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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83권 / 묘지명(墓誌銘)
동악(東岳) 이공(李公) 묘지명 병서(幷序)
내가 어렸을 때 동악 이공의 이름을 익히 들었는데, 그 시(詩)를 보고는 대뜸 이는 세상에서 보배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고, 조사(詔使)가 왔을 때 지은 ‘청강(淸江)’이란 시를 보고는 또, 이 솜씨가 아니었던들 대결에서 패하여 수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국가에서 공을 청백리(淸白吏)로 뽑은 것을 보고는, 공은 문학사(文學史)일 뿐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알았다.
그런데 지금 공의 종질(從侄) 택당공(澤堂公) 이식(李植)이 지은 행장과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이 지은 명(銘)을 보고는 공의 가행(家行)은 지금 세상에 있는 바 아니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다시 알았다. 옛날 송(宋)나라 사람들이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의 문장만 알았을 뿐, 그의 정사(政事)는 알지 못하였고 심지어 학도(學道)에 대한 말은 주 부자(朱夫子)가 나서 비로소 믿었으니, 어쩌면 그 문장에 가려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공의 행장과 명(銘)에 공의 중요한 한 부분이 발휘되었으니, 거의 문장에 가리우지 않았다 하겠다.
삼가 택당공이 지은 공의 행장에 의하면, 이씨는 덕수(德水)를 본관으로 하여 시조(始祖) 돈수(敦守)로부터 좌랑(佐郞) 인범(仁範)까지의 6세는 다 고려에 벼슬하였고, 그 뒤 4대째 되는 사간(司諫) 의무(宜茂)는 호가 연헌(蓮軒)인데, 문학(文學)으로서 우리 성종(成宗)에게 지우(知遇)를 받았고, 그 아들 좌의정(左議政) 행(荇)은 호가 용재(容齋)로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지금도 접빈사(接儐使)로서 중국 사신을 굴복시킨 이를 손꼽을 적에는 반드시 용재를 으뜸으로 삼는다. 용재의 아들 원정(元楨)과 손자 형(泂)은 다 벼슬하지 않았으나 문헌(文獻)으로써 그 가문을 이었다.
형(泂)은 진사(進士)로 대호군(大護軍) 이양(李𡸑)의 딸을 맞이하여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안눌(安訥), 자는 자민(子敏)이고 동악(東岳)은 호인데, 12세에 재종부(再從父) 감찰공(監察公) 필(泌)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공은 말하면서부터 문자(文字)를 깨달았고 10세에 경사(經史)를 통하였으며, 사부(詞賦)를 배우는 데 동년배보다 걸출(傑出)했고, 성동(成童 15세 때를 말함) 때 시험에 응하여 여러 번 상등에 들었다. 하루는 선조(宣祖)가 묻기를, “제생(諸生)들 가운데서 누가 문형(文衡)의 재목이 될 만한가.”하자, 대사성(大司成) 김응남(金應南)이 공을 들어 대답하므로 상이 탑상(榻上)에 기록해 두었다.
18세에 또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명성이 더욱 크게 떨쳤는데, 꺼리는 자가 배제하므로 마침내 세상과 담을 쌓고 오로지 고문(古文)에만 힘썼다. 이윽고 양부(養父)와 생부(生父)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 대부인(大夫人) 봉양을 위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 기해년(1599, 선조 32) 문과(文科)에 합격하고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북막 평사(北幕評事)가 되었다가 들어와서는 형조ㆍ호조ㆍ예조의 좌랑(佐郞)이 되었다.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접빈사(接儐使)를 따라 고(顧)ㆍ최(崔) 두 조사(詔使)를 맞이하였는데, 고씨(顧氏)가 재주를 믿고 거만하여 방약무인한 태도로 굴다가 공의 시를 보고는 옷깃을 여미고 심복(心服)하였다. 이 까닭에 접빈사가 차츰 기세를 펴게 되었다.
