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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모던포엠 원문보기 글쓴이: 전형철
감동의 시론, 그 형식과 내용의 진화
유창섭 시인. 본지 주간
시는 무엇보다도 감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그 종착역도 감동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시는 감동을 바탕으로 쓰여지고 그 감동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시를 쓰게 되는 경우, 자신이 감동하지 않은 어떤 정황에서도 시를 써서는 안되는 것이며 자신조차 감동받지 못한 정황을 가지고 시를 쓴다면 그 시를 읽는 독자들을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활달한 문체만으로? 아니면 어려운 수사만으로? 그도 아니라면 억지 정서의 비틀기 형식으로? 모두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감동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감동이란 “마음에 느끼어 일어나는 급격한 정신적 흥분”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이나 행동, 철학, 또는 사상을 접하였을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정신적 흥분, 또는 마음의 크고 작은 움직임이 감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이 최초로 시를 쓰기 전에 마주하는 일이란 시인 자신이 어떤 이미지(=심상)으로부터 크던 작던 충격을 느꼈을 것이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 충격을 통해서 시를 창작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감동이나 깨달음을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상을 보거나 듣고 그 순간 그것으로부터 감동을 받거나 깨달음을 느끼게 된다거나, 또는 개별적인 놀람을 가지어 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었다거나, 철학적 명제, 그 내용과 형태가 어느 것이든 그것들을 통해서 새롭게 형성된 마음의 움직임---즉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것이 시에 있어서 중심정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시를 쓰는 시인은 자신이 감동받지 않은 이미지를 앞에 놓고 시를 쓰는 일을 삼가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거니와 자신조차 감동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어떻게 독자를 감동하도록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그 감동을 창조적으로 감당해 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황을 주변에 세워놓고 그 감동의 중심에 이를 수 있도록 구성plot을 하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소설이 보다 구체적 정황을 창안하여 기획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감동을 의도적인 수준으로 끌고 가려는 섬세한 구성을 하게 된다면, 시는 보다 우발적이고 순간적인 발상에 치중하게 된다는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창작물에는 감동이 전제 되지 않은 작품이란 그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는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
최근에는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시적 정서를 창안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는 경향이 높다. 종전과 같이, 예를 들면 우리의 노래가 창唱의 가락에서 현대적 의미를 담은 트로트 풍의 가락으로 우리의 정서를 표현해 내다가 다시 서구 문명의 영향과 조율을 거친 랩과 재즈 등의 혼합된 형식으로 변모해 왔던 것처럼, 우리 시詩도 정형적 운율이나 형식에서 벗어나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으로, 다시 “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새로움에 대한 인식은 언어의 새로움과 더불어 의미 천착의 기교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종래의 전통적 수사학적 어휘의 인식에서 사물의 실체적 형상이나 동작보다는 그 사물이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그 뒷면의 인식체계에 더욱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예가 실험적 정신이 투영된 새로운 시적 실험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심상을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투영하여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새로움의 탐색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모더니즘 계열의 시, 또는 전후에 나타났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가 있었고,그 이후에는 상징시라든가, 해체시, 무의미시, 날이미지 시, 비대상 시, 미래파들의 시나, 난해시, 형이상 시와 같은 형식적, 내용적 실험이 시의 세계를 넓혀가는 길을 선도하였다. 그 결과 현대의 우리 한국시는 시인 각자가 어떠한 시의 계열에 속한다는 형식의 분류가 아닌 몸으로 체득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복합된 형태로의 진화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과거의 커다란 내용적 형식적 흐름의 하나였던 “압축”의 흐름에서 그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 하는 “드러냄”의 형식적 흐름으로의 진화가 가장 뚜렷한 변화의 물결을 이루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압축”이라는 기교가 시의 기본적 태도로 인식되었던 흐름을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한다.
