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은 농악을 가리키는 말로, 농악을 연주하는 것을 '풍물 친다'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풍물은 꽹과리·북·장구·징과 같은 악기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며, '매구'·'풍물'·'풍장'·'두레'·'걸궁'·'걸립' '금고'(金鼓)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일부 지방에서는 풍물을 군악(軍樂)으로 보아 '군고'(軍鼓)라 일컫기도 한다.
이와 같이 풍물은 그 명칭이 다양한 종합적 예능이다. 풍물의 기원은 노동설(勞動說)과 제의설(祭儀說) 등 두 가지로 집약된다. 노동설은 풍물이 농경의례인 생산과 풍요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고, 제의설은 농악이 제천의식인 소도(蘇塗)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따라서 풍물은 생존을 위한 노동과 투쟁의 철학에서 잉태된 것으로서, 그 형식은 각종 제의와 전투행위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풍물의 시원(始源)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문헌적 기록은 없으나, 수서와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풍물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단편적인 기록이 보인다. "馬韓에서는 5월에 파종이 끝나면 항상 귀신에게 제를 올렸다. 마을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주야로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과 음식을 먹었다. 그 춤은 여러명이 한 줄을 이루어 몸을 구부리기도 하고 허리를 펴기도 하며 손과 발을 서로 맞추는 것이었다.
절주(節奏)는 마치 중국의 탁무(鐸舞)와 비슷하였다. 10월에 농사가 끝나도 그와 같이 하였다." 는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풍물은 삼국 시대에 이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제현의 해시(解詩)에 전하는 '사리화' 같은 농부가 뿐만 아니라, 고려 25대 충렬왕이 일반 농악에 관심이 커서 장려한 일도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세조 등은 농악과 농가에 대한 관심이 있기에 '선농가자'(善農歌者)를 불러 연주하게 한 일이 있고, 농가구(農歌 )를 도와 주었으며 가기(家妓)로 하여금 농가를 장려하게 하였다. 성종도 민요와 농가를 잘 이해하였고 육성시켰으며, 고종은 경복궁 수축공사 때에 밤마다 농악대회를 개최하여 부역인들의 위안을 겸하여 농악육성에 힘썼다.
(2) 풍물의 종류
풍물은 공연하는 목적·계기·방법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보면, 당산굿·마당밟이·걸립굿·두레굿·판굿이 있고, 그 밖에 기우제굿·배굿 등 여러 가지가 있다.
1)당산굿
마을굿에는 무당의 가무, 제관의 독축헌잔, 굿패들의 풍물이 따르는데, 이처럼 마을굿에서 치는 풍물을 '당굿' 또는 '당산굿'이라 한다.
2)마당밟이
굿패들이 마을 수호신인 당신을 모시고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집돌이 의식을 하며 치는 풍물로, 지신밟기·뜰밟이·답정굿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집돌이 외에 정초에 집가심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3)걸립굿
걸립패들이 마을마다 돌며 집집마다 들러서 고사를 지내고 돈과 쌀을 거두며 치는 풍물로 일명 '걸궁'이라 한다. 걸립은 목적에 따라 절에서 시주를 걷는 절걸립, 다리를 짓기 위해 걷는 다리걸립, 그 외에 서당걸립·나루걸립 등이 있다.
4)두레굿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김매기를 할 때, 또한 호미걸이와 같은 축제를 벌일 때 치는 풍물로, 일명 '두레풍장'이라 한다.
5)판굿
굿패나 걸립패·두레패와 같은 농악대가 마당에서 마을사람들에게 구경시키기 위하여, 온갖 구색을 갖추고 순서를 짜서 노는 풍물을 말한다.
(3) 풍물의 편성
1) 악기
풍물에 쓰이는 악기는 타악기인 꽹과리·징·장구·북·소고와 관악기인 호적·나발이 있다. 악기는 지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나는데, 경기 북부에서는 바라를 쓰며, 영동지역에서는 소고를 소고와 법고로 나누기도 한다. 영남지방에서는 땡각이 쓰이기도 한다. 풍물은 꽹과리가 주가 되며, 꽹과리 제1주자인 상쇠가 농악대를 지휘한다.
