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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 4대왕 세종 “도”(등극 1418 ~ 왕위 31년 06월)
1. 세종이 등극한 배경
세종대왕 즉위도
경복궁의 정궁인 근정전의 내부 모습입니다.
왕이 앉아 있는 용상 뒤로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도 그림.
세종대왕은 22세에 즉위하여 54세 승하 하실 때 까지 조선을 32년간 훌륭하게
통치하였습니다.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양녕을 세자로서 신뢰하지 못했으며.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납니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 때 황희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태종이 일방적으로 세자를 폐한 것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때문일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이에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게 됩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4대왕 세종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
2. 폐세자 사건과 관련한 실록 기록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 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 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 조선왕조 최초로 폐세자가 되는 양녕대군의 발자취를 잠시 따라가 봅니다..
사실 태종은 정상적으로 맏아들에게 왕위자리를 넘겨주기로 작정 하였었다.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 특히 친척, 공신, 형제, 이복형제 들을 잡아들여 쥬리를 틀고 곤장을 치고 귀양보내고 목을 쳤던가?
태종에게 있어 가장 절실했던 것중 하나는 정상적인 왕위계승을 통한 왕권의 안정이었는 지도 모른다.
세자 양녕대군의 사건사고 종합
1. 1394년 태조의 조선 개국2년 뒤 나라의 왕권을 이을 태종의 맏아들(양녕대군)이
태어남.
1404년 태종4년 10살때 세자로 책봉되어 왕이 되기 위한 제왕수업을 받기 시작함.
11살때는 세자가 공부 안한다고 환관들이 종아리 대신 맞음.
세자에게 한번씩 공부한 내용을 테스트 해서 잘못하면 종아리를 때림.
당연히 세자는 종아리를 맞지 않고 세자의 시중을 드는 내시들이 대신 맞음.
아무래도 세자의 종아리를 직접 때렸으면 버릇을 고쳤을수도 있었을 것이나.
자기가 잘못해도 대신 매를 맞는 사람이 있으니 어린 나이에 이게 얼마나 재미 있는
놀이라고 생각 했을까?
2. 환관 노봉이란 사람이 대신 맞음. 이번에는 볼기짝 맞음.
노봉이 하는 말" 이것이 어찌 소인의 죄이옵니까?"
이 사건으로 세자의 사부들이 세자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협박함.
세자의 공부가 게을러질 경우 고급관리였던 세자의 사부들도 명퇴 당할수 있슴.
3. 이때부터 세자랑 밥먹을때도 왕이 세자에게 잔소리함. -
임금은 계속 세자의 사부와 세자의 시중드는 환관이나 하급 관리들을 닥달함.
4. 세자 13세때, 세자의 개인교수(정4품)관리 한명은 1년간 개인교습을 했지만 세자의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탄핵 받고 짤림.
5. 1407년, 세자 나이 만13세때 임금이 세자에게 왕권을 물려준다고 양위를 유포함.
대부분의 신하들은 먼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반대함.
그때 당시 세자와 아주 친하던 세자의 외삼촌(민무구 민무질)들이 세자에게 왕권을
받으라고 꼬드김.
임금은 "한번 해본소린데 -- 외삼촌 두명 탄핵 받고 귀양. 나중에 죽임을 당함.
6. 세자 1407년에 장가감. 만 13세때..
7. 세자 결혼하고 얼마 있다가 중국으로 출장감.
중국 출장 가는 길에 한성관원 1명이 세자에게 자석과 철(나침반 용도 인듯)을 선물함.
세자 그거 가지고 놈. 선물 준 관리 탄핵 받고 파직됨. 자석과 철을 준게 어떤 죄인지??
8. 세자가 출장 간 사이에 태조 이성계가 많이 아픔.
임금이 아버지 이성계를 가까이 두고 간호하려고 임자 없던 세자궁으로 태조를 모심.
세자, 출장가고 없는 사이에 방 뻇김.
9. 세자 14~15살때부터 외국물 먹은 경험도 있고 태종도 몸이 많이 아프기도 해서
업무분장을 새로함. 외국 사신이 오거나 하면 거의 대부분이 세자가 대신 나감.
15살 때 부터는 임금이 지내야 항 궁궐의 제사도 대신 지내게 함.
아무래도 세자는 공부할 시간보다 술판 벌이는 시간이 더 많았을듯.
10. 세자는 사냥개와 사냥매를 무척이나 좋아함.
