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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桓國)'의 의미는 '현묘지도(玄妙之道)의 나라'
『삼국유사』기이제일(紀異第一)편 고조선에 관한 내용에 따르면,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국[桓國, 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환국(桓國)이 제석(帝釋)을 의미한다.[昔有桓國(謂帝釋也)].’고 주석(註釋)이 붙어 있다.
우선 상기 기록에 관하여 누구든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점은 환국(桓國)에 ‘나라 국(國)’자가 붙어 있는데, 어떻게 환국을 큰 성인(聖人) 또는 부처님(또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는 ‘제석(帝釋)’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에 ‘환국(桓國)을 일컬어 제석(帝釋)이라고 한다.’라고 주석이 붙어 있으니, 다짜고짜 잘못 기록되었다는 둥, 어쩌면 일제항쟁기(日帝抗爭期)에 일제(日帝)가 뜯어 고쳤다는 둥 하면서 기록 자체를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듯이 무시해 버릴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여러 군데 주석이 붙어 있는데, 조선 중종 7년(1512년)에 이들을 재간행하면서 어떤 것은 역사적인 지명의 위치를 확실하게 변이(變移)시키기 위하여 임의로 삽입한 주석으로 볼 수 있으나, 어떤 것은 본래 원본(原本)에 있었던 주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장보고(張保皐)가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 명을 이끌고 청해(淸海)에 진(鎭)을 세웠는데, ‘청해(淸海)는 지금의 완도(莞島)’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청해진의 본래 위치는 현재의 산동성 영성(榮成)시로 추정할 수 있다. 즉, 현재 그곳에 법화원과 장보고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청해진(淸海鎭)의 본래 위치가 현재의 산동성 영성(榮成)시였으나, 지금(고려)의 완도(莞島)로 변이시키기 위하여 주석을 임의 삽입하여 붙여 놓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청해진 추정지역
또 『삼국유사』기이제일(紀異第一)편 북부여에 관한 내용에 따르면, 『고기』를 인용하면서 ‘서기전 59년에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王)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북부여(北夫餘)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흘승골성이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여기서 ‘서기전 59년’이란 북부여의 건국년도를 뒤로 늦춘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왜냐하면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부여와 조선은 최소한 기원전 221년 이전에 전국시대 연(燕)과 함께 존재하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멸망한 해인 668년이 ‘건국된 지 900년이 되는 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근거하면 고구려가 서기전 232년경에 건국되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에 북부여가 서기전 59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북부여가 고구려보다 대략 22년 앞서서 서기전 254년경에 건국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후한서』군국지에 따르면, 낙양에서부터 현도까지 동북방향으로 4,000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한서』동이전에 따르면, 다시 현도에서 부여까지 1,00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여의 본래 위치가 마치 현재의 길림성 지역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그림 2] 흘승골성(북부여) 추정지역
다시 말해서 『후한서』에 따르면,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치 현재의 길림성 인근 주변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또 요(遼) 남경이 현재의 북경시 인근지역에 있었던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요사』지리지 남경에 따르면, 요(遼) 남경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屯留)현에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근거: 『고대 요수의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 김진경 박사학위논문)
즉, 의주(醫州)는 요(遼) 남경의 동쪽 인근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흘승골성은 의주(醫州) 경계지역에 있었으므로, 흘승골성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서성 중동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에서 흘승골성의 위치에 관한 주석은 『삼국사기』 원본(原本)에 있었던 주석임을 알아챌 수 있다.
