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大賢) 간재(簡齋) 김택(金澤)
백두대간 밤원숭덕지맥의 오봉산을 지나 송현(솔티, 松峴)의 남쪽 대정산(大井山) 자락에 오랜 연륜이 묻어나는 큰 무덤이 하나 있으니, 바로 간재(簡齋) 김택(金澤) 공(公)의 유택(幽宅)이다.
상주 상산지 총묘(冢墓)편에 『金澤 墓 在尙州外北月堤松峴山碑石書曰進士追封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金澤之墓子咸寧君饒婿右文館大提學諡文孝公李穀號稼亭(상주 외북의 월제 송현산 비석에 진사 추봉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김택의 묘, 그의 아들은 함녕군 요이고, 사위는 우문관 대제학의 문효공 이곡이고, 호는 가정이다.)』라 전하고,
함녕현지 인물 편에는 『金澤 高麗進士贈贊成事初居寧海爲鄕校大賢見李穀知其必貴以女妻之晩年愛古陵山水之明麗因卜居焉事蹟載寧海邑誌(고려의 진사이고 향교 대현이다. 가정 이곡이 장차 귀하게 될 인재임을 미리 알고 그를 사위로 맞아 마침내 가정은 물론 외손 목은 이색이 여말(麗末)에 부국 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명려한 함창산수에서 자적하였다. 졸(卒) 후 학덕과 아들 함녕군의 貴로 도첨의 찬성사에 추증되었으며, 행적이 우거하였든 영해의 地誌에도 등재되어 있다.』라고 적고 있다.
상주에는 상주(尙州, 商山)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성씨(姓氏)가 여럿이 있다. 그중에서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함창(咸昌, 咸寧) 김씨(金氏)는 대전 뿌리공원의 성씨 조형물에『함창 김씨의 시조(始祖) 고녕가야국(古寧伽倻國) 태조(太祖) 고로왕(古露王)은 단기 2375년(壬寅年) 3월 15일 함창에 도읍(都邑)하여 개국(開國)하였고, 2대 마종왕(摩宗王), 3대 이현왕(利賢王)을 끝으로 279년간 통치한 국가로서 낙동강(洛東江)과 영강(潁江)이 합류하는 천연(天然)의 강산(江山), 교통의 요새지(要塞地)에서 가야 문명(伽倻文明)의 발길이 닿지 아니하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국(高麗國) 명종조(明宗朝)에 정사공신(定社功臣) 문정공(文貞公) 덕원군(德原君) 종제(宗悌), 충경공(忠敬公) 덕양군(德陽君), 종계(宗繼) 형제분을 중시조(中始祖)로 번창(繁昌)하였다.
각 종파(宗派)에서는 8 봉군(八封君), 4 상서(尙書), 400여 음사(蔭仕)를 배출하였고, 9세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 겸 찬성사(都僉議 兼 贊成事) 김택(金澤) 공(公)께서는 유행(儒行)으로 영해향교(寧海鄕校, 1346년 創建)에서 대현(大賢)으로 추앙(推仰) 받았으며, 공의 자(子) 함녕군(咸寧君) 요(饒)는 시문(詩文)에 능통하여, 세칭 강촌(江村) 선생이라 하였다.』라고 알리고 있다.
상주시 함창읍 증촌·오사리에는 고녕가야 국왕(古寧伽倻國王)과 왕비 능(王妃陵)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상주와 영덕 영해(寧海)의 관련성은 신라시대 당시 현재 영덕군 남정면 일대 해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성(沙道城)을 매개로 역사적인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발견된다.
『162년(阿達羅王 9) 왕이 이곳을 순행하여 성을 쌓는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232년(助賁王 3) 7월 이찬 우로(于老)가 사도성에서 싸울 때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배를 태우니, 왜병들이 물에 뛰어들어 죄다 죽었다. 292년(儒禮王 9)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함락당하자 왕이 일길찬 대곡(大谷)을 시켜 성(城)을 수복시켰고, 다음 해에 성을 개축하여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尙州) 부호 80여 호(戶)를 와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이는 혹여 고녕가야국이 서기 293년(儒禮王 10) 신라에 복속되면서 왕족 등 80여 가구가 강제로 영해의 사도성(沙道城)에 이주되었다는 것으로 연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연유로 후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고, 결국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중기까지의 세계(世系)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 인종(仁宗) 때에 김종제(金宗悌1124~?)가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명예를 회복하여, 명종(明宗) 때는 정사공신으로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강종(康宗) 때 문정(文貞)으로 시호(諡號)를 받은 김종제(金宗悌)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였다.