세자가 매를 기르다가 여러차례 혼나고 매는 압수되고 그럼.
그래도 세자가 매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관리들이 매를 뇌물로 사용하다가 걸려
서 매 맞고 귀양가고 그럼.
임금과 세자가 외출 나간 사이에 환관이 임금의 명으로 몰래 매를 풀어줌,
세자가 돌아와서 환관을 채찍으로 마구 때림.
11. 드디어 세자가 사는 궁궐에 3교대로 당직근무자(보초) 세움.
세자전에 개인적으로 출입하여 빌붙는 사람들 단속하기 위함.
당연히 그 단속대상에는 세자가 포함됨, 세자의 일거수일투족 다 임금에게 보고됨.
그전에도 당직이 있었지만 그전 당직들은 대부분 중,하급관리와 내시들이었기 때문에
세자의 눈치를 안볼수 없었슴.
새로 부임한 당직 관리들은 대부분 군(君. 軍)의 칭호를 받은 임금의 친척이나 공주들의
사위 또는 개국공신들의 자제들로 구성됨. 이사람들 파워가 막강함. 이들을 종친(宗親)
이라 하며 임금과 농담도 주고 받을수 있는 사이임.
12. 세자 나이 17살때 봉지련이라는 기생에게 홀딱 반함. 궁궐에 불러들여 놀다가 걸림.
봉지련은 나중에 관청의 노비가 됨.
13. 20살때 소앵이라는 평양기생을 궁궐에 불러 들여 놀다가 걸림.
이제는 환관들이 세자에게 기생을 소개해 주는 역활까지 함,
관련자들 전부 처벌 받음. 세자 기생 뻇겼다고 단식 투쟁하다가 임금(태종)한테 혼남.
14. 21살때 종친의 모임에 가서 기생 초궁장을 끼고 밤새도록 놈.
이 초궁장이란 기생은 재주가 좋앗던듯. 정종하고도 놀았고 세자하고도 놀았다 함.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져서 왕실 개망신 당함.
어느날은 퇴임한 관리의 손녀가 이쁘다는 말을 듣고 그 관리집에 처들어감.
손녀랑 자고 나옴.
15. 세자가 20세가 넘은뒤부터는 거의 공부도 안하고 놀기만 함.
이때부터 테종도 서서히 세자 양녕에게서 마음이 떠나는 듯 함.
충녕대군(세종)이 워낙 똑똑하고 총명해서 자주 비교 됨.
16. 드디어 1418년 태종18년 양녕대군은 세자에서 폐위되고 3째인 충녕대군이 세자 자리에
오름.
세자에서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퇴직 관리의 첩을 뺏어서 데리고 다님.
이 첩의 이름이 '어리'임. 어리는 결국 양녕의 아이를 임신함.
17 양녕대군의 특이한 버릇.
아랫사람들에게 꼬임을 당했던 어떻든 간에 임금에게 죄가 발각되면 항상 있는데로
다 말함. 전에 있었던 일들까지 친절하게도 임금에게 다 이야기 함.
그로인해 몇년전 사건들이 들통이 나서 또다시 처벌을 받는자가 많았슴.
폐세자가된 이후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때까지도 계속 조정의 골치꺼리가 되었다...
18. 양녕대군의 글씨
국보 제 1호인"숭레문" (남대문) 현판글씨
삼봉 정도전이 작명하고 바로 양녕대군이 썼다는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숭례문의 현판글씨
입니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로로 썻다 합니다...
아들을 몹시 미워했었던 태종마저도 양녕의 글을 보고 그 놀라움과 감동에 자랑스러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3. 세종대왕 의 업적
1.생애와 업적
지난 천년 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과 가장 자랑스러운 일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로 세종대왕이었고,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한글창제로 선정되었습니다.
세종대왕 어진
조선 제 4대왕 이름은 도. 태종의 셋째아들로 15세기 우리 민족에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임금 이다.
안으로는 백성들에게 희망, 용기, 가능성을 심어 주었고, 밖으로는 호국의 의지로 국경을 튼튼히 하고 국토를 확장 개발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고.
22세의 나이로 임금이 되어 첫 사업으로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집현전은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소이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였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을 등용하여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세종의 업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우리 민족 문화의 발전을 위해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바로 한글을 창제하고 훈민정음을 만든 일일 것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 나라에는 우리의 글이 없었으며. 신라 때 설총에 의해 '이두'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거의 중국글자인 한자를 써 왔기에.