또 호우(湖右)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었고 관서(關西) 지방의 농지를 검사하였다. 이윽고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는데, 단천군에는 산혈(鏾穴 은광(銀鑛))이 있다. 그러나 탐인(貪人)이 항시 많으므로 공이 근렴(謹廉)한 관리를 가려 맡기고 오은지(吳隱之)의 ‘작탐천시(酌貪泉詩)’의 뜻을 취하여 그 난간에 ‘불역심(不易心)’이란 편액을 달았으며, 자못 문교(文敎)에 유의(留意)하여 외진 곳이라고 낮추어 보지 않았으므로 온 경내(境內)가 기쁨을 노래하였다.
이어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뽑혔는데, 이는 정직함을 인정받아 승진된 것이다. 그러나 사건으로 인하여 그만두고 돌아왔다. 내간(內艱 모친상)을 당하여 상(喪)을 마치고도 그 무덤 아래에서 거처하다가 다시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는데, 비변사(備邊司)가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추천 발령하였다. 동래는 사실 왜사(倭事)를 관리하고 있다.
왜사(倭使)가 일찍이 공갈(恐喝)하기를,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나아가 예물을 올리겠다.”하는데, 상하가 그것을 거절할 만한 구실을 찾지 못하므로 공이, “이러이러하면 저들이 당연히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하여, 조정에서 결국 공의 계략대로 해서 왜인(倭人)의 꾀가 마침내 저지되었다.
또 옛 관례에, 왜국의 상인(商人)을 접대하는 데 공비(公費)가 매우 많이 들었으므로 공이 그 조약(條約)을 고쳐 상선(商船)의 수를 감소하자, 해마다 그들에게 사뢰(賜賚)하는 비용이 천만 냥 이상이나 절감되었다.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다시 담양 부사가 되었고, 바로 면직되었다가 이 부인(李夫人)의 봉양을 위해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구하여 나갔는데, 마침 왜사(倭使)가 이르러 공의 기거(起居)를 묻고 나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좌천이 되었는가?”하므로 조정에서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올려 제수하였으나 다시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戶曹參議兼承文院副提調)에 제수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옮겨졌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되었으며, 문신시(文臣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포상을 받았다. 이때 폐주(廢主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우므로 공이 군소배(群小輩)와 함께 나서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면직을 간청하므로 군소배가 그 의사를 알고 사주(使嗾)하여 탄핵하였다.
얼마 뒤에 충청 감사(忠淸監司)에 제수되었다가 또 논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공기(崔公沂)가 문초를 받다가 죽으므로 군소배가 이를 자기들의 공로로 삼았다. 마침 공이 승지(承旨)로서 내심 원통해하고 애석해하다가 차례로 물음을 받을 때 대뜸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친구들이 대신 두려워하였다.
외직(外職)을 청하여 강화 부사가 되었고 전대(前代)에 대한 은전(恩典)으로 가선(嘉善) 품계에 올랐다. 또 강화 부윤(江華府尹)으로 승진되었는데, 행도(行都 임시 수도)로서 토목 공사까지 아울러 일으킬 수 없다고 여기고 전적으로 간정(簡靜)한 정사를 힘쓰므로 백성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
그런데 공사 책임자와 맞지 않았고 대간(臺諫)에서 글을 올려 여기에 가세하였으나 광해군은 공의 능력을 애석히 여겨 듣지 않았고 또 공의 직위 사양도 허락하지 않으므로 만기가 되어서야 체직되었다. 이 부인(李夫人)이 돌아가자, 공은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도 그 묘소를 떠나지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곡배(哭拜)하였다.
명(明) 나라 조정에서 장차 감군(監軍)을 파견하여 본국(本國)을 경략(經略)하려 하므로 공이 시임 총관(時任摠管)으로 정경(正卿)을 대리하여 접반(接伴)하라는 명을 받고 오랫동안 정주(定州)에 나가 머물렀다. 그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이어 형조(刑曹)와 호조(戶曹)의 참판(參判)이 된 데다가 별도로 수국(數局)의 일을 겸임하였으며, 때로는 휴가를 얻어 한가로이 지내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익대(翊戴 반정 공신) 제공(諸公)이 공에게 은밀히 반정 계획을 이야기하였으나 공이 사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또 멀고 나쁜 고을을 지원하였다. 이는 공이 자신을 단속하려는 뜻이었는데 시의(時議)는 나라를 원망한다 하였다.
