘 복천부부인오씨부좌(有明朝鮮國麟坪大君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忠敬公之墓 福川府夫人吳氏 左)의 명문과 무술구월초삼일(戊戌九月初三日) 의 건립기문이 있다. 상석의 고석(鼓石)은 사면에 사자상이 양각으로 조식되어 있고 문인석, 장명등의 재질은 대리석이다. 묘역은 묘전을 장대석으로 치장하였고 장명등은 안상문(眼像文),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하였다.
원형의 호석을 둘은 봉분은 직경 550, 높이 175cm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묘역 우측 하단에는 제물을 진설할때 사용하였던 판석이 놓여있고 마주하여 묘비의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문인석은 두손으로 홀을 잡고있는 모습이며 관복의 앞자락에는 운문(雲文)이 조식되어 있다. 묘역 후면 우측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60여m 전면하단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총고325, 폭115, 두께35cm의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으며 귀부와 이수는 사실적표현의 정교한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이경석(李景奭)이 짖고 비문의 글씨는 오준(吳竣)이 씻으며 전액은 오정일(吳挺一)이 한것으로 되어 있다.
인평대군 이요(李 )는 인조의 3남, 효종의 동생으로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서예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학문도 깊어 제자백가에 정통했다. 인조8년(1630) 인평대군에 봉해지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때는 부왕을 남한산성에 효종했다. 인조18년(1640)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효종1년(1650)부터 4차에 걸쳐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병자호란의 비분을 읊은 시가 전해온다. 호는 충경(忠敬)이며 저서로는 송계집(松溪集),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등이 있다. 묘역은 1800여평으로 매우 광대한 편이고 특히 묘역 하단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의 어제어필로된 치제문비가 있어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하고 있다.
국립수목원
목본류 1,660종과 초본류 1,184종을 포함해서 총 2,844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국립수목원은
세계적 희귀조인 크낙새 서식지이며 하늘 다람쥐, 장수하늘소 등 천연기념물 20종이
서식하고 있다.
자연의 비경이 숨어 있는 울창한 원시림, 광릉은 세조(수양대군)와 정희 유씨의 능으로
오르는 길옆에 자리한 울창한 자연수림은 사계절이 뚜렷한 명승지로서 오월의 신록과 겨울 설경,
그리고 선경에 가까운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무려 150만 평에 28,000여 점을 보유한 박물관 뿐 아니라 2,844종의 식물,
15개의 전문 수목원으로 이루어진 인조림, 8㎞에 이르는 삼림욕장, 백두산 호랑이 등
15종의 희귀동물을 보유한 야생동물원까지 보유하고 있다.
포천 석조여래입상(抱川 石造如來立像)
지 정 번 호 : 유형문화재 제150호
지정년월일 : 1995.8.7
시 대 : 고려 전기
소 재 지 : 포천군 포천읍 어룡리 산19번지
관리자 : 포천군
규 모(격) : 지상 254cm(무릎이하제외) x122cm
재 료 : 철분섞인 화강암
포천군 해룡산(해발 660.7m)의 정상 가까이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서북향으로 50m정도 올라가면 평편한 넓은터에 석불입상이 동남향을 향해 서 있다. 불신의 무릎부분은 50cm정도 땅속에 묻힌채 앞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어 최근에도 기도처로 주민들에게 활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체적으로 풍화가 심하고 석불의 코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불신의 형태.수인.의습선이 그대로 남아있는 등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현재 인근마을에는 이 곳이 조선태조가 있었던 곳이라는 전설이 구전되어오나, 사찰명과 폐사시기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여지도서 designtimesp=31017>에 의하면 <경기도 포천현 designtimesp=31018>에 {해룡산은 재현서남20리주엽산(在縣西南二十里注葉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범우고 designtimesp=31019>,<포천조 designtimesp=31020>에는 해룡사는 {재해룡산감지방혹칭안국사금폐(在海龍山鑑池榜或稱安國寺今廢)}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기록들에서 해룡산에 있는 해룡사는 안국사라고도 했으며, 오래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룡사의 암자에서 신봉되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 254cmx122cm, 두께26cm의 주형광배를 갖춘 여래상으로서 두부 62cm, 어개폭 80cm 크기이며, 무릎아래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지만, 대략 6등신의 입상이다.
나발에 크고 둥근 얼굴.큰손.좁은 어깨를 가진 신체의 이 석불입상은 배를 약간 내밀고 서 있으며, 좌수인은 여원인처럼 손을 펴고 있고, 우수인은 팔을 들어 어깨에 대고 있다. 통견형식으로 신체에 걸쳐진 법의는 양 팔에 계단식 주름을 보이며 흘러 내려 가슴아래에서부터 여러개의 U자형 의문을 그리고 있다.
대체로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된 이 석불입상은 비록 어깨와 양팔에 형성된 계단식 의습선이 도식적이기는 하나, 얼굴모습과 배를 내밀은 자세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양식적 특성을 고수하고 있어서 이 상의 제작년대는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또한 이례적인 수인으로 보건대, 이 여래상은 고려시대이후 활발히 조성되었던 미륵불로 추정된다.
청성사(淸城祠)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64호
지정년월일 : 1975.9.5.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
소유자 : 사유(유림)
규모(격) : 건평7평
재료 : 목조와즙
청성사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을 봉사하고 있는 사당인데,언제,누구에의하여 건립된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청성사는 화강암 장대석과 자연석으로 축조된 기단위에 정면3칸, 측면2칸의 본전과 삼문이 있고 주위는 자연석 막돌로 축조된 담장이 둘려 있다. 본전의 전면은 각칸마다 창방을 설치하고 공간포가 없는 대신 2개 소루가 각칸의 장혀를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굴도리를 설치하고 석가래를 얹어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형성하였는데, 평주와 귀기둥머리의 보머리를 받친 익공은 초익공이며 내부의 마루는 정자마루이다.
안에 선생의 73세 때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데,세로가 135cm이고 가로가 89cm이며, 작자, 연대는 미상이다. 선생은 신라 857(헌안왕1)년에 출생하여 12세 때 당에 유학하고 17세 때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懸慰)를 거쳐 황조의 반란이 일어나자 고병(高騈)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문}을 지어 적의 간담을 서늘케하여 문명을 중국대륙에 떨쳤다. 28세 때(884) 귀국하였으며 893(진성여왕7)년에 시독겸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단서감을 역임하고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듬해에 시무10조를 내어 아찬이 되었다. 뒤에 그는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국운을 바로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난세에 절망하여 각지를 방황하며 풍월을 읊고 자연을 벗하다가 마지막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ㄴ 고려태조 왕건이 건국하매 그의 학풍을 듣고 글로써 문답하였다 하며 그는《계원필경》을 저술하고 봉암사비문,숭복사비문등 많은 시문이 전하여지고 있으며 죽은 년대는 알 수 없다. 고려 현종때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문창후(文昌侯)의 시호를 내려 그의 학덕을 기리었다.
민박마을명 : 교동마을
감압상태에서 식물유에 투긴 것으로 버섯의 영양과 물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첫댓글 와, 사회숙제 100점이당..
나도 여기에서 찾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