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10월 6일 중앙정치국은 문화혁명을 주도한 핵심 세력 4인방(四人幇)인 장칭(江靑), 장춘챠오(張春橋), 왕홍원(王洪文)과 야오원웬(姚文元)을 체포하고 화궈펑(華國峰)을 중앙정치위원회와 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추대함으로 문화혁명은 마침내 종식된다.
이번호에서 우리는 문화혁명 이후 정치적 과도기를 맞아 중국의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적 변화
문화혁명이 종식되면서 중국은 화궈펑 영도 하에 새로운 정치체제가 형성되었다. 화궈펑은 1977년 2월 7일, <인민일보>, <홍기> 와 <해방군보> 등의 사설을 통해 “마오(毛) 주석이 결정한 모든 정책은 굳건히 견지하며 옹호하고 마오 주석이 주장한 모든 지시를 시종일관 견지한다(凡是毛主席作出的決策,我們都堅決擁護, 凡是毛主席的指示,我們都始終不?地遵循)??는 소위 ??두 개의 모든(兩個凡是)??이라는 그의 정치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는 마오 주석 추종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1977년 8월 12일,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화궈펑은 앞으로 중국은 ??사회주의 현대화강국??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할 것을 선포하고 명실상부한 새로운 시대의 영도자의 위치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8년 2월 24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5대 제1회 정치협의회>를 통해 덩샤오핑(?小平)은 정치협의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화궈펑과 덩샤오핑과의 정치노선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2월에 열린 <제11대 제3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을 위시한 수정주의파는 화궈펑이 주장한 “두 개의 모든??방침을 강력히 비판하며 계급투쟁을 위한 당강이 정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민 경제와 경제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임을 지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업, 농업, 과학, 국방 등의 ??4개 현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한 4개 현대화 실현을 위한 ??4가지 견지(堅持)??를 내세웠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해야 한다. 둘째, 무산계급의 통치를 견지해야 한다. 셋째, 공산당 영도 체제를 견지해야 한다. 넷째, 사회주의노선을 견지해야 한다.
이로써 덩샤오핑은 당시 일부 도시에서 불기 시작한 민주화운동을 잠식시키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다져갔다.
종교정책(1976. 10-1978. 12)
이 시기 종교정책은 완화되어 문화혁명 이전의 온화노선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관련된 정책은 여전히 연구 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종교 사무를 담당하는 통전부, 종교사무국, 애국종교조직들은 여전히 편견 속에 푸대접을 감수해야 했다.
1977년 9월 27일, 런지위(任繼愈)는 <광명일보>에 문화혁명 이후 처음으로 종교문제를 주제로 다룬“종교연구와 신학비판??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으로 종교를 연구하고 신학을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당과 국가가 종교에 대해 올바른 정책을 실시 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와 사상을 제공하기 위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78년 3월에는 사회과학원 소속인 종교연구소는 연구 활동을 재개(再開)하고 런지위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제5회 정치협상회의>에는 16명의 각 종교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는데 기독교 대표로는 띵광쉰(丁光訓), 리우량모(劉良模), 루오꽌쫑(羅冠宗), 옌쟈러(閻迦樂)등 4명이 참석하였다. 곧이어 개최된 <제5차 인민대회>에도 20여 명의 종교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1978년 4월, 백여 명의 당고위층 간부들과 학자들은 세계종교연구소가 개최하는 <종교학 연구좌담회>에 참석하여 종교연구에 대한 필요성과 원칙에 대해 토론하고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의견들을 내세웠다. 그해 12월 난징(南京)에서 개최한 <제1차 중국 무신론학술대회>에서는 무신론과 유신론간의 충돌과 모순이 정치, 경제와 이데올로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토론하고 <중국 무신론협회>를 성립하였다.