또 공이 일찍이 특진관으로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반정(反正)이란 바로 천재일시(千載一時)인데, 시비(是非)가 공정하지 못하고 상벌(賞罰)이 사사롭습니다.”하고, 이어 지척(指斥)이 많았으므로 물론(物論)이 매우 시끄러웠다.
마침 폐세자(廢世子 광해군의 아들을 말함)가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던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논박을 조금만 완만(緩慢)하게 한 자는 대뜸 배척을 당하곤 하였다. 어떤 이가 넌지시 공을 떠보면서, “공은 앞으로 이번 의논을 힘껏 주장하겠는가. 그렇게 하면 공을 대사간(大司諫)에 추천하겠다.”하므로 공이 웃으며 사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무함이 함께 일어나 공에게 두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행동을 정탐하였다.
명 나라에서 행인(行人 사신)을 모장(毛將 모문룡(毛文龍))의 군영(軍營)에 파견하여 나라의 변고를 사문(査問)하자, 대신이 공을 천거하여 답을 기록하여 올리게 하였다. 이때 이괄(李适)이 반(叛)하여 종묘사직이 파천(播遷)하였다가 난(亂)이 평정되었는데, 공이 모문룡의 군영에 있을 때 옳지 않은 말을 하였다는 말이 있으므로 마침내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 윤의(尹毅)와 대질(對質)하여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 말은 모두 나라를 우려(憂慮)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하였다.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될 뻔하였다가 다만 북쪽 변방 유배(流配)에 그쳤다. 그래서 근신(近臣)과 유생(儒生)이 서로 이어 공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약간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다. 정묘년(1627, 인조 5)의 호란(胡亂)으로 풀려나서 급히 행조(行朝)로 달려가자, 강화도 사민(士民)들이 거리가 가득하도록 나와 위로하고 환영하였으며, 또 글을 올려 공의 옛 공적을 아뢰므로 상도 행도(行都)의 시설로 보아 공이 평소 아첨하거나 속이지 않았음을 확인하였고 돌아갈 때 공에게 강화도를 맡기고는 임기가 지나도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들어갔을 적에는 한 품계를 더하여 전일의 노고에 보답하였다.
이윽고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나갔다가 다음해에 갈렸는데, 길에서 주청 부사(奏請副使)로 임명되었음을 들었다. 당시 사신들은 조공(朝貢)이 까다롭다 하여 흔히 구실을 붙여 사신의 임무를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행장을 재촉하여 배에 올랐다. 여러 차례 위험한 태풍을 만났으나 공은 배 속에 버티고 누워서 계속 시(詩)만 지으니, 동행자들이 믿고 위안되었다.
공은 미리 설인(舌人 통역관)에게, 북경(北京)에 가서 답변하는 요령을 일러두었기 때문에 일에 차질이 없이 쉽게 끝마쳤고 또 노활(老猾)한 그쪽 통역들을 조절하여 이전처럼 간람(奸濫)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남은 수천 금(數千金)을 탁지부(度支部)에 되돌려 주었다. 복명(復命)하는 날에 상이 크게 기뻐하여 상(賞)으로 정헌(正憲) 품계에 올려 주고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하므로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에 제수하였다가 다시 충청 감사(忠淸監司)에 제수하여 임기가 지나도 그대로 유임시켰는데, 사건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모든 대부(大夫)와 장보(章甫 선비)가 공의 효행(孝行)을 상신하여, 상이 정려(旌閭)를 명하고 또 청백리(淸白吏)에 기록하였으며, 숭정(崇政) 품계를 더하여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므로 상이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총애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 14) 겨울에 서부(西部)의 경보가 다급하여 상이 장차 강화도로 행차하려 할 때 늙고 병든 신하들을 먼저 떠나라는 유지(諭旨)가 있었으나 공은 성가(聖駕)를 따르기 위하여 떠나지 않았고, 상이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어서는 공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따라갔다.
