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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갱빈 과수원집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그날은 가고 없어도
별과바람 추천 0 조회 58 12.11.12 01: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날은 가고 없어도



  당신은 지금 밤이 깊어 인적이 끊긴 조그만 도시의 정거장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시끄러워 귀엣말을 주고받을 수 없던, 오고 가는 사람마저 소음에 포개지던, 보내고 맞이하는 우리네 애환으로 수런거리던. 그러나 이제 막 먼  길을 달려온 막차가 시동을 끄고 마지막 여행객이 총총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오직 눈 뜬 시간의 발자국 소리만 벽을 타고 내려와 미궁의 복도 끝으로 자박자박 걸어가는 정거장의 적막을, 적막의 정거장을 찾아올 수 있겠는가. 자동차는 한결같이, 오늘 하루도 참 힘들었지...... 부어오른 바퀴 위에 무거운 제 몸을 내려놓고 캄캄하게 물러앉아 인적 끊긴 정거장의 풍경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당신은 별빛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따금 낯선 손님처럼 바람이 찾아오면 휴지조각들이 조금씩 제 자리를 옮겨 앉거나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칠 뿐 처마 끝 가로등은 허공 쪽으로 한눈을 팔고 화장실 낙서들도 더 이상 관능의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당신이 시인이라면 정거장은 수천 번의 이별과 수만 갈래의 미로를 내장한 시간의 육체임을 안다. 정거장엔 아무도 집 짓지 않고 정거장엔 아무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정거장의 이미지는 형벌이며 유적이다. 당신이 시인이라면 폐허로 태어나 폐허로 살다가 폐허로 되돌아가는 이 세상 정거장의 아픈 숙명을 안다.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의 그날들이 그랬다. 아무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아무도 거기 깃들어 집 짓지 않았다. 아버지의 빛 바랜 수첩을 따라가다가 나는 할 수 없이 인적 끊긴 조그만 도시의 정거장에 닿는다. 정거장은 아버지의 내면풍경이었다. 이렇게 시작된다.


新曆正月1日이다 確實히 人生 午後다 過去의 淸算整理. 結實을 爲하야 努力하여야겟다 大邱 周錫氏 金女 鑛山路 解決 女兒 歸省 xx70,- 家用500,- 顯國200,- 計770,-支出 東亞日報 受信 豚肉10斤 구入


  1968년 1월 1일 아버지의 일기이다. 심한 흘림체의 글씨여서 70원을 지출한 내역은 판독이 어렵다. 이거 무슨 잡니까 물어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아버지의 자잘한 일상이, 알뜰한 경제가, 빈틈없이 꼼꼼한 성격이 잘 보인다. 왜 하필 1968년부터일까. 그해부터 메모를 하기 시작하신 까닭, 인생의 오후를 느끼시게된 배경이 따로 있을까. 셈하여 보니 그해는 내 아버지 50세에 접어드신 때, 되돌아보니 그때는 내가 대학에 입하하던 해.

  내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늘 늦가을 오후이다. 이상한 일이다. 벽에 걸린 사진 속의 아버지 말고 아버지의 젊은 날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내게 늘 50대 이후이다. 일찍 백발이 되어버린 머리칼 때문일까, 단정하게 기르신 콧수염 때문일까, 즐겨 쓰시던 중절모 때문일까, 앞 뒷산이 쩌렁쩌렁 온 마을을 호랑이 잡던 무서운 아버지도 그렇고, 자식을 등에 없고 개울을 건너시던 내 초등학교적 자상한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갖는 분위기, 아버지의 역할이 갖는 무게 때문일 것이다. 50이라는 산술적, 물리적 사실을 <확실히 인생 오후>로 느끼시게 한 내적, 심리적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돼지고기 한 근 값이 얼마인지 나는 모른다. 10근이면 대단히 큰돈을 주어야 살 수 있는 양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왜 돈육 10근 구입에는 지출 액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외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걷이를 하면 갚기로 하고 가져오셨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들은 잦았으니까.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 풍속이었겠지만 내 어릴 적 우리 마을에서는 이따금 주민들이 뜻을 모아 돼지를 잡아 나누어 먹곤 했었다. 일본말로 가부시끼였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마을을 한바탕 들어올리면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개울가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죽은 짐승의 내장 생김새도 신기했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어른들이 던져주는 오줌보였다. 입으로 후후 바람을 불어넣으면 그것은 희고 질긴 축구공이 되어 논밭으로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돼지 오줌보와 함께 산골 아이들의 낮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것이 비록 외상이라 하더라도 돼지 뒷다리를 사들고 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든든하고 넉넉해 보였다. 시렁에 매어놓은 그 큰 고기 덩이를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자였던가. 당신이 내게 가장 맛있는 음식의 기억에 대해 묻는다면, 작아지는 고기 덩이를 아까워하며 숯불에 구워먹던 그때 그 저녁 답의 돼지고기 바비큐(?)라고 말하는데 서슴지 않겠다

