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霞石) 박정(朴炡)의 푸른색 관복의 정사공신 화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7호) / 크기 : 170 × 90cm
위의 정사공신 박정(朴炡)의 화상(畵像, 170×90cm, 簇子 227×185cm)은 현재 그의 넷째 아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종택(宗宅)에 2점이 전한다. 하나는 푸른색 관복의 초상화(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7호)로 수염이나 눈썹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성격까지 짐작케 한다.
정3품 흉배(胸背)에 수놓는 백한(白鷴)으로 보아 1623년 인조반정에 공헌한 후 정3품 벼슬에 올랐을 때 그린 공신화상으로 여겨진다.
1625년 경에 제작된 이 화상은 영조 말년까지 박정의 장자인 박세규(朴世圭, 大護軍)→박태소(朴泰素, 兵曹佐郞)→박필사(朴弼思, 副司直)→박사창(朴師昌, 承旨)→박호원(朴好源, 府使)으로 이어지는 박정의 불천위(不遷位) 종가에게 전례되어 왔다.
그러나 박호원의 아들 박상로(朴相老)가 1777년(영조 52) 역모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파탄지경에 이르면서 박정의 아들 중 가세가 가장 온전했던 넷째 서계 박세당 종택에 위탁 보존되어온 것이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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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朴炡)
[생졸년] 1596년(선조 29)∼1632년(인조 10) / 향년 36세
조선 후기에,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곡(霞谷). 증 영의정 박소(朴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며, 어머니는 청선군(淸城君) 이걸(李傑)의 딸이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아버지가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兩司: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사직하고 시골에 내려와 독서로 자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靖社)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홍문관정자·박사를 거쳐 다음 해 사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검상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부응교 유백증(柳伯曾),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광해군 때에 당파를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했다가 오히려 함평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해, 다음 해 동부승지가 되어 호패법 강화를 주장했고, 그 뒤 대사간·병조참지·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대사간으로부터 붕당을 만들어 자기 파를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좌천되어 남원부사가 되었다.
남원부사로 임명될 때에 새 수령을 영접하러 나온 아전이 박정을 보고는 “젊은 사람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오똑하게 단정히 앉아 있어 마음속을 알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당시 관내의 도적을 색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지고 1631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특진되었다가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소서파(小西派)의 핵심 인물로 비록 말은 과감하게 한다는 칭찬이 있었으나, 급하고 곧은 뜻이 지나쳐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남계집(南溪集)』
『백헌집(白軒集)』
『약천집(藥泉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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