만약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위사(僞史)를 분별해서 솎아내지 못하고 상기한 주석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여와 북부여의 위치가 현재의 길림성 주변지역이 되어 역사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흘승골성이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라는 주석에 근거하여 요(遼) 남경과 의주를 찾음으로써 흘승골성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붙어 있는 주석들이 각각 본래 원본(原本)에 붙어 있었던 기록인지, 지명을 변이시키기 위해서 임의 삽입한 위사(僞史)인지를 분별해 낼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환국(桓國)을 일컬어 제석(帝釋)이라고 한다.’라고 주석이 붙어 있지만, 본래 『삼국유사』 원본(原本)에 붙어 있었던 주석인지, 아니면 1512년에 『삼국유사』를 재간행하면서 임의 삽입된 주석인지 명쾌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 전반에 걸쳐 ‘제석(帝釋)’에 관한 글들이 왕왕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환국(桓國)을 일컬어 제석(帝釋)이라고 한다.’라는 주석이 과연 『삼국유사』 원본(原本)에 본래 기록되어 있었던 주석인지 여부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삼국유사』기이제일(紀異第一)편 북부여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천제(天帝)가 자기 자신을 왕(王)이라고 일컬었으며,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는데, 해(解)를 씨(氏)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유사』에 따르면, 천제(天帝)를 왕(王)이라고도 칭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 탑상제사(塔像第四)편 ‘흥륜사(興輪寺) 벽화(壁畵) 보현(普賢)’에 따르면, 921년에 제석(帝釋)께서 흥륜사에 오셔서 열흘쯤 머물다 가셨는데, 제석(帝釋)을 천제(天帝)라고도 혼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제석(帝釋)이 천제(天帝)이고, 천제(天帝)를 제석(帝釋)이라고도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천제(天帝) 해모수가 자기 자신을 왕(王)이라고 일컬었다고 하니,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면, 천제가 제석이고, 제석이 천제이며, 천제를 왕이라고도 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 사관들이 1512년에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재간행하면서 『삼국사기』의 제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내용들을 뜯어 고쳤음을 알아챌 수 있으나, 어떤 내용을 어느 정도까지 뜯어 고쳤는지 100% 완전히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明)이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고려 땅을 차지하게 되자 기존 중국 23사(『사기』부터 『원사』까지)의 지리지들을 뜯어고친 것은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주요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이전의 내용도 뜯어고쳐진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으나, 본래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까지 고쳐진 것인지 뚜렷하게 알아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이 명(明)과 보조를 맞추듯이 1512년에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재간행하면서 지명의 위치뿐만 아니라 아래와 같은 내용들을 뜯어 고치지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 단군(檀君)의 건국년도를 요(堯) 대에 맞추었다.
둘째, 부여·가야·신라·고구려·백제 등의 건국년도를 약 200년 이상 늦추었다.
셋째, 조공을 한 나라와 조공을 받은 나라를 바꿔치기 하면서 연호(年號)를 바꾸었다.
넷째, 조선(朝鮮)과 동이(東夷)의 문화를 비하시켰다.
다섯째, 환도성(桓都城)을 환도성(丸都城)으로 바꾼 것을 볼 때, ‘환(桓)’이라는 글자에 얽혀있는 역사를 폐기시켰다.
그런데 ‘환국(桓國)을 일컬어 제석(帝釋)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국(桓國)은 부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제석(帝釋)과 밀접하게 연계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국(國)’자가 현대적 의미의 국가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더라도 그 당시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사회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일정한 규율에 따라 인간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해모수를 천제(天帝)라고 기록했으며, 921년에 흥륜사(興輪寺)에 오신 제석(帝釋)을 천제(天帝)라고도 칭했으므로, 해모수도 제석(帝釋)이든지, 최소한 제석(帝釋)에 준하는 신분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삼국유사』 전반에 걸쳐 ‘제석(帝釋)’에 관해서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흥륜사(興輪寺) 벽화(壁畵) 보현(普賢)’에 따르면, 제석(帝釋)께서 921년에 신라 흥륜사(興輪寺)에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탑상제사(塔像第四)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에 따르면, 『옥룡집(玉龍集)』과『자장전(慈藏傳)』을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월성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 그 터는 전 세상 부처님[전불(前佛)] 때의 절터로서 지금의 황룡사 터가 곧 일곱 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동 기록을 남긴 저자(著者)가 연좌석을 직접 보았는데, 연좌석이 불전 뒷면에 있었으며, 돌의 높이는 5~6척(약 1.8m)이었고 둘레는 겨우 세 아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서산(西山)의 큰 병란이 있고나서 불전과 탑은 불에 타버리고 돌 또한 땅에 파묻혀 평평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가섭불(迦葉佛)이 ‘제석(帝釋)’의 제자로서 전불(前佛)인데, 신라(또는 가야 금관경)에 왔었다는 기록이다.
