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2월 26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우리만’을 넘어 누구와도 하나가 되도록!
본문 : 사도행전 9장 17절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새번역>
많은 사람들이 한계를 뛰어 넘는 사람과 어떤 상황을 볼 때 놀라움으로 환호성을 지르곤 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 같은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일이 일어났을 땐 정말 진심으로 저절로 박수를 치게 됩니다. 그만큼 한계를 뛰어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 기적을 이룬 존재가 대부분 사람이기에 더 존경심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사람이 그 불가능과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흘린 눈물과 땀이 엄청날 것이라고 예상이 가기에 마음도 함께 뭉클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이 영어 단어를 꼭 마음에 각인시키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Overcome'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한계를 극복한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삶인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영역에서 이 ’Overcome'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 육상 100m에서 불가능해 보이던 10초벽을 처음 깬 사람은 1968년 미국의 짐 하인즈라는 선수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우사인 볼트가 2009년에 세운 9초 58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있지만, 당시 10초벽을 깬 선수가 나왔을 땐 정말 전 세계가 놀랐다고 합니다.
1953년 오전 11시 30분에는 정말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바로 인류 최초로 영국 원정대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첸징 노르가이가 에베레스트산 최고봉 정상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2010년 1월 4일 두바이에서는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꾼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삼성건설이 주요 시공사로 참여해서 더 큰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바로 'UAE'(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인간이 만든 최고의 높이의 건축물인 ‘부르즈 할리파’가 완공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829.8미터 높이에 163층으로 되어 있고 공사 시간만 6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서울에 있는 롯데월드타워도 123층에 555m로 어마어마한 높이인대 도대체 얼마나 높은지 감도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높이만큼이나 감탄이 나오는 점은 바로 이 건물이 사막의 모래 위에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곧 1007미터의 제다타워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불가능을 넘어서고, 한계를 넘어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속에서도 수많은 ‘Overcome’의 현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고, 한계를 뛰어넘으신 분이시며,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구원을 바꾸셨고, 슬픔을 희락으로 바꾸셨으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오늘날 나와 같은 사람까지도 가장 귀하다 말씀하시며 친히 직접 예배를 받고 계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스라엘과 너무도 먼 거리에 있던 우리나라에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실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노고 덕분에, 땅 끝에 있던, 지도에도 잘 등장하지도 못했던 이 땅에, 지금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 같은 일들, 즉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 일이 일어나게 만든 최초의 장본인도 바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던 상황의 한 가운데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매 순간 한계를 넘어서는 놀라운 사랑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원래 이름은 우리에겐 낯선 이름입니다. 그의 별명은 ‘이방인을 위하여 하나님이 택한 자’였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울’입니다. 요나단의 아버지였던 초대 이스라엘 왕 사울이 아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울’입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명이었던 스데반집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수많은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교의 현장에서 유대인들 편에 서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던 한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누구보다 율법을 중시여기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넘치던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따르던 이들을 극렬히 반대하며 미워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 생각하며 죽여 버리고, 이 땅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할 존재들이라 생각하며 척결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제자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당시 초대교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 1호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뜻이란 명목 하에,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 다마스쿠스까지 핍박을 가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청하여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구별 없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다마스쿠스로 떠나게 됩니다.
바로 이 때, 사울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회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 하나 일어나게 됩니다. 거의 다마스쿠스에 도착할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기 시작했고, 곧 사울은 땅에 엎드러지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행전 9장 4절, 새번역>
사울은 엎드러진 채로 이 음성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사도행전 9장 5절A, 새번역>
그리고 곧 다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도행전 9장 5절B, 새번역>
이 순간 사울의 머릿속은 아마 새하얗게 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은 잠시 잠깐 유대인들을 뒤흔든 폭동자였고, 주동자였을 뿐이었습니다. 분명히 죽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 있고,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단 말인가!?’ 생각하는 중에 계속해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9장 6절, 새번역>
사울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이 소리를 함께 들었습니다. 그러나 음성만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그치자 이내 사울의 절규가 들려 왔습니다. 사울이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동행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 시간을 참으로 극적이게 3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사도행전 9장 9절, 새번역>
마치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던 3일처럼, 요나가 불순종 한 후에 물고기 뱃속에 3일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 있었던 3일처럼, 사울 역시 3일 동안의 시간을 홀로 보내게 됩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마시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아마 그의 생각이 통째로 바뀌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면서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시작했던 아브라함의 3일 후처럼, 불순종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로 결심한 요나의 3일 후처럼, 완전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셨던 예수님의 3일 후처럼, 사울이 완전히 다시 태어난 시간이 바로 3일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가능으로 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생각하던 한계를 모두 뛰어 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가 아닌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잠시 이 부분에서 잠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반드시 이 3일을 지나가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인생에는 이런 3일이 있으셨습니까? 이미 지나오신 분도 있으실 것이고, 앞으로 오실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입니다. 신앙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저 생각이나 신념이 아닌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미 경험하신 분들도 매일 다시 경험해야 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빛 아래 엎드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묻고, 예수님께 듣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사울에게 일어난 전반전을 보내고, 본격적인 이야기 후반전이 시작됩니다. 후반전 휘슬이 울리자마자 예수님의 음성이 또 한 사람에게 들려 지기 시작 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사도행전 9장 10절B, 새번역>
그 음성을 들은 주인공은 바로 다마스쿠스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0절C, 새번역>
아나니아는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지 귀와 마음을 더욱 더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던 아나니아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었 길래 점점 표정이 그토록 무거워지게 된 것일까요?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사도행전 9장 11~12절, 새번역>
그래서 차마 아나니아는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동일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바로 ‘네, 알겠습니다.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눈이 먼 사울을 찾아 가서 바로 ‘죽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거절을 선택하며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3~14절, 새번역>
아나니아는 혹시라도 예수님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모르실까봐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완곡한 거절을 표시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자에게 갈 수 없습니다.’ 분명하게 의사 전달을 한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저는 아나니아를 옹호하고 싶습니다. 제가 아나니아라고 해도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나니아의 마음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공동번역이 예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사도행전 9장 15~16절, 공동번역>
‘그래도 가야 한다.’ 이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배 안에 하나가 되길 원하는 우리 모두가 오늘 꼭 들어야 하고, 가슴에 간직하고 돌아가야 하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생각에는 불가능이고, 내 생각에는 여기까지가 한계인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래도 해야 한다!”
