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난중일기에서 빠진 32일 동안의 기록인 ‘충무공 유사’ 가 새로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적 인물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료라 할 수 있는데 충무공 작년 이맘때쯤 생가 터를 찾아 나선적이 있습니다. 물론 아산 현충사와 충무공 묘소도 가보았습니다만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충무공 생가 터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4월 28일이 충무공 탄신일 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장 역사적 복원이 시급히 곳이 생가 터이기 때문입니다. 충무공은 인종(仁宗) 원년인 조선시대 때 건천동은 지금 남산 밑에 중구 인현동을 말하는데 실제로 중구 현재 명보프라자(구 명보극장)건물 앞에 생가 터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표지석을 잘 닦여 있어 보기 좋았고 덕분에 사진 찍는 내 모습도 보였다. 아마 이곳을 오고 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곳이 생가 터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관할 지자체에서 세웠으니 믿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충무공 생가 터를 추적하던 사람들이 이곳은 생가 터가 아니란 걸 밝혀 냈습니다. 그분들이 이곳이 생가 터가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표지석의 주소지는 중구 초동 18-5번지인데 조선시대 건천동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 부근입니다. 따라서 일단 표지석의 자리는 아니란 것인데 그렇다면 진짜는 어디일까요? 정확한 주소지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하지만 여기서 난관에 봉착하게 됐는데 중구 인현동 1가에는 40번지가 없다는 점입니다. 38, 39번지 그리고 41, 42번지는 있는데 감쪽같이 40번지만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아마 조사를 하던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40번지가 없어진 이유는 중구청 지적과에 확인해본 결과 1942년 즉 소화(昭和) 17년에 40번지와 31-2, 32-2번지 등이 31-2번지로 합병되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는데 여기사 한가지 크게 의심스러운 점은 1942년에 다른 번지와 합병된 40번지를 1956년 조사에서 40번지로 기록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부분이 충무공 생가 터 확인에 가장 큰 미스터리인데 아마도 해방과 그 후 전쟁을 겪으면서 주소지 정비가 정확히 되지 않아 생긴 오류일 가능성이 제일 크지만 조금 뒷 맛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곳 즉 현재 인현동 1가 31-2번지가 지금으로는 제일 유력한 곳임은 분명하기에 앞서 생가 터를 찾아나선 분들의 발걸음을 따라 그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먼저 명보프라자 표지석 앞에서 중구청 방면으로 약 50m(30m인가? 작년에 가보아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정도 걸어 가면 동아장식 이 나오고 그 옆으로 골목이 나옵니다.
골목을 들어서면 인쇄골목이 나오는데 그 조그만 골목에 더 조그마한 간판들이 서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고운손카드방이 1층에 있는 건물이 나옵니다. 바로 이곳이 중구 인현동 1가 32-2 번지 건물이며 기록에 따른 유일한 생가 터라 말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생가 터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이곳에서 오래 사셨던 노인 분들이 아주 옛날에 이곳이 생가 터란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있었으며 이 건물 주인도 약 40년 전 이 건물을 지으려 할 때 이곳이 40번지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으며 어머니에게서 이곳이 충무공 생가 터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하니 이곳에 대한 신뢰성은 매우 높다고 할 것입니다. 생가 터. 애정다방 ^^;
건물을 옆에서 보니 출입문이 있는데 1층은 좁은 인쇄업소들이지만 아마 지하는 그것보다 큰 다방이 있는 듯 보입니다. 애정다방. 바로 애정다방이 생가 터의 가장 정확한 위치입니다. 애정다방이 써있는 건물을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아니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인 최근의 기사를 보면 중구청에서는 생가 터를 성역화 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 중이라 하며 성역화의 장소를 남산 한옥마을 안에 조성하려 한다고 합니다. 다 좋습니다. 어디서건 하지만 그것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힘들다 한다면 최소한 정확한 생가 터의 확인 및 안내 정도는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대로 앞에 표지석을 세워놓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올바로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데 오점이라 지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설가 어머니는 자식의 억울한 누명을 구명하기 위해 도성으로 올라오시다 돌아가시고 아들은 일본군 특수부대에게 살해당하여 새파랗게 찢어진 가슴, 옥고와 부상으로 인해 몸은 피곤죽인 된 상태로 백의종군 해야 했던 버려진 군인. 자신을 끝내 믿지 못하여 끊임없이 흔들어대고 중국장수들과 심지어 다행히 12척의 배가 있으니 신이 있는 한 적이 조선을 업수히 여기지 못 할 것이라며 본인 뒤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에 오직 자신의 어깨에 겨레와 사직의 운명을 올려놓고 12척의 배로 수 백 척의 적선을 향해 돌진해야만 했던 가련한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4월 28일. 이제 어제가 되어버렸지만 겨레의 역사상 가장 위대하지만 가장 힘겨운 한 생을 살다간 충무공 2008 . 4 . 29 금강안金剛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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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4.28일이 탄생일이시군요...생가터를 복원하고 잘 간직햇으면 좋겟네요...
고등학교 때 시험문제로도 나왔던 것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승당을 참 좋아합니다. 다녀오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