또 『삼국유사』 탑상제사(塔像第四)편 ‘황룡사(黃龍寺) 장육(丈六)’에 따르면, 자장이 636년에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는데, 문수보살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釋迦)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자리로서 연좌석이 아직도 남아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가섭불(迦葉佛) 뿐만 아니라 석가(釋迦)도 신라에 오셔서 강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 탑상제사(塔像第四)편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에 따르면, 진지왕(576~579년) 때에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가 화랑(花郞)을 지도할 국선(國仙)을 선발하기 위하여 미륵상 앞에서 매일 아래와 같이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큰 성인[대성(大聖)]께서 화랑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타나시면, 제가 언제나 미륵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면서 받들어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 당시 좋은 집안의 남자 가운데 덕행이 있고 올바른 사람들을 뽑아 화랑(花郞)으로 삼았는데, 선행을 하게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도록 하니, 다섯 가지의 떳떳한 윤리[오상(五常)]와 여섯 가지의 학예(學藝), 삼사(三師), 육정(六正)이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진자(眞慈)가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돈독해져서 어느 날 저녁 꿈에 승려(僧)가 나타나, ‘네가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 수원사(水源寺)로 가면 미륵선화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진자(眞慈)가 수원사(水源寺)에 가서 어린 동자를 만났는데, 만난 동자가 미륵선화(彌勒仙花)인줄 몰라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마을을 두루 돌면서 이름이 미시(未尸)라는 단정한 모습의 수려한 소년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왕이 그를 국선(國仙)으로 삼았는데, 그는 무리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와 풍속의 가르침[풍교(風敎)]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풍류(風流)가 세상에 빛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동 기록을 남긴 저자는 ‘큰 성인[대성(大聖)]께서 오직 진자(眞慈)의 정성에만 감동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자주 나타난 것이다.’라고 평하여 찬술(撰述)하였다.
과연 조상님들이 수천년 이상 다스려 오신 이 땅이 환국[桓國, 제석(帝釋)을 말한다.]과 어떤 인연을 어느정도 맺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眞興王) 37년(576년)의 기록에 따르면,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인용하면서, ‘어진 보필자와 충신이 화랑(花郞)으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최치원(崔致遠, 857~ ? 년)이 쓴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고 있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詳仙史實內包含三敎接化群生且如入則孝於家出則忠於國魯司寇之旨也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周柱史之宗也諸惡莫作諸善奉行竺乾太子之化也”
즉, 상기한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여러 가지 번역본 중에서 구해 볼 수 있는데, 대부분 거의 유사하게 번역되어 있다.
아래와 같이 번역하여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실로 이는 세 가지 가르침(三敎)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접(接)하면 뭇 백성들이 교화된다.
