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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850803-태안사 하계용맹정진 4일째법문-92호.zip
* 1985년8월3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4일째 법문
염불선은 부처님의 근본서원을 믿고 한다.
이것은 어째서 우리가 하기가 쉽고, 공덕(功德)이 많은고 하면은, 어제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천지우주는 근본(根本) 서원(誓願)이 있습니다. 우주로서의 근본(根本) 목적의식(目的意識)이 있습니다. 마치 인력(引力)이 있고 척력(斥力)이 있듯이 우주의 인력 이것은 모든 중생을 가운데 중심으로 이끌어옵니다. 이것을 우리 종교적으로 표현하면은 모든 중생을 다 해탈(解脫)로 이끌어오는 힘이 우주에는 본래 있습니다. 모든 중생을 다 성불(成佛)시켜야 되겠다.
또는 모든 중생한테 무량한 법문(法門)을 다 알게 해야겠다. 이런 우주의 의지(意志)가 원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의지로 딱 믿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근본서원(根本誓願:本願)을 딱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다에 가서 배를 탈 때에 풍선(風船)을 타면은 풍향(風向)이 좋아야만이 잘 갑니다. 그래야만이 바람 쪽으로 돗대를 세우면 잘 가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시 부처님의 본원(本願). 부처님의 근본서원에 우리가 편승(便乘)하면 됩니다. 천지우주 인력은 이쪽방향인데 우리가 인력을 반대해서 저쪽으로 갈려고 해보십시요. 그때는 굉장한 무리가 생기지요. 따라서 부처님의 힘은 우리들 모두를 다 해탈(解脫)시킬려는 애쓰는 힘이 원래 있습니다. 우리 본 성품은 부처인데 따라서 부처의 힘을 딱 믿어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이미 편승한다 말입니다.
순풍(順風)에 돛단배 같이 부처님의 원력(願力) 거기에 편승하면 쉽습니다. 헌데 편승하려면은 부처님을 생각을 또 많이 해야 합니다.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를 염하면 부처는 도리어 우리를 굽어봅니다. 중생염불불환억이라, (부처불(佛)자. 돌아올환(還)자. 기어할억(億)자)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은 부처는 또한 우리를 굽어봅니다. <念念稱名常懺悔 人能念佛佛還憶 凡聖相知境相照 即是眾生增上緣[般舟三昧行道往生讚]>
부처가 아닌 우리 사람끼리도 역시 여느 사람를 우리가 애쓰고 생각하면, 집중하는 그런 염파(念波) 때문에 그 사람은 나를 굽어보는 것입니다. 헌데 하물며 부처는 만능(萬能)하신 분입니다. 부처는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절 하면은 다 보시는 것이고, 우리가 부르면은 들으시고, 우리가 생각하면 다 아십니다. 우리가 구하려하면 부처님은 분명히 우리 앞에 나오실겁니다. 부처님은 능소능대(能小能大)입니다. 더러는 작은 모습으로, 우리가 크게 구하면은 우주에 가득 찬 모습으로, 부처란 것은 본래 상(相)이 없습니다 만은 이것은 무한히 가능한지라 우리가 구하는대로 옵니다.
[능엄경(楞嚴經)]에 가서 “약중생심(若衆生心)” 만약 중생의 마음이 “억불염불(憶佛念佛)”이라, 부처를 기억하고 부처를 생각하면은 “금생당래(今生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금생과 내세에 반드시 부처를 뵈온다는 말이다. <若眾生心,憶佛念佛,現前當來,必定見佛![首楞嚴經卷第五]>
우리는 부처를 생명으로 알아야합니다. 만약 우리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외운다 하면은 현생이나 아니면 내생에 분명히 부처를 봅니다. 부처 그것은 일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능소능대(能小能大)라 작을 때는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고, 클 때는 천지우주를 다 감싸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거니 보아서<견불(見佛)> 부처하고 일치가 된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 또 한 가지는 본래 부처이니 의심을 뭐해야?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우리가 산란심(散亂心)만 안내면 우리가 부처가 되어가겠지. 이와 같은 것은 묵조선(黙照禪)이라.