  35년 전 그날 나는 200원을 어디에 썼던가. 아버지는 알뜰한 아내가 가계부를 정리하듯 계770원이라고 쓰시며 가난한 살림을 걱정하셨을 터이다. 동아일보 구독을 신청하시면서도 몇 번을 주저하고 망설이셨을 것이다. 라디오가 있는 집은 마을을 통틀어 작은집뿐이었다. 오촌 아저씨 한 분이 일본에 살고 있는 덕분이었다. 비록 이틀씩 늦게 배달부가 가져다주는 것이기는 했지만 신문은 아버지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었다. 그날 집에 온 여아는 죽은 누이일까, 교장선생이 된 누님일까. 흩어진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앉은 집은 둥근 궁전이다. 아기 새를 품에 안은 어미 새의 안도감, 아니면 무사히 첫 비행을 마치고 둥지로 돌아온 새끼 새의 무용담; 누이라면 전자이고 누님이라면 후자이다. 광산으로 내는 길 문제가 해결 된 것 또한 커다란 기쁨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광산은 내 의식 속에 구불구불 구렁이같은 줄기를 뻗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慶大登錄. 李廷花孃의 案內感謝. 弟嫂 만났음.(賢模)


  1968년 2월 16일 아버지는 위와 같이 적고 있다. 나의 대학 등록을 하고 오신 아버지는 등록 창구에서 만난 이정화라는 여학생에 대해서 아주 신나하시며 말씀하셨다. 등록 서류에 아마도 간단한 영문 표기가 필요했었던 것 같고 알파벳을 아실 리 없는 아버지는 그 도움을 우연히 창구에서 만난 예의 학생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풋내기 여학생으로부터 받은 친절을 시골 영감인 아버지는 단순하게 지나쳐 버리고 싶지 않으신 눈치였다. 생김새에서부터 말버릇까지, 소략한 그 집안의 내력과 함께 전주 이씨는 양반이며 행세하는 집안인 듯하다고 덧붙이기도 하셨다. 입학하거든 꼭 만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고 심심 당부하셨다.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대구역 앞 2층 건물에 ‘시골다방’이 있었다. 내가 그 다방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당시에는 가장 멋진 데이트 장소가 다방이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떠올려 보라. 그때 우리는 그랬다. 도라지 위스키 한잔 시켜놓고 창가에 앉아 허공에 할일 없이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젊음은 괜히 고독했고 철없이 심각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얼굴이 둥글고 가무잡잡한 이정화는 커피를 시키고 나는 작은 유리잔에 따라주는 도라지 위스키 싱글을 시켰었다. 흐린 기억이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때 겉멋에 사로잡힌 철부지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았고, 그녀 어머니의 비대한 체구에 놀랐고, 가족들의 호의에 감동했고 상다리가 휘어질 듯 차려진 진수성찬에 충격을 받았었다. 어렵고 조심스러운 자리에서 식사할 때 코가 훌쩍거려지는 것이 얼마나 큰 괴로움인지 그때 알았고 밖에서는 얌전한 여자아이들이 집안에서는 그렇게 수다스럽다는 사실 또한 처음 알았다. 수다떨기는 여자의 생리라는 것, 수다떨기는 신뢰와 평화의 해방구에서 행해진다는 것, 그러므로 수다를 떨 때 지금 그 여자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둔하게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아버지의 기대가 왜 무산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바빴을 것이다.


  내가 경북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김춘수 때문이었다. 김춘수의 「꽃」때문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작품을 나는 해방 몇 주년 기념으로 우리 문학을 조망하는 어느 신문의 기획란에서 읽었다. 동아일보였던 것 같다. 여름날 사랑 마루에서 아버지가 읽다 둔 신문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늘 야당이셨고 당연히, 야당지인 동아일보만 보셨으니까. 그때 나는 대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재수를 하면서도 정신 못 차리고 한하운의 일생과 「보리피리」 같은 것에 찔끔찔끔 슬퍼하며 시간 다 보내고 어디 만만한 지방대학쯤으로 뜻을 굽힐 무렵 「꽃」을 만났던 것이다. 그것은 한하운류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이를테면 우리가 서양여자의 맨 살을 스쳤을 때 느끼는 그런 낯선 황홀이었다. 내게는 그랬다.  