세종은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의 필요성을 느끼고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훈민정음 28자와
'용비어천가'라는 한글 책을 엮었다.
세종은 백성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정치와 훌륭한 치적을 쌓은 어진 임금이었고 우리 민족 문화를 창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대왕입니다.
세종대왕 독서도
세종대왕은 방대한 독서광이었다 함.
어린시절 아버지인 태종에게 혼이날 정도로, 또한 왕이 된 후 당뇨로 눈병이 심해져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해집니다.
멀리 창 너머로 활달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사냥을 즐겨했던 맏형인 양녕대군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세종대왕 업적]
1. 훈민정음(한글)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반포되었음
2.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845호)
3. 측우기 (세계 최초의 우량계)
4. 물시계 (자격루, 옥루 등)
5. 일성정시의(별이 자리를 옮기는데 따라서 밤 시각도 알게 만든 시계)
6. 4군6진 개척,
7. 군사제도 개편,
8. 조선통보 주조
9.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음악을 발달시켰음
10. 구리로 된 『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을 남겼음
11.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 편찬
12. 우리 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리지' 편찬
13. 1445년 '치평요람'완성
14.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지었음
15.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이 밖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음.
2.한글 창제
훈민정흠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표현하고자 하여도 서로 맞지않아, 이런 절차로 어리석은
백성이 알리고자 애를 써도, 표현하지 못하노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날로 써서 편안케 하고져 함이다"
즉 일반백성들의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서 라고 하지만, 사실은 백성들이 너무 무식해서
어느정도의 상식이라는 것을 갖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글의 우수성
혹자는 우리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나쁘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사실 우리말의 표현 그대로는 세계 어느 나라 언어로도 번역을 못한다.
우리말은 표현력도 세계 으뜸이지만 어감(語感), 정감(情感), 음감(音感) 등도 으뜸이다.
외국에서 우리말을 번역 못하는 것은 우리말이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외국어가 표현력이 부족하여 우리말을 번역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 를 하나 들어 보자
가자미 냄비에 물을 잘잘 부어 살근살근 끓이고 졸졸 졸여서
노리끼한 고기를 보시기에 소복하게 담아
괴괴한 달빛 아래 사랑하는 님과 단둘이 - 술 한 잔을 곁들이니
살살 목을 넘는 요맛이 달콤하기도 하구나.
너무나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이 표현과 어감을 어떠한 외국어로 번역해 내겠는가?
한글의 탄생배경.
어느 날 세종이 집현전의 학자들을 모아 놓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포부를 이야기 했다.
" 나에게는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꿈이 하나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오. "
학자들은 아무도 세종의 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궁금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다.
" 나는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들이 편하게 살아가게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우리에게는 말은 있으나 글이 없어 백성들이 불편해 하고 있소.
자기 나라의 글이 없는 민족은 그 나라의 문화를 가꾸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 우리 글을 만드는데 전념해 주셨으면 하오. "
이 말을 들은 집현전의 모든 학자들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고 문화를 빛내고자 하는 투철한 염원에 놀랐다.
세종은 우리 글을 만드는데 필요한 사람의 여러 가지 입모양과 글씨가 적혀있는 두루마리 종이를 꺼냈다.
" 중국의 한자는 물건의 모양을 본 딴 글자이나 우리 글은 소리나는대로 적는 표음문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 입모양을 여러 개 만들어, 이 모양을 본따 우리 글의 기본을 정하면 어떨지 오랫동안 생각하여 만든 것이오.
이 원칙에 따라 모든 것이 순서있게 진행되면 좋을 듯하오."
세종의 이와 같은 신념, 열정과 더불어 신숙주, 박팽년, 이개, 정인지, 성삼문, 최항, 이선로 등 여러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인 한글이 만들어집니다.
훈민정음 반포도
이 곳은 경복궁의 앞마당인 조정 앞 입니다.
왕이 지나는 길인 삼도를 지나 답도를 올라서면 근정전 앞의 단인 월대 이지요.
삼도 옆으로 무반과 문반이 난란히 품계석 앞에 도열해 있는 모습입니다.
근정전 뒤에 보이는 산은 북악산입니다.
이 곳에서 세종대왕은 1446년 훈민정음을 온나라에 정식으로 반포 하였습니다.