종교 신앙의 자유
중국의 종교사무국 국장인 샤오시엔파(蕭賢法)는 중국의 종교정책은 이미 헌법에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와 불신앙의 자유가 있을 뿐 아니라 무신론을 선전할 자유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헌법의 규정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 중국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샤오시엔파는 “종교 신앙의 자유??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와 불신앙의 자유가 있다. 2.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를 선택 할 수 있다. 3. 국민들은 오늘 종교를 믿고 내일 믿지 않을 수 있고, 혹은 반대로 오늘 믿지 않고 내일 믿을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4. 대종교나 소종교 등 정치적으로는 모두 동등한 지위에 있어 국내에서 어떠한 종교도 특권을 누릴 수 없다. 5.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신앙인이든 신앙인이 아니든 정치적으로는 모두 평등하다. 6. 정부는 행정적인 수단으로 종교를 간섭하지 않는다. 7. 종교 인사들은 외국 종교 인사들과 자유롭게 우호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다. 8. 각 종교는 스스로의 단체들을 조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천주교애국회>, <불교협회>, <회교협회> 등. 9. 신앙인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모두 참여하기 때문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문화혁명 이후의 중국의 종교정책은 통전을 위한 잠정적인 조치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하지만 그러할지라도 종교 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종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것은 상당한 발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 신앙 자유정책의 실시
1978년 12월 <제11대 제3회 중앙전체회의> 개최 후 종교 신앙의 자유정책이 정부기관에 의해 실행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통전부와 종교사무국들이 문화혁명 시기의 “투항주의?? 혹은 ??수정주의??의 산물이라는 비난을 벗어버리고 종교업무를 재개했다. 또한 5대 종교의 애국조직들이 활동을 재개하고 정부도 종교 연구기관들을 설립하여 규모 있게 발전시켜나갔다.
1979년 2월, 쿤밍(昆明)에서는 <전국종교책화연토회(全國宗?策??討會)>를 개최하여 정부가 종교자유를 실시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인 근거와 효과적인 실행을 위한 정책들을 토론하였다. 종교연구를 통해 국민들의 유심론적인 사고방식을 타파하고 정부의 종교정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외국의 종교를 이해함으로 각 나라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1979년 3월 15일, <인민일보>에는 “종교와 봉건미신??이라는 글을 통해 초자연의 신비의 힘을 믿는 것은 모두 미신으로 간주하지만 종교는 미신으로 볼 수 없고, 모든 미신은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여 정의하였다. 또한 국가는 신앙 자유정책을 실행하여 종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종교 지도자들은 반드시 정부의 정책과 법령을 준수해야 하고 타인의 신앙의 자유를 간섭해서는 안 되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반혁명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종교사무국의 회복
종교사무국은 국무원 직속기관이지만 통전부의 감독과 지도를 받고 있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모든 기관들이 폐지되었다가 1972년 후에 중국이 ‘핑팡(??)외교??를 전개하면서 회복은 되었지만 겨우 외국 손님들을 접대하는 정도였다.
1978년 12월에 열린 <제8회 전국종교공작회의>를 통해 건전한 종교 활동을 실행하기 위해 종교사무국의 조직과 업무를 회복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를 국무원에 건의했다. 국무원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 해 중앙과 각 지방의 종교사무국이 재조직되었다.
종교사무국의 주요한 업무로는 첫째, 신도들에게 무신론을 교육하고 종교의 성장과 영향력을 제한한다. 둘째, 교회, 성당, 사당과 절 등의 종교 건물들을 보호하여 불필요한 파괴를 방지한다. 셋째, 외국 종교단체나 지도자들이 중국 내의 종교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감독한다. 넷째, 신도들을 고무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4개 현대화를 적극 참여시켜 강력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도록 한다.
종교사무국이 종교를 권장하기보다는 종교를 감독하고 종교 활동을 제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하고 있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전국 삼자회(三自會)의 부활
1979년 6월 상하이(上海)의 <기독교삼자애국위원회>가 그 활동을 재개하면서 전국 각 지역의 삼자회 조직과 업무가 회복되었다.
삼자회가 회복되면서 오랫동안 닫혔던 교회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1979년 4월 8일 닝뽀(寧波)의 교회가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문혁 이후 처음으로 문을 연 교회가 되었다. 1971년부터 외교관, 유학생과 외국손님들에게만 개방되었던 베이징의 미스탕(米市堂)은 1979년 4월부터는 중국 신도들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각 지방에서도 연이어 교회활동이 재개되었는데 어느 지역이나 문을 열리기만 하면 신도들이 구름같이 밀려와 예배를 여러 차례 나누어 드려야 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오랫동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일시에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성경과 교회 지도자들의 수가 매우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교회가 온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결 론
중국은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인 회오리바람을 만나 오랜 동면(冬眠) 상태에 있다가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의 붕괴로 서서히 동면에서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도 예외 없이 종교사무국이 회복되고 삼자회와 교회들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재개되면서 중국교회는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상으로 이해하고 강력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전제 하에 있는 중국 기독교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출처/ 중국어문선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