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부(金殷傅)는 수주(水州) 안산현(安山縣) 사람으로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성종(成宗) 때에 견관승(甄官丞)을 지냈고, 목종(穆宗) 때에는 여러 차례 전임하여 어주사(御廚使)가 되었다가, 현종(顯宗) 초에는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왕이 거란(契丹)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하다가 공주(公州)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김은부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서 마중하면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성상께서는 산 넘고 물 건너 서리와 눈을 무릅쓰며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셨습니까?”라고 하며, 의복과 띠와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입고는 토산물을 나누어 호종관(扈從官)들에게 하사하였다. 왕이 파산역(巴山驛)에 도착하였는데, 역리(驛吏)들이 모두 달아나 버려서 어주(御廚)에 음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자 김은부가 또 음식[膳羞]을 올리며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받들었다.
거란군이 퇴각하고, 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공주에 머무르자, 김은부는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로 인해 그 딸을 맞아들였는데, 이가 원성왕후(元成王后)이고, 원혜왕후(元惠王后)·원평왕후(元平王后) 두 왕후 역시 김은부의 딸이었다. 얼마 후 〈김은부를〉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임명하였고, 거란에 보내어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게 하였는데, 돌아오는 중에 내원성(來遠城)에 이르렀을 때 거란이 여진(女眞)에게 알리니, 그를 잡아 가게 되어 여러 달 만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에〉 지중추사(知中樞事)로 승진하였고,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옮겼다가 중추사 상호군(中樞使 上護軍)으로 임명되었다. 현종 8년(1017)에 죽자 왕후의 연고로 추충수절창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군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司空 上柱國 安山郡開國侯) 식읍(食邑) 1,000호를 추증하였고, 그 처를 안산군대부인(安山郡大夫人)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친을 상서좌복야 상주국 안산현개국후(尙書佐僕射 上柱國 安山縣開國侯) 식읍 1,500호를 추증하였고, 모친을 안산군대부인으로 삼았으며,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尙書佐僕射 上柱國 邵城縣開國侯) 식읍 1,500호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