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313년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이라는 큰 사건으로 기억된다.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를 만나 자신의 동생과 결혼하게 하고, 제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기독교를 공인하기로 한다. 이른바 밀라노칙령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진흥 정책을 쓴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내전에 내전을 거듭하는 전쟁 끝에 권력을 잡은 콘스탄티누스에게 확고한 권력 기반은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는 여기에 기독교의 힘을 이용하기로 한다. 황제는 교회의 권위와 하느님의 권위에 따라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공인 10여 년 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가 동양으로 오면 불교로 바뀐다. 종교의 정치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묻노라면 그것은 거의 틀림없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으로부터 꼭 60여 년 뒤, 고구려도 같은 상황을 맞고 있었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지 2년 되는 임신년(372)은 곧 동진(東晉)의 함안(咸安) 2년으로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또 4년 갑술년(374)에 아도(阿道)가 진(晉)나라에서 왔다. 다음 해 을해년(375) 2월에 성문사(省門寺)를 짓고 그곳에 순도가 있게 하였으며,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짓고 그곳에 아도가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가 비롯된 바이다.”
먼저 [삼국사기]가 쓰고 [삼국유사]가 그대로 인용한 고구려의 불교 전래 사실이다. 불교의 전래가 왜 하필 소수림왕 때인가. 우리는 그 답을 로마의 기독교 공인과 비교하며 생각해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