의식을 더욱 경건하고 장엄하게 받혀주는 편경, 편종, 그리고 지금은 쓰이지 않는 건고도 보입니다.
모두 세종전에 전시되어 있는 악기입니다.
2. 집현전 설립
집현전을 설치해 그곳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집현전학사도
경복궁 경회루 앞에 있던 수정전으로 - 세종시대에 집현전으로 쓰였던 건물임.
이 곳에서 젊은 인재들과 한글을 이용한 다양한 책을 집필하였으며.
가장 처음 한글로 만든 책은 '용비어천가' 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내용과 함께 조상의 덕을 칭송하고 있으며.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가고 있다.
경복궁내 경회루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 기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였으며.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3. 국방정책
김종서와 북진 개척도
북으로는 여진족에 의한 잦은 침입이 있었지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한 김종서입니다. 뒤에 보이는 강은 함경도 지역의 두만강입니다.
김종서의 6진개척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들을 쫒아냄으로서 오늘날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영토를 확보해놓습니다.
그리고 최윤덕, 이천에게 시켜 압록강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을 설치합니다.(이천은 자세히 보면 안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금속활자를 간행한것도, 측우기를 만든 것도, 압록강을 개척한 것에도 모두 이천이란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이 북방개척에서는 세종대왕의 가장 악독한 업적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바로 사민정책입니다.
남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강제로 북쪽으로 이주시킨 것이지요.
물론 세금혜택이나 정부지원 등 상당한 대가가 있었지만,
실제로 이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에 다른 임금들이 이러한 업적을 행했다면 두고두고 가십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책을 펼쳤기에 그 확보해놓은 북쪽땅이 완전히 우리땅으로 편입되게
된 것이죠. 현재는 욕을 먹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세종대왕다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이종무와 대마도 정벌도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라 앞뒤로 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남으로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이 항상 골치거리였으나. 세종 때 이종무에 의해 대마도 정벌을 완수하게 되었습니다.
뒤에 보이는 커다란 배와 바다는 지금의 대한해협의 모습이겠지요.
이와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흘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고.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4. 음악의 재 정비
모든 음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낸 사실들이 곧 그의 중요한 업적의 내용들입니다.
자음도
돌로 만든 악기 "편경" 입니다.
중국에서 수입해 쓰다가 세종 때에 우리나라에 좋은 경석이 발견 되어 박연에 의해
악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편경을 세종대왕 앞에서 처음 시연하는 장면이지요.
여기서 세종은 절대음감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미세한 음의 차이를 세종대왕은 집어내었습니다.
5 과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관하던 곳은 서운관이었습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 --
천문을 관측하는 간의대에 올라 세종은 맏아들인 훗날의 문종대왕이 혼천의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천문 및 지리학, 달력 제작, 기상 관측 등을 담당하던 관청을 서운관이라 합니다.
나중에는 관상감으로 바뀌지요.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으며.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 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혼천의
혼천의는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정인지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며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습니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습니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습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입니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 하였습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습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됩니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습니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으며.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6. 세종의 사망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아버지인 태종이 『주상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못하니 내가 죽은후 상 중에도 고기를 들게 하라』는 유교를 내릴 정도로 세종은 육식을 좋아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세종은 체구가 비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혈류순환 장애는 물론 혈탁이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혈탁은 피가 탁해지는 것을 한방적으로 지칭하는 것인데, 심하면 염증성 질환이 쉽게 온다.
또 혈액의 농도가 높아져 수분 대사가 잘 안돼 부종, 설사도 생기기 쉽다.
세종이 안질, 종기, 부종, 설사 등의 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자주 눈에 띠며.
혈탁의 원인은 영양과잉, 대사의 이상, 노폐물 배출 장애에 있다.
혈탁을 막기 위해서는 소식을 하며 대소변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 규칙적이고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
태종은 이를 잘 알았던듯 경기도 관찰사로 하여금 세종에게 운동을 시키라 명하기도 한다.
세종은 30세 전후로 소갈(당뇨)을 얻게 된다.
말년까지 고통스럽게 한 안질(눈병)은 그 원인이 혈탁 뿐 아니라 소갈의 합병증으로도 추측됨..
세종 23년 실록에는 임금의 병이 온천욕으로 차도가 있다는 내용이 있으며.
세종은 안질, 부종 등을 치료하기 위해 부지런히 온천을 즐긴다.