  재수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때로는 좌절과 폐허의, 때로는 도피와 분노의 내 생애에서 가장 긴 1년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엄살 떤다고? 지금과는 달라, 당신과는 입장과 처지가 나는 달랐어. 취직하고 돈벌어 아버지 등짐을 벗어드려야 했어. 동생들 학비도 내 책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 하루가 급했어. 당신과는 달라. 나는 아버지의 희망이자 자존심이었단 말야. 어머니는 나만 보고 사셨어. 어머니께 나는 희망 없는 세월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출구였단 말이야.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데올로기가 달랐으니까. 어머니는 고향과 함께 가난을 버리자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가난과 함께 고향을 껴안으셨다. 이처럼 가파른 처지에 내 몸에는 무슨 피가 흘러, 무슨 몹쓸 놈의 피가 흘러 시를 좇아, 돈 안 되는 문학을 좇아 김춘수 시인이 교수로 계시는 대학을 찾아갔던가.

  늦가을 이른 아침이었다. 산 속 외딴 암자에서의 입시 준비를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대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대구시 칠성동에는 현모 삼촌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와 이복 형제인 그는 아버지 5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 칼라였다. 팔달교에서 총을 맨 경찰들의 검문이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나는 파출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물들인 군복을 입고, 농구화를 신고 바짓가랑이가 아침 이슬에 다 젖은 채 사흘 굶은 몰골을 하고 차에 탄 탤런트 이순재를 닮은 내가 간첩임이 틀림없다고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차에서 내리면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여자 애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세상이 우습기만 했다. 손떼 묻은 「영어정해」가, 여기 저기 밑줄이 그어진 「하이라이트 국어」가 겸연쩍게 내가 선량한 이 나라의 국민임을 증명해 주었다.

  낙방의 고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학원에 다니며 제일 자신 없는 수학과 생물을 공부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숙모의 주선으로 나는 북구 산격동 머리 나쁜 아이들이 올망졸망 많은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를 했다. 그 집 건너 채에 경북대 농대 4학년 학생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김춘수 교수요? 대단한 시인이지요. 턱수염을 허옇게 기르고... 굉장한 분이지요...” 그가 알려준 김춘수는 마치 책에서 본 인도의 시인 타고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끝 모를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대학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내게 잔치를 열어주셨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것도 아니고 장군이 된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당신의 친구들을 초대하고 내 친구들을 부르도록 하여 술과 떡과 고기를 실컷 먹도록 해주셨다. 시름을 잊을 의식이 필요하셨으리라. 부디 열심히 공부해서 큰 뜻을 이루라는 격려를 하고 싶으셨으리라. 가난의 대물림 걱정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당신의 실패한 삶을 되풀이하지는 않으리라는 작은 안도 큰 기대 때문이셨을 것이다. 재수할 때 나는 심지어 아버지와 다투고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었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서 알고 있었던 낙화암 고란사에 가서 무작정 살길을 찾아보면 되리라 생각했었다. 이렇듯 황당한 철부지의 일년, 그 황폐의 기억을 술과 떡과 기름진 음식으로 지우고 싶으셨으리라. 確實히 人生 午後다 過去의 淸算整理. 結實을 爲하야 努力하여야겟다 이런 맥락 속에 있다.


  돈이 없어 사범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선생님은 문리대에 계셨고, 가까이 뵐 수 없어 참 낭패스러워 하던 중 나는 선생께서 지도교수로 계시는 복현문우회에 서둘러 가입했고 서둘러 선생을 뵙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금 사제가 되어 있는 이정우 형을 따라 내당동 선생님 자택에 들렀을 때 깡마르신 선생께서는(타고르의 턱수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면도를 깨끗이 한)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거의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셨는데 이상하게도 선생은 담뱃불을 붙일 때마다 손과 얼굴을 가늘게 흔들고 계셨다. 면도는 어떻게 하실까 궁금했다. 선생께서는 주로 정우 형과 말씀을 나누셨는데 분명하진 않지만 시의 리듬에 관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서재 멀리 논이 바라다 보였고 논두렁에는 말뚝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는데, 그것을 가리키며 말씀을 이으시는 동안 나는 벽에 걸린 「裸木과 詩」를 훔쳐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돌아왔지만 퍽 자랑스러웠다. 시인 김춘수를 만난 문학 지망생이 된 것이었다.

