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2016년 6월 1일 발행한 [문학사랑] 여름호에 발표하였습니다. 6월 27일에는 임강빈 선생님과 선생님의 오랜 친구이신 안영진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 대접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2016년 7월 16일에 갑자기 임강빈 선생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가슴이 먹먹한 가운데 세월을 보내다가 이 권두언을 다시 수록합니다.--리헌석
순수 서정시에 담긴 증언과 의식
―등단 60주년을 맞은 임강빈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문학사랑] 발행인 리 헌 석
세월이 참 빠릅니다. 3.1절을 맞는가 했는데, 4.19도 봄바람처럼 지났습니다. 5.18을 생각하는가 했는데, 6.6 현충일과 6.25 동란이 머지않습니다. 시대적 아픔을 노래하는 참여시인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생을 거울삼아 순수시를 빚는 서정시인들의 마음에도 겨레사랑은 늘 작품의 중심에 있어 왔습니다. 등단 갑년(甲年, 60주년)을 맞은 임강빈 시인의 여리고 고운 서정시에서도 꼿꼿한 정신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창조와 미적 관조의 바탕이 되는 순수의식, 즉 마음을 깨끗이 비워버린 순수의식이 허(虛)하고 정(靜)한 상태를 허정(虛靜)이라 하고, 이 허정에 이르는 방법을 심재(心齋)라 하는데, 이 심재란 마음을 텅 비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텅 비우는 일은 근원적인 순수의식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무욕 또는 허정의 시심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은 선시(禪詩), 한시(漢詩), 시조(時調) 등에서도 산견됩니다.
임강빈 시인의 작품을 분석한 결과 허정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심재의 과정이 확인됩니다. 시인은 ‘비우고자 함’이나 ‘비운 상태’를 나타내는 ‘무욕의 시심’을 시종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올곧은 정신을 추구하는 작품에서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선보입니다. 특히 항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작품 창작은 굉음과 같은 울림을 생성합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성장한 시인의 무의식에 연면하게 녹아 있는 한국적 정서로 기인한 것 같습니다.
순백의 꽃 이파리를
살포시 가지 위에 얹어 놓는다.
장날이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흰옷을 사랑하는 백성
일본 순사들이 숨어 있다가
흰 것이 눈에 뜨이기만 하면
검정 물감으로 그어댔다.
고샅으로 피해 다니고, 또 쫓고
조선의 마음을
뭉개버리려는 얄팍한 수법.
환한 백목련을 보면
그 광경이 선히 살아난다.
임강빈 시인의 시 「백목련」입니다. ‘흰 꽃’과 ‘흰 옷’의 색채적 동질성을 통해 목련과 우리 겨레의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입니다. 평생 순수 서정시를 지향해온 시인의 작품 중에서 목적의식을 살짝 얹은 작품입니다. 특히 서두 2행 ‘전경화(前景化)’에 의해 상황을 제시한 다음, 중심을 이루는 9행에서 일본의 강압적 폭거를 증언합니다. 이어 결미 2행의 현재형 종결어미로 회상적 정서를 확인하게 합니다. ‘살아난다’에서 일본의 폭압을 잊지 않고 있다는 내면을 담아냅니다. 또한 현재형의 수미상관(首尾相關) 배치를 통해 분명한 의지를 투영하는데 성공합니다.
꺾이지 마라
늘어진 가지야.
전봉준의
혁명처럼 꺾이지 마라.
춥고 어두운 겨울을
견딘 버들아.
봄추위가
아직은 골목에 남아 있지만
맨 먼저 눈 뜨거라,
춤 추거라.
뿌리박은 나의 땅
늘어진 가지야
바람 따라 서러운 버들아
진정 꺾이지 않는
힘을 보여라.
임강빈 시인의 시 「버들」입니다. 이 작품은 다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일차적 의미는 어둡고 추운 겨울을 견딘 버들가지에게 꺾이지 말라는 간절한 주문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버들’이 언표화(言表化)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 확산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버들을 시인 자신의 내면적 표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바람 詩抄」 연작시에서 보여주는 심리적 명암을 버들에 전이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현실에 대한 관심의 표명입니다. 특히 ‘전봉준의 혁명처럼’ 꺾이지 말라는 주문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예술적 갈등이 노정되는 시대에 끝없는 시련과 고난을 ‘겨울’로 포괄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민족에 대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뿌리박은 나의 땅’에서 맨 먼저 눈을 뜨라는 것, 진정 꺾이지 않는 힘을 보이라는 것은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초인(超人)’과 같은 상징적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임강빈 시인은 1931년 2월 22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은 후 정년퇴임하고 시 창작에 전념하는 분입니다. 1956년 《현대문학》에 시 「코스모스」 「항아리」 「새」가 박두진 시인의 3회 추천 완료로 등단하여, 2016년 현재 등단 60주년을 맞은 원로 시인입니다. 시인은 시로만 노래한다는 주관에 따라 ‘산문을 쓰지 않는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순수 서정시에 절실한 의식을 투영한 작품을 감상하며,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을 조감하며 겨레 의식이 소생하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시련과 강압에도 무너지지 않는 우리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첫댓글 다시 한 번 임강빈 시인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