온천은 심폐활동을 강화하여 말초 혈행을 개선시키고 소변량과 땀의 배출을 증가시킴으로써 노폐물의 배출을 용이하게 한다.
세종은 42세에 임질을 앓아 그후로 고생이 심했다고 합니다.
임질로 인한 통증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탔을 정도였다고 하며
임질 치료를 위해 죽엽석고탕 등 탕제를 하루에 3번 드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 사인은 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종은 이처럼 병마와 싸우면서도 소현왕후 심씨와 후궁 사이에 모두 18남 4녀를 두었으며
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세종의 여덟째 아들)의 집 별채에서 승하하셨습니다.
세종대왕 묘 여주 영릉
조선왕조 제 5대왕 문종 “향”(등극 1450 ~ 왕위 02년 03월)
1. 문종의 등극 배경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8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으면서 8년 동안 상왕의 대리로 나랏일을 하다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조선 제 5대 임금 문종이다.
문종대왕 어진
왕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1421년으로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그리고 즉위 초부터 각종 질환으로 고생을 한 세종이 병상에 누운 것은 1436년(세종18년)으로 향의 나이 23세 때였다.
이듬해 세종은 드디어 왕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줄 것을 결심했다.
말하자면 왕세자의 섭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종은 실질적으로 상왕으로 물러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우선 세자가 섭정을 하는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을 설치하고, 그곳에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첨사원은 고려 때 동궁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던 첨사부 제도를 본딴 것으로 이는 충렬왕 이후(1276년) 에 폐지된 제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이 제도를 임시로 도입한 것은 세자가 섭정을 할 경우 승정원과 편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첨사원의 설치와 함께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세자의 나이 29세 때였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 동안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 조회를 받도록 하는 한 편, 모든 관원을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고,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세자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세자 향은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2. 문종의 성품및 업적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 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문종은 언론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6품이상의 신하들은 돌아가며 임금에게 의견을 올렸으며 문종은 의견들은 나름대로 수렴하여 정치를 실행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후 정도전, 정초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고자 하였던 '고려사'를 완성하였다.
고려사는 고려 34왕 475년간의 역사를 편찬한 역사책으로서 고려 시대의 기록이 담겨있어 가치가 큰 책이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 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는등 불교 융성 정책이 활발했지만, 유신들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 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야만 했다.
이 때가 1452년 5월이었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단종과 경혜공주를, 사측 양씨에게서 경숙옹주를 얻었다.
3.문종의 병세
문종의 건강은 어렸을적부터 좋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언론을 존중하여 너그러운 정치를 펼쳐나갔던 문종은 병세가 깊어가 결국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세상을 뜬다.
문종은 건강이 약한 탓으로 자식도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 1남 1녀만을 두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0세의 단종이 임금으로 보위되어야 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세종 치세 말기에는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세자로서 대리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세종 말기는 이미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아버지 세종대왕 만큼이나 천재였던 왕이 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문종대왕은 정말 아쉽다. 기록에 보자면 문종은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화도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남은 왕의 어진이 한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한 왕의 어진이었는데,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난리통에 겨우 건진 문종의 어진은 결국 소실되고 말았다.
4. 세 부인을 둔 홀아비
여자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첫번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문종을 위해 온갖 비방을 쓰다가 쫓겨났고, 둘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는 문종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자 레즈비언이 돼서 쫓겨났다.
그러나 후궁들과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걸 보면 문종 본인이 세자빈들에게 마음이 없었던
듯도 하다.
2명이나 쫓겨난 상황이라,
세종은 3번째 세자빈을 뽑을 땐 새로 간택하는 것보다 기존의 후궁 중 한 명을 선택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경혜공주의 어머니이고, 문종과 사이가 좋은 권씨를 새로 세자빈으로 뽑았다.
그러나 그녀는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해, 다시 세자빈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권씨의 칭호 현덕왕후는 사후에 받은 것이다.).
그러다 새로 세자빈을 뽑는 문제는 흐지부지 되었고, 문종은 왕위에 오른 후로도 결혼하지 않았기에 조선에서 재위기간 동안 유일하게 왕비를 두지 않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종이 즉위한 후, 그를 보호하며 수렴청정을 할 왕실의 웃어른이 없어서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하며.
단종을 늦은 나이에 얻고 아들이 채 성년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권력 공백을 초래했고, 이는 야심많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좌를 노리는 하는 계기를 제공하게도 되는 것이다.
