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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자본주의’ 전도사 마거릿 대처
노동자를 중산층으로, 파업왕국을 비즈니스 천국으로
오늘날 많은 여성이 꿈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성공한 여성 선배들이 있어서다. 여성 정치인에서 여성 기업인, 여성 저널리스트, 여성 학자, 여성 우주인까지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이들은 모두 강한 자신감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올랐다. 자신감이란 원하는 결과에 대한 긍정적 기대다. 인간은 누구나 어려운 시기를 겪게 마련인데, 성공한 여성들은 이 시기를 자신감 하나로 견뎌냈다. 필자는 그런 여성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려 한다. 그 첫 인물은 대처 전 영국 총리다.
이명박 정부는 여러 차례 ‘이념(理念)’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했다.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이념이란 현실과 맞지 않다고 판명된 ‘좌파이념’일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낡은 좌파이념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언명한 적은 없다. 그가 내세운 이념은 ‘실용’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두 정권은 우리 체제에 대안적인 실험을 했다. 세금을 늘리고 경제활동에 대한 기업규제를 심하게 해 자본주의의 근간인 사유재산권을 흔들었다. 이 생각의 뿌리가 바로 ‘좌파이념’이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합세했다.
시사평론가 복거일씨는 지난 10년간 정권이 가졌던 이념은 ‘민족사회주의 이념’이라고 못 박는다. 그는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이런 대안적 체제실험에 대한 국민의 단호한 심판이었다”며 “다수의 시민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리인 자유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충실히 따르려 애쓴다는 것을 선거를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평했다.
이념은 믿음이다. 중요한 것은 새 정부 사람들이 얼마나 올바르고 굳센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점이다. 새 정부가 표류하는 것은 비록 총론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갖고 있다 해도 각론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미숙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난날 영국을 이끈 마거릿 대처를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대처는 한마디로 믿음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모든 불행의 씨앗을 정부와 남에게 돌리는 ‘남 탓 심리’가 ‘영국병(病)’의 원인이라 보고 이를 ‘자기 탓’으로 바꾸는 정신혁명을 이뤄냈다. 그리하여 영국은 눈부신 변신을 했다. 총리 재임 기간 11년 동안 영국병은 말끔히 치유되고 번영과 성장을 구가한 것이다.
대처의 정치인생은 정치가에게 ‘이념’과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자유시장경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여성이 정치를 한다는 것
대처는 옳은 것을 밀고 나갈 줄 아는, 현대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신념의 정치가였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제 한 말이 오늘 다른 숱한 정치인에게 익숙한 우리로서는 신념이 먹히는 정치가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선하게 보인다. 대처는 정치야말로 모두의 삶을 한 단계 향상시키고, 그 기반이 되는 ‘정신혁명’을 가능케 하는 가장 훌륭한 자선(慈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역시 여성으로서 한계를 느낀 적이 많았다. “여자의 몸으로 총리는커녕 재무장관도 어렵다” “모든 여성 정치인은 2류이고 대처는 여성인 데다 경험도 경량급”이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그 스스로 “내 생전에 영국 정치 무대에서 여성 총리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낙심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설정한 한계를 스스로 깼다. 그렇다고 그가 여성운동가적 면모를 보인 적은 없다.
그는 ‘성(性)차별’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잡화점 딸이 영국 정계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는 그 자체만도 충분하며, 여성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입법은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1979년 4월 총선 때에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며 여성운동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남녀 구분 없이 인간은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여성’을 부각하고 ‘여성’을 강조할수록 여성은 피해자요,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은 페미니스트들에겐 인심을 잃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남성 우월주의자들에게 여성도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과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 됐으니 이보다 더 큰 여성운동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능력을 믿는 대다수의 여자처럼 대처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여성이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가고 싶다면 여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보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남자들과 경쟁해 실력으로 당당하게 겨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처가 보수당 당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정치가로서 여성이라는 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라는 기자의 질문을 받자 그는 “나는 (여성, 남성이 아니라) 정치가입니다”라고만 답했다. 이어 “미세스라고 불러도 되겠느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나는 마거릿 대처입니다”라고 답했다. 여성 최초니, 여성 정치인이니 하는 성의 구분을 뛰어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여성성을 활용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여성이란 게 무기이자 자산이 됨을 깨달았고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어찌 생각해보면, 여성이면서 여성성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남성주의적 사고방식일지 모른다. 자기의 성에 대한 이해와 사랑 없이 어떻게 자신감이 생기겠으며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 타인에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사실 개혁적인 이미지에 여성만큼 어울리는 ‘성’은 없다. 기존 사회의 주류는 대부분 남성이 아닌가. “모든 걸 바꾸겠다” 는 슬로건을 내건 대처에게 남성 위주의 기존 사회에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은 남자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쟁력’이었다.