또 한 가지는 화두(話頭)하는 분이나 염불(念佛)하는 분이나 묵조(黙照)하는 분이나 다 같이 공동(共同)으로 할 수 있는 염불선(念佛禪). 내 자성(自性)이 원래 부처이니 내 자성 이름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니까 내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하겠다. 이와 같이 생명(生命)으로 구하는 분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구해서 하시면 좋습니다. 이렇게 해도 무방합니다.
헌데 이러한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서 말한 것 처럼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선오후수가 안 되면은 참선이 못됩니다.
구해탈(俱解脫) : 혜해탈(慧解脫)정해탈(定解脫)
우리 깨달음이 해탈(解脫). 우리 목적이 해탈아닙니까? 우리 번뇌(煩惱)에서 해탈 또는 인생고(人生苦)에서 해탈이 우리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헌데 인생고에서 참다운 해탈은 불법의 성불(成佛)이외에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불교의 목적은 해탈인데, 해탈을 구분해서 혜해탈(慧解脫)이라, 정해탈(定解脫)이라, 이와 같이 구분해 있습니다.
혜해탈 이것은 지혜혜(慧)자, 풀해(解)자 혜해탈입니다. 우리가 지혜로 해탈합니다. 그 다음은 선정해탈(禪定解脫)이라. 지혜로는 다 알았다하더라도 우리가 깊은 삼매에 못 들면은 그때는 우리 생리(生理)에 베어있는 그런 습기(習氣) 버릇을 못 버립니다.
마음으로는 다 알지만은 오랫동안 참선(參禪)하지 않고 염불(念佛)하지 않으면 그때는 우리 몸에 베어있는 습기(習氣). 번뇌(煩惱)의 종자(種子)는 못 떼어냅니다. 마치 잡초를 베면은 우둠지는 베어 버려도 잡초 뿌리가 남아 있어 다시 솟아오르듯이,
우리는 혜해탈(慧解脫)을 해서 지혜(智慧)가 밝은 분들이 그냥 내가 부처다.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거니. 이와 같이 느낀다하더라도 오랫동안 삼매(三昧)에 잠겨서 종자 번뇌의 씨앗을 못 빼어 버리면 신통(神通)도 그때는 못합니다. 따라서 과거에도 막히고 현재에도 막힙니다.
참다운 해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超越)해야 합니다. 과거에도 통달무애(通達無礙)하고, 미래에도 통달무애하고, 또는 인과(因果)에도 안 걸리고, 그래야만이 참다운 해탈인 것입니다. 이런 해탈은 깊은 삼매에 들어서 우리번뇌의 종자를 다 몽땅 뽑아야합니다.
이런데서 달마(達磨)스님 같은 대천재(大天才)도 9년 면벽(面壁)이라. 9년동안 앉아서 공부했고, 석가모니(釋迦牟尼) 같은 분도 역시 6년동안 고행(苦行)을 했습니다. 서산(西山), 사명당(四溟堂), 원효대사(元曉大師) 어떤 분이든 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선정해탈(禪定解脫).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머리가 영리해서 빠딱해서 이치(理致)를 알면 다 되어버렸다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도인행세(道人行世)한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공부한 과거를 보면 빤한 것입니다. 헌둥만둥 이렇게 해서는 아까 말씀한 것 처럼 정해탈(定解脫), 선정해탈을 못합니다. 따라서 그때는 구두선(口頭禪)이라, 말로만 지꺼리지 참다운 힘은 없습니다.
참다운 해탈은 조금 전에 말씀한 것 처럼 과거에 통달. 미래에 통달. 또는 인과(因果)에 안 걸려야 합니다. 이래야만이 참다운 그때는 삼계(三界) 해탈이고 성불(成佛)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법성(法性)을 능히 우리가 체험(體驗)을 해야 합니다. 법성을 체험하면 그때는 인과(因果)에 안 걸리고 과거, 미래에 통달무애라, 통달해서 걸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한다는 것은 아까 말씀한 것처럼 먼저는 혜해탈(慧解脫)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너무나 겸허(謙虛)해서 나는 번뇌(煩惱)가 많다. 내가 범부(凡夫)다. 이렇게 자기를 겸손(謙遜)한 분이 있습니다만 참선(參禪)을 할 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범부가 봐서 범부인거지 비록 내가 지금 욕심도 많고 진심도 많다하더라도 부처가 보면 똑 같은 부처입니다.