공은 포위망 속에 있을 때부터 병이 위독하였고, 적이 물러간 뒤 정축년 3월 29일에 한양(漢陽) 마을집에서 6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부인 송씨(宋氏)는 장령(掌令) 승희(承禧)의 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어서 동종(同宗)의 아들 갑(柙)으로 입후(立後)하여 지금 필선(弼善)이 되어 있고 측실(側室)에서 유(楢)ㆍ규(楑)ㆍ정(朾)을 낳았다. 필선의 아들은 광하(光夏)이고 딸은 권두기(權斗紀)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 자녀는 모두 어리다.
공은 윤4월 28일에 해미현(海美縣) 모산리(母山里) 해좌(亥坐) 묘(墓)에 안장되었고 호종(扈從)의 은전(恩典)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가(追加), 별직(別職)은 전례에 따라 겸하게 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강개하고 큰 뜻이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뜻을 얻으면 일세(一世)를 구제할 것이고 얻지 못하면 한 계곡에서 늙을 것이다. 일생을 어찌 메마르게 마칠 수 있겠는가.”하였다. 성기(性氣)가 개특(介特)하고 식도(識度)가 호거(豪擧)하여 거업(擧業)을 다루는데 고문(古文)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였고, 득실(得失) 같은 것은 담박하게 여겼다.
이미 급제하여서는 남과의 교유(交遊)가 매우 뜸하여 성세(聲勢)에 의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으뜸가는 저택과 이름난 정원이 서울 남산(南山) 아래 있었으나, 공은 마치 채롱이나 올가미처럼 여기고 일찍이 수년간 머물러 있은 적이 없었으며, 강사(江舍)에 소오(嘯傲)하거나 또는 주로 송추(松楸)에 있었으니, 이는 평소의 말을 잊지 않은 것이었다.
효성과 우애의 행(行)이 한결같이 성실하여 종족과 향당(鄕黨)에서 조그마한 군소리도 없었으며, 백형(伯兄)은 일찍 돌아간 뒤 외로운 두 딸만 있었고 중씨(仲氏)는 식구는 많은데 재산이 없으므로 공이 두 집을 시종 보살펴 주었고, 혼가(昏嫁)와 크고 작은 일에 직접 나서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생가(生家)에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으나 공은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돌려보내면서 형의 아들 잠(梣)으로 하여금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고 또 남산에 있는 제택을 주어 살게 하였다.
삼종제(三從弟) 두 사람이 떠돌아다니다가 중이 되었는데 공이 데려다가 장가들여 자리 잡고 학업에 힘써 이름을 이루게 하였으며, 공이 입양(入養)한 집안은 옛 국척(國戚)이었으나 그 풍요한 것 보기를 마치 옴병처럼 여겨 재산을 털어서 가난한 벗과 못사는 종족에게 나누어 주고, 털끝만큼도 아까워하는 의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름은 부가(富家)였으나 여러 차례 끼니가 어려워 때로는 꾸어다가 자급(自給)하였다.
그러나 부모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 때는 불시(不時)로 마련하므로 좌중의 안색이 달라지곤 하였으나 끝나고 나면 부엌이 냉랭하였으니, 그 막힘없이 텅 빈 흉금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관청의 일만은 정밀 상실(精密詳悉)하여 물샐 틈이 없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 번잡함을 병통으로 여겼으나 공은 언제나 스스로 정연하고 여유가 있었으며, 식품과 비축이 으레 부임할 때마다 넘쳤으나 넉넉함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고, 관리나 백성에게 친밀하게 대하지 않아도 떠난 후에는 으레 생각하여 이르는 곳마다 포상(褒賞)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공의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함경 감사로 있을 적에는 거센 토호(土豪)들을 제어하고 효유하다가 번번이 중상(中傷)을 받았으나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단속하고 성심으로 봉직하여 물건을 망녕되이 받음이 없으므로 전후 명(明) 나라에 조회할 때도 행탁(行槖 여행자의 짐)이 초라하였다.