1. 압축이 기교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의 시
서구의 문화적 영향과 사회적 발전에 의해 인간의 심상적 구체성이 그려지던 근대시의 초기에는 우리 시가 전통적 운율과 은밀한 내면의식의 발로를 추구하는 감춤의 시가 유행하기 시작 하였고, 그러한 시적 완성기에 등장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 까지는”과 같은 시에서는 운율적 흐름과 감성적 감춤이 시의 심미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러한 시가 문학의 흐름에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등장에 따라 시는 도시의 정경에 문화적 정황과 다소 낯설음과 새로움이라는 내용을 담아내려는 의도적 흐름으로 문을 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산발적이고 다양한, 그리도 어느 의미에서는 매우 유사한 시적 변화를 수용하면서 현대시의 형상화 방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소위 “낯설게하기”라는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것은 시클로프스키(Shklovsky, V.)가 주장한 것으로 일상화되어 친숙하거나 반복되어 참신하지 않은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낯설게 하여 새로운 느낌을 갖도록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 물론 이러한 낯설게하기“라는 경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그러한 낯설게 하기 수법은 1920년대에 시작되었고, 그것은 문학적, 또는 시적 화두로서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이 시대에도 그 “낯설게하기”---어떤 의미에서는 ‘새롭게 사물을 바라보기’와도 일맥 상통한다---라는 시적 정서적 발현 방법은 하나의 정통성있는 기교적 정의定義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한 시대적 경향을 바탕으로 현대시는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또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의 시적 정서를 받아들이며 우리가 시를 읽고 감동을 받게 될 때, 그 시의 중심에 들어있는 시적 정서의 진정성과 그 시의 뒷면에 마련되어 있는 상상력의 공간이 넓게 구성된 시에 대하여 그 감동이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시는 독자에게 많은 상상력의 공간과 진성정이 바탕이 된 작품이 감동을 크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현대시가 그 내용이 “감추면서 드러내는 시의 형식”---종래의 압축과 은밀함이 더 큰 미덕이었던 시대---에 그러한 “이미지의 압축”이 살아 있는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徐廷柱 시인/ “동천冬天”전문)
서정주의 시는 “동천冬天”에 이르러 천상적天上的이며. 정신적 사랑과 우주적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있다고 말한다. 지상의 언어가 아닌 천상의 언어답게 이 시는 거추장스러운 단 한마디의 설명도 배제한 채, 고도의 상징적 수법---고도의 이미지 압축기법---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잘 살펴보면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는 '눈썹'과 '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지 섣달 겨울 하늘에 차갑게 걸려 있는 눈썹 같은 그믐달, 그리고 그 곁을 비껴가듯 날고 있는 한 마리 새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풍경화처럼 보이는 풍경 속에 그 그믐달을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으로 표현하여, 오랜 세월 동안 꿈꾸어 그리운 임을 하늘에 옮겨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겉으로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한 여인에 대한 승화된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며, 달리 해석해 본다면 이 시 속의 '눈썹'은 시인이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던 여인의 육체적 심상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인이 마음속에 다듬어 온 삶의 어떤 고귀한 이상이나 정신적 지주支柱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에 옮기어 심어 놓았다는 것은 절대적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간다는 것은 하늘을 나는 새까지도 그 고귀한 정신적 이상이나 자신이 품어온 정신적 지주支柱를 알아차리고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외경(畏敬)의 경지에 들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처럼 짧은 시의 공간에 많은 상상력이 펼쳐질 수 있는 의미를 압축적---시의 행간에 배열된 싯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긴 해설이 가능하도록 그려진 시 형식---으로 그려내는 시적 기교가 가장 멋진 시로 여겨지던 때에는 이런 “압축”이 시를 관통하는 형식의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역시 이와 비슷한 유형의 압축이 중심이 되고 있는 시를 한 편 더 살펴보도록 한다.