일찍 죽지 않았다면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성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으나 실제로는 문종은 성종보다도 오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로서 30 여년간이나 세종을 보필했던 반면 실제 본인의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어딘가 약하며, 요절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세종 말년에는 강무나 종묘의 제례를 대신하는 등 사실상의 왕 노릇을 무난하게 해내 실제적인 재위 기간은 그보다 길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만큼 문종의 권력은 매우 강했을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이 조선 역사상 거의 정통성이 꿀릴 일 없는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라는 점도 강력한 왕권에 한몫을 했다.
5. 문종 독살설
조선왕 독살설 중에서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설이다.
문종이 2년밖에 살지 못 한 게 너무 큰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것이겠지만.
문종은 세종 말기에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아 아버지에게 손자 걱정까지 하게 만들긴 했지만
원래 몸이 그리 약한 편은 아니었다. 사망의 원인은 종기라 전해진다.
원래 고질병이었긴 했으나 당시 어의 전순의가 병을 오히려 키우는 처방을 내려 죽음을 앞당겼다는 설이 제기된다.
《식료찬요 : 食療纂要》를 저술하여 "전통 온실" 등에 대한 놀라운 기록을 남겼고,
이후로도 어의로 계속 재기용되었던 그는 계속 문종의 종기에 나쁘다는 꿩 고기와 활쏘기 구경 등을 처방으로 내렸다.
이 전순의는 귀양갔다가 세조의 쿠데타 때 공신에 책봉되고 복권되었다.
이것이 문종 독살설의 단초가 되고 있으나...
정작 이 전순의가 책봉된 공신은 원종공신으로 급이 크게 떨어지며,
당시 1등만 무려 79명이다.
정작 이보다 윗등급인 좌익공신에서도 성삼문, 이휘가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고,
원종공신 중에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이름이 떨어진 사람이 많다.
원종공신까지 합하면 세조 때 공신이 된 인물은 무려 2000 여명.
이쯤 되면 전순의가 공신이 된 게 신기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정기룡의 경우처럼 공신과 원종공신의 차이를 잘 모르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낚시로 봐야 될 것이다.
전순의를 탄핵한 것은 대부분 삼사였는데,
이를 반대한 것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권신, 즉 세조의 반대파였다.
오히려 세조 쪽인 신숙주는 이에 대해
대간들 얘기가 맞는데 왜 전순의를 싸고 도는가 라면서 대신들과 언쟁을 높이고 있다.
이 독살설 덕분에 꿩고기가 종기에는 안 좋다는 게 널리 퍼졌는데 정작 현대 한의학에선 꿩 고기가 오히려 종기에 좋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한의학이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만 독살설에는 이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다.
현재 한의학은 그 때와 500년이 넘는 격차가 있다.
현재의 눈으로 볼 게 아니라 당대 종기에 대한 대처가 어땠는지를 봐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게 정말 잘못된 처방이라고 한다면 또 위의 원종공신과 엮어서 다시 생각해 봐야 된다. 한 마디로 뭔가 그럴듯 하긴 하지만 - ???
문종대왕릉(헌릉) 구리시 동구릉
1. 세종야사
조선의 성군(聖君)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上參)에서 부터 과업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했다.
밤 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기에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들고 나선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나도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 하려한다.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킨다.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처절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을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 였을것으로 여겨진다..
2. 세종야사
세종대왕은 7명의 후궁을 두어 10남 2녀를 낳았다.
후궁은 권문세족이나 지방 토호 세력과의 연대를 위해 간택하였으나 세 번째 후궁부터는 출신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이는 국왕의 선택권을 넓혀 주는 한편 궁녀들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은 휘빈 김씨를 며느리(아들 향: 훗날 문종의 아내)로 간택한다.
휘빈은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자 비방을 썼다.
남편이 찾아다니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몰래 잘라다 불에 태워 술에 타 마시게 하고,
봄에 교접하는 뱀을 잡아 가루로 만들어 먹게 하는 등 민간요법을 사용했다.
또 미채라는 풀을 먹고 자란 나비를 말려서 차고 다니기도 하고,
붉은 박쥐가루를 써보기도 하는 등 온갖 비방을 쓰다가 왕후인 소현황후에게 발각되어 쫓겨나게 된 것이다.
3, 세종대왕의 가족
세종대왕의 부인은 총 8명이고 자녀는 18남 4녀를 두었다.