선거전에서 벌인 그의 ‘아줌마 전략’은 유명하다. 그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서 유세를 했다. 한 손에는 가득 찬 장바구니를, 다른 한 손에는 절반 정도만 채워진 장바구니를 들고 말했다.
“오른손 장바구니에 가득 찬 것은 1974년 1파운드로 살 수 있던 식료품입니다. 왼쪽은 지금(1979년)의 노동당 정권에서 1파운드로 살 수 있는 식료품입니다. 만일 현 집권당인 노동당이 다시 5년을 다스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때엔 하도 살 것이 없어 비닐봉투 한 장이면 충분할 겁니다.”
이렇듯 감성적인 언어는 인플레이션에 지친 주부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는 자신의 행정철학을 ‘집안 살림’에 비유하곤 했다.
“나라 재정이 어째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까. 현명한 주부는 가정 수입의 범위 안에서 늘 알맞게 지출을 해가고 있습니다. 주부들도 잘 해내는 일을 어째서 정부가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사실, 행정이란 게 다른 게 아니다. 살림을 잘하는 것이다. 수입의 범위 안에서 지출을 하고 되도록 절약해서 수익을 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부와 정부의 비유는 절묘했다.
대처가 자신을 간호사에 비유한 것도 여성적인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그는 실업을 병(病)에, 영국을 환자에 비유했다.
“환자를 불쌍히만 여겨서 ‘그냥 가만히 누워 계세요. 필요한 건 제가 다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말하는 간호사와 ‘누워 있지만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보세요’라고 채근하는 간호사가 있다고 칩시다. 누가 더 좋은 간호사인가요? 당연히 후자이고 내가 바로 그런 간호사입니다.”
때로 그는 국민의 어머니상(像)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전쟁에서 첫 사상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내각회의를 주재하다 말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 참석자들은 “총리는 고개를 숙이고 1분가량 테이블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국민은 대처의 이런 모습에서 남자에게선 볼 수 없는 전쟁 지도자의 모습을 봤고 반전(反戰) 여론을 누그러뜨렸다. 대처는 또 전사자 250명의 유족에게 일일이 친필로 위로편지를 써 보냈다. 어머니 처지에서 자식을 전쟁에서 잃은 가족들을 이해하고 그 상처를 보듬겠다는 모성적 리더십을 보여준 것.
대처는 이름 앞에 ‘주의(主義)’라는 말(‘대처리즘’)이 붙는 거의 유일한 정치가다. 그가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을 가진 철학자이자 이론가였으며, 자신의 사상을 책이나 교실이 아니라 삶과 현실에서 실현시킨,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인간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처리즘의 본질
대처리즘이란 과연 무엇일까. 어려운 게 아니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면서 의지한 철학은 서너 가지의 단순한 사고방식이었다. 그것은 장사를 한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들이기도 하다. 첫째,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돈을 쓰지 않는다. 즉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춘다. 둘째, 결코 남의 돈을 빌려선 안 된다. 결국 파산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셋째, 친구라면 무조건 성실과 충성을 다해야 한다. 넷째, 성공하고 싶다면 열심히 일하라…. 이는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自助)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는 정부가 개인 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것, 그리고 국민이 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려 한다는 것을 영국 정부의 가장 큰 문제라고 봤다. 중산층 내 하층 계층에서 출발해 자수성가, 영국 정치의 중심에 선 자신의 삶처럼 모든 국민을 활력있게 만드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런 활력만이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해 지치고 게을러진 영국을 살려낼 수 있다고 믿었다. “마음을 고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외쳤다.
우리는 ‘국정운영’이라고 하면 사뭇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만, 정치란, 국가지도자란, 한마디로 대처처럼 국민의 마음을 바꾸는 주체 아닌가. 대처는 이렇게 말했다.
