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염두에 두고 11살 왕자 방석의 왕위계승을 주장.
정도전은 방원 방간 사병조직을 해산시키고 지방으로 분산.
방원은 전라도로, 방번은 동북면으로
왕자들을 내보내 병권을 뺏으려 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늙은 이성계 판단이 흐려진 탓.
건국공신 주역 이방원을 젖혀두고,
11살 방석을 세자 책봉한 점은 실수.
결코, 무사할 수 없는 후계구도였다.
결국, '이성계의 실책'이 빚은 '왕자의 난'.
정도전은 오만하고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
한때 자신을 가르친 스승 이색을 탄핵했고
동문수학을 했던 이숭인을 죽이기까지 했다.
비록 정치노선이 달라도 죽일 필요가 없는
한때의 스승인 이색을 죽이자고 주장한 점.
정도전의 경륜보다는 야망이 앞섰던 야비함.
분명, 정도전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의 오만과 교만은 감당할 수 없는 결점.
불교탄압후 불교권 국가들과 문화교류가 단절된 이조.
결국, 이조는 유교정착 만큼 국제정세에서 뒤떨어진다.
정감록.
이조의 혼란기마다 민심을 사로잡은 예언서.
정감록에서 유교사상의 한계를 드러낸 대목들.
정감록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쓴 책인지 살펴보자.
정감록 내용은 이조 국가존망에 관한 예언서
이조 혼란기마다 민심을 사로잡은 예언서이다.
도교 사상이 담겨있는 책이지만
저자와 저술 연대는 아직도 베일.
정도령의 출현, 새로운 도읍지,
환란과 십승지에 관한 내용의 책.
아직까지도 민심을 사로잡는 예언서.
'오늘날까지도 민족사상의 한 줄기.'
신라 말 고승 도선국사가 지은 것이라 전해온다.
권력변천과 난세의 피난처에 집중된 정감록 내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후에 작성된 예언서라는 설.
정감록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지식인이 유포한듯.
아직도 '정체불명의 말세론 예언서'로서 존재한다.
정감록의 사상배경은 고대중국의 자연철학적 우주론
정치적 역성혁명 이론, 중국의 음양오행 철학 우주관.
여기에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설이 합쳐진 내용이 줄거리.
정감록이 우리나라에 정착된 시기는 이조후기
정감록의 출발점은 정도전에서 비롯된 듯 싶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11살 왕자를 앞세워
정감록을 유포해 대신 정치를 열려한듯.
그 뜻이 실패하자 죽음이 두려웠던 정도전.
가문의 멸망을 막기위해 정감록을 은폐한듯.
정도전 사후 정감록 예언설은은 한동안 잠잠.
그러나, 그 추종세력들이 정감록을 보완해 온듯.
정도전의 '사상과 야심'이 담긴듯한 정감록.
정씨가 나라를 구한다는 내용이 단적인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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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저서로 추정되는... 정감록의 3대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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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이는 것은 누구인가(殺我者誰),
나를 살리는 것은 무엇일까(活我者誰)
미래와 영원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한 대목.
예언마다 반복되는 그 문구는 정도전이 심경.
죽음을 두려워하는 솔직한 심경 토로인 듯 싶다..
계집(女) 사람(人)이 벼(禾)를 인 것이 사람인 줄을 모른다(人不知).
이는 왜(倭)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임진왜란을 미리 예언한 대목.
이조 국란에 도움 줄 사람은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라 뜻 풀이.
<임진왜란> 왜적이 출병할 때 일본 공주는 전쟁결과를 예견.
전쟁에 이기지 못할 것으로 판단,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였는데,
이를 묵살하고 떠나자 '솔 송(松)'자 가진 사람을 조심하라...예언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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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정감록의 예언 풀이가 맞는 것일까?' 아니다.
정도전의 숨은 뜻..솔 송(松)은 곧은 절개를 지닌 선비를 의미한다.
음지에서 곧게 자라는 잣나무 栢과 합친 송백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
난해한 한문책 정감록을 해석할지 모를, 선비에 대한 두려운 심경.
훗날 이조의 유림들이 정도전을 높이 칭송하게 만들려는 계략인 듯.
정도전 후손들이 정감록 원문에 토를 달아 임진왜란을 예언한 듯 왜곡.
<병자호란>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엄동설한 혹한에 침공.
1636. 12. 9. 압록강을 건너 피난 가 산에 숨으면 얼어죽을 것을 예언.
비우(雨) 字 아래 뫼산(山)자를 옆으로 눕혀 써서 합치면.. 눈설(雪) 字.
그 의미는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모른다(天不知)는 뜻의...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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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비결은 '허공에 뜬 흙...(浮土)'= 따뜻한 흙(溫土) = 따를 흙(從土).