아들 유(楢)가 향군(鄕郡)에서 죽었는데, 공은 그 어머니의 분곡(奔哭)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이 도(道)를 지키고 있는데, 첩부(妾婦)로 하여금 나의 구역을 넘게 할 수 없다.”하였고, 혹 과오에서 빚어진 재해(災害)로 인하여 여럿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원만히 처리하였고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온 이래 국가에 변고가 많았는데, 공은 매번 한산한 자리에 있으면서, 한 번도 횡의(橫議)에 참여하거나 하나의 비인(匪人)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말년에는 시사(時事)를 개탄하다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질(子侄)들에게 말하기를, “국사는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오랑캐와 화의(和議)하는 데에나 붙지 말고 명절(名節)을 온전히 할 뿐이다.”하였다.
젊어서 글을 읽을 적에는 으레 만번 읽기를 기준으로 하고는, “책을 만번 읽지 않으면 글이 신(神)의 경지에 들지 않는다. 나는 오직 우리 할아버지 용재공(容齋公)을 스승으로 삼는다.”하였다. 그러므로 그 시(詩)가 봉망(鋒鋩)이 준건(俊健)하고 성률(聲律)이 해적(諧適)하여 많으면서도 번거롭지 않고 정연하면서도 국한되지 아니하여 시체를 따르지 아니하고 예스러웠으니, 일찍이 흔히 있었던 일이 아니다.
명 나라에 조회할 때 공성(孔聖)의 후예 두 사람이 공의 의리를 사모하고 그 시에 감복하여 매우 친절하였고 주사(主事)와도 가까워져 사사(使事)를 비교적 쉽게 마치게 되었으니, 시가 전대(專對)에 잘 쓰였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의 여사(餘事)인데, 세상에서 공을 말하는 이들이 다만 이것으로써 공을 일컬으니 한스럽다.
오직 효의의 행이 택리(宅里)에 표시되고 청백(淸白)한 지조가 조적(朝籍)에 나타나고 정사(政事)의 사적이 구비(口碑)에 전파되고 행의(行義)의 자취가 친구들의 감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수되는 관직은 대각(臺閣)에서 막히고 정치의 큰 계획은 하전(廈氈 임금의 자리)에 진달되지 않아서, 그 포부가 언제나 원만히 발휘되지 못하다가 끝내 몸을 따라 인멸되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은 정사(政事)로써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겼으나 남들은, 그가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긴 것은 사실 부족함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는데, 공은 시(詩)로써 스스로 훌륭하다고 하였으나 지금 명(銘)과 행장(行狀)에 발휘된 것은 바로 실제의 행동을 적은 것이다.