“보다 많이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보다 많이 생산하지 않으면 많은 재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보다 많이 투자하지 않으면 취업할 수 없습니다. 보다 많이 저축하지 않으면 투자할 수 없습니다. … 재산 이상을 소비한다면 저축할 수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그 재산을 키울 수 없습니다.”
아부 대신 채찍
그는 “영국민은 지금 정신을 고쳐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구제해야 한다. 국민이 만사를 정치가에게 맡기려고만 한다는 사실, 이게 문제”라고 말했다. 선거에 의해 뽑힌 정치지도자는 국민의 공복이라는 신념으로 국민에게 아부하기 쉽다. 그러나 대처는 아부 대신 채찍을 들었다.
그리하여 먼저 에너지를 쏟은 일은 국영기업 민영화였다. 대처는 영국 기업이 활력을 잃은 것이 경제를 무너뜨린 첫째 이유라고 생각했다. 주요 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경영자들로부터 ‘기업가 정신’을 박탈했다고 믿었다.
영국 국영기업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변화한 세계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소련 하나뿐이던 사회주의 국가는 중국과 동유럽까지 번졌고, 마침내 유럽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업을 자유롭게 두면 독점이 생겨 국민을 착취하므로 기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로서는 신사상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철강, 석탄, 전기, 가스, 철도, 통신, 방송, 은행을 국유화했다. 그 무렵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을 제외하면 영국은 국영기업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영국은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발상지다. 자유방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를 낳은 나라다. 그러던 영국이 국가의 경제 간섭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시장경제라는 말을 쓰기도 꺼리는 사회가 됐다. 자본주의의 미덕인 부(富)를 떳떳하게 여기지 않는 생각까지 퍼졌다.
문제는 그러한 국가개입 경제정책(다시 말해 사회주의적 정책)이 국민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인플레와 실업이 만연하고, 장의사들까지 파업에 나서는 바람에 국민은 일상의 안전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됐다. 결국 1976년, 우리가 11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IMF로부터 30억달러 차관을 받는 관리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대처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의 영광을 되찾자며 들고 나섰다. “이 나라는 세계의 공장이었고 영국민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던 사람들이었다. 세계 최고였기 때문이다”라며.
대처는 국영기업이야말로 사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국민의 정신을 썩게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스스로 일어나 성공하려 하지 않고 남(정부)에게 기대어 살아보자는 의존심리가 팽배하니 종업원들도 마찬가지로 변해갔다.
대중자본주의
대처리즘의 핵심 실천사항이던 국영기업 민영화는 그의 11년 재임기간 내내 추진됐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체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소유권 이전’(서울대 박지향 교수)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혁명적이었다. 민영화는 20세기 영국의 정책 가운데 다른 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경제정책이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영화가 국민의 정신을 바꿔 놓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작동 원칙을 대중에게 가르쳐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를 높였다. 민영화는 한 마디로 정신운동이었던 것이다. 대처는 부를 추구하는 개인의 성공심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의욕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윤은 나쁜 것이라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산업활동을 저해하고 세계무대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하는 것을 방해한다. 심지어 자유롭고 다양한 사회의 기초를 망치는 요인이다.”
대처는 “부자를 때려 부순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자본주의 철학을 ‘포퓰러 캐피털리즘(popular capitalism)’ 즉 대중자본주의라고 한다. 기존의 영국 자본주의가 자본가를 위한 자본주의였다면 그가 내건 자본주의는 일반 노동자를 위한 자본주의다.
‘자본가를 위한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따르면 노동자는 단지 노동이라는 상품을 파는 임금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경제활동으로 이룩되는 모든 성과가 노동자가 아니라 주주인 자본가에게 귀속된다는 계급투쟁적 시각으로 이어진다. 대처는 노동자들을 ‘중산층, 혹은 중산층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며 계급의식을 걷어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는 이것이 영국 정치사상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곡점을 그리는 사상적 전환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를 생산자 집단으로 바라보는 전투적 노동운동이 사용한 개념만으로는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실제 노동자의 삶을 그려낼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따라 보상을 받기보다 집단적 투쟁에 무임승차해 이득을 얻는 부조리도 치유할 수 없다.’(박지향, ‘중간은 없다’)
대처는 부의 창출을 미덕으로 격상시켰다. 돈 버는 일이 왠지 옳지 못하고 천한 것 같다는 생각은 지식인들이 대중에 심어준 위선이자 편견이라고 통박했다. 박 교수의 말대로 “대처는 20세기 정치지도자 가운데 자본주의라는 ‘더러운’ 단어를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외친 거의 최초의 정치인”이다.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대처는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란 “무엇을 결정할 때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어떤 공식적 결정을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목표는 무능한 정부를 쫓아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의 허위를 폭로하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선포했다.