산수유 열매
오돌오돌 떠는
저 내를
살얼음
자박자박 밟으며
건너가는 소리
차마
뒷등 시려
못 돌아 보았습니다
(김준환 시인 / “후회“ 전문)
이 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고 떠나 보내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후회”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도 초겨울 쯤 이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왔다가 떠나는 시간, 시인은 그 사람을 가지 말라고 붙잡지 못하고 등 떠밀어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그 사람을 붙잡지 못한 마음이 “후회”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산수유 열매는 이 시기에 빨간 열매로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 ‘빨간‘ 열매는 ’사랑‘의 상징성이 높은 색채(=빨갛다)를 감추고 열병에 걸린 듯 오돌오돌 떨고 있음을 상징한다. ’살얼음‘도 그 아슬아슬한 서로간의 위태로운 사랑은 아니었을까? 그 사랑이 발(=현실)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가슴에 얹혀 있는 정경이 눈에 그려진다. 그리고는 “차마” 붙잡지 못한 마음이 “귓등 시려 / 못 돌아 보았습니다”라고 후회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농익은 사랑의 마음이 철저하게 감추어지고 압축되어 있는 정경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제시한 시가 그 전형적 수법의 대표적 경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형태로 그 압축의 심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들도 많이 있고 그 내용을 전부 옮겨 설명하는 것은 주제가 아니므로 서두에서 언급한 “압축”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는 선에서 예시하고 나머지의 세부적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현대시가 그 내용이 “감추면서 드러내는 시의 형식”---종래의 압축과 은밀함이 더 큰 미덕이었던 시대---에서 “드러내면서 감추는 시의 형식”---현대의 다양한 시선과 정서적 감동에 관여하는 시적 요소들을 드러내면서 그 뒷면에 은밀함, 또는 시적 정서의 중심을 감추는 시대---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시대적 흐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드러냄이 시적 기교의 중심이 되는 시대로의 진화
시를 쓰는 데에는 그 정서와 정황에 맞는 언어의 선택이 필요하게 된다. 물론 시를 쓸 때 마다 그러한 의미를 담은 언어를 쓰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를 쓰는 기초가 있는 경우에는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매우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동이나 정서에 바탕을 두고 말하듯이 쓰여지게 되는 것이겠지만, 마지막 퇴고를 하게 될 때에는 아주 위대한 시인들조차도 그 어휘나 표현의 선택에 고뇌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 할 수 있다. 따라서 적절한 시적 언어의 선택과 활용이란 시를 시詩답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 예각적銳角的 시선視線을 통한 관점 전환과 이미지 전개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의 글쓰기에서는 시 창작에서의 “낯설게 하기”, 또는 “새롭게 하기”라는 형태의 표현과 새로운 이미지 발현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그 경향이 시의 본령인 것처럼 인식될 만큼 비중을 두는 글쓰기의 경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경향을 부추겨 온 “신춘문예”제도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나 시적 경향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적 욕구가 그러한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표현기교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유포되고 그러한 경향이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표현 형식을 뛰어 넘는 “새로운 표현 형식으로의 이동”이라는 자연스러운 모습의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대가 매우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가치있는 정보로서 살아남는 새로운 감각의 “시적 정서”라는 새로운 “포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詩가 언제까지나 김소월의 시적 성취나 정지용의, 서정주의 시적 성취, 또는 김춘수의 시적 성취의 형태에 매몰되어 그 아류의 형식으로 시를 쓰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자각에서 추구하기 시작한 자연스러운 시적표현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즐겨 쓰는 시적 정서라는 것이 어쩌면 수 천년 동안 써 온 시적 이미지의 복사본처럼 유사한 이미지로 가득 채워지고 있고, 그 시적정서가 시의 제재題材가 되고 있는 마당에 앞서 간 시인들의 시쓰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감성의 시를 쓰기 위하여는, 다시 말하면 그 유사한 이미지의 재생산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하여는 새로운 표현 형식의 글쓰기가 필요하였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 기교나 정서의 감각적 성향을 퇴영적인 경향으로 폄하하기 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과거의 뛰어난 시적 성취의 한 방법이었던 압축이나 함축미를 이 새로운 표현형식에 접목시켜 새로운 변화에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은 우리 詩의 영역을 넓히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여 보는 것이다.
2.2 사물의 뒷면, 그 뒤집어 보기와 드러냄의 시각視覺
그렇다면 새로운 시쓰기의 새로운 형식이란 어떤 것일까?
“새롭다”는 말은 같은 이미지를 “다른 형식에 담아내거나, 다른 표현방법으로 표현해 내거나, 다른 형태로 글을 쓰는 것”이 그 변화의 모습이 될 수 있겠다. 그러한 방법에는 하나의 예로 우리의 시적 정서를 표현해 내는 방법으로서 같은 사물을 보는 시선을 달리하여 그 변화된 모습을 담아내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나 윤리적, 도덕적 가치,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가치의 영향으로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詩라는 형식에 담아내는 정서도 그러한 가치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에 대한 익숙한 표현은 詩라는 형식 속에서는 매우 상투적이거나 신파적 요소로 해석되어 그 진실한 정서가 함몰되어 버릴 위험이 많다.