이는 온돌방 구들을 뜻한 것으로 방안에 가만히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정도전의 숨은 뜻은.. '1396년 라오둥 정벌 계획' 무산 후 자신의 죽음을 예견.
라오둥 정벌은 이성계의 아들 방언 방간 두 아들을 변방으로 축출하려는 계략.
그후, 이성계의 11살 어린 왕자에게 대통을 이으려다가 실패한 심경이 담긴 듯.
온돌방 구들이 있는 지리산 칠불암을 은신처로 생각한 대목으로도 풀이 된다.
인간 모두를 죽이는 것은 작은 머리에 다리가 없는 소두무족(小頭無足).
이것이 바로 천상 영계의 신명인 것을 모른다(神不知)고 뜻 풀이가 된다.
'귀신 귀(鬼)'에서 작은 머리에 ' (점) 하나가 없고 다리를 떼어내면.. 밭 田.
이는 천상 군대(神軍)의 총지휘자인 신장(神將)을 암시하는 은밀한 단어이다.
그러면 나를 살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이다.
'절의 논 칠두락'이 있는 금산사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상으로도 추정.
지리산 '49일 온돌방 아자방' 큰바위에 '7불상이 새겨진 칠불암으로도 추정
부금, 냉금, 종금의 뜻은 밑없는 시루(浮金)위에 서 계신 미륵불(冷金).
사람으로 태어나니 그분을 잘 믿고 따르라는(從金)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 오시는 장소는 문득 곡부에 집을 정하게 되며(奄宅曲阜)
새로운 진리를 주실 것이니, 이를 잘 수도(修=三人一夕)하고,
이재전전(利在田田)은 환란이 매듭 지어지는 피난처가 대전(大田).
그곳 신도안이 환란의 피난처로 적당하다는(道下止)로 풀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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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러한 뜻의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다.
정도전의 숨은 뜻은..신도안 도읍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
아울러, 그가 죽게되면 후손 삼족이 멸할 재앙에 대한 대책과 은신처.
'작은 머리에 다리가 없는 소두무족(小頭無足) = 세치 혀'
정감록을 후손에게 죽어도 발설하지 말라는 정도전의 비장한 심경 토로.
하여, 이조시대 후기까지도 그의 후손들이 책의 저자를 숨긴 것으로 추정.
정도전의 유교사상 기본 초석은 그가 비합리성과 폐단을 지적한 불교이다.
'<유교사상의 지침서> 정감록을 불교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모순.'
죽음이 임박한 그는 불교에 의지하려 한 심경 고백일까?
아니면, 무학대사 도움 없이는, 살 길 없다고 판단한 걸까?
정감록은 학문의 깊이로 보아.. 그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책.
'하여, 세 가지 예언에 숨은 뜻을 보아 정감록 저자는.. 정도전.'
<정감록>에는 진주 서쪽 100리에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본 고려시대의 이인로,
조선시대 김종직 .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바 있다.
신라가 패망할 무렵부터 천년 동안 청학동의 위치는 신비의 베일에 쌓여 있었다.
1919년 전국에 60 방주(方主) 교구 및 수백만 신도
1921년 함양군 황석산에서 천자등극을 위한 천제(天祭)
조선총독부에서는 보천교 신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
일제 탄압이 계속되자 차경석은 친일행각을 시작.
교단 내에서 심한 반발이 일어나 보천교 혁신운동
이때 일부 간부들이 이탈해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서울대법사(大法社)·삼성교(三聖敎) 등.
한편 강일순 추종자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
순천교(順天敎)·태극도(太極道) 등 100 여 개
1938년 조선총독부는 증산교 및 유사종교 해체령
증산교 교단이 소멸되거나 지하로 잠적.
1945년 8.15 해방후 새로이 흥기하기 시작.
1950년 후반 말세론이 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1960년대 자체 정비와 도태과정을 겪는 한편,
이상호·이정립 형제에 의해 경전 발행 작업
1970년대 이후 한국학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정신 문화유산을 간직했다하여 학계의 주목
1975년부터 〈증산사상연구〉를 발간하기 시작,
1974년 증산도장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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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혼란기의 정감록, 갑오경장 등 격변기
미륵신앙은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선동
희망 잃은 민초에게 새 세상을 열어준다고 현혹했다.
하지만, 미륵사상을 표방하는 정통 종파는 없었다.
불교에서의 미륵신앙은 스스로가 미륵이 되는 수행.
전생에 죄업까지 참회하여 도솔천으로 간다는 믿음.
1966년 교주 서백일이 피살된 뒤 교세가 쇠퇴.
지금도 금산사 용화동은 용화교 신봉자의 마을.
장길산(張吉山) 소설 저변에 깔려있는 미륵사상
................장길산......................