사회주의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다 보니 독립성과 창의성을 갖고 삶을 디자인하기보다 잘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질투하는 심리에 의지해 번성한다고 봤다. 대처는 모든 국민을 부르주아로 만드는 것만이 사회주의를 소멸시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다.
자립 돕는 게 진짜 휴머니즘
대처는 ‘여성 자신(Women´s Own)’ 이라는 잡지와 인터뷰하면서 “사회라는 것은 없다”라고까지 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다. 가난하니 보조금을 타야지, 노숙자가 됐으니 정부에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해야지 하는 생각들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 문제를 곧잘 사회에 떠넘긴다. 하지만 사회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자신부터 돌봐야 한다. 먼저 자신을 스스로 보살피고 이웃을 보살피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지금 영국인들은 의무도 수행하지 않고 남에게 얻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당연시한다. 먼저 의무를 완수하지 않고 마땅히 얻어야 할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대처의 말은 정부의 책임을 미루거나 민간에 떠넘기겠다는 게 아니었다. 사회는 머릿속에 그려진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 가족, 이웃, 그리고 자발적 단체들로 구성된 살아 있는 실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라고 하면 흔히 어려운 이론을 생각하지만, 그 속을 파헤쳐보면 결국 삶을 보는 인생관의 문제라는 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지금 내 삶을 힘들게 하는 게 남 때문이냐, 나 때문이냐 하는 생각에서 갈라진다고 본다. ‘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남을 바꿔야 한다. 결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나 때문’이라면 나를 바꿔야 한다. 나를 바꾸는 일은 무척 힘들기에 남 탓을 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 진정한 휴머니즘, 진정한 복지는 상대가 홀로 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지, 상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흔히 자유주의를 ‘차갑다’고 이야기하지만, 자립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낯선 사람에게 단순히 착한 마음씨만 보여주고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해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경제발전의 믿음직한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얘기는 인생에 자선(慈善)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거나 오직 물질적인 것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대부분의 일에서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하려면 사람들 각자의 이익추구에 기대하는 것이 상책이다.”(대처, ‘국가경영’)
대처는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라야 편견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편견은 궁극적으로 빈곤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에 시장경제의 속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인이 만들었든 흑인이 만들었든 황인종이 만들었든 기계는 기계다. 그 기계의 가격과 품질이 적당하다면 어디서든 사람들이 그 기계를 살 것이다. 시장은 이렇게 정부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믿음직하게 시장을 해방시킨다.”
영국병 완치
대처는 하나의 방침이 서면 끝까지 관철했다. 그렇다고 돌격대장식이 아니라 나름의 승산이 있다고 계산될 때 행동했다. 사자처럼 고함만 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능하다고 판단한 후에 움직였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1993년 11월 일본을 방문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대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정치가에게는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TV의 발달로 정치가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정치가는 자기의 철학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중에게 영합하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지도자라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야 하고 그러면 국민은 으레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대처는 그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돌아가시오. 나는 유턴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국회에서 동료들로부터 단순하고 천진하다는 비판을 들을 만큼 늘 진실을 말하려 애썼다.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자기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사실이나 원칙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어떤 정치평론가는 그의 특기가 ‘불의로부터 정직하며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하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대처는 영국을 다시 일으켜 자신감을 회복하고 국력과 국제적 위신을 되찾는 일에 헌신했고 그 소명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이제 영국병은 완전히 치유됐다. 2006년 통계에 의하면 영국은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미국, 일본, 중국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으며 기업자유지수에서도 6위에 올라 있다.
대처 취임 첫해인 1979년 17%이던 인플레이션 율이 집권 마지막 해인 1985년엔 9%로 떨어졌다. 1980년 마이너스 4%를 기록한 국내총생산도 해마다 증가해 1988년에는 5%의 성장을 보였다. 대처가 세 번이나 총리에 연임된 것은 이처럼 눈부신 경제성장 덕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영국의 모든 것을 바꿨다.
