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회복제'로 소비되는 교회(이연학 신부)
한 철학자가 오늘 세상을 ‘피로 사회’라 호명했다(한병철, 「피로사회」, 2012년). 그는 사회 구성원들이 ‘번아웃’(탈진)과 우울증에 전에 없이 시달리는 것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전에 없이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피로 사회는 ‘성과 사회’라고도 불린다.
피로 사회
오늘 사람들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삶의 주체로 등극했지만, 이 주체는 무엇보다 “성과 주체”로서 “자기 자신의 경영자”이다. 과거에는 통치자나 사회 시스템이 노동을 강요했다면, 지금은 성과 또는 성공의 이름으로 사람이 스스로를 착취한다. 타자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기 착취’이기에 ‘무한 착취’가 가능하며, 스스로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게 더 큰 문제. 바로 이런 경로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탈진, 우울증 환자와 자살자가 많은 ‘우울 사회’에 살게 되었다는 진단이다. 이 맥락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그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현격히 줄어든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서로 연결된 이 일련의 현상 근저에 ‘시장 사회’ 현상도 든든히 한몫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성과 주체’는 스스로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끊임없이 계발하고 포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로 교회?
피로 사회에서 탈진한 영혼들에게 ‘힐링’이나 ‘쉼’[休] 같은 광고 문구는 절실하게 와닿는다. 그래서 이른바 ‘명상 산업’은 불황을 모르는 ‘블루오션’이 된 지 오래다. 이미 30여 년 전, 당시 도미니코수도회 총장 티모시 래드클리프 신부는 온 세상이 이미 시장판이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은 종교마저도 이 장터로 나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호객해야 한다고 유혹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마저 아주 좋은 상품으로 스스로를 이 진열대 위에 올려놓고 있다”(한국 베네딕도회 연합, 「코이노니아 선집」 3, 409쪽). 오늘 교회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치유와 휴식을 목말라하게 된 근본 이유를 진단하고 복음의 빛으로 근원적 치유와 정화를 모색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물결에 발 빠르게 편승해서 더 많은 ‘고객’(으로서의 신자)을 유치, 관리하는 노력의 차원에 머물고 있을까.
현실이 후자에 꼭 멀지만은 않다면(2014년 한국 방문 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웰빙 신학’의 위험을 거론하셨음을 기억하자.), 교회는 이 피로 사회의 하위 시스템으로 복무하며 스스로를 ‘피로 회복제’ 정도로 소비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는 뜻이다. 피로 사회 안에서 ‘피로 교회’가 될 위험이 크다는 뜻이다. 혹시, 수도자들 가운데도 눈에 띄게 늘어난 탈진 증후군과 우울이 그 징후 중 하나는 아닐까. 혹시, ‘피로 수도회’나 ‘성과 수도회’가 우리 모습은 아닐까.
쉼과 관상
「베네딕도 수도 규칙」은 “거룩한 독서에 전념하라.”라고 말할 때 특별한 동사를 쓴다(48,4.17). 바로 바카레(vacare) 동사다. 글자 그대로는 ‘비우다’라는 뜻인데 ‘휴가’를 뜻하는 현대어들이 여기서 나왔다(프랑스어 vacance, 영어 vacation). ‘독서에 전념하다’(lectioni vacare)라는 원문의 뉘앙스를 충분히 살리자면 ‘성경 독서를 위해 오롯이 비워진 시간을 할애하다’ 정도로 새길 수 있다. 그러니까 성경 독서를 포함한 기도 시간은 무엇보다 ‘빈(비운) 시간’이다. 이 빈자리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누린다(마태 11,28-30 참조). 과로와 걱정으로 짓눌린 사람이 깊은 안심과 해방을 얻는 곳도 여기다. 이것은 ‘거룩한 여가’(holy leisure), 거룩한 빈둥거림이다. 고대와 중세 수도승 문헌에서 ‘쉬다’ 또는 ‘앉다’ 같은 단어가 나오면 많은 경우 ‘관상’의 문맥과 직결된다. 관상으로서의 쉼, 또는 쉼으로서의 기도는 활동을 위한 재충전의 기능적 역할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목적인 ‘안식일’에 도착하는 일이며, 어떤 면에서 하느님과 동일한 저 신적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과 쉼 가운데 뭐가 먼저냐는 질문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은 종류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멍에를 메고 참으로 쉬는 법을 배운(마태 11,29 참조) 사람에게, 일과 쉼은 그리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동양의 지혜 전통에서도 정중동(靜中動)은 늘 동중정(動中靜)과 연결된다. 정혜쌍수(定慧雙修)니 공적영지(空寂靈知)니 하는 불교 용어도 궁극에는 같은 지혜를 표현할 터. “안 하는데도 하지 않는 바가 없다.”(無爲而無不爲, 「노자」, 37)라는 말씀이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도 이 맥락에서 더 쉽게 알아듣는다. “진리 사랑은 거룩한 한적함(otium sanctum)을 찾고, 사랑의 필요는 마땅한 일(negotium iustum)을 맡는다”(「신국론」, 19,19). 이렇게 쉴 줄 아는 자리야말로 제대로 일하는 자리다. 여기야말로 시대의 병증을 근원적으로 진단하고 참예언과 복음화 활동이 솟게 하는 산실이다.
도착해야 쉰다
오늘 사람들은 일이 없어도 쉬이 쉬지 못한다. 몸은 쉬어도 마음이 쉬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은연중 늘 장차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를 상정하고 산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목적지’에 도착해야 비로소 행복할 것이라는 전제와 함께. 그리하여 지금 주어진 일은 다음 순간의 목표로 나아가는 방편으로만 사용된다. 심지어 기도와 쉼마저 그렇다.
내게 복음은 지금 내가 이미 도착해 있다고 알려 주는 놀라운 소식이다. 그리하여 늘 지금 떠나도 아무 문제 없다고 알려 주는 ‘한 소식’이다. 내내 지지부진, 비틀거리고 뒷걸음질 치기 일쑤지만 그래도 나는 이미 도착해 있다. 자비로 씻긴 맑은 눈에, 어느새 하느님께서 먼저 달려오시어 내 앞에 턱 서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 ‘먼저 오심’을 일컬어 자비 또는 용서라 한다. 여기서 ‘지금’은 다음 목적지로 건너가는 징검돌이 아니라 ‘종점’으로 경험된다. 우리는 여기서만 정녕 깊이 안도하고 쉰다. 하느님 현존, 그 영광이 모든 것에 충만히 빛남을 뵙는 곳도 여기다.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불안합니다”(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1).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