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대흥사에서 기이한 십자가 발견
대흥사 속에서 예수교십자가를 발견해
순금으로 지은 고귀한 십자가
<매일신보> 1927년 11월 20일자
성대(城大) 소전(小田) 교수는 저번 전라남도를 여행하던 중 해남군(海南郡) 선교양종(禪敎兩宗)의 고찰(古刹) 대흥사(大興寺)에서 옛날 걸승(傑僧)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보(遺寶)중으로부터 순금제의 십자가(十字架)를 발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목하 연구중으로 그 십자가는 안밖에는 미려한 붉은 칠보(七寶)로 아로새기었고 가운데는 비었는데 표면에는 'ㅡNRㅡ'의 '로마'글자가 새기어 잇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면상을 부치어 두었던 듯한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는데 이것은 여러가지 점으로 보아 매우 귀중한 발견이라 한다.
SB는 과연 누구
의문의 해결은 막연
서반아이나 포도아 제조품
성대 오다 세이고(小田省吾)씨담
이것은 반도에 전파된 초기 천주교(天主敎)의 유물로서 이것이 불사(佛寺)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내가 이것을 천주교 관계의 것이라고 안 것은 표면에 새긴 '로마'글자 넉자를 본 까닭이며 그 '로마'글자는 '대따스. 나단. 누쓰. 렉쓰. 유때오름'이하는 '라덴(羅典)의 두문자를 써논 것으로 그 의미는 '유다야(猶太)'사람의 왕 '나다레' 예수(耶蘇)라고 한 것이오 가운데를 비워논 것은 유명한 승정(僧正) 유해(遺骸) 또는 유발(遺髮) 같은 것을 넣기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종주(縱株) 밑에 SB의 머리글자가 새겨있는 것은 그 십자가의 주인의 이름인 듯하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비슷한 이름이 없으므로 장차 그 이름을 알아내는 때는 연대도 알게 되어 상당히 자미있는 이야기가 있을 줄로 압니다. 원래 조선에 예수교의 전래는 '쩨쓰페테스' '쩨스잇트' 선교사 등의 포교로부터 있었으나 당시는 전시중이었으므로 좋은 성적을 보지 못하고 그 후 서력 일천칠백팔십삼년, 그 당시 견당사(遣唐使) 이동욱(李東郁)이가 북경에 갔을 때 신부를 만나 그 이듬해에 예수교에 관한 많은 서적과 십자가 등을 가지고 돌아온 때부터이오 그 후부터 예수교가 전파된 듯합니다. 그 십자가는 '스페인'이나 '폴드깔'에서 만든 것인 듯한데 매우 귀중한 발견입니다.
(정리: 2004.11.9,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추가 1]
제가 이 글을 올렸을 당시에 이 십자가의 현존여부에 대해 의문을 가진 바 있었는데, 그 때 '민들레처럼'님(참여연대 우리땅 박상표 회장)께서 직접 해남 대흥사쪽에 질문을 드려 그 절의 유물관리자로부터 "그 순금 십자가가 대흥사에 보관되었던 점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1985년에 인근의 어떤 사람이 훔치고 나서, 그것을 녹여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그 유물은 대흥사에 없습니다."라는 사실을 확인해준 적이 있었다. 해당 유물이 없어진 사실은 무척 아쉬웠으나, 그 사실의 내막이 어떠했는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추가 2]
오늘 (2005.9.14) 우연하게도 임진왜란과 당시의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그 분과 함께 국회도서관에서 관련자료를 찾다가 오타 줄리아(大田 Julia)라는 조선출신 여자순교자의 생애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서구인으로 알려진 '세스페데스 신부'의 존재에 대해서도 전해듣게 되었는데, 그에 관한 참고자료를 뒤지다가 <사학연구> 제18호 (한국사학회, 1964년 9월)에 발표된 김양선, "임진왜란 종군신부 세스페데스의 내한활동과 그 영향"이 있는 것을 알았고, 이 논문의 말미에 바로 대흥사 십자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참고할 만한 내용인 듯하여 해당부분을 여기에 다시 옮겨두기로 한다.