공의 부족한 것이 시에 있다고 본다면 그 유여(有餘)한 것이 따로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청음(淸陰)과 택당(澤堂)의 문하에 달려가 이를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동악의 시는 / 東岳之詩
그지없이 찬란한데 / 焜熀無垠
사람들은 혹 말하기를 / 人或有言
시가 사람만 못하다 하네 / 詩不如人
택당이 행장 짓고 / 澤堂狀行
청음이 명 지었으니 / 淸老爲銘
시는 혹 산정(刪定)할 게 있어도 / 詩或可删
사람이야 천년만년일세 / 人則千齡
<끝>
ⓒ 한국고전번역원 | 조창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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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東岳李公墓誌銘 幷序
余幼時則誦東岳李公名。得其詩。輒謂曰。此世人所寶者也。及見詔使時淸江作。又喟曰。靡此一手。全敗難收矣。其後見朝家以淸白秩公。復知公不專爲文學士而已。今見公從姪澤堂公狀。淸陰文正公銘。又知家行非今世所有。故人鮮克知之也。昔宋人只知歐陽公文章。不知其政事。而至於學道之語。則惟朱夫子始信之。豈爲文章所掩而然歟。今銘狀發揮其所重有在。庶幾哉不爲所掩哉。謹按澤堂公狀曰。李氏出德水縣。自始祖敦守。以及佐郞仁範。六世皆仕高麗。又四世而有司諫宜茂號蓮軒。以文學受知我成廟。子左議政荇號容齋。久典文衡。至今數儐伏華使者。必以容齋爲首。子元禎,孫泂。皆不仕。然亦以文獻世其家。泂魁進士。娶大護軍李𡸑女生公。諱安訥。字子敏。東岳其號也。十二歲。出後再從父監察公泌。公自能言。便曉文字。十歲能通經史。學爲詞賦。傑出流輩。成童就試。屢居上游。一日宣廟問諸生誰可爲文衡須者。大司成金應南以公對。上識諸榻上。十八。又發解壯元。聲名益大振。忌者擠之。遂與世抹摋。專肆力於古文。已而所後所生考相繼下世。服除。爲大夫人復取應。捷己亥文科。由承文院。爲北幕評事。入爲刑戶禮三曹佐郞。以禮曹正郞。從儐使迎顧,崔兩詔使。顧恃才行。傲睨傍無人。及得公詩。斂衽心服。以故儐使稍奮其垂翅。又試士湖右。檢田關西。俄守端川郡。郡有鏾穴。膩人常多。公擇謹廉吏付之。取吳隱之詩。扁其軒曰不易心。頗留意文敎。不以僻陋而鄙夷之。一境歡謠焉。擢拜吉州牧使。見正以驟陞。又因事罷郡歸。丁內艱。服闋。仍居墓下不去。復以禮曹正郞。爲洪州牧使。籌司薦授東萊府使。萊實關倭事。倭使嘗嚇言欲直詣京城進禮。上下未得
其折却之辭。公曰。如此彼當無說矣。朝廷竟用公策。倭謀遂沮。舊例接待商倭。公費甚夥。公更其條約。減定商舶之數。歲省賜賚千萬以上。病遞。又爲潭陽府使。旋復免去。爲李夫人便養。求爲錦山郡守。時倭使至。問公起居。仍曰。如何左敍。朝廷遂陞拜慶州府尹。坐事罷。旣敍爲戶曹參議兼承文院副提調。移同副承旨。陞右副。取文臣試第二名。受褒賜。時廢主政亂。公恥與群小同進。求免不已。群小知其意嗾劾之。俄拜忠淸監司。又被論遞。海州牧使崔公沂栲死。群小方自功。公以承旨。內冤傷之。被歷問。輒對以不知。知舊代怖焉。丏外爲江華府使。用前恩進嘉善階。又陞江華爲府尹。以爲行都而營建幷興。公專務簡靜。民以賴之。與使者忤。臺章助之。主惜公能不聽。又不許公辭。秩滿乃遞。李夫人沒。公期年外。猶不去其墓。朝夕拜哭。中朝將遣監軍。使經略本國。公時任摠管。攝正卿應接伴之命。久留定州。仁祖反正。就拜禮曹參判。還朝。遞貳刑戶曹。又別兼數局。間亦乞暇就間。先是翊戴諸公微告公以謀。公辭焉。至是又求遠惡州。公意蓋欲自效。而時議以爲怨望。又公嘗以特進入侍言反正乃千載一時。而是非不公。賞罰以私。仍多有指斥。物論甚讙。適廢世子跳出。持論稍緩者輒被斥。或微諷曰。公將力主此論乎。當擬公以諫長矣。公笑謝之。於是構扇並興。謂公不能無貳心。遂伺其動止。皇朝遣行人到毛將營。査問國故。大臣擧公齎對以進。會李适叛。廟社播遷。難已。有言公在毛營時。