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은 군주로서의 자질을 타고 났는데 큰 장점 중 하나가 바른말 하는 신하를 옆에 많이 두고 그들의 충언(忠言)을 항상 경청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바른 신하들 중에서도 대표적 인물을 하나 들라면 두 말 할 필요 없이 위징(魏徵)이란 사람을 꼽는다
위징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라 출가(出家)하여 도사(道士, 도교의 중)가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서 당을 일으킨 이연(李淵)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위로부터 건성, 세민, 원길이다. 이중 태자 건성(健成)이 위징을 눈여겨보고 태자세마(太子洗馬)라는 측근으로 등용하였는데 왕자들끼리의 권력암투에서 세민을 제거하라는 위징의 말을 안 듣고 미기적 대다가 세민에 의해 막내 동생과 함께 살해당하고 만다.
이 사건 후 세민은 위징을 잡아다가 “네 이놈,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들 사이를 이간질 하여 이렇게 참담하게 만들었느냐?”하고 문초하자 위징은 "태자는 제 상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태자를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태자께서 내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화는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서 목을 치시지요”라고 당당히 말했다.
위징의 사람과 시절을 꿰뚫어 보는 눈, 주군을 향한 충성,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당당함에 반해 그를 바로 서기관으로 임명 하였고 이세민은 두 달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간의대부(諫議大夫)라는 측근으로 발탁하게 된다. 이 때 위징의 나이 마흔 일곱. 요즈음으로 치면 환갑이나 된 나이인데 막판에 제대로 임자를 만나 인생 후반전에 꽃이 활짝 핀 인물이다. 17년간 이세민을 보좌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직언을 하여 당태종의 세개의 거울중 하나로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 역사에서 만고(萬古)의 충신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