2) 편성
풍물패의 편성은 기를 드는 기수, 악기를 연주하는 잽이, 탈을 쓰고 여러 가지 배역으로 분장하여 춤추는 잡색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다. 농악대는 고장에 따라 기수가 앞서고 다음에 잽이가 따르고, 그리고 맨 뒤에 잡색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 풍물에 쓰이는 기는 영기와 대기가 있는데, 영기는 작은 기폭에 '令字'를, 대기의 기폭에는 기의 종류에 따라 용·정방형의 도안·신상·신위를 쓰는데, 이를 '神農遺業' 혹은 '農者天下之大本'이라 쓰는 경우가 많다.
이는 꽹과리잽이·징잽이·장구잽이·북잽이·소고잽이 순으로 행렬하며, 잡색은 고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영동에서는 무동을, 경기에서는 무동·사미·양반광대를, 남쪽지역에서는 대포수·조리중·양반·할미·각시·창부·무동 등 여러가지를 쓰기도 한다. 두레풍장에는 잡색이 없다.
(4) 풍물의 지역적 분포
1) 경기농악
경기·강원·영서·충청도 북부지역에 전승되며, 안성·평택 등지가 중심이 된다. 경기농악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가락이 분명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2) 영동농악
강원도 대관령 동쪽지방에 전승되며, 강릉·삼척 지방이 중심이 된다. 영동농악은 소박·단순하고 향토색이 짙다.
3) 호남우도농악
전라도의 서남지방에 전승되며, 정읍·장성 지방이 중심이 된다. 호남좌도농악은 쇠가락·춤사위·판굿놀이의 변화가 다양하고 흥겹운 점이 특징이다.
4) 호남좌도농악
전라도 동북지방에 전승되는 농악으로, 진안·장수·완주·임실·순창·남원·곡성·구례·화순 등지가 중심이 된다. 호남좌도농악은 호남우도농악과 경기농악의 특색을 고루지녀 음악과 춤사위놀이가 완벽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5) 경남농악
경남지방에 전승되며, 함안·진주·삼천포 등지가 중심이 된다. 경남농악은 자진가락이 많고, 씩씩하며 활기찬 점이 특징이다.
6) 경북농악
경북지방에 전승되며, 김천·청도·영주 등지가 중심이 된다. 경북농악은 꿋꿋하고 향토적인 고박(古朴)함을 간직하고 있다.
(5) 풍물의 의의
풍물을 종교적 관점에서는 '굿'·'매굿'·'地神밟기'·'마당밟기'라 하며, 노동의 관점에서 볼 때는 '두레'라 하고, 풍악(風樂)이나 풍류(風流)로 해석하는 경우에는 '풍장'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풍물에는 과거 고대 사회에서의 공동체적 문화전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옛 농경조직은 협력결사체인 두레와 품앗이제도로 되어 있었다. 두레생활의 특징은 공동노동·공동가무·공동회식이었으므로, 농악의 형태도 집단적 예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두레의 농경방식은 노동·노래·춤 등을 삼위일체로 행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노동요나 집단적인 춤이 자연발생적으로 파생되었다. 이러한 풍물은 공동제의로서의 동제굿을 비롯하여, 공동노동으로서 두레와 품앗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단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큰 역할을 하면서 자리매김을 해 오고 있다. 풍물의 밑바탕에는 주당풀이라든가 동제굿, 돌돌이처럼 무속성(巫俗性)이 짙게 깔려 있다. 풍물의 복식에 있어서 고깔과 띠가 있고, 춤에 있어서는 나비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파악된다.
특히 군사놀이와 관계깊은 각종 진(陣_풀이는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때 농군들에 의해 연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잡색(雜色)놀이의 배역이나 내용에 있어서 탈춤과 유사한 점이 나타나는데, 이는 풍물의 예능 속에 종교를 비롯한 여러 민속예능이 습합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따라서 풍물은 종합예능적인 성격을 지닌 예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악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차츰 종교적인 예능형태, 즉 신을 위한 종교적 예능은 퇴화하고, 인간을 위해 행하는 오락적이고 예술적인 형태만이 한층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풍물은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적 놀이요, 집단의식에서 싹튼 예능양식으로서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발달한 문화의 한 형식이다.
그리고 풍악에는 신명(神明)이 있다. 풍물의 악기는 원래에는 신을 부르는 악기였고 잡귀를 몰아내는 악기였기에,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주술음악적 기능을 가졌다. 춤을 통해 소외된 존재의 고독과 고통을 풀어 기쁨으로 승화시키는데서 신명은 나온다. 신명없는 일은 고통의 노동일 수밖에 없으므로 농민들은 활기있는 노동 생활을 위하여 농악을 통하여 신명을 얻어내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풍물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염원을 결집하는 진취적인 행위, 신명으로 고통을 극복하는 재생과 생존의 예능이라 할 수 있다.