천지우주를 바로 산이요, 냇이요, 강이요, 물이요, 모두를 다 같이 똑 같은 평등(平等) 무차별(無差別)의 부처로 봐야합니다. 이래야만이 혜해탈(慧解脫)입니다. 이런 자세로 공부해야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범부인체 바로 부처이다.
경(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약기어중생상(若起於衆生相)”이라, 만약 내가 중생이라 하는 상을 낸다하면 “동비방삼세제불(同謗三世諸佛)”이라, 삼세 부처님을 비방하는 죄입니다.
<或起於一念 言我是凡夫 同謗三世佛 法中結重罪 [五字陀羅尼頌>
삼세 부처님의 법이라 하는 것은 다 우리 중생한테 청정(淸淨) 불안(佛眼)을, 부처의 안목(眼目)을 우리한테 줄려고 하신 법문(法門)입니다. 즉, 부처의 견해, 부처만이 바로 봅니다. 부처만이 보는 바른 정견(正見) 이것을 우리한테 줄려고 가르친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내가 범부다’ 이렇게 생각을 내면은 이것이 벌써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비방(誹謗)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상대 현실적인 존재에서는 분명히 우리는 범부(凡夫)입니다. 범부이나 바로 보면 범부인체로 바로 부처입니다. 일반 공부는 내가 범부다. 내가 못났다. 나는 참회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를 비하(卑下)해서 하는 공부가 일반 공부입니다. 허나 참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선은 내가 부처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분들은 남이 보면 아만심(我慢心)도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본인(本人)이 어떤 경우에는 참회(懺悔)할 때는 현실적으로 자기 범부성(凡夫性)을 반성(反省)하고서 공부를 해야 하나, 참선(參禪)을 할 때에는 우리가 본래로 돌아가서 역시 앞서 말한 것처럼 부처가보면 바로 내가 부처거니 내 몸 바로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요, 내 마음은 바로 청정심(淸淨心)이요.
<三身元我體 四智本心明 身智融無礙 應物任隨形, [法寶壇經], [正法眼藏]>
천지우주 이것은 바로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다 말입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이와 같이 느껴가지고서 화두(話頭)를 들고, 묵조(黙照)를 하든, 염불(念佛)도 그렇게 해야만이 비로서 염불선(念佛禪)입니다. 이것이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먼저 알고 닦는다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하면 이것은 별로 공덕(功德)은 없고, 내 마음만 좀 맑아진다. 공덕을 느낄려면 법당(法堂)에 가서 부처님한테 굽신굽신 절하고 기도(祈禱)를 모셔야만이 공덕을 받는다. 이렇게 느끼는 분이 있습니다. 허나 이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달마스님 말씀도 “약능료심(若能了心)”하면은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우리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가 거기에 다 붙어온단 말입니다. 마음을 깨달으면 만공덕(萬功德)이 거기에 다 붙어옵니다. <心者萬法之根本 一切諸法唯心所生 若能了心 則萬法俱備. [達磨大師破相論],[少室六門]>
따라서 실은 참선공덕(參禪功德)이 자기 집안 운수나 누구한테나 이것이 제일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부처다’ ‘내 본래 마음이 부처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부처라는 생각을 딱 간직하고서 공부한다면 공부하는 그 광명(光明)이 여러분의 집안을 비추는 것입니다. 집안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어느 면으로 보나 최상법(最上法)입니다. 공덕면으로 보나 우리 마음 밝게 해주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그것은 최상법입니다. 여기계시는 분들은 집안의 일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집안에 나이 많은 노부모가 계신다 하더라도, 노부모 단둘이만 계신다하더라도, 여러분은 지금 불효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한테 대한 가장 최상(最上)의 효도(孝道)는 부모님을 영생(永生)의 해탈(解脫)로 인도하는 법(法)입니다.