이를테면 집안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라는 것은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旨)이고, 욕심을 내지말며 할 일을 하되 일을 하였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믿음(宗)이며, 어떤 악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깨달음(化)이다,”
즉, 난랑비(鸞郞碑)는 ‘화랑(花郞)’을 기리는 비로서 ‘난(鸞)’자는 봉황(鳳凰)과 비슷한 전설상의 난조(鸞鳥)를 의미하는데, ‘원화(源花)’ 라는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한 진흥왕(眞興王), 또는 최치원(崔致遠, 857~ ? 년)이 살아있었을 당시에 서거한 경명왕(景明王)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8세기와 9세기 인물인 김대문(金大問)과 최치원(崔致遠)의 글을 인용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眞興王) 37년(576년)의 기록에 남긴 것은 ‘화랑(花郞)’이란 제도가 인재(人才)를 키우는데 매우 유용했다는 의미 외에도 화랑제도를 시행한 진흥왕(眞興王)의 업적을 특별히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시대에도 제도적으로 젊은이들에게 ‘화랑(花郞)’과 같은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기한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밑줄 친 구절에 관하여 특별히 음미해 볼 여지가 있다. 즉, 풍류(風流)에 관한 가르침의 근원이 상세히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 ‘선사(仙史)’가 과연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아마도 예전에는 ‘선사(仙史)’에 관한 기록들이 다양하게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본기(本紀)와 유사(遺事)만 남아있어서 별도의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상세한 내용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 민족 태초 역사의 유일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가 후손들에게 전래되었으므로 『삼국유사』기이제일(紀異第一)편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檀君)의 건국 신화부터 정성껏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풍류(風流)에 관한 가르침의 근원으로서 '천부인(天符印)',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등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정성이 경주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풍류(風流)가 유교, 도교, 불교 등 삼교(三敎)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는데, 단순히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규범을 잘 지키라는 의미이겠는가?
즉, 풍류(風流)는 올바른 일상생활 속에서 사유(思惟)를 바르게 거듭 행하므로써,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人間)의 본성(本城)을 다듬어 깨달음(覺)을 지향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환국(桓國)이 제석(帝釋)을 의미한다.'는 뜻은 '현묘(玄妙)한 도(道)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이번 포스팅은 주제가 ‘환국(桓國)’이시군요. 예, 좋은 주제지요. 다만, ‘환국(桓國)인지?’..‘환인(桓因)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논란이 많으니. 여러가지로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본문중에 “後歸國謁王, 以卒萬人, 鎮清海 清海今之莞島..> {장보고(張保皐)가}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 명을 이끌고 청해(淸海)에 진(鎭)을 세웠다 [청해(淸海)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광화님께선, 이 부분을 ‘청해진의 본래 위치=현,산동성영성(榮成)시’인데,...‘지금(고려)의 완도(莞島)로 변이시키기 위하여 주석을 임의 삽입했다’라고 보고 논지를 전개하셨는데,...
본문의 ‘清海今之莞島’란 주석은 분명히 ‘현,전남완도를 지적한 것’이지 ‘현,산동성영성시를 감추기 위하여 거짓으로 지적한 것’이 아닌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삼국사기 본문 어디에도 ‘淸海鎭(청해진)이라는 鎭(진)의 명칭’을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淸海(청해)라는 바다이름’만 거론하고 있는데, 후대인들이 ‘스스로 淸海鎭(청해진)이라고 오해석한 것’입니다. 따라서 ‘현,산동성영성시 부근의 바다도 淸海(청해)라는 바다이름에 해당’되고, ‘현,전남완도 부근의 바다도 淸海(청해)라는 바다이름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清海今之莞島’란 주석문장을 ‘청해진은 지금의 완도이다’라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카오스 ‘청해(라는 바다)는 지금의 완도(부근의 바다)이다’란 의미로 해석되어야 제대로 해석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현,산동성영성시에 있는 鎭(진)도 淸海鎭(청해진)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현,전남완도에 있는 鎭(진)도 淸海鎭(청해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므로 ‘清海今之莞島란 주석을 거짓주석으로 보는 것은 삼국유사의 문장을 (심각하게) 잘 못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는 “장보고가 ‘중국(산동성)~한반도~일본’을 왕래하면서 행한 ‘淸海作戰(청해작전?)을 했었던 한 경로 중에 현,완도가 있었었다”라고 보고 당시의 상황[=淸海作戰(청해작전?)]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검토해 보시길....
본문에 鎮清海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같은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원본 '환국'에 환인이라고 매모한 책을 일본에서 확인했습니다.
'鎮清海(진청해)=清海(청해)에 鎮(진을 설치하다)'과... '清海鎮(청해진)=清海鎮(청해진)이라는 鎭營(진영)의 명칭'은...해석의 과정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고 봅니다....본문 그 어디에도 '清海鎮(청해진)=清海鎮(청해진)이라는 鎭營(진영)의 명칭'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