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溪 박희용 麗陽南禪軒日記 2024년 8월 5일 월요일]
『대동야승』 중 [청파극담] 세 이야기
「갑진년에 영해(寧海)의 땅속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는 위로 수백 길이나 오르고 열은 온돌과 같이 뜨거우므로 헤치고 보니, 화염이 극히 심하여 사석(沙石)도 모두 타고, 타버린 돌의 색깔이 숯과 같은데, 온 들불(野火)이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사석을 태우면서 자연히 발화하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돌을 주워 불에 던지면 불이 타고 연기가 났으니 대개 석탄(石炭)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한재의 징조인가. 을사년의 한재에도 내(川) 마르고 나무가 말랐는데 영표(嶺表 嶺南)는 더욱 심하였다.」
「홍인산 부원군(洪仁山府院君)은 성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수상(首相)이 되었으나 나무를 심고 재물을 늘이는 것에 정신을 쓰지 않은 적이 없으니 베틀을 거두고 아욱을 뽑는[거직발규 去織拔葵] 것으로 본다면 부끄러운 일이나 일은 아니하고 빈들빈들 노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났다고 하였다. 일찌기 길에서 두 백성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공은 말에서 내려 묻기를, “이것이 무엇하는 것이냐. 여기서 옷이 나오며 밥이 나오느냐. 너 같은 사람들은 마땅히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런 쓸데없는 짓은 무었 때문에 하는가. 너희들은 이것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하고는 그 바둑을 다 먹게 하였다.」
「겸사복(兼司僕) 박효공(朴孝恭)은 공주(公州)의 백성이다. 말 타는 기술에 능하여 벼슬이 어모(禦侮)에까지 이르렀다. 사족(士族) 과부집에서 딸을 시집 보낼 적에, 서달성(徐達城)이 족빈(族賓)으로 참여하였다. 혼인 날 서랑이 혼례가 끝나 예대로 인도되어 들어갔고, 손님들도 각각 흩어졌는데, 노상에서 달성을 따라온 사람들이 서로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오늘 서랑은 박효공이라.” 하였다. 방금 서로 예할 때 달성이 속으로 박효공인가 의심하였으나 반드시 그 모양이 비슷한 자이리라 하여 묻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듣고는 크게 놀라, “무슨 말이냐.?” 하니, 모두들 “오늘 서랑은 박효공입니다.” 하기에, 달성이 말을 급히 몰아 그 집에 돌아오니, 박이 벌써 옷을 벗고 베개에 의지한 채였고 촛불은 켜지지 않았다. “오늘 서랑이 누구냐?” 물으니, 충의위(忠義衛) 민(閔) 모라.“ 하였다. 달성이, ”그럼 지금 안에 있는 사람은 곧 겸사복 박효공이로다.“ 하고, 서로 크게 놀라 그 이유를 물으니, 두 집이 같은 날 장가를 들이는데 여자 집에서 잘못 맞아들인 것이었다. 밤은 깊고 타고 갈 말도 없어서 두 신랑이 다 도보로 각각 처가로 돌아갔다.」
[청파극담 靑坡劇談]
『청파극담』은 조선 전기 문신 이육이 역대 인물들의 일화 및 소화를 중심으로 엮은 필기집이다. 저자의 문집 초간본 『청파집(靑坡集)』 제2권에 수록되어 있다. 왕이나 조정 관료, 사대부들의 일화에서부터 민간의 전설, 속신, 골계적 소화(笑話)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이육(李陸, 1438~1498)의 자는 방옹(放翁) · 부휴자(浮休子), 호는 청파거사(靑坡居士)이다. 고려 말, 조선 초 저명한 가문의 후손으로 선대의 가업을 계승해 정치와 문학에 평생을 바친 관료 문인이었다. 육조(六曹)를 두루 거치고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두 차례의 중국 사행을 다녀왔는데, 이 경험이 『청파극담』에 실려 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파집(靑坡集)』이 있고, 저자의 선조들의 글을 편집한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이 있다.
강릉 해운정(海雲亭)은 1530년(중종 25) 어촌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강원도 감찰사로 있을 때 경치 좋은 곳에 지어 놓은 상류 주택의 별장[별업]이다. 『강릉해운정역방록(江陵海雲亭歷訪錄)』에는 강릉 해운정이 창건된 1530년 이후인 1538년부터 1989년까지 약 450여 년간 이곳을 다녀간 1,408명의 명단이 박효공(朴孝恭)을 시작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