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일들이 이미 의식 저 밑에서 결정된다.
융은 이런 내면의 과정을 콤플렉스라고 했고, 피아제는 스키마라고 불렀으며, 신경학자들은 뉴런의 그물망이라고 설명한다.
최악의 경우 콤플렉스는 우리가 타고난 변화에 대한 창조적 적응력까지 방해하며, 우리를 반복적인 반응 패턴에 묶어두기도 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 삶을 휘젓고 다니는 콤플렉스에 대해 부인한다.
우리는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고 하지만 그건 자아의 기만책에 불과하다.
콤플렉스는 적응 전략으로 출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어제는 해결책이었던 것이 종종 오늘은 문젯거리가 되곤 하는데, 이유는 그것이 편협하기 때문이다.
콤플렉스를 치유할 때, 치유의 목표는 특정 사고나 행동패턴을 제거하는데 있지 않다.
의식에 경련이 오지 않도록 콤플렉스를 완화시켜주고 자신에게 더 많은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
풍성한 삶으로 이끌어줄 잃어버린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얻게 해야 한다.
콤플렉스에 의식의 조명을 비추면 콤플렉스는 더 이상 숨어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진화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엔 훈련이 필요한데 처음엔 절망스러울 수 있다. 모욕감이 들기도 한다.
콤플렉스를 무장해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지전능하다는 환상을 버리고
자아를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꾸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대인들이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하데스의 그림자에 관해 알아보려면,
이 지하세계의 기운을 볼 수 있는 조용한 전망대를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림자는 우리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할 것이다.
흔들림 없는 존재의 기술을 배우고 터득해야만 편파적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내 자아보다 더 고결하고 영속적인 무언가와 연결될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은 행위와 존재가 분리되어 있기에 훈련이 필요하다.
반성과 명상, 현재에 집중하는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건 백일몽을 꾸거나 정신을 놓거나 망연자실하는 것과는 다르다.
활기찬 존재가 될 때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고의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내 존재를 내 삶 속으로 초대할 수 있다.
존재가 생성될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심란하거나 슬프거나 외롭거나 들떠 있을 때,
최선의 처방은 분주함 속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있는 것이다.
첫댓글 글을 읽으며 징징..여운을 남기며 묵직하고 깊은 그곳을 두드려대는 신호를 느끼게됩니다. 최선의 처방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있는 것...깊은 공감이 남습니다.그리고 아픈 통증도 남습니다.
내 존재를 내 삶 속으로 초대할 수 있다. 제겐 담배 한 대 태우는 짧은 순간이 그렇습니다. 근데 마나님께서 자꾸 압력을 행사하시니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봅니다.
심란하고 슬픈 지금은 가만히 고요히 있어야 할 때인가보네요. 며칠 시체놀이를 하고 나서 이제 서서히 움직여 보려 합니다. 컴플렉스가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란 말도 어디서 들은 듯... 의식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 하겠지요.? 그러려면 인정하는 것이 제일의 작업이 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