서민계층에서 자라온 풍물은 비록 고상하고 우아한 놀이는 아니지만, 흙냄새가 물씬 나고 소박하며, 天災와의 싸움에 뛰어드는 농민들의 힘찬 의지와 패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 줄기차게 일해야 하는 생산자에게는 힘이란 제일 고귀한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을 불러일으켜 주고, 반복되는 고된 노동에 흥을 불어넣어 피로를 잊게 함으로써 일에 의욕을 북돋아 주던 것이 바로 농악이다. 그리고 고된 노동을 하고 살아야 하는 농민들에게는 현실에 대한 갈등과 더불어 신분에 대한 갈등 역시 컸기 때문에 그러한 갈등을 해소시키고 공동체 의식을 다시 확인하는 데 풍물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 역사
남사당은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 예인집단이다,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떠돌이 예인집단은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중매구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첫손에 꼽힌다.
남사당패의 연원이나 역사적 형성과정을 밝히기에는 현존하는 자료가 빈약한 편이다. 유랑하는 민중놀이집단에 대한 기록으로는, 《 해동역사》 에 이미 신라에 인형놀이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 고려사》 폐행전(嬖幸傳) 전영보전(全英甫傳)과 《 문헌통고》 ·《 지봉유설》 ·《 허백당시집》 등에서도 역시 괴뢰목우회(傀儡木偶戱)나 그 연희자인 광대(廣大)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때그때의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하여 유랑예인집단의 연원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조선왕조실록》 을 비롯한 그 밖의 사서류나 문집이나 잡기 등에서도 시종 편증(偏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봉건적 질곡 속에서 싹튼 민중의 자생적 연희집단에 대한 지배계층의 도식적 평가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문헌들은 민중의 이해와는 거의 대립적인 입장에서 기술된 것으로, 그 내용상의 분류조차 못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 또는 자연발전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2) 연희내용
남사당패의 놀이는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등 여섯 종목이 남아 전한다. 얼른(요술) 등의 종목은 이미 인멸되었다.
● 풍물: 첫번째 순서인 풍물은 주로 웃다리가락(충청·경기)을 바탕으로 한 농악이다. 그러나 남사당패는 팔도를 유랑하는 까닭으로 웃다리가락의 정수로 볼 수는 없을 것이며, 때로는 각 지방의 특색 있는 가락과 판제를 재치있게 수용하고 있는 면도 있다.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동니·열두발·채상 등의 체기(體技)와 묘기를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 버나: 대접이나 쳇바퀴 또는 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로, 접시돌리기를 연상시킨다. 버나는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잡이와 받는 소리꾼 매호시(어릿광대)가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 살판: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본래는 대광대패나 솟대쟁이패의 놀이 가운데 하나였는데, 남사당놀이로 수용된 것이다. 땅에서 재주를 부리는 땅재주로 서양의 텀블링(tumbling)을 연상시킨다.
● 어름: 얼음 위를 걷듯이 어렵다 하여 줄타기를 이와 같이 부른다. 관가나 양반집에 초청받아 불려다닌 '광대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도 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회공연을 하기 때문에 역시 서민의 취향으로 짜여져 있다. 버나와 마찬가지로 매호씨와의 재담과 창이 있어 극적인 요소가 짙다.
● 덧뵈기: 덧(곱)본다는 뜻으로 탈을 나타내고 있다. 덧뵈기는 지역전승의 탈놀음에 비하여 의식성이나 행사성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취향과 흥취에 영합하였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더 우세한 풍자극으로, 네마당(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갑이)'를 중심으로, 일정한 보수없이 숙식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꼭두쇠란 명실공히 패거리를 대내외적으로 책임지는 우두머리인데,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고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 조직은 일사불란하여 오히려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만큼 엄격하였다.
꼭두쇠는 한 패거리에 한 사람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 사람일 수도 있다. 곰뱅이는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라는 뜻으로,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승낙을 받은 일을 맡았다. 뜬쇠는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이며, 그 밑에는 해당놀이에 예능을 익힌 '가열(보통기능자)'을 두고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둔다. 이 삐리들은 가열이 되기까지 여장(女裝)을 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던 점이 특이하다.