서울대 박지향 교수는 대처의 유산(遺産)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노동조합의 세력 약화’를 꼽는다. 노동조합을 여러 이익단체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노동시장이 정부의 간섭이나 통제가 아니라 시장조건에 따라 반응하게 해 고용을 늘린 것이다. 조합원들은 시대변화에 적응해 수준 높은 일자리와 기술을 창출하고자 기업의 성공을 바라게 됐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조합총회가 나라의 국가경쟁력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하면 노조가 기업의 적대세력이 아니라 효율적인 파트너가 될 것인지를 총리와 각료 앞에서 브리핑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2000년 9월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파업을 벌이자 노조가 나서서 총리에게 엄벌을 요구할 정도였다.
대처는 영국을 ‘파업의 나라’에서 ‘비즈니스의 나라로’ 바꾸었다. 실제로 취임 첫해 2125건에 달하던 파업과 2만9474일에 달하던 노동손실일은 1985년 각각 903건, 6402건으로 줄었다. 대처 정권이 발족할 당시 노조원 수는 1200만을 넘었으나 집권 말기에는 800만 수준으로 떨어졌다.
박지향 교수가 꼽은 대처의 두 번째 유산은 관료국가의 독주를 막고 시민사회를 해방시킨 것이다. 국가의 역할을 크게 줄이고 개인의 영역을 확대해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덜 의존토록 하고 교육과 의료보험과 국영산업 분야에 시장경제를 도입해 경쟁력을 강화시켰다.
1970년대 영국 경제는 시장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한국보다 뒤처질 정도였다. 캐나다의 프레이저 연구원이 작성한 경제자유지수에서 1970년 영국 경제의 자유평점은 54개국 가운데 33위였고 한국은 30위였다. 그러나 2006년 조사에서는 영국이 6위, 한국이 36위였다.
노동자를 중산층으로
대처의 세 번째 유산은 앞서 언급한 대중자본주의다. 그는 노동자들을 중산층으로 만들었다. 국민의 4분의 1이 주식을 갖도록 했다. 대처 집권 이전보다 5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또 국민의 3분의 2가 자기 집을 갖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대처는 세금을 삭감해 사람들에게 금전적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소비와 투자를 활성화하고 경제를 부활시켰다.
대처 정부는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을 택했다. 18~19세기 세계의 공장을 운영했던 영국인들은 금융을 비롯한 서비스업, 컨설팅, 광고, 연예, 레저사업에서 서서히 빛을 발했다. 오랫동안 침체에 빠졌던 경제는 금융 서비스와 첨단기술에 힘입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만 대처 집권기간에 빈부격차와 지역격차는 더 커졌다. 이에 대한 비판에 대처는 이렇게 답했다.
“단지 돈을 아낀다든지 세금을 깎는다든지 하는 게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곤궁한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들을 척결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목표 중의 하나는 그 속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개인의 재능이 발휘되는 사회는 인내하고 자신감 있고 통합된 형태의 사회를 목적으로 합니다. 사회를 함께 묶어주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 즉 사회를 단순히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응집력 있게 만들려는 관심의 증대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영국의 부활을 이끈 대처의 생애는 유능한 국가지도자의 힘이 국가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대처’ 하면 떠오르는 ‘철의 여인’ 이미지는 단지 그가 강단 있는 지도자였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자유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있었다. 그런 믿음 아래 자신의 신념을 흔들림 없이 끌고 간 것이다.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일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철학이다. 소모적인 이념논쟁에 휩싸여 국제경쟁의 속도전에서 뒤처진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철학이다.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참고도서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처 평전은 몇 종 안 된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박지향 교수의 ‘중간은 없다’이다. 박 교수는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확고한 이념적 바탕 위에서 대처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비춰 고품격 평전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대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독을 권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고승제 전 서울대 교수(한국경제학회장 역임)가 쓴 ‘마거릿 대처‘도 읽을 만하다.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대처의 삶과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1995년 암으로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병상에서 구술한 원고를 타이핑해 완성한 역작이다.
단국대 박동운 교수가 쓴 ‘대처리즘 :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대처의 성과를 다뤘다. 각종 통계자료와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경제학적 잣대를 통해 영국병의 치유과정을 다뤘다.
‘국가경영’(김승욱 옮김)은 대처가 직접 쓴 글을 모은 것이다. 국제 문제에 대한 시각이 주로 담겨있다. 뒷부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비판자들’이란 논문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단순한 이론적 지지를 넘어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경험과 지혜가 담겨 있다./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