가끔 새로이 발표된 詩를 읽는 경우에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어디선지 읽은 듯한 글을 만나게 되는 일은 시의 형식 면에서나 정서적 내용 면에서 그 시가 진정성을 상실하고 있거나 상투성에 오염되어 있는 듯한 경우가 대부분일 때가 많다.
바로 그러한 정서적 유사성이나 상투성을 탈피하고 신선하고 새로운 시적 정서가 발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시쓰기—흔히 형식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의 “낯설게 하기”나 “새롭게 하기”와 같은 표현기법—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필요가 시를 새롭게 느껴지게 하기 위한 표현기법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질 만큼 우리시대의 오늘날 현대시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 쓰기”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시 쓰기”는 새로운 시적 정서를 발현시키기 위한 “정서적 발상 전환”을 필요로 하고 있다.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시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낯설게 하기” 또는 “새롭게 하기”가 필요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눈길(=시선視線)이 일반적 둔각적鈍角的 사고, 즉 남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게 되는 당연한 눈길에서 벗어나 예각적銳角的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하면 사물의 모습을 늘 보던 각도에서 볼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좁은 각도에서 “뒤집어 보기”를 통해 그 의미를 재생산하고 재창조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시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그 시선에 다양한 정서를 부가附加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압축의 형식” 보다는 다양한 시선이 드러나게 하는 “드러냄의 형식“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변화는, 즉 이러한 시적 진화進化는 과거의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으로부터 일탈하여 주체가 바뀌면서 “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으로 바뀌어 감을 의미한다.
어떤 즉물적 이미지를 모든 사람이 함께 느끼는 당연한 눈길로 그 정서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제 아주 낡은 표현방법이 될 수 있으며, 보다 예각의 시선으로 이미지(심상)를 끌어내어 표현해야만 새롭게 다가오는 정서적 발현을 기대할 수 있게 되리란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 그늘진 반대편의 모습에 심취하여 사물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상대적 모습을 통해서 그 본질적인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감동을 배가 시킬 수 있는 언어로 재 해석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요즘의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이 신선하고 멋진 표현에 심취하여 지나치게 감각적인 표현에 몰입하여 그것이 시의 본령인 듯 착각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그 진정성이나 절실함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발현이 가능하게 되는 적절한 형식과 표현기교를 통한 새로운 틀로 자리잡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시에서도 잔재주나 표피적인 찰나적 표현들은 그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며 전체를 장악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그래서도 아니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시 쓰기에 있어서는 과거의 틀을 완벽하게 혁파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장점들을 수용하면서 “뒤집어 보기”를 통해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새로운 인식의 드러냄”으로 시를 쓰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예각의 시선”이란 어떤 것일까?
앞에서 말한 “예각의 시선”이란 통상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그 자체의 기능이나 존재형식으로, 때로는 매우 교육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형식으로 그 실체적 감성을 인식해내는 방법을 의미하며 그것을 다면적으로 관찰한 결과를 시적 정서에 투영하여 “드러냄”을 우선하고 “감춤”을 종속적으로 취하게 만드는 형식에 치중하게 한다.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가지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를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번 붙잡은 먹이는 좀처럼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 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로 외로워 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 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하지도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발 달린 짐승이다
(시 “의자”전문 / 김성용 /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2000)
김성용의 “의자”에서는 의자 자체를 짐승으로 의제擬制하여 표현하고 있다.