(4) 분포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청남도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인데, 은거지에서는 놀이가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하여서 삐리들의 기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5) 의미
남사당은 서민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으로부터는 심한 혐오와 수모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지배층으로터의 멸시 속에서도 남사당이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은,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인형극을 통해 현 사회의 모순을 연극적인 요소로 잘 소화해내 풍자함으로써, 서민들이 입장을 대변해 주고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사당은 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서 어렵게나마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의 놀이 중에서 꼭두각시놀음은 산대도감계통극에 비하여 더욱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ady)를 보여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오늘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1) 역사
꼭두각시놀음은 과거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에 의하여 연희된 것으로, 현재까지 전래된 전통적인 인형극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일명 '박첨지놀음'·'홍동지놀음'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주인공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패가 하는 여섯 종목의 놀이 중 끝놀이이며, 이들 연희자들은 그들만의 은어로 꼭두각시놀음을 '덜미'라 부른다. 이는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노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꼭두각시놀음은 중국대륙으로부터 전래된 인형극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인형극은 이미 삼국시대의 고구려악(高句麗樂)에 있었고, 그것은 중국을 거쳤거나 혹은 직접 북방을 거쳐 수입된 서역악(西域樂)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고구려 악무(樂舞) 중 서역악에서 유래된 가면무악과도 서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내용
꼭두각시놀음의 내용은 채록본에 따라 다른데, 이는 민속극의 구전성(口傳性)이라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극본의 형성시기는 그 내용으로 보아 조선조 후반기 서민문학의 대두와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역시 산대도감계통극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보통 7∼8막으로 나뉘는데, 가장 오래된 채록본인 김재철본에 의하면 8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막은 '곡예장'으로, 박첨지가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남사당패 놀이판에 끼어든 이야기를 산받이(인형과의 대화자)와 나누면서 자기 소개를 한다.
제2막은 '뒷절'로서, 뒷절의 상좌들이 박첨지의 질녀와 놀아나는 것을 보고 박첨지가 노해서 자기 조카 홍동지를 불러 중을 내쫓는다.
제3막은 '최영로의 집'으로서, 박첨지가 사돈 최영로의 집에 가서 새를 쫓으러 갔는데 사람이 나오는 족족 잡아먹는 용강 이심이에게 막 잡아먹힐 뻔했을 때 홍동지가 와서 구해준다.
제4막은 '동방노인'으로서, 눈을 감고 등장한 이유가 세상이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5막은 '표생원'으로서, 표생원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본처 꼭두각시를 만나는데, 첩인 돌머리집을 상면시키자 싸움이 벌어지고, 박첨지는 살림을 나누어준다면서 첩에게만 후하게 나누어주자 꼭두각시는 금강산으로 중이 되러 가겠다고 퇴장한다.
제6막은 '매사냥'으로서, 평안감사가 새로 부임해오자 매사냥을 하겠다며 포수와 사냥하는 매를 대령하도록 한다.
제7막은 '평안감사 상여'로서, 평안감사가 모친상을 당해 상여가 나가는데 상제는 오리려 좋아하며, 향두군으로 벌거벗은 홍동지가 불려와서 상여를 메는 내용이다.
제8막은 건사(建寺)로서, 박첨지가 나와 장례 후 명당에 절을 짓겠다고 알리면 중 2명이 나와 조립식 법당을 짓고는 다시 헐어버린다.
(3) 분포
꼭두각시놀음은 주로 경기·충청·전라·경상 등 중남부일대에서 남사당패에 의해 많이 공연되었다. 그런데 꼭두각시놀음에 나오는 인물 중에 평안감사, 용감 이심이, 황해도 영노 등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놀이가 해서와 관서지방과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이 극본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최근까지는 산대도감계통극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이규보의 ‘관극시(觀劇詩)'에 인형극의 내용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에 어느 정도의 극본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의미
꼭두각시놀음은 고전극의 한 종류이면서도 색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은, 박첨지의 일대기적 성격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즉, 박첨지 일가의 파탄과 구원이라는 줄거리를 일괄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당시의 시대상활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제2막은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제4막은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풍자를 볼 수 있다. 제5막에서는 일부처첩제로 인한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모순과 서민층의 생활상을, 제6막에서는 지배계급의 횡포와 그에 대한 풍자를, 제7막은 지배계급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조롱을 보여준다.