왕비는 소헌왕후(昭憲王后)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 1375~1418)의 따님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소헌왕후의 외조부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안천보(安天保)이다.
세종이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태종께서 선택하여 배필로 삼은 것이었다.(안천보 실록졸기)
소헌왕후는 어려서 외가인 안천보의 집에서 자라 외조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소헌왕후는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후궁은 영빈 강씨(令嬪姜氏), 신빈 김씨(愼嬪金氏), 혜빈 양씨(惠嬪楊氏), 숙원 이씨(淑媛李氏), 상침송씨(尙寢宋氏), 장의궁주(莊懿宮主) 박씨(朴氏), 명의궁주(明懿宮主) 최씨(崔氏)이다. 세종은 후궁과의 사이에 군(君) 10명, 옹주(翁主) 2명을 두었다.
4. 고기덕후
나라에 큰일이 있어 모두 육식을 금했는 기간이었는데 태종은 어린 세종에게만은 특별히 육식을 허락함
이유인 즉, 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먹었다고......
고기반찬이 없으면 쓰러지는 척하며 고기를 달라고 때썼다고 함
한번은 친경 한다며 소끌고 밭을 갈다가 비가 오니까 소를 떄려잡아서 고기로 해먹음
태종은 죽기전에 -- "주상에게 고기 잘 챙겨먹여라" 라고 했다기도
그래서 고기만 먹고 앉아서 책만 읽으니 엄청 뚱뚱했다고 함
잘 안씻어서 피부병까지?....나중에는 건강때문에 많이 마르게 되었다 함.
5. 여자들을 좋아했던 세종대왕.
평소에 여색을 밝혔으며
자식 문종이 아픈데 옆에서 간호하던 궁녀에게 반해서 후궁으로 들임.
그 후궁은 갓난아기인 단종을 실질적으로 양육하게 되는 '혜빈 양씨'이다
혜빈양씨는 훗날 단종 복위 사건 발생시 사육신중 일인인 성삼문과 내통했다는 건으로
수양대군(세조) 에게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6. 시대를 앞서 가던 왕
출산휴가의 시초 -- 노비가 아이를 낳았을때 일주정도 밖에 쉴수 없었는데 100일로 늘려줌
이를본 신하들이 '우리도 문병 못가는 데요? '하니까
'너네는 옆에서 봐주는 사람이라도 있잖아'라고 반론함
훈민정음창제 당시 집현전 학자들은 '글자'를 중시하고 세종대왕은 '발음'을 중시함
결국 세종대왕의 고집으로 발음을 위주로 창제했는데 결과적으로 한글은 거의 대부분의 소리를 표현가능하게 됨
노비인 장영실을 급제시킨것만 봐도 가히 그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일 이었다.
사실은 아버지인 태종이 왕권을 노릴만한 적들을 모두 제거해준 덕이라 할수도 있을것임.
7. 타고난 욕쟁이
신하들이 열뻗치는 소리를 하면 울컥해서 욕설을 난무하였다 함.
그 정도를 짐작키는 어려우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나오는 '지랄', '우라질'정도는 썻을것으로 여겨집니다.
8. 맞 형인 양녕대군 과 기생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으로 보내 주었다.
9. 신숙주와 세종
책을 좋아하는 세종이 왕에 등극후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자들이 학문 연구에 힘쓰도록 하였을때 있었던 일화이다.
어느날 세종이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있는것을 보고 내시로 하여금
누가 밤늦도록 집현전에서 책을 읽고있는지 보고오라 명하니
이에 내시가 보고와서 아뢰기를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다 하니 왕(세종)이 친히 집현전에 나가 그 광경을 살피니 신숙주가 세종이 온것을 모르고 계속 독서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이에 왕이 새벽이 되도록 밖에서 글 읽는소리를 경청하다 신숙주가 고단하여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추운날씨에 독서에 열중한 신하에게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돌아왔는데
이튿날 아침 깨어난 신숙주가 자신 등에 씌워진 어의를 보고 내시에게 물어보아 전날밤 왕이 행차하신을 알고 그 은혜에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하였으며 더욱더 학문연구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10. 황희정승 과 세종
세종대왕께서 어느날 황희 정승의 집을 방문하여 집안에 들렀더니 그 방안에는 흔하디 흔한 돗자리 하나 깔려있지 않고 다 헤진 멍석이 하나 깔려있었다고 한다.