자식한테나 동생한테나 자기 애인한테나 누구한테나 그 사람한테 가장 거룩한 보시는 무엇인가? 그분을 영생의 해탈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까 제가 말씀한것처럼 여러분과 같이 말씀드릴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또한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히 이런 기회가 없을런지도 그것은 모릅니다. 인간(人間) 자체가 무상(無常)하지 않습니까? 꼭 여러분들 틀림없이 아까 말씀한것처럼 참선의 결정신심(決定信心) 말입니다. 참선은 꼭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천지우주의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 내가 바로 부처라는 생각말입니다.
내가봐서, 못난 내가봐서 범부(凡夫)로 보는 것이지, 부처가 보면 내가 똑 같이 석가모니(釋迦牟尼)나 같은 부처인 것입니다.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인 것입니다.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에 있는 시(詩)에도 임만이 임이아니라 바로보면은 산도, 내도, 풀도, 다 임입니다. 바로 보면 다 부처님입니다.
이와 같이 딱 느끼고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덩어리로 봐버려야 참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보면 참선이라는 말을 못 붙입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이렇게 보고서 그다음 문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정(定)과 혜(慧)가 같이 아울러 가야만이 그때는 마치 수레바퀴가 둘이 되어야만이 갈수가 있고, 나는새는 날개쭉지가 둘이 되어야만이 높은 하늘로 고상(高翔)하듯이 우리는 꼭 정(定)과 혜(慧)가 아룰러 가야합니다. 그래야 조화롭게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빠릅니다.
묵조(黙照)만 주로해서 가만히 있는 선, 이런 선은 고요한 정(定)은 좋아도 혜(慧)가 부족하니까 빨리 못갑니다. 따지기만 좋아하는 그런 선(禪)은 따지면 혜(慧)는 밝아지겠지요, 허나 그런 선법은 고요한 일심(一心)이 못 되니까 역시 정(定)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비추어 보는 혜(慧)와, 오로지 마음을 모우는 정(定)과, 이것이 아울러야 합니다. 비추어보는 혜와, 관조(觀照)하는 혜와 또는 마음을 하나로 모이는 고요한 그 마음이 딱 하나로 합해져야 만이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그래야만이 빨리갑니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몸이 거북하다, 몸이 무겁다, 가슴이 답답하다, 이런것은 우리 마음이 정혜쌍수가 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정과 혜가 균등되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야 분분단단히 올라가서 성불(成佛)의 길로 우리가 나아간다 말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염불법문(念佛法門)
그럴려면 마음으로 부처의 경계(境界). 서산대사(西山大師) 선가귀감(禪家龜鑑) 법문(法門) 가운데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심즉연불경계(心卽緣佛境界)”라, 마음은 부처의 경계를 연(緣)해서, 떠나지 않게 해서, “억지불망(憶持不忘)”이라, 생각하고 생각해서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 말입니다.
마음심(心)자, 곧즉(卽)자, 이연연(緣)자, 부처불(佛)자, 경계경(境)자 경계계(界)자. ‘심즉연불경계’마음은 부처의 경계을 연해서, ‘억지불망’이라. 생각할억(億)자, 가질지(持)자, 아닐불(不)자, 잊을망(忘)자. 이를 잊지 않는다 말입니다.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이라, 입구(口)자, 곧즉(則)자. 입은 곧 부처이름을 불러서 “분명불란(分明不亂)”이라, 분명히 불러서 산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부처의 경계를 잊지 않는 그 마음과 부처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우는 그 마음이 하나가 딱 되어서 해야 만이 우리 8만4천 번뇌를 몰록 순간 녹인다는 것입니다.
<心則緣佛境界。憶持不忘。口則稱佛名號。分明不亂。如是心口內外相應。若念一句阿彌陀佛。能滅八十億劫生死之罪。成就八十億劫殊勝功德. [禮念彌陀道場懺法]卷第二 >
<阿彌陀佛六字法門。定出輪迴之捷徑也。心則緣佛境界憶持不忘。口則稱佛名號分明不亂。如是心口相應名曰念佛。[禪家龜鑑]>
육조혜능대사 : 자성(自性)을 비춰보면서 ‘이뭣고’를 하라
우리가 ‘이뭣고’ 선(禪)을 한다하더라도 천지(天地)에 빛나는 천지를 훤히 비추는 우리 자성(自性)을 딱 비추어 봐야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것이 무엇일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냥 의심만해서는 그때는 마음이 지혜(智慧)도 정(定)도 맑아지지 않습니다.