제8막에서 절을 짓는 것은 주인공의 종교에의 귀의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마지막에 절을 허는 것은 토속사상과 외래종교인 불교와의 상극이라는 해석으로, 또는 종교마저 뛰어넘는 주인공의 초월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꼭두각시놀음의 경우 등장인물이 인형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있으나 역시 가장한 배우에 해당되며, 첨예한 갈등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대화와 몸짓·춤사위·노래 등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그것이 관중들 앞에서 다른 민간전승에 의존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공연된다는 점에서 민속극으로 규정된다.
또한 삶의 덧없음과 함께 양반의 횡포·파계승·처첩제도 등의 소재들을 가지고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내용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격조 높은 인형극이라고 볼 수 있다.
(1) 역사
탈놀이는 가면을 쓰고 연희를 행하는 가면극의 일종으로, 탈놀이와 함께 산대놀이, 오광대, 야유, 사자놀이, 별신굿 놀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의 가면극은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에 나타나 있는 오기(五伎)(金丸·月顚·大面·束毒· 猊)가 처음이다. 이 5기 이전에도 신라에는 분명하지 않으나 극적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무검무(無劍 )·처용무(處龍舞)·無 舞 등 가면희가 존재하였으므로 이미 신라시대의 가면극은 상당히 발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함께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륙 전래의 산악백희(散樂百戱_가 향악화(鄕樂化)되었다. 고려의 산대잡극으로 이어지며, 조선전기에는 각종 가면희가 선행예능으로 참여하면서 조선 후기,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현전하는 것과 같은 산대도감극의 드라마가 정립되었다. 산대도감극의 대중화는 1634년(인조 12) 산대극이 공의(公儀)로서 상연되는 일이 폐지되자, 산대도감에서 녹을 받던 연희자들은 해산하여 주로 민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산대극은 점차 민중오락을 위한 민속극으로 정착하게 된다.
(2) 연희내용
1) 서낭제 탈놀이
산대도감극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마을굿으로 행해진 서낭제 탈놀이에는 하회별신굿놀이, 강릉단오제의 관노탈놀이, 동해안별신굿의 탈놀음굿이 있다. 서낭제 탈놀음은 세시의례연극의 성격을 지닌 향촌형의 탈놀이이다. 서낭제 탈놀이에서 하회별신굿놀이는 경남 하회에서 10년에 한 번씩 또는 신탁에 의해 임시로 거행되는 놀이로, 정월 초이틀 아침에 山主와 무녀와 연희자들이 서낭당 앞에 제수를 차려 놓고 성줏대에 강신이 되길 기원한다. 성주대에 신이 내리면 별신굿놀이가 시작되는데, 과장은 9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주지놀음, ②무녀가 주연하는 삼석놀음, ③파계승놀이, ④양반·선비놀이, ⑤떡다리와 할미과장(서민생활의 고달픔 묘사), ⑥살생과장(백정마당), ⑦還子놀이(관리인의 횡포를 풍자), ⑧혼례과장, ⑨신방과장으로 총각이 잠든 뒤 각시의 애인이 나와 총각을 살해함으로써 놀이는 끝을 맺는다. 탈놀이가 끝나면 길놀이가 행해진다. 이 외에 강릉단오제의 관노탈놀이는 5월 1일의 본제사날부터 단오날까지 놀았으며, 동해안별신굿의 탈놀음굿은 별신굿의 19거리 중 18째 거리에 연희된다. 이 두 놀이는 하회별신굿과 과장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내용은 같다고 볼 수 있다.
2) 산대도감계통극
① 경기지방의 산대놀이
경기지방의 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가 있으며, 이 두 놀이의 차이점은 송파산대놀이에 등장하는 탈들이 양주별산대에서는 이미 탈락한 초라니·당녀·해산할멈등의 탈들이 맡는 역이 따로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과장별 줄거리와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
이에 8과장 8경으로 과장이 구성되어 있는 양주별산대놀이의 과장을 주로 살펴보면, ①상좌춤, ②옴과 상좌, ③옴과 목중, ④연잎과 눈끔적이, ⑤팔목중놀이(ㄱ.염불놀이, ㄴ.침놀이, ㄷ.애사당 복놀이), ⑥노장(ㄱ.파계승놀이, ㄴ.신장수놀이, ㄷ.취발이놀이), ⑦샌님(ㄱ.의막사령놀이, ㄴ.포도부장놀이), ⑧신할아비와 미얄할미, 그리고 종장에는 지노귀굿이 연희된다.