황희정승은 차마 왕께 그 멍석에 앉으시라 할수없어 고민을 하는데 이번에는 왕이 눈을 들어 천정을 보니 집 천정에 구멍이 뚫여 비가 오면 다 새게 생겼다고 한다.
왕이 근심하여 물으니 황희는 그것은 비오는날 낙숫물울 받아가며 가난한 백성을 생각하며
더 좋은 정치를 펼 생각을 다잡기 위해 일부러 뚫어 놓은 것 이라한다.
이에 세종이 감탄하여 회궁하여 신하로 하여금 황희의 봉급을 더 올려주라 일렀고
황희는 오른 봉급만큼 그 돈을 불쌍한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다 썼다고 합니다.
11. 인터넷 시대의 최적 한글
중국인이 컴퓨터 자판을 치는 모습을 본다.
3만개가 넘는다는 한자를 어떻게 좁은 자판에서 칠까?
한자를 자판에 나열하는게 불가능해 중국어는 발음을 먼저 영어로 묘사(한어병음)해
알파벳으로 입력한다.
단어마다 입력 키를 눌러야 화면에서 한자로 바뀐다.
불편한건 더 있다. 같은 병음을 가진 글자가 20 개 정도는 보통이다.
그 중에서 맞는 한자를 선택해야 한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중국을 앞선 이유 하나가 여기에 있다.
타이핑을 많이 하는 전문직 중국인들은 한자의 획과 부수를 나열한 또 다른 자판을 이용한다.
자판을 최대 다섯번 눌러 글자 하나가 구성되므로 오필자형(五筆字型)이라고도 한다.
속도가 빠르지만 익히기 어려워 일반인은 못한다.
일본인은 어떨까. 컴퓨터 자판을 보니 역시 알파벳이다.
일본인들은 '世'를 영어식 발음인 'se'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법을 쓴다.
각 단어가 영어 발음 표기에 맞게 입력돼야 화면에서 가나로 바뀐다.
게다가 문장마다 한자가 있어 쉼없이 한자 변환을 해줘야 하므로 속도가 더디다.
나아가 '추'로 발음되는 한자만 해도 '中'을 비롯해 20개 이상이니 골라줘야 한다.
일본어는 102개의 가나를 자판에 올려 가나로 입력하는 방법도 있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워 이용도가 낮다.
이러니 인터넷 친화도가 한국보다 낮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말레이시아 처럼 언어가 여러 가지인 국가들은 아예 컴퓨터 입력방식 개발부터 골칫덩어리다.
24개의 자음· 모음만으로 자판 내에서 모든 문자 입력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한글은
과시 하늘의 축복이자 과학이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한글로 5초면 되는 문장을 중국, 일본문자는 35초 걸린다는 비교가 있다. 한글의 입력 속도가 일곱배나 빠르다는 얘기다.
정보통신(IT)시대에 큰 경쟁력이다.
한국인의 부지런하고 급한 성격과 승부근성에, 한글이 '디지털 문자'로서 세계 정상의 경쟁력이 있는 덕에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글로 된 인터넷 문자 정보의 양은 세계 몇 번째는 된다 한다
세종이 수백년 뒤를 내다본 정보통신 대왕이 아니었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26개인 알파벳은 한글과 같은 소리문자이고 조합도 쉽지만 'a'라도 위치에 따라 발음이 다르고 나라별로 독음이 다른 단점이 있다.
그러나 한글은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만 갖는다.
어휘 조합능력도 가장 다양하다. 소리 표현만도 무려 8800여개
여기서 중국어의 400 여개, 일본어의 300 여개와는 비교가 안 된다.
세계적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이어서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거의 0%인 세계 최저의 문맹률이 가능했고 이게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한글은 발음기관의 모양까지 반영한 음성공학적 문자여서 세계의 언어를 다 표현해낸다.
맥도널드를 중국은 '마이딩로우', 일본은 '마쿠도나르도'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이것이 네팔 등의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한글로 문자를 만들어 주는 운동이 추진되는 이유다. 외국인에게 5분만 설명하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게 할수도 있다 합니다
아! 위대한 '세종대왕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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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세종과 문종편을 마치고 다음은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파란만장했고 흥미 진진한 단종과 세조대왕편으로 갑니다..
사육신등 숱한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하며 특히 세조의 장자방인 한명회의 활약상은 단연 압권입니다. -- 2012, sj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