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서울 재수복 의미
▲ 서울 탈환 계획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로 서울을 상실한 지 두 달여 만인 1951년 3월 16일 수도 서울을 재수복함으로써 정치 심리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다.
당초 유엔군은 51년 2월 중공군의 공세를 분쇄하고 반격으로 전환해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방어선을 확보했다.
이로써 중공군 개입으로 형성됐던 패전의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서울 탈환을 목전에 내다볼 수 있게 됐다.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1군단으로 하여금 한강 남안으로 진출해 서울을 탈환토록 했고, 국군1사단과 미3사단이 그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국군1사단은 한강 도하 주력부대로서 제15연대를 영등포∼한강교 부근에 배치했고, 제12연대를 김포 일대에, 그리고 제11연대를 예비부대로 배치해 시가지전투에 대비했다.
이때 우인접 미3사단도 잠실 일대에서 국군1사단과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면서 서울 동북방의 쌍문동과 퇴계원을 잇는 선으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에 바쁜 일정을 보냈다.
▲ 서울 재수복의 의미
마침내 국군1사단의 서울탈환 작전이 개시됐다. 선봉 임무를 부여받은 제15연대는 3월 15일 먼저 각 대대의 일부 병력만 도하시켜 적정을 탐지토록 했다.
이어 16일에 모든 병력이 차례로 한강을 도하, 시내로 진출했고 드디어 서울 전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장관 일행이 연대의 한강 도하상황을 시찰했다.
제15연대는 이어 서울을 경유 외곽지대로 진출했고 미3사단도 용마봉을 점령했다. 이후 각 사단 정면에 가설된 교량을 이용해 제1사단은 추가로 제11연대를 전방으로 투입했고, 미3사단도 완전한 1개 연대로서 교두보선을 강화했다.당시 서울은 그동안 주인이 네 번씩이나 바뀌어 말 그대로 폐허가 됐다.
시가지 내의 건물들은 폭격·포격으로 수난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으며 교통·통신, 그리고 기타 공공시설이 모두 심하게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최소한의 발전 시설과 급수 시설을 복구하는 데도 2개월 이상 소요될 것으로 추산됐고, 150만 명의 서울 인구 중 남아 있는 20만 명에게 제공할 식량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서울을 탈환한 직후 한국군과 경찰은 각종 언론의 홍보활동을 통해 서울의 생활 여건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행정이 재개될 때까지 일반인의 복귀를 자제토록 권고할 정도였다.
이 작전으로 공산군이 완전히 패퇴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군이 적 병력 4800여 명을 포획하면서 수도 서울을 재탈환함으로써 전장의 주도권을 확보했음은 물론 모든 장병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다.
전쟁에서 적의 침공으로 상실했던 수도를 되찾는다는 것은 어느 한 전투의 승리 또는 어느 한 지역의 회복과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 작전으로 아군은 심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완전한 주도권을 되찾았음은 물론 그동안 적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 시민들이 다시 찾게 된 자유는 더욱 가치 있는 일이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