이뭣고를 한다하더라도 ‘이뭣고’선을 제시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 마음이 천지를 훤히비추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것이 무엇인가?’를 해야합니다. 부처의 경계 이것을 비추어보는 이것이 혜(慧)입니다.
허나 우리는 부처의 경계(境界)를 우리 범부(凡夫)는 못 봅니다. 다만 부처님이나 도인(道人)들 말씀따라서 방불(彷佛)에 우리는 느낄 뿐입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이것도 역시 부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천지우주는 텅 비어있고, 텅비어 있는 가운데는 알수 없는 묘유(妙有)가 있다. 이것도 역시 부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진공묘유(眞空妙有)>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천지우주는 부처님의 광명뿐이다. 이것도 역시 부처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우주는 청정한 광명뿐이다. 이것도 역시 부처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無量壽佛號 : 無量光佛、無邊光佛、無礙光佛、無對光佛、炎王光佛、清淨光佛、歡喜光佛、智慧光佛、不斷光佛、難思光佛、無稱光佛、超日月光佛。[佛說無量壽經卷上]>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우리 마음에 맞는 그런 것을 골라서 우리가 부처의 경계를 안 떠나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원래 부처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부처하고 간격이 좁아진다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의 경계를 생각하는 이것은 혜(慧)가되고, 이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을 쭉 안 쉬고 이어가는 이것은 정(定)이 됩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다른 말씀으로 바꾸어서 말하면 천지우주를 하나의 광명(光明)이다. 하나의 부처다. 생각하는 이 마음. 이것은 일상삼매(一相三昧)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안 쉬고 쭉 이어나가는 것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이 아님이 없음을 비추어보는 이것은 혜(慧)가되고, 이런 마음을 안 쉬고 생각생각 이어가는 계속하는 마음은 정(定)이 됩니다. 이것이 아울러져야 만이 우리 공부는 조화(調和)가 되서 마음도 가볍고 몸도 가볍고 성불이 빠릅니다. 이것이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정혜균등(定慧均等)입니다.
말씀들일려면 한도끝도 없습니다. 참선(參禪)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고 최상(最上)의 문화형태인지라, 우리가 이것을 체계(體系)를 세울려고 하면은 몇 권의 책도 부족한 것입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를 드는 법문(法門)만 한다 하더라도 선문념송(禪門拈頌)이라, 30권 책에다 이렇게 수록했습니다.
그렇게해도 다한 것은 못됩니다. 이와 같이 어렵습니다만은 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하고 한말로 두리뭉실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내가 부처임을 딱 느끼면서 닦아야합니다. 그래야 참선이지 그렇게 못느끼면은 그떄는 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을 하건, 하나님을 부르건, 주문을 하건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실은 선뿐인 것입니다. 모두가 선(禪)뿐인데 따지고 보면, 주문을 한다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부처임을 딱 느끼고 주문하면 그건 선입니다.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이란 그것이 천지우주를 다 감싼 우리 부처님과 같으면 그때는 그것이 선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이나 문자나 그런것에 걸리지 말고서 오직 마음자세. 우리 마음이 부처와 나와 더불어서 하나,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 덩어리 이렇게 느끼고 닦는 이것이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러한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로 느끼는 그 느낌. 그 느낌을 계속해서 이어간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定)입니다.
이와 같이 정혜쌍수(定慧雙修)와 선오후수(先悟後修), 선오후수(先悟後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이 말씀을 명심(銘心)하시고서 이번 기회에 꼭 ‘참선(參禪)이 무엇인가?’ 하는 참선에 대한 결정신심(決定信心)을 가지고서 앞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19850803-태안사 하계용맹정진 4일째법문 : 청화대종사 설법
* 태안사 방송실 카셋 녹음
* 정훈스님 카셋 테이프 보급
* 해인, 법륜행, 외 펜글씨 녹취
* 태호스님 녹취 취합
* 20160221-워드작업 : 고은, 창해
* 20160301-워드교정 : 본정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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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고맙습니다. 구어체의 큰스님 법문을 읽다보면
큰스님의 우리 중생들을 위하는 간곡한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언제 보고 들어도 감로수와 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