言有不韙。遂就對。毛伴尹毅立質明其不然。謂其言皆憂慮所發。事將不測。止配北荒。有近臣儒生相繼冤訟。稍內移。丁卯。因亂赦還。公疾赴行朝。江都士民塡街迎勞。亦疏陳其舊勩。上以行都設張。驗其不阿誣。回鑾。命公後。仍過期不許遞。復入貳刑曹。進一資以酬前勞。尋爲咸鏡監司。翌年遞。路聞奏請副使之命。時當行者。以貢梗多詭免。公促裝下海。累遭颶危。公堅臥舟中。賦詩不輟。同行恃之爲安。公預授舌人以至京應對機宜。故前定不跲。事以亟竣。又操切老猾譯鞮。使不得如前奸濫。竟以餘資數千金還度支。復命。上大喜。賞階正憲。賜土田臧獲。辭不許。拜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復除忠淸監司。撥限仍任。坐事罷免。諸大夫章甫士列公孝行。命表門閭。又以廉吏見錄。加崇政拜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皆辭。御批慰寵。丙子冬。西報急。上將幸江都。諭老病朝臣先往。公欲從駕不肯行。上不得幸江都。公隨亂于南漢城。公自在圍中。疾已劇。寇退。遂以丁丑三月二十九日。卒于漢陽里第。得年六十七。夫人宋氏。掌令承禧女。先沒無子。以同宗子柙爲後。今爲弼善。側出梄,楑,朾。弼善男光夏。女適權斗紀。餘男女皆幼。閏四月二十八日。葬于海美縣母山里亥坐之原。以扈從恩。追加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別職如例。公自少慷慨有大志。嘗曰。士得志則濟一世。不得則老一壑。豈可乾沒終身哉。性氣介特。識度豪擧。其爲擧業。直以古文攄發己意。視得失泊如也。旣登第。交游甚簡。恥爲聲勢倚。有甲第名園在漢師南山下。公視若籠紲。未嘗數年淹也。常嘯傲江舍。亦多在松楸。蓋不忘平生言也。孝友之行。一於誠質。宗族鄕黨。一無間言。伯兄早沒。有二孤女。仲氏口多而資薄。公經紀二房。終始無替。其昏嫁細大。無不躬莅。本生親有析給財產。公一不留。悉以歸之兄子梣。使奉其祀。又捨南山第宅以居之。三從弟二人流丐爲僧。公取歸冠顚而舍業之。俾之成名。其所後故國戚。公視其饒。若病癢焉。斥財以與窮交寒族。無毛髮難捨意。以故名爲富室。而屢有空無時。至假貸以自給焉。其爲庭闈置宴。則叱嗟而辦。座人變色。而旣已則廚無欲冷之人。其曠然無滯類此。惟吏事精密詳悉。置水不漏。觀者病其繁絮。而公則常自整暇。食儲帑藏。必充溢於始至。然不以奇羨自衒。與吏民不爲喣濡。而必有去後思。所至隨有褒賞。然非公之所希也。其莅藩臬。則鋤梗茹剛。動遭中傷而不顧也。律己奉公。物無妄受。前後朝天。行橐如洗。子梄死於鄕郡。公拒其母不聽奔哭曰。吾方按道。不可使妾婦踐吾界也。當其眚災。衆皆洶懼。而公沛然抵蹋。不少撓懾。立朝以來。國家多故。每低徊宂散。未嘗參一橫議。近一匪人。及末年。慨歎時事。至於流涕。謂子姪曰。事已無可奈何。但勿附和議。以全名節而已。少時讀書。必以萬遍爲率。嘗曰。書不萬讀。文不入神。我惟我祖容齋公是師焉。故其爲詩。鋒鋩俊健。聲律諧適。多而不繁。整而不局。匪今而古。亦未嘗有也。朝天日。孔聖後二人者。慕公義服其詩甚。相與客習於主事。使事賴竣。信乎詩之有用於專對矣。然此公之餘事。而世之稱公者只以此。是可歎也。惟孝友之行。表于宅里。淸白之操。著在朝籍。政事之蹟。播于口碑。行義之迹。見諸朋歎。然而除目常阻於臺閣。謨猷不陳于廈氈。使其抱負恒有不自得之意。終至於殉身而泯沒。豈非命也耶。然歐陽公以政事自多。而人以爲其自多出於不足。惟公以詩自多。而今銘狀之所發揮。乃在於實行。然則公之所不足者。猶在於詩歟。而其所有餘者可知也歟。恨不及就質於淸陰,澤堂之門也。銘曰。
東岳之詩。焜熀無垠。人或有言。詩不如人。澤堂狀行。淸老爲銘。詩或可删。人則千齡。<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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