② 해서지방의 탈놀이
해서지방의 탈놀이에는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이 있으며, 이들 놀이들은 과장의 순서나 등장인물에 약간에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봉산탈춤은 해서 일대(황해도)에 분포된 탈춤 중의 하나이다. 이 놀이는 단오에 주로 연희되었으며, 탈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길놀이가 행해진다.
놀이의 처음은 상좌춤으로 시작되고 끝은 굿으로 끝나며, 벽사의식의 마지막 절차로서 가면을 불사르는 소제(燒祭)를 행한다. 내용은 양주별산대놀이의 주제와 거의 동일하며,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뉜다.
봉산탈춤의 과장을 주로 살펴보면, ①사상좌춤, ②팔목중춤, ③사당춤, ④노장춤(ㄱ.파계승놀이, ㄴ.신장수놀이, ㄷ.취발이놀이), ⑤사자춤, ⑥양반춤, ⑦미얄춤으로 이 중에서 팔목중, 사당춤, 사자춤 과장이 양주별산대놀이와는 다르다. 강령탈춤은 황해도 탈춤 중에서 해주탈춤형에 속하는 놀이로, 봉산탈춤과 함께 현재 남한에서는 황해도탈춤의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강령탈춤과 해서형 탈춤인 은율탈춤은 모두 놀이의 시작을 벽사무인 사자춤으로 시작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③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유
영남의 오광대와 야유에는 통영·고성·가산오광대와 수영·동래야유가 있다. 낙동강변의 초계 밤마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오광대는 수영·동래·부산진 등 낙동강 왼쪽 지역에서는 들놀음을 뜻하는 ‘야유(野遊)라고 부르고 기타 낙동강 오른쪽 지역에서는 모두 오광대라고 부르는데 오광대라는 이름은 오행설에 의거한 '五'로서 가산오광대에는 오방신장무가 있어 오행과 벽사개념에서 연유한 '五'임을 짐작케한다.
오광대와 야유의 춤은 모두 덧배기춤이라고 부르며, 오광대의 과장은 통영과 고성은 5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밖의 지방의 탈놀이는 대체로 5내지 7과장으로 되어 있어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다. 통영오광대의 과장을 예로들면,
①문둥탈놀이, ②풍자탈놀이, ③영노탈놀이, ④농창탈놀이, ⑤포수탈놀이로 나뉜다. 오광대와 야유의 주요 내용은 벽사의 의식무(오방신장무), 양반계급에 대한 반감과 모욕, 파계승에 대한 풍자. 一夫와 처첩의 삼각관계에서 오는 가정 비극, 축사연상(逐邪延祥)의 축원(사자무)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통영과 고성에는 벽사의 의식무와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탈락되었다.
④ 북청사자놀음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하 전 지역에서 행하여졌다. 사자놀음의 주 목적은 벽사진경(酸邪進慶)에 있으며, 이 놀음은 음력 정월 14일 밤 달이 뜬 뒤부터 시작한다. 이 놀음의 순서는 먼저 퉁소와 북의 반주에 맞춰 애원성춤을 추며, 그 다음에 양반과 그 하인 꼭쇠와 악사가 나온다. 양반이 사당춤과 무동춤, 꼽새춤 등을 불러들여 한데 어울려 한참 놀게 한 다음 사자를 불러들인다. 사자춤에는 상좌중이 사자 앞에서 시종 같이 춤춘다.
사자가 한참 여러 가지로 춤추는 재주를 부리다가 기진하여 쓰러진다. 처음에 대사를 불러 반야심경을 외우나, 그래도 사자가 움직이지 않으니 의원을 불러들여 침을 놓으니 사자가 다시 일어난다. 굿거리장단에 맞처 사자춤이 다시 고조되고, 사자가 퇴장하면 함경도민요를 부르면서 군무를 추면서 끝이 난다.
3) 공연방식
① 상연시기와 시간
현전하는 탈놀이의 상연시기와 시간은 각 지방에 따라 다르나, 주로 음력 정월 대보름과 4월 8일, 5월 단오, 팔월 추석 등의 명절놀이로서 놀았고, 그 외에 나라의 경사 때나 기우제 행사로도 동원되어 연희되었다. 상연시간은 일반적으로 저녁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서너시간으로 줄이는 수도 있다.