  그후 나는 틈나는 대로 문리대에 개설된 선생님 강의를 도강하기도 하고 틈나는 대로 습작한 것을 들고 연구실로 다방으로 찾아다니며 선생을 괴롭히는 만용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두고 가라는 것이었고, 내 깐엔 참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평을 청하면 늘 하시는 말씀이 “어디 두었는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결혼을 하고 난 뒤 나는 비로소 그때 선생님 말씀이 공부 더하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인이 되면 별이나 따는 것처럼 조금해 했던 철없던 날들, 돌아보니 부끄럽다. “배고팠던 날들의 기억”은 당시의 정경을 스켓취한 것이다. 겹치는 말들이 있지만 그대로 옮겨 보겠다.


배고팠던 날들의 기억


  그 방은 자목련 그늘 밑에 있었다. 본관 건물 아래층에 있었으므로 지금은 아마도 행정 부속실로 쓰이고 있으리라. 그러나 내게 그 방은 지금도 자목련 그늘 밑 햇빛 들지 않는 강의실이다. 내 인생의 꿈이 시인이었으니까, 문학을 하기 위해 김춘수 선생께서 계신다는 경북대학교에 입학했으니까 두근두근 그 방을 찾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대문학연구회에서 복현문우회로 이름이 막 바뀐 그 방의 터줏대감은 김광수 선배였다. 굽은 어깨와 도수 높은 안경, 그리고 끝간데 모를 그의 진지한 사변은 풋내기인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권기호, 권국명, 전재수, 도광의, 이창윤 등 전설적인 시인 선배들도 그러하고 이정우, 허은, 손병현, 김귀옥 등 하늘처럼 보이던  한두해 선배들의 문학적 열기도 그러했지만 지도교수가 김춘수 교수라는 사실에 나는 얼마나 설레었던가. (중략)

 그러나 선생님은 당시의 내게 너무 멀리, 너무 높이 계셨다. 지금 와서 생각컨데 낙서밖에 아닌 것을 시랍시고 들고 연구실을 찾아가고, 인문대에 개설된 “시론”강의를 청강도 하고, 학보사에 작품을 투고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싶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배고픈 체험만을 했을 뿐이었다. 일청담 옆 미루나무 로터리에서 일년에 한두 차례 시화전을 하고 가을이 깊어지면 문학의 밤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진정성보다는 현시욕을 앞세운 토론회를 하고 그러는 사이 하늘처럼 보이던 선배들도 하나 둘 하늘이 아닌 채 그 방을 떠났다. 배고픈 나는 한사코 사대 국어과를 사대 국문과로 바꾸어 썼지만 문학에 주린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 학교 공부도 시들해지고 동아리 활동도 뜨악해졌다. 당연히 나는 학교 대신 향촌동을 떠돌았고, 동아리 활동 대신 이재행, 이하석, 이동순, 구석본, 이재훈 등 바깥 글쟁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교문 앞에 학사주점 델레스망을 차렸던 일도 그 무렵의 일이고, 김형철, 남주숭, 최정호, 유창국 등 후배들과 복현동 과수원 뒤편 한적한 사잇길, 회상의 그 언덕을 “강현국 로드”라고 명명했던 치기 만만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 방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지났고 시인의 꿈을 이룬지도 20년이 넘었다. 이쯤 서서 바라보니 자랑보다는 부끄러움뿐이고, 만족보다는 후회가 앞선다. 내가 지금 내 딸아이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손 시린 고독을 그늘진 구석에서 견딜 수 있을까.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길의 끝까지 가서 아득한 지평선 푸른 하늘 한 자락을 만져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방의 날들은 향기로웠다. 결여가 욕망을 낳는다 하지 않는가. 한 세대전 나처럼 지금도 누군가 거기 그 방을 드나들며 시인이 되면 하늘을 도리질하리라는 맹목의 열병을 앓고 있겠지. 다시 공화국이 아홉에 아홉 번을 바뀐다 하더라도 철따라 피고 질 자목련 그늘 밑 그때 그 방에서.      

  