영해면의 북동쪽에는 괴시(槐市)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 말 수안 김씨(遂安金氏), 함창 김씨, 영해 신씨(寧海申氏), 영양 남씨(英陽南氏) 등이 세거(世居)하였는데, 지금은 영양남씨 괴시파(槐市派)만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안동 권씨(安東權氏), 재령 이씨(載寧李氏), 선산 김씨(善山金氏), 영양 남씨, 함양 박씨(咸陽朴氏) 등 5대 명문가의 8종 가(宗家)가 한마을에 세거(世居)하는 반가(班家)의 마을로 영남(嶺南)의 명당으로 꼽히기도 한다.
본관이 상주 함창이지만 영해에서 태어난 김택(金澤)은 이곳 영해 지방의 토호(土豪)로서 향교 대현(鄕校大賢)이었다. 그래서 함창 김씨는 함창은 시조(始祖) 창업지(創業地)이고, 영해(寧海)는 중조 발상지(中祖發祥地)라 말한다.
공(公)의 조부(祖父)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휘(諱) 사조(思祖)이고, 부(父)는 시중(侍中)과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휘(諱) 인완(麟琬)이다. 외아들인 공(公)의 호(號)는 간재(簡齋), 배위(配位)는 영양 남씨(英陽南氏) 이다. 공(公)은 영해에서 졸(卒) 하였는데, 평소 유언에 따라 유택(幽宅)은 저 멀리 광활한 사벌 들을 가로질러 갑장산을 바라보는 상주시 사벌면 목가리에 있으며, 공(公)을 기리는 대정재(大井齋)는 임진 4월 19일 창건하고, 1991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묘비(墓碑)의 명문(銘文)은 광정대부도첨의찬성사함녕김공지묘 자좌(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咸寧金公之墓 子坐)이고, 비문(碑文)은 가의대부이조참판겸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규장각직제학세자시강원검교보덕여흥민병승찬(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直提學世子侍講院檢校輔德驪興閔丙承撰)이다. 배위 영양 남씨의 유택(幽宅)은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濠池村)에 소재한다.
공(公)의 아들 요(饒)는 고려 27대 충숙왕(1313~1330, 복위1332~1339) 때 삼사(三司) 좌윤(左尹 종3품)을 지냈으며,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으며,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도 유명하였다. 홍건적의 난(亂) 때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함녕군(咸寧君)에 봉해졌다. 그는 충의(忠毅)와 절개(節槪)가 남달랐다고 한다. 늙어 막에 고려의 기운이 기울어지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창으로 내려왔다.
西江村(현, 공검면 예주리)에 청향정(淸香亭)을 짓고, 생질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1328~1396)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고, 작은 배를 만들어 강 건너 가정(稼亭)에 사는 매형 이곡(李穀, 1298~1351)과 만나 시(詩)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영해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부친(父親)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혼인(婚姻)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얘기는 젊은 시절 경상도 동해안을 여행하다가 영해 지방의 사족(士族) 간재(簡齋) 김택(金澤)의 사위가 되어 처향(妻鄕)에 살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해부 편에 의하면 『급제하기 전에 유람(遊覽)으로 여기에 와서 김택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색은 외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외가 괴시리에서 이색은 어린 시절을 대 문장가이고,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에 추봉(追封)된 김택 외할아버지에게 한학을 익혔다고 한다.
가정(稼亭)은 이웃 창수(蒼水) 출신의 나옹왕사(懶翁王師, 1320~1376)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상주시 이안면 아천리는 이곡(李穀)의 가정(稼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은척면 무릉리에는 여말(麗末)의 고승 나옹왕사가 심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 지금도 주민들은 이 나무를 나옹정(懶翁亭)이라 부르는데, 나옹왕사가 문경의 묘적암(妙寂庵)에 머무를 때, 가정과 함께 일대의 산수를 사랑해 자주 왕래할 때 심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뿌리 깊은 인연은 나옹왕사가 입적(入寂)하자 목은(牧隱)이 임금의 명을 받아 아버지의 절친한 벗이었던 나옹왕사의 비문(碑文)을 짓고, 공신 권중화(權仲和)가 쓴 비(碑)가 신륵사에 전해오고 있다.
이러하듯 간재(簡齋) 김택(金澤) 공(公)과 관련된 것은 영덕 영해에 영해향교, 괴시 마을, 괴시 마을의 목은 기념관을 비롯하여, 상주 함창의 왕릉(王陵), 사벌의 묘소(墓所), 이안의 가정(稼亭), 공검의 청향정(淸香亭), 은척의 나옹정(懶翁亭), 그리고 문경의 묘적암(妙寂庵)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痕迹)과 유적(遺蹟)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앞으로 공(公)에 대하여 재조명(再照明)을 해 볼 필요성이 있다 할 것이다.