“어떻게 사울에게 제가 갈 수 있습니까? 사울이 저를 잡아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사울의 눈 먼 것을 고쳐 줄 수 있습니까? 차라리 평생 사울이 그렇게 살도록 하면서 ‘자업자득’이라고 놀려 주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예수님!”
“그래도 가야 한다! 그래도 해야 한다!”
아나니아는 역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더 이상 변명과 망설임의 태도는 가지지 않습니다. 참 멋진 사람입니다. 참 멋진 제자입니다. 저희가 오늘 아나니아의 이 행함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나니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Overcome'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침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도행전 9장 17~19절A, 새번역>
저는 바로 이 현장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현장이 바로 교회가 날마다 추구해야 할 ‘하나됨’의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지금 아나니아의 행동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회복을 선포하고, 침례를 주며, 식사를 나누며, 격려와 위로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새번역>
그리고 또 하나 아나니아에게서 배워야 할 행동이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른 제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마스쿠스에 있던 교회 공동체에도 전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조심스러웠겠습니까? 스파이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혹시라도 돈이라도 받아서 사울과 짜고 자신들을 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가 그랬듯이 교회 공동체도 사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참 멋있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공동체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사도행전 9장 19절B,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하나님은 사울을 처음부터 만나자마자 곧바로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에게는 진심으로 회개 할 3일이란 시간을 주셨고, 아나니아에겐 예수님의 제자로서 받은 사랑을 베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게는 ‘우리만’이란 한계를 뛰어넘어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펼쳐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하나 된 교회가 필요하고, 함께 이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할 동역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라면 앞으로 어떤 사람이든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사실을 교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울 역시 완전히 달라진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는 것만으로 하나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가 되기로 한 개개인도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도 노력했고, 공동체도 노력했기에 그들은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불가능을 넘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노력을 ‘사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만’을 넘어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사랑’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이 말씀이 우리 교회에도 이루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 공동번역>
이렇게 하나가 되어 준 공동체를 통하여 사울 역시 마음을 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사도행전 9장 20절, 새번역>
유대인들이, 사울 자신 역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증오하고 죽였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의 중심에 서 있던 사울이 이제는 이 선포를 하고 있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마구 죽이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가 여기 온 것도, 그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사도행전 9장 21절, 새번역>
하지만 사울은 이런 말들을 들으며 더욱 더 참회라도 하는 마음으로, 더욱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능력을 얻었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다마스쿠스에서 핍박자 사울을 기다리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적잖게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곧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게 된 교회 공동체와 사울은 서로 도와 사울을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것처럼 사울은 어느 순간부터 바울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수많은 고초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을 위하여 택하신 그릇’ 답게 살아가게 되었고, 신약에도 수많은 기록을 남긴 믿음의 선배가 되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추종자가 되어 바울에게 박수를 전하게 된 오늘날입니다. 그런데 이 박수를 받으면서 바울은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박수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다마스쿠스에 있던 아나니아에게! 그리고 다마스쿠스 교회 공동체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아는 ‘바울’은 이 땅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영광은 ‘우리만’을 뛰어 넘어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교회 공동체와 함께 누리고 싶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도 이 영광을 함께 누리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바울이 탄생되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고,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사랑’이 얼마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비밀인지를 발견했으면 좋겠고, 앞으로 교회와 하나가 되길 원하는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는 공동체로 든든히 서 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만’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누구나’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월 한 달 동안 동역자들이 예배 안에 하나 되는 길을 하나님께 배워 보았습니다. 먼저 꼴찌가 되고자 결심해야 합니다. 진짜 순서상으로 꼴찌라고 인정하는 것, 사실은 오전 6시에 왔지만 한 데나리온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양보를 소유하는 것, 먼저 마음을 열고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내 목숨처럼 상대방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한계를 뛰어 넘어 ‘우리만’이 아닌 그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성숙한 ‘Overcome’ 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공동체가 되는 것! 우리 모두 2023년 한 해 동안 부지런히 이렇게 살아가면서 진짜로 예배 안에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단 찬양 - 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