당연히 앉음과 편리성이 전제로 되어 있는 의자가 아니라 그 편리함과 안락함을 무기로 인간의 몸을 “먹이”로 인식하는 뒤집어 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심각한 어려움은 없다. 쉽게 읽히면서 편리함을 추구하려는 인간 본성과 그 의자를 소유하므로서 잠깐의 졸음이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그러한 의자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는--작은 철학적 메시지를 슬쩍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가 대단히 뛰어난 명작名作이라는 의미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사색의 결이 매우 멋지고 충실한 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여기에서 보듯 각각의 관찰된 사물의 정서에 감성적 소구점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압축”보다는 “드러냄”이 강하고 그 의미 행간에 각각의 세분된 정서가 매달려 전체의 정서적 내용과의 합일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많은 정서적 다양한 발현과 그 행간에 감추어진 의미가 개별적 소구점을 형성하고 있는 시 한 편을 살펴본다. 이 역시 “드러냄”의 형식에 치중하여 “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에 걸맞는 시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의 창조문학 신문 당선작품으로 심사해설을 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가파른 한의원 계단을 오르며 바스락거리는 호흡들
딸아이를 생산한 이후로 십여 년 동안 아내는
깊은 강이 되어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밤마다 강의 적요가 지나는 소리 들린다
가끔 연어의 몸살 앓는 소리도 난다
물의 기원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것이리라
한의원에서 강의 몸이 열리자 화석 같은 통증 묻어나온다
수척한 팔다리며 가슴 아래 캄캄하게 돋은 가시들
오래도록 부드러운 물길이 식탁이며 침실을 흐르는 동안
가시는 안으로 날카롭게 이빨을 들이댄 것이리라
그녀의 몸은 잘못 들어선 길처럼 토라져 있다
너무 오래 걸어 들어가 돌아오는 길 버렸을 것이리라
몸은 수위를 낮추며 나이테를 키우며 줄어든 바닥으로
아내의 부장품이 보인다. 닳아버린 나의 구두며 녹슨 반지가
골다공증 걸린 흰 뼈처럼 바람의 길 만들고 있다
길 위로 낡은 복사기며 서류뭉치들이 눈치를 살피면
물수제비뜨던 딸아이의 돌이 초생달처럼 웃고 있는데
아내는 어디를 갔을까.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작한
삶의 원류을 찾아간 것일까
마른 물줄기의 혈에 박힌 시침, 명치끝에서 타는 약쑥 같은 시간
야위어 가는 봄 강처럼 마른나무로 선 나는 짙은 그늘을
그녀에게 드리우고 싶은데, 그녀는 어디쯤 지나는 것일까
홀로 어두운 길 돌고 돌다 흐르는 강이 되려나 보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거친 내 손에 길을 만든다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물길, 환한 시간이다.
(시 “아내의 불면” 전문 / 강봉덕 )
강봉덕의 시 「아내의 불면」을 보고자 한다. 살벌하고 낭자한 죽음의 각에서 치유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한의원을 찾는다.
우리의 생명의 혈자리에 병이 깊으면 사망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혈자리, 그것은 바로 우리 몸에서 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혈액이 원활하게 도는 길, 그리고 우리의 기운이 줄기차게 통행하는 길을 따라서 강은 흐른다. 생명의 강이 흐르고 존재의 강이 흐른다.
그 흐름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열려진 육체 너머로 신에게 향하는 “비밀의 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중히 여겨야 할 생명의 신경이 육체 안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신께서 부여하신 삶의 분량대로 건강하게 살아야 할 강물이 우리의 몸 안에 “비밀의 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생명의 강의 의식과 존재와 삶의 진한 고통의 길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간의 길로 오버랩되는 레이어들을 강봉덕은 그의 렌즈로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신앙하는 신전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가 강처럼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육체에 본향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놓으신 신에 의해서 태초 전부터 이미 심어져 있음을 강봉덕은 사유한다. “물의 기원의 기원까지 거슬러” 사유의 끈, 혹은 믿음의 실한 밧줄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각의 탈출을 위한 그의 묘안으로서 출발되는 행위인 시적 창작력에 대한 시행들의 신경줄에 해당하는 진술인 것이다.