② 연희형태
탈놀이의 연희형태는 음악반주에 의한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몸짓과 덕담·재담이라고 하는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 부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③ 악기
탈놀이의 반주악기로는 이른바 삼현육각, 즉 피리 두개, 대금 하나, 해금 하나, 장구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되지만, 꽹과리를 추가할 수도 있다. 중부지방의 산대춤과 황해도지방의 탈춤에서는 타악기와 함께 관현악기도 포함한 이른바 삼현육각이 기본적으로 쓰이나.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유에서는 타악기가 주가 된 농악이 반주로 쓰인다.
④ 연희자
조선시대말기까지도 직업적인 연희자들이 각 지방을 돌면서 흥행하였고, 일례로 사직골 딱딱이패가 노는 본산대를 본떠서 오늘의 양주별산대놀이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현전하는 가면극은 비직업적인 반농반예(半農半藝)의 연희자들에 의해 연희되어왔다.
⑤ 탈
탈은 각 지방의 탈놀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표정의 탈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수가 매우 많다. 탈제작의 재료로는 나무와 종이, 그리고 바가지가 가장 많이 쓰인다.
중부지방의 산대탈은 주로 바가지이고, 황해도지방의 탈은 종이를,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류탈은 종이와 바가지를 주로 사용하고, 대바구니와 모피도 사용된다. 탈의 색은 붉은색·검은색·푸른색·노란색 또는 갈색·흰색 등의 오방색이 주로 쓰이는데, 그 색이 가지는 의미는 민간신앙적인 면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또한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제외한 모든 탈놀이는 공연 뒤에 부정을 꺼려서 탈과 소도구 등을 태우거나 부셔버리는 소제(燒祭)를 행하고 행사때마다 새로 만들었으나, 요즘에 들어와서는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을 사직골 당집에 보관하고 해마다 개장하여 써왔다고 한다.
4) 의미
마을 굿으로 행하여진 서낭제탈놀이인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강릉단오굿의 관노탈놀이들은 농경의례설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마을 굿의 일부로서 연희되며, 세시의례연극의 성격을 지닌 향촌형의 탈놀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제의연희(seasonal ritual drama)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들 서낭제 탈놀음은 향촌형 가면극으로, 토착적인 가면극의 기원에 많은 시사를 던져 준다. 예를 들어 현존하는 가면극에서 호색을 통한 파계승에 대한 풍자나 현실폭로를 통한 양반에 대한 조롱, 그리고 남녀의 갈등 같은 것은, 부락제의 신성(神聖)속에서 이루어지는 세속(世俗)의 금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즉 가면극에 표현된 대립과 갈등은 사회적인 갈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연극으로의 전환이라고 풀이될 수 있겠다. 반면에 산대도감계통극은 서낭제 탈놀이굿과는 독립으로 공연된 보다 발전된 도시형의 탈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놀이의 내용은 대체로 공통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즉 조선시대의 서민문학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벽사의 의식무와 굿,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남녀의 대립과 갈등, 서민생활의 실상과 애환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각 놀이마다 주체성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예컨대 남녀관계의 설정에서 봉산탈춤·오광대·꼭두각시놀음 등은 남녀의 갈등을 강조하여 영감과 미얄과 그 첩과의 삼각관계를 다룬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신할아비과장에서 부부관계에 첩을 등장시키지 않는 대신, 샌님과정에서 샌님·포도부장(상민)·샌님의 소첩과의 삼각관계로 이를 설정하여 남녀의 갈등보다 양반과 상민의 대립관계에 역점을 두어 양반에 대한 모욕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있다.
이것은 지방에 따른 계급차별에 대한 자각과 남녀차별에 대한 자각과의 차이로 보인다. 또 중부와 서북지방의 탈놀이에서 파계승에 대한 풍자과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비하여, 영남지방에서는 파계승에 대한 풍자가 약한 대신 양반에 대한 모욕이 심하여 취발이 대신 말뚝이 재담이 중심이 된 느낌이다.
탈춤놀이는 처음에는 자연의 모방과 농경행위, 성행위 또는 귀신을 격퇴시키는 무속신앙과 결부된 행위이던 것이 점차 탈놀이의 성격변화에 따라 풍자적인 춤 등 민중들의 의지가 담긴 상징동작과 민중적 미감(낙천적)에서 나온 예술적 표현운동으로까지 변모 발달하였다. 탈놀이춤의 특징은 서민의 생활 경험을 무극적으로 엮어가면서 한바탕 흥과 난장판을 이루어 감정을 풀어서 삶에 활력을 찾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첫댓글 공부잘하고갑니다 자료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