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에 필요한 믿음
2023.05.07.(부활절제5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뒤에,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2/ 어떤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종이었다. 3/ 그 백부장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달라고 하였다. 4/ 그들이 예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기를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하였다. 6/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께 이렇게 아뢰게 하였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8/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9/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종은 나아 있었다. (누가복음 7:1-10)
들어가는 말
공동체가 무너진 사회에는 사랑과 자비와 배려가 없습니다. 제도와 법에 의해 유지될 뿐입니다. 이런 사회가 커질수록 법은 다양해지고 강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사회로부터 누군가를 추방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법의 형량은 높아지는데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최대한 격리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주의 사회가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요? 우리사회는 공동체의 포용력을 키우는 대신 공동체의 배타적 능력만을 키우면서 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점점 메말라가는 사회 속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십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두로와 시돈으로부터 온 사람들로 시작되어 땅 끝, 그리고 역사의 끝에 있는 사람들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중심 구성원이 될 제자들을 향해 원수사랑과 자비라는 공동체의 기본 가치들을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이루려는 공동체의 출발지가 될 것입니다. 이 무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버나움으로 향하는 예수님과 무리들에게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입니다. 그가 공동체의 또 다른 중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백부장이 장로들을 보내다
가버나움의 백부장 이야기는 마태복음(8장)과 요한복음(4장)에도 등장합니다. 모두 백부장에게 소중한 사람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된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요한복음은 마태, 누가복음과는 달리 백부장의 아들이 병들었다고 말합니다. 한편 마태와 요한복음에서는 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와 부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러 오지 않습니다. 백부장에게는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소중한 종이 있었습니다.(2) ‘그 백부장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달라고 합니다.’(3)
당시 로마 병사들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의 백부장이 가버나움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법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한 유대인인 예수님을 초대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유대 유력자들인 장로들을 보냈습니다. 백부장은 장로들을 통해 예수님이 집으로 와서 종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장로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4) 장로들은 백부장이 이스라엘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유대를 위한 그의 선행도 말해 줍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5)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을 향해 가십니다.(6) 백부장은 유대 공동체에 친숙하며 배려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그의 종을 고쳐주어야 할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장로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지만 사실 장로들은 예수를 향해 어떤 호칭도 쓰고 있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이해관계 속에서 백부장과 예수님을 연결하고 있을 뿐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초대했고, 예수님은 백부장을 만나러 가지만, 장로들은 예수님과 백부장 사이의 쓸데없는 연결고리인 것입니다.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다
예수님과 일행은 백부장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습니다.(6) 그때 백부장은 예수님에게 다시 사람들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친구들입니다. 장로들은 유대 주민들을 대변하지만, 친구들은 지위 등 모든 면에서 백부장 자신을 대리합니다. 그들의 말은 백부장 자신이 하는 말이 됩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6) 장로들은 예수님을 아무런 호칭도 없이 불렀지만 백부장은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백부장은 그 짧은 순간에 단지 손님으로 초대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쳐 부를 수 있었을까요? 사실은 장로들이 ‘주님’이라는 호칭을 생략한 것은 아닐까요?
백부장은 자신의 자격이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을 장로들을 보내기 전에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7) 먼저 장로들을 보낸 것은 예수님께 직접 나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마태와 요한은 백부장을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게 하지만, 누가는 백부장의 종됨과 겸손을 보다 더 드러나게 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먼저 가지 못한 이유는 그럴만한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로마 백부장으로서의 거만함 때문이 아니라, 부르지도 않은 주인에게 자신의 일을 부탁하는 것은 종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인 예수님과 친밀할 것 같은 유대 장로들을 통해 초대한 것이지만, 곧바로 백부장은 이 마저도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급히 자신의 종이 아닌 자신과 동급인 친구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7) 백부장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도 설명합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8) 백부장은 로마의 법과 제도에 익숙한 사람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관계와 믿음
누가복음은 관계를 분명하게 한 백부장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알았다는 말도 없으며, 가라는 말도 없으며, 낫게 해주겠다는 말도 없습니다. 단지 친구들로부터 말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무척 놀랐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백부장의 믿음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를 따라온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 이미 백부장의 전갈을 가져온 장로들에게서 드러난 것처럼 이런 믿음은 이스라엘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에 백부장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백부장은 주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한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시작되는 예수님의 공동체에서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적으로 먼저 보여준 것이 백부장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믿음의 당연한 결과만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부름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종은 나아 있었습니다.’(10)
우리에게는 이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백부장이 그 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의를 표했다거나, 같은 가버나움 지역에 사는 예수님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다거나, 나아가 이방인 유력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들은 백부장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 세워진 공동체에서 제자들은 이 모든 일들을 해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믿음이 없이는 조금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자신을 종으로 낮춘 백부장이 보여준 믿음은 간격을 메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그를 예수님과 대면하지 않도록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의 믿음은 로마인과 유대인의 간격을 없애버렸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과의 물리적 거리도 없애버렸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공동체 안의 모든 간격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부자인 제자가 가난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명령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은 곧바로 상대에 대한 믿음 없음으로 나타나며,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없이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믿음 없이는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의 하나 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역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이러한 곳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기에 서로에 대한 간격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와 동족도 아니며, 예수님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방인 백부장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도 믿지 못합니다. 의심하고 질투합니다. 여차하면 법의 잣대를 들이대려고 합니다. 법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습니다. 보상할 뿐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슬픔을 치유하며 죽음을 살려냅니다.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공동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간격을 메우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