“연어의 몸살 앓는 소리”를 들으며 사각의 밤바다가 끓어오르고 있음을 그는 영원의 소리의 카메라에 잡는다. 삶의 고통이 그만큼 우리에게 가시가 되어 “안으로 날카롭게 이빨을 들이대고” 있는 고통 깊은 층을 찍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어들을 살펴보면 “불면”, “화석 같은 통증”, “캄캄하게 돋은 가시들”, “마른 물줄기의 혈”, “홀로 어두운 길” 등의 시어들로 인해 시를 다 마쳐갈 때까지 다 어둡다. 거의 몰사 상태에 이를 지경에 있는 아내의 건강에 대한 표현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바탕에 죽음의 그림자가 바짝 마른 절망의 뼈다귀들로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바짝 마른 강줄기를 살려내는 비법의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아내의 손가락”인 것이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거친 내 손에 길을 만든다 /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물길, 환한 시간이다.”라며 이 시를 단 번에 살려내고 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거친 내 손에 길을 만든다’며 이 시에 강물이 흐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물길, 환한 시간이다.’라고 하며 그의 시가 마지막에 푸드득 살아난 것이다. 이제 이 시의 경락에 물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심사평 부분 : 문학평론가 ; 박인과) <창조문학 신문 인용>
마지막으로 또 다른 사물의 이미지를 통하여 시적 정서를 발현해 낸 작품 “소라 여인숙”(강원일보 2007년 신춘문예당선작)을 읽어 본다.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 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漁撈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이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은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당겨 덮는다
(시 “소라여인숙”전문 /김영식•포항 )
당선작으로 뽑은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은 선이 굵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이 있고 사물들과 자신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와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같은 묘사도 빼어나지만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같은 표현은 탁월하면서도 참신한 맛과 멋이 있다. 신인에게는, 그리고 문학에는 독자를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는 이런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소라 여인숙'은 표현에 공을 들이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무척 신경을 쓴 작품이다.....
김영기•최승호 <강원일보에서 일부 인용>
여기에서도 각각의 행간에 매달려 숨어 있는 정서들---쓸쓸함, 그리움, 지친 나그네의 피곤함, 과거의 흔적을 통한 일체의 상념을 시인 자신의 것으로 환치시킨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개별 정서의 집중화를 획책하여 그 감동과 새로움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힘을 보여주는 내용---을 축으로 사물의 배경을 새로운 눈길로 드러내 보이는 예각적구조의 시선으로 창작되어 새롭게 드러냄을 완성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3. 시적 감동의 진화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제는 이 시대의 시적 흐름이 과거의 “압축“---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이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드러냄”---드러내면서 감추는 형식---을 통하여 정서적 집중력을 높이고 세밀한 심상을 묘사하여 상상력과 결합시키므로서 감동을 이끌어 가는 형식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짧은 시적 공간에서도 의미의 분화를 조화시키는 연나누기의 형식이 자주 사용되었지만 이 시대에는 연을 나누는 형식조차도 과감히 생략한다. 그 호흡이 빠르고 긴장감이 적게 구성되는 형식으로 속도와 다양성을 결합시킨다. 이것은 과거의 형식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작용하면서 현대시의 거대한 흐름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징후의 하나이다. 이러한 흐름의 원류에는 현 시대의 정보 전달방식이나 인터넷 세계의 확산 방식에 힘입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의 독자는 그 시대의 중심세대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 또는 문화적 코드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선호하고 그들이 환호하는 형식이 그 시대의 코드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독자들과 함께 존재해야 하는 시의 세계에서도 그 시대성이 접목된 새로운 양식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이러한 변화에 대한 해답과 현명한 방식을 창조해 낼 수가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무조건 인기에 영합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시인들 자신에 맞는 어법과 창조적 시선이 조화를 이룬 시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일이야 말로 이 시대의 시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일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진화의 흐름이 좋으냐 나쁘냐, 또는 옳으냐 그르냐 하는 평가는 아직 조급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 과거의 압축에 길들여진 기성 시인들의 반응은 착잡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러한 흐름을 마냥 방관하면서 자신의 과거의 창작 태도에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러한 흐름의 긍정적 측면과 과거의 시 형식에서의 장점을 조화시키고 접목시키면서 당대當代의 진화하는 시 형식에로의 접근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는 감동의 소산이다. 그 감동을 교류하고 확산시켜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이루어내는 일은 이 시적 정서를 어떤 형식으로 접목시켜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는가에 이르게 된다
보다 더 나은 시적 정서의 감동을 교류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시인들이 한 번쯤 이러한 흐름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시에 대한 증정적 방향을 논의해 보고 그 철학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자료>
현대문학(1966.5) 서정주 시 “동천”
매일신문 (2000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강원일보(2007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창조문학신문 (2007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