璲兒衣服 小包로오다 貧者의 恨 夫婦 울었다


  1971년 2월 12일, 아버지와 어머니는 군대간 자식의 옷 보따리를 받아들고 울고 계신다. 가난을 우신다. 빈자의 한을 울고 계신다. 璲는 내 아우이다. 아우는 6.25사변 동이이다. 태아적 영양 부실로 몸이 약하고 총소리의 영향인 듯 신경이 날카롭다. 아우는 지금 서울 강남 산다. 시계 제조업 사장이 되어 수명의 사원을 거느리고 산다. 지난 해 아우는 50이 넘은 나이에 4년제 대학을 졸업한다. 못 배움의 한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모른다. 가난이란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배부른 소리하는 당신들은 가난이 왜 죄가 되고 악이 되는 지를 알 리가 없다. 가난은 공복의 어미이므로 죄이고, 죄 없는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움으로 악이다.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이과계의 머리가 있어 약학대학 제약과에  입학한 아우는 등록금이 없어 중도에 그만 두고 공군에 지원한다. 가정교사도 하고, 아이템풀 회사의 심부름도 하고 겨울밤엔 찹쌀떡 장수도 하며 학비를 벌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형은 무능했고 농촌의 경제는 대학생을 둘씩이나 거둘 수가 없었다. 아우는 군에 가고 그 무렵 중학생이었던 누이는 죽으라고 고생만 하다가 시골학교로 전학 간다. 가난은 죄악이다. 죽으라고 고생만 하다가 죽은 누이의 여수바우 무덤을 당신은 아는가.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번지는 무덤가 잡초처럼 가난은 뽑아도 뽑아도 그 뿌리가 다 뽑히지 않는 죄악이다. 대책 없는 형, 대책 없는 오빠였다. 나의 대책 없음은 아우도 잘 알고 있다. 첫시집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를 출간했을 때 아우는 내게 편지를 보냈다. 다음 시는 그 편지에 꼬리를 조금 붙인 것이다.


  한 시인은 그의 해설에서 큰 발견인 듯 낭패해 했는데 그건 여태 적절한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지, 형님이야 옛날부터 낭패스런 마음밖에 달리 술수가 없어 온 분 아닙니까. 어릴 적 사랑마루에서 장기를 두다가 악착같은 저에게 회양목 뿌리로 만든 장기 알로 이마를 맞았을 때나 연필로 얼굴을 찔렸을 때나(아직도 눈 밑에 자국이 있는지요?) 중학교 대 연애편지 주고받다 들켰을 때나 형님은 아무런 술수도 대책도 없었습니다. 대학입시 낙방했을 땐 어머이 말씀대로 정신나간 눔처럼 작업복 입고 수염 안 깎고 세수 안 하고 어디 산속 절엔가 암자엔가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혼이 나기도 했다지요. 경북대학교 정문 앞 술집 델레스망 시절은 얼마나 큰 낭패였으며 검은 교련복 입고 데모하다 붙잡혀 북대구 경찰서 트럭에 던져진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스스로 낭패 속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었겠는지요?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실 겁니다, 형님은. 누이의 죽음을 제가 시외전화로 알렸을 때도 형님은 첫마디가 그럼 어짜지?였습니다. 어짜긴 어찌야 빨리 가봐야지 하고 제가 성질을 냈던 것이 귓전에 쟁쟁합니다. 형수님이 계시니 부모님이나 저희가 걱정 없이 지내지요, 형님이야 어허- 밖에 무슨 계략이 있겠습니까.

  그 시인보다 제가 해설을 썼으면 독자들 이해도 빠르고 피부에 닿았을 텐데 잘못했습니다. 재판 인쇄 때 하지요. 그럼 책도 잘 팔리고 장사도 될 것 같고. 저야 장사꾼이니 책장사가 잘 되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월 수 백만원씩만 부수입이 됐으면 집도 좀 늘리고 좋겠습니다만......얘기하자면 길어지니 여기서 줄이고 형님, 책 팔아 드릴테니 좀 보내주세요. 재고는 얼마나 있는지요?


  아우야, 너는 잠시

  내 발바닥 태엽을 감았다 푼다

  잃어버린 시간 찾아 꺼이, 꺼어이

  푸른 산허리 두 쪽으로 가르는

  꿈속의 흰 갈매기처럼.

                                                                           -「편지」전문


  1971년 2월 12일, 학업을 포기하고 군에 간 자식의 남루 앞에서 당신들의 무능을 가슴 뜯고 계신다. 산골의 2월은 한겨울이다. 구병산 눈 덮이고 버들개 얼어붙어 인적 끊어진지 오래이었으리라. 아버지가 형벌과 유적의 정거장을 사실 그때 나는 대학 졸업반, 무얼 하고 있었던가!

  다시 내가 대학생이 된다면 향촌동 막걸리집 대신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살겠다. 문학한답시고 지향없이 떠돌다가 가정교사 자리를 쫓겨나 동가식서가숙, 아버지 가슴에 대못 박지 않겠다. 십원을 아껴 풀빵을 사고 백원을 아껴 라면을 사고 만원을 아껴 밀린 방세를 갚겠다. 역사도 그렇고 일상사도 그렇고 가정은 패자의 넋두리일 뿐, 삶은 언제나 일회적이고 시간은 되풀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복현동 판자촌 김한묵씨 집, 아우와 함께 연탄불에 손 쪼이던 월세 방의 날들 앞에서 운다. 그날은 가고 없어도, 가고 없음으로  그날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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