"...... 세스페데스 신부의 유물 하나가 전남 해남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동사내(同寺內) 휴정 서산대사 표충사(表忠祠)에 서산대사의 유물로 보관되어 내려오는 황금제 칠보십자가(黃金製 七寶十字架)가 바로 그것이다. 동 십자가는 세스페데스 신부의 애용하던 십자가로 필자는 생각한다.
이 십자가의 질(質)은 황금인데 장(長) 1촌(寸) 9푼(分) 5리(厘), 횡주(橫柱) 1촌 2푼 5리, 주폭(柱幅) 2푼 5리, 후(厚) 1푼 8리다. 표리(表裏)와 측면(側面)이 아울러 아음다운 칠보제로서 정교한 금선문(金線紋) 사이에 백, 홍, 록, 남색의 여러 빛깔의 보석을 충전(充塡)시켰다. 주두(柱頭)에는 앞뒤에 촉루(촉루)를 새겼고 표면에는 그 아래에 보통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INRI의 사자(四字), 즉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의 약호(略號)가 표시되어 있다.
갑진(甲辰, 휴정입적년의 간지) 8월의 "표충사집물전장기(表忠祠什物傳掌記)"에 다른 여러 물품의 목록과 함께 십자패(十字牌) 일개(一個)라는 것이 보인다. 6.25사변시에 부산에서 발견된 서산의 재자 유정(惟政)의 친필 서산대사 유물기는 칠보(七寶)라고만 있으나 그것이 십자가를 가리킴임은 유물중에 십자가 이외에는 칠보제(七寶製)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서산(西山)의 유물임에 틀림 없겠으나 기독교의 유물이니만큼 서산대사의 손에까지 들어간 경로(經路)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최남선(崔南善) 선생은 유정의 포로쇄환(捕虜刷還)을 위하여 일본에 갔을 때에 천주당(天主堂)에 들러서 얻은 것을 서산에게 드린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서산의 입적(入寂)은 유정의 일본 다녀오기 전년(前年)인 1604년이었으므로 맞지 않는다.
필자는 그것을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진중(朝鮮陣中)에서 패용(佩用)했던 십자가로 본다. 그 이유는 첫째 그 십자가가 보통 십자가가 아니오 사제용(司祭用)의 특제품(特製品)인데서 그렇고, 둘째로는 세스페데스 신부가 그 십자가를 분실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동 신부의 조선진중에서 발송한 서한(書翰)에 의하면 그는 웅천(熊川)에서 기장(機張)에 이르는 사이에 일직선(一直線)으로 놓여 있는 천주교 장군(天主敎 將軍)들의 성채(城砦)를 순행(巡行)할 때에는 말을 타고 다녔으며 때로는 밤길을 달리기도 하였다. 험한 산길을 밤에 말로 달리던 동 신부의 가슴 혹은 옆구리에 드리웠던 심자가가 심한 동요(動搖) 때문이든지 혹은 무엇에 걸려서든지 땅에 떨어질 위험성은 확실히 있었다. 밤인 탓으로 떨어지는 것을 감지치 못하였을 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이때에 일본성채에 대진(對陣)하고 있던 한국병(韓國兵)은 주로 서산(西山) 휘하(麾下)의 승병(僧兵)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들이 산길에 떨어진 십자가를 줒어 가지고 하도 아름답기 때문에 선생(先生)에게 드렸을 법도 하다. 성채와 성채 사이에 연결된 길은 승려와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몰래 드나들 수 있었다. 사제용 십자가가 서산대사의 손에 들어간 경로(經路)로서는 필자의 추상(推想)하는 바를 그보다 더 낳은 자료가 발견되는 때까지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