이조 효종 때, 계집종의 몸에서 태어난 장길산
광대 장충의 구원으로 재인(才人) 마을에서 성장.
같은 마을 역사(力士) 이갑송, 송도 상단 행수 박대근,
구월산 화적인 마감동 등과 사귀다가 창기 묘옥과 정분
길산은 해주 간상배 신복동을 징벌하려다 붙잡혀 사형수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후 양부모의 뜻을 어길 수가 없어
누이 동생 봉순과 결혼후 금강산 입산.
운부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백성'에 대한 의식이 눈뜬다.
숙종 10년, 대기근이 발생하자
관아와 부호를 털어 기민을 구출
구월산에서 의적떼 활빈도를 결성
운부 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계(巫系),
근기 지방의 미륵교도 등과 결속해 반란.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조가 망한다는 괴서가 나돌고,
미륵이 도래해 용화(龍華)세계 믿음이 번져 나간다.
길산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
이때 고달근이 관가에 검거되자 길산 일당을 밀고한다.
토포관 최형기가 급습하지만 길산은 달아난 뒤.
길산은 고달근을 찾아 응징하고 최형기를 처단.
그후 길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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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북부능선' 삼정산에 있는 도솔봉.
연하천과 벽소령 사이 삼각고지 인근 도솔봉.
이상향 건설을 꿈꾸며 지리산으로 숨어든 화전민들.
결국, 1950년대 '반란의 역사'에 휘말려 온갖 고초.
소각령에 의해 그들이 꿈꾼 이상향을 떠나야만 했다.
'이상향 도솔천에서 도솔봉까지 빨치산 격전지.'
결국, 도솔천 이상향은 아비규환 지옥이 된 셈.
연하천에서 형제봉까지는 일명 '숲속 요정의 거리'.
죄없이 죽임을 당한 산골 처녀들 영혼이 떠도는 곳.
함양 삼정마을 일대에서 아직도 불리우는 '산동애가'
'연하천 요정의 실제 주인공들이 아닐까?'
미륵산(461m)
통영은 남해 최고의 미항으로 소문난 '동양의 나폴리'
미륵도 미륵산이 없었다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명성.
미륵도와 통영 해협의 사이를 잇는 충무교와 통영대교
임진왜란의 전승지로 수많은 유적지가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기후, 청정 해역
풍부한 해산물 먹거리가 인파를 붐비게 한다.
통영해협을 가운데 두고 시가지와 남쪽으로 마주 보며
그 가운데에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미륵산(461m).
경남 통영시 봉평동, 미수동과 산양읍을 가르며 솟아있다.
산정에 서면 대마도까지 바라보이는 조망
그래서 산림청이 선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
한려수도 사이로 솟는 일출은 황홀경을 연출.
미륵산은 미래의 부처 미륵불이 여기 사바세계에 출현
용화수 아래에서 삼회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곳.
미륵산 속칭 용화산은 유서깊은 용화사 이름을 딴 지명
미륵, 용화 등 불교용어가 암시하듯 산기슭에는
용화사, 관음암, 도솔암, 미래사 등의 사찰이 있어
이곳이 불교문화 요람인 동시에 영산임을 알 수 있다.
산정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옛 천제단을 비롯해
제2봉에 봉수대 터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용화사는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화상이 초창해 정수사라 명명
고려 원종 원년(1260)에 큰 비가 내려 산사태로 소멸.
3년 뒤 자윤, 성화 두 화상이 옮겨 짓고, 천택사라 명명
인조 6년(1628) 소실된후 벽담선사가 중창 용화사로 개칭
관음암을 벗어난 오르막길 따라 10분이면 도솔암.
고려 태조 26년(943)에 도솔선사가 창건했다.
암자 뒤 동굴은 도솔선사와 호랑이 전설의 고향.
효봉선사가 6.25 당시 이 암자로 피난 와 머물면서
통영땅에 선종 불교의 뿌리를 내리고 미래사를 창건
제자 법정, 일초 스님이 문파를 형성한, 선종의 산실
미륵도는 연륙교로 인해 오래 전부터 섬이 아니다.
그래서 통영 시민들은 이 산을 찾고 또 아끼고 있다.
서울에 북한산이 있고, 부산에 금정산이 있다면
통영에는 미륵산이 있어 시민 안식처로 자리매김
북쪽 내륙에는 통영의 조산인 벽방산이 솟아 있고,
발아래 통영 동으로 거제도와 한산도, 남쪽의 욕지도,
서쪽 자란만 사량도까지 삼면의 바다에 100 개의 섬들
첫댓글 남일대 해수욕장 가는 길에 매향암각이있습니다. 메일로 자료 보냈습니다.
보내주신 메일 자료